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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힐 수 없는 공동체 중 부정의 공동체


발제(발췌)자 - 정해성


1. 배경지식


모리스 블랑쇼와 공동체의 사유 - 고재정,  중에서 발췌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블랑쇼의 공동체와 공산주의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관계가 없다고도 또는 단순히 관계가 있다고도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블랑쇼의 정치적 입장은 1930년대 극우 국가주의에서 1950년대 이후 좌파 국제주의로 이동한다. 1950년대 블랑쇼를 다시 정치적 발언의 장으로 이끌어낸 잡지, 『7월 14일』을 함게 하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물론 프랑스 지성인들의 정치적 성향이 좌파로 대표되던 시기였던 만큼 전혀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더구나 국가주의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던 젊은 시절의 환상의 잔해를 직시해야했던 블랑쇼가 공산주의와 국제주의에서 대안을 찾는 작가 그룹에 합류했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블랑쇼가 좌파에 동참했다고 할 때 그것은 정파로서의 좌파, 즉 공산당이나 사회당에 동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일상생활의 틀을 짓는다는 매우 근본적인 의미로서의 정치에 있어서 좌파적 성향을, 보다 정확하게는 혁명적 성향을 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어느 시기에도 블랑쇼에게 현실 정치 체제로서 공산주의가 환상이나 희망의 동의어였던 적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극우적 국가주의를 신봉하던 열정을 전후에는 그대로 극좌적 과격주의로 이동시켰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우에서 좌로, 라는 진영의 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절대적 가치를 두려움 없이 외치던 인간에서 모든 절대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경계,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를 위한 “전적인 비판”을 사유의 기본 양식으로 삼는 인간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과 그 야만의 충격이 그에게 가져다준 사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2. 훑고 들어가기


Review -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 문정애, 중 발췌


‘공동’이라는 존재의 조건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공동체의 이름 아래 다양한 유령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오며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블랑쇼와 낭시가 지적하듯이, 동일성과 내재성을 요구하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공동체의 이름을 낚아채려 달려든다. 또한 민족․인종․이념․종교를 토대로 하는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책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이 유령들은 블랑쇼와 낭시가 말하는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공동체를 향해 달려든 유령들은 동일자의 표식을 너무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테두리를 정하지 않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테두리를 정하지 않기에 견고한 테두리를 가진 이 유령들은 이 낯선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다.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텅 빈 중심을 가진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은 자기 동일성과 내재성을 구축함으로서가 아니라 타자와 외재성과 바깥을 긍정하고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바깥에 대한 긍정은 근원적인 기원을 주장하는 공동체나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감행했던 공동체가 오히려 ‘공동’의 영역을 은폐하면서 획일적인 기획 아래 체제 유지에 몰두해왔다는 비판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은 ‘공동’의 영역의 본질적 특성인 ‘다수’를 ‘대중’과 ‘계급’으로 변형, 교정하는 실험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공동체의 구조와 체계에 대한 실험은 한계를 드러내고, 공동체는 내부에서 찢겨져 나가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폐허의 흔적 한가운데서 블랑쇼와 낭시는 ‘공동’의 영역을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중략)

 블랑쇼의 개인에 대한 비판은 엄중하다. “순수한 개체적 실재”(13)로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개인은 타자조차도 자기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절대적 내재성을 요구한다. 절대적 내재성은 개인의 자기 동일성 확립에 있어서 방해로 작용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은 “자신 이외의 다른 기원을 갖기를 거부”하고, “타자에게 이론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 무관심한 채 스스로를 긍정”하고,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무한정 반복해서 정립된 자신”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자 불사의 존재”(13)이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 공동체를 불러들이는 반면에, 개인은 무한한 자기 동일성 속에서 “불사의 존재”로 남는다.


