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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과 진단

사무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10/22 발제 이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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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장소에 있다. 나는 나라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나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른다. 나는 어떤 장소에 정착해 있다. 불빛들이 불규칙하게 빛을 내고, 머피, 말론, 몰로이 등 모두가 여기에 있고, 말론이 내 앞을 지나가는 곳. 이곳은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가장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그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사랑과 지성에 대해, ‘지도교사의 언어’로, 진리를, 나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폭력적이고,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라고 여겨졌던 이들엔 마후드가 있었다. 마후드는 항아리 안에 있다, 마후드는 가족의 죽음과 죽은 그들의 잔해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대단한 여행가였지만, 지금은 몸통만 남아 항아리 속에 있다. 도살장 근처, 술 취한 행인들이 떠드는 자리, 검은 파리가 우글거리는 대가리, 뾰루지가 잔뜩 나 있는 대가리가 항아리 밖으로 솟아있고, 싸구려 식당 여주인(마르그리트)만이 그를 돌본다.

마후드의 이야기가 끝나고 웜의 목소리가 시작된다. 웜은 구멍에 있다. 출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상에 온 자이고, “덜 변해서 실재적으로 생각되는 자”(91)다. 웜은 귀에서부터 시작되고 머리는 싹처럼 올라온다. 웜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원하는 바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게 웜의 강점이고 웜이 있는 구멍은 그들이 빛이 닿지 않는 회색에 잠겨있다.

나는 마후드의 목소리로, 웜의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면서 나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감옥, 그곳에 모두 돌아오고 있다, 내 위로 포개지려, 나를 버리고, 나한테 가서, 다시 나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들이 모두 다시 돌아오는 곳. 이곳에서 나는 소강상태, 1초의 짧은 침묵이 아니라, 완전한 침묵을, 더 이상 나에 대해 묻지 않을, 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침묵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말한다.

어느 순간 나는 먼 곳에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차례다. 나는 이제 여기에 없고, 말하지도 듣지도 않는 자, 침묵으로 만들어지는 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야기 가운데 있지 않은 자, 내가 절대로 그만두지 말아야 했던 그 이야기, 내가 가져봤던 침묵의 가운데 있다. 오래가는 침묵, 지속 되는 침묵이 나를 찾아낼 때까지, 나는 계속해야만 한다.

 

실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베케트 3부작은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다루고 있는 것 아닐까. <몰로이>에서부터, <말론 죽다>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까지 ‘나’를 괴롭히는 질문은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관통하는 주제, 반복되는 구조는 ‘내가 놓인 장소’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강렬한 빛으로 밝히고, 교사의 언어로 대답시키는 질문에, 베케트는 죽음에 가까운 자(마후드), 태어나지 않은 자(웜), 그리고 마침내 ‘내가 가져봤던 완전한 침묵’으로 답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이르러 텍스트의 구조는 점점더 독백에 가까워지고, 모랑·말론·머피 등 등장인물들은 ‘나/서술자’에 통합된다. 나라고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나라고 칭하는 인칭들, 그들과 등장인물들은 인칭과 호칭, 대명사를 뒤섞으면 “하나의 목소리”(95)/ “완전한 침묵”으로 모인다. 그곳은 내가 끊임없이 말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려온 장소,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내가 가져봤던 침묵 가운데이다.

 

같이 얘기해보고 싶은 것들

 

1) 말과 침묵,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계속돼야 한다는 강박’. 완전한 침묵에 이르는 결말에서도 ‘나’는 계속해야 한다고 외친다. 3부작에서 말/ 이야기 그리고 침묵은 무엇일까?

 

2)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복수가 분명하게 드러난 텍스트이기도 한데, ‘그들’은 무엇이라고 읽었나? 그들에 등장인물과 ‘나’도 포함될까? 아니면 나와는 다른 존재일까?

 

3) 베케트 3부작에서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 마후드의 이야기에서 그를 돌봐주는 여주인은 말론 죽다의 간병인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은 두 작품에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서술이 나오는 보기 드문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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