공동체의 근원 없는 근원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서의 개인을 거부하면서 구성되고, 기존의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가는 공동체의 특징으로 블랑쇼는 ‘결여의 원리’와 한계 없음을 언급한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17) 바타유의 이 말처럼, 블랑쇼에게 결여의 원리는 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혼자서는 스스로에게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지고 평온 가운데 잠잠해지게 된다.”(18) 혼자만의 무감각과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결핍이며, 결핍으로 인해 인간 존재는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타자의 존재를 요구하며, 타자의 필연성을 긍정하게 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 자신을 부인하디고 하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다ㅡ는, 즉 자기 또는 분리된 개인으로 존속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인간 존재는 자신을 항상 미리 주어진 외재성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실존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 존재는 과격하지만 은밀하고 조용한 끝없는 자신의 와해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구성 가운데 아마 실존하게 될 것이다. (18)


 미완성의 실존 혹은 결핍된 실존은 결핍을 망각하지 않는다. 블랑쇼가 지적하듯이, 바타유에게 “모든 것을 망각하는 데 이르게 되는 황홀의 상태”는 “결핍된 실존의 수행과 결핍된 실존의 자기 초탈”(21)보다 중요하지 않다. 결핍이란 내재성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초월성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여기저기 갈라진 실존’을 체험하는 인간 존재는 바깥을 향하여 있다. 그래서 외재성은 실존의 조건이며, 이로 인해 인간의 실존은 타자 혹은 다수의 타자, 즉 공동체를 부른다. 이러한 공동체, 다시 말해 ‘자신의 와해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고성’가운데 실존할 수 있는 공동체는 한계 없음에 그 자신을 내맡기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공동’의 것은 각 사람들에게 필연적인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건이다. 공동체는 죽음에 의해 질서 지워져 있다. 그러나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죽음을 미화해 그로부터 어떤 실체 또는 주체를 구성하고자 하지 않는다”(25). 다만, 절대 타자일 수밖에 없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됨으로써 자기 바깥에 놓이게 될 뿐이다. 이러한 바깥은 지배와 내면성, 단일성,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권위와 단일성을 희생과 비움이 대신한다. 이때 희생은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고, 비운다는 것, 내어준다는 것”(32)이다. “한계 없는 비움에 자신을 결정적으로 내어줌” 속에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의 비밀이 있다.




3. 본격 발췌1)


 나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는 하나의 생각(공동체의 가능성, 도는 불가능성)을 다시 붙들어보려 한다. 공산주의, 공동체, 라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고 본다면, 공산주의 혹은 공동체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는 위의 물음은 공산주의 혹은 공동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결함들에서 근근이 제기되어 왔을 뿐이다.


공산주의․공동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이 용어들이 우리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묶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신이란 혁명의 실패, 혹은 공산주의의 이상이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음 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쨌든 공산주의라는 이름은 실패하였고, 우리를 배신하였다. 공산주의가 모든 인간들의 욕구들이 평등하게 만족되어야만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산주의는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체 홀로 생겨날 수 있는 어떤 투명한 ‘내재적인’ 인간성의 원리를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평등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동일자를 가정하고 있고, 때문에 모나드로서 개인을 상정하여, 개개의 개인의 내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때문에 공산주의의 기본 모티브를 갖고는 개인의 바깥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자신을 정립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절대적 내재성에 대한 요구가 정당화된다. 절대적 내재성을 획득한 개인은, 아마도 소실점을 획득한 주체적 자아로 기능할 것이고, 때문에 자아의 바깥을 동일성의 차원에서 먹어치운다. 이러하므로 거기에 겉으로 보아 온전할 뿐 가장 병적인 전체주의의 기원이 있다.


공동체에의 요규 : 조르주 바타유


 반혁명주의의 가장 단호한 지지자들과 마르크스 또한 공산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 상호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만일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 이상 동일자와 동일자의 상호적 관계가 아니게 되고, 타자가 자신의 자기 동일성과 그를 고려하는 자와의 반대칭성으로 인해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자로 나타난다면, 완전히 다른 관계가 주어질 것이다. 또한 이 완전히 다른 관계는 우리가 거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을 완전히 다른 사회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개인이 동일자가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사유하던 공동체의 부재에서 공동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공동체의 부재에서 부재의 공동체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것이 블랑쇼가 닿아 있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왜 “공동체”인가?


 앞서 역사를 살펴보건대, 제대로 된 공동체는 없었다.


결여의 원리


 결핍에 대한 의식은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며, 그 문제 제기를 위해 타자 자체 또는 하나의 타자가 필요하다. (…) 인간 존재는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인되기를 원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 자신을 부인하기도 하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즉 자기 또는 분리된 개인으로 존속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자신을 항상 미리 주어진 외재성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실존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각 인간 존재의 실존은 타자 또는 복수의 타자를 부른다. 따라서 각 인간 존재는 어떤 공동체를 부른다. 즉 유한한 공동체.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이번에는 자신을 조직한 인간 존재들의 유한성을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번에는’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그렇다면 먼젓번에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절대적 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동일자들의 사회(공산주의의 기본 모티브)였다, 이러한 동일자들은 타자에게 무관심한 채 스스로 무한정 반복해서 정립되는 자신이다. 이 개인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불사의 존재이다. 때문에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개념인 유한성과 대비시킬 수 있다. 때문에 ‘이번에는’ 유한성을 지닌 실존들로 구성된 유한한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든 어떠한 공동체든 그것들은 어떤 연합과 융합의 흐름으로, 다시 말해 열광의 흐름으로 제시되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연합이라는 형식은 낭시의 무위의 개념에서도 벗어나며, 블랑쇼가 예시하고 있듯이 어떤 단일성을 중심으로 묶일 가능성도 있다.


연합?


 군사 집단 또는 파시스트 집단. 거기서 각 구성원은 자신의 자유와 의식마저 그 집단의 육화로 여겨지는 우두머리에게 양도한다. 그 우두머리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본래 이를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사 집단과 파시스트 집단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이야기는 불필요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사회성에 대해서도.

 많은 독자들에게 조르주 바타유라는 이름은 법열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도는 법열의 경험에 대한 무신론적 탐구를 의미한다. 그러한 조르주 바타유가 “어떤 집단적 일체 속에서는 융합의 완성”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또한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데 이르게 되는 황홀의 상태는, 결핍된 실존의 수행과 결핍된 실존의 자기 초탈에 따라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엄격한 행보보다 <덜>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법열과 황홀의 상태가 등가의 의미를 지닌 단어인지는 불분명하다. 여하간, 그러한 어떤 초월적 경험(개인적인 것)보다 결핍(필연적으로 타자를 필요로하고, 타자를 향하게 하는)을 중요시했다는 점은 중요해 보인다. 

 공동체가 법열에 이르러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가치가 부여된 어떤 단일성 내에로 융합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즉 ‘어떤 것’을 나누는 것 이외에2) 다른 무엇도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다수로만 존재하려 할 수도 있다.

 결핍은 결핍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으며 오히려 초과를, 채워질수록 심해지는 결핍의 초과를 추구한다. 의심할 바 없이 결핍은 나에 대한 타자의 이의 제기를 요청한다. 이의 제기는 고립된 나로 인해 생겨난다. 이의 제기는 그 위치로 인해 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인 하나의 타자로서의(또는 타자 자체로의) 노출을 항상 유도한다.

 인간 실존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진 실존이 아니다. 조금 애매해서 해석을 달아보면, 블랑쇼는 인간 실존이 스스로 의문하며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이의 제기, 는 스스로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결핍에 의한 결여의 원리로부터 시작된다.


타인의 죽음


 따라서 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의문에 빠지게 하는 것은 죽어가면서 부재에 이르는 타인 앞에서의 나의 현전이다. 죽어가면서 결정적으로 멀어져 가는 타인 가까이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그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내 자신 바깥에 놓는다. 거기에 공동체의 불가능성 가운데 나를 어떤 공동체로 열리게 만드는 유일한 분리가 있다. 그를 근본적으로 상실로 이끌며 나눌 수 없는 그의 소유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그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남겨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죽음-)으로 인한 고독을 나누기 위해, 나는 그 대화를 이어간다. 아마도, 타자의 죽음이 가장 효과적인 타자의 이의 제기가 되는 것인가? 타인의 죽음을 목전에 두는 것은 자신의 결핍을 가장 강렬히 인식하는 순간이 아닐까? 그러니 이것은 각자의 것이 아니다. 부정되고자 하는 인간의 결핍에 따른 필연이다.


죽어가는 자의 이웃


 공동체가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공동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 만일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진정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하찮기는 하지만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 자를 내리막길에서 붙들기 위해서이다. 가장 부드러운 금지의 명령으로. 지금 죽으면 안 돼. 죽기 위한 지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안 돼.’ 최후의 말, 탄식이 되어버린 금지의 명령, 더듬거리는 부정의 말. 안 돼 - 너는 죽을 거야?”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부딪힌 자, 를 붙드는 순간, 나는 타자에게 열린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모든 자에게 각자의 것일 수 없고 공통된 것이듯이, 공동체는 그 순간의 질서에 의해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주체들 사이에 어떤 보다 상위의 삶, 불사 또는 죽음 너머의 삶의 끈을 엮지 않는다.”


공동체와 무위


 공동체는 죽음에 의해 질서 잡혀 있지만, “여기서 죽음은 공동체에 부여된 과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죽음을 미화해 그로부터 어떤 실체 또는 주체를 구성하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몇몇 주요 문장들을 옮기고 난 후, 나에게 결정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주장에 도달한다. “만일 공동체가 타인의 죽음에 의해 드러난다면, 죽음 그 자체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불가능한 연합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독특한 점을 갖고 있다. 즉 공동체는 그 고유의 내재성의 불가능성을, 주체로서의 공동체적 존재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어쨌든 공동체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며 새겨둔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리를 제시한다. 공동체는 유한성을, 유한한 존재를 근거 짓는 결정적 초과를 제시한다.

 죽음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 죽음에 초월적 의미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가 ‘타자’를 만나 이의 제기를 당하는 순간, 나는 바깥에 놓이고, 그러한 결핍의 순간들은 나 이외의 타자, 혹은 다수의 타자를 불러들인다. 때문에 공동체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보았듯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타자의 소멸(죽음)이다. 타자의 완벽한 소멸, 우리가 ‘나’가 ‘타자’의 이의 제기로써 실존하기 시작한다고 할 때, 타자의 죽음, 소멸은 ‘나’의 소멸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실존의 극을 느끼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죽어가는 그에게 불가능한 현재 죽지 말라는, 부드러운 명령을 내리게 된다. 안 돼, 라고 말하지만, 너는 죽을 거야? 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유한성의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유한성의 깨달음이야 말로, 모든 독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한계 없는 공동체, 우리가 속해있는지 아니면 속해있지 않은지 알 수 없는 공동체, 그것이 공동체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공동체, 그러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를 요청한 자들이 유한하다면, 공동체 역시 유한한 게 아닌가. 그러니 천년 왕국 어쩌고 지껄인들 덧없는 것이 아니리오.

 이러한 사유에서 공동체의 두 가지 본질적 특성이 드러난다. 1) 공동체는 축소된 형태의 사회가 아니며, 또한 연합을 통한 융합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2) 사회 조직에서와는 다르게 공동체에서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공동체는 어떤 생산적 가치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어떤 목적을 갖는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타인에 대한 헌신을 그가 죽음 앞에 처했을 때조차 항구적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타인이 고독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타인이 대신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동시에 타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이 대리 죽음을 또 다른 자의 것으로 넘겨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대속代贖이 연합을 대신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는 대목이다. 연합이 아니라, 대속이다. 바타유의 ‘죽음이라는 높이’, 에서 장엄함과 높이, 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있듯이, 죽음(장엄한 것, 혹은 높이에 있는 것, 초월적인 것)으로 연합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죽음을 헌신적으로 대속하는 것만이 공동체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나 그 목적도 목적이라 명명하는 순간 그 명령을 외면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 한에서만 말하고 있다.


공동체와 글쓰기


 공동체는 공동체에 반하는, 존재의 외재성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말 가운데에서 전개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의 와해와 어떤 종류의 글쓰기가 연관이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최후의 말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찾지 않는 글쓰기. “와, 와, 오시오, 명령, 기원, 기다림에 답할 수 없는 당신 또는 너.”

 아마도, 문학의 공간이나 미래의 책의 모티브와 연결되는 지점인 것 같다. 거칠게 읽어보면, ‘공동체’란 말은 ‘공동체의 부재’를 포함하지 못한다. 최후의 말, 아마도 이것이 글쓰기의 바깥을 의미하는 듯싶다. 때문에, 글쓰기의 바깥을 쓰는 글쓰기와 공동체의 부재를 포함해야 하는 공동체의 운명을 연관시키는 듯하다.


공동체 무두인 (무두인은 바타유가 만들었던 공동체의 이름이자 잡지의 이름이다)

 

 건너뜁니다.


희생과 비움


 무두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비운다는 것,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과 같았다. 한계 없는 비움이 자신을 결정적으로 내어줌. 바로 거기에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이 있다. 희생한다는 것은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고, 비운다는 것, 내어준다는 것이다.


내적경험


 죽음, 즉 타자의 죽음은, 우정 또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내밀성의 공간 또는 내면성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조르주 바타유에게서) 내밀성․내재성은 주체의 것이 아니라 한계 바깥으로 미끄러짐이다. 그러므로 ‘내적 경험’은 그것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반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주체에서 비롯되었지만 주체를 황폐화시킨다. 그것은 공동체 자체인 타자와의 관계를 보다 깊은 기원으로 갖는 이의 제기의 움직임을 말한다. 타자성의 무한성이 갖는 준험한 유한성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자신에게 내맡겨진 자를 타자성의 무한성으로 열리게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리라.


문학적 공동체


 따라서 진정 중요한 것은 모르는 자와의 관계를 전제라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겨냥하고 있지 않은 책의 익명성이다.


심장 또는 법


 우리는 겉으로 보아 방향성이 없어 보이는 그러한 메모들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한계 없는 사유의 한계가 최고 주권 속에서 깨져 나나기 위해 설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한계 없는 사유의 한계는 소통으로 열리기 위해 최고 주권의 상실을 요구한다.

 죽어가는 타인의 더할 나위 없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살아 있는 현전은 참을 수 없는 영원한 부재. 하지만 그러한 타인의 보재와 만나는 곳은 바로 삶 자체에서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부재를 통해 우정은 이루어지며 매 순간 사라져간다. 우정, 관계 없는 관계 또는 어떤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관계 이외에 그 어떤 관계도 아닌 관계.

 고독으로의 노출, 그것은 우연이 아니며 박애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심장 또는 법.


공동체 무두인 ~ 심장 또는 법, 정리 


 계속 비슷한(똑같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무두인의 실례를 들어서 공동체의 형태에 더 접근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변하지 않고 있기에, 읽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1) 10포인트 글자는 발췌이다. 때로 문장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읽기 편하게 하였다. 9포인트, 이탤릭체 글자는 발제자 본인이 나름대로 붙여본 해석이다.


2) 여기서 ‘어떤 것’은 죽음의 순간의 대속을 의미하는 것이나 너무 이른 감이 있어 지우고 읽는 게 편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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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수학사세미나] 첫 세미나 후기 choonghan 2012.07.08 1494
408 [서양철학사] 사유지도 그리기 두 번째 시간 후기... [1] 회림 2012.07.06 1372
407 [횡단정신분석]지젝과이데올로기의 문제, 『HOW TO READ LACAN』 4장~7장까지의 발제문입니다. file 염동규 2012.07.05 5377
406 [흄 세미나] 6월 28일 후기 및 공지(7월5일은 휴세) [1] 꽁꽁이 2012.07.03 1433
405 [서양철학사] 사유지도 그리기; 첫 시간 후기 + 7월 4일 공지 [4] 일환 2012.07.03 1779
404 [언어학] 언어학세미나 6월 29일 후기 및 7월 6일 공지입니다 [1] 미선 2012.07.02 37144
403 [하이데거강독] 6월 30일 세미나 후기 김민우 2012.07.02 12948
402 [6월24일 자본세미나] 늦은 후기 및 공지 조금 [1] 조아라 2012.06.29 1636
401 [언어학] 후기 및 6/29 공지 [1] 지훈 2012.06.27 1570
400 [하이데거강독] 6월 23일 세미나 후기 김민우 2012.06.25 1688
399 [흄 세미나] 6월 21일 후기 및 공지(28일) 꽁꽁이 2012.06.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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