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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에 대한 단상

프랜시스 맥도먼드. 존재만으로도 신뢰감을 주는 배우. 남편 조엘 코엔이 연출한 <파고>에서 만삭의 경찰관으로 끔찍한 살인현장에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그녀를 기억한다.

 

마트에서 만난, 예전에 그녀가 문학을 가르쳐줬던 어린 제자의 물음에, 노숙자homeless가 아니라 집 없는 사람 houseless 이라고 정정해주는 펀(프란시스 맨드먼드)은 남편도 죽고 자식도 없이 60대 나이에 홀홀단신 'vangard'라는 이름의 밴을 타고 유랑한다. 영화 도입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실제 배경이 자막으로 나온다. 2008년 미국 경제 대공황으로 네바다주 엠파이어시티의 석고 공장에서 일했던 펀은 공장이 문을 닫고 마을 전체가 우편번호마저 사라진 유령도시가 되었을 때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지도를 찾아보니 네바다주는 미국 서부 시애틀과 로스엔젤레스 중간 쯤에 위치한 사막지대이다. 서쪽 아래로는 요세미티국립공원도 있고, 샌프란시스코처럼 살기 좋은 곳이 있지만 동쪽으로는 아이다호, 와이오밍..그 아래로 아리조나주가 있다. 이쪽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아이다호> 같은 영화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북미 대륙의 풍경이다. 이런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그런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펀의 행동을 보면서도 하게 됐다. 나무 하나 없이 바위와 암석만 있는 곳에서 아이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비록 사방이 가로막힌 바위 산맥이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넘으며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고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근육을 키우며 자란 것일까.

 

 최소한의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이를테면 담배를 산다든지 차 기름을 넣을 돈을 위해 아마존 물류센터든, 국립공원 청소 일이든, 햄버거가게 식당이든...뭐든 마다 않는다. 그리고 제자 아이의 엄마가 자기 집에 와서 지내도 좋다는 도움의 의사도 거부한다. 그녀는 철저히 독립적이지만 노매드들의 공동체 속에서 즐겁게 웃고 물건을 나누며 도움을 주거나 받곤 한다. 풀이 있는 곳으로 염소나 양을 이끌고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경제공황의 여파로 생겨난 노매드들 역시 밥벌이를 찾아 여기서 저기로 이동한다. 길에서의 삶은 인간의 조건을 원초적으로 보여준다. 난방도 힘든 자동차 안에서 한겨울에 잠을 자야하고, 차 안에 둔 플라스틱 통에 걸터앉아 용변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삶이 그저 비참하거나 비루한 건 아니다. 또다른 노매드 할머니 친구와 모든 걸 갖춘 캠핑카 안을 둘러보며 아이들처럼 우와 감탄할 때, 거기엔 부르주아에 대한 적의와 열등감 따위는 없다. 어떤 면에서 적의와 열등감이란 같은 걸 욕망했는데 가지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어떤 삶이든 문제가 발생하고, 외부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온다. 징징대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차분히 감내하고 그 속에서 마주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던 펀은 무엇보다 중요한 반려자 밴이 거의 생명이 다해 폐기 처분하는 게 막대한 수리비를 지불하는 것보다 낫다는 수리공의 조언을 거부한다. 사물에 대한 우정일까. 새 차를 사고, 새 집을 사는 게 아니라 나와 공생하는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하지만 축적된 돈 없이 그날 그날 살아가는 펀이기에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언니를 오랜만에 찾아간다. 언니와 형부는 젊은 시절 펀과 함께 잘 어울렸던,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모기지펀드로 장만한 집의 대출금을 평생 갚아나가야 한다. 그리곤 사람들이 흔히 하듯 언제 어떤 주식을 사놨으면, 혹은 어떤 부동산을 장만했으면 등등 이야기할 때, 펀은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어떤 불평등을 낳는지 지적함으로써 화기애애했던 저녁 식사자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렇게 어렸을 땐 같은 꿈을 꾸고 살가왔던 옛 사람들이 사회에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 때, 자연스럽게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대화 장면은 독립영화 <소공녀>를 생각나게도 한다. 잘 사는 친구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하며 생존을 위한 먹을꺼리와 취향을 위한 담배와 위스키 값을 버는 미소. 하지만 월세 상승으로 그나마 살던 집에서 쫓겨나 캐리어를 끌고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방문한다. 그렇다고 절대 비루하거나 주눅들지 않는 미소는 집도 있고 다른 것들도 많은 친구들보다 오히려 삶을 긍정한다. 우리가 노동할 수 있고 밥을 먹으며 어딘가 머리 둘 곳이 있다면, 그리고 나와 더불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후반부. 노매드 촌에서 만난 괜찮은 남자와의 우정이 쌓여갈 무렵.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듯한 편안한 주거 공간에서 그 남자와 함께 살 수도 있었겠지만, 펀은 그 집,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밴, 작은 침상을 선택한다. 야생의 삶, 야생의 자유일까...경험해보지 않아 그 맛을 모르겠지만 내 가까운 사람이 오성급 호텔방에서 숨을 못 쉴 정도로 갑갑해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고 짐작해본다.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가 선택했던 월든 숲에서의 삶.

 

그런데 나 역시 잠깐씩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었다. 천막에서 촬영하며 하룻밤 자본다든가, 길바닥에서 사람들과 누워 깜박 잠을 잤을 때 느꼈던 즐거움. 혹은 노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보았을 때 그들이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채 누리는 자유를 포기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물론 펀이 그런 건 아니다. 그녀는 노숙자가 아니다. 비록 궁색한 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잘 씻지도 못할 테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사는 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오래되고 좁지만 익숙해서 그럭저럭 편안한 내 공간. 새로 지은 아파트, 환경호르몬 덩어리인 신축 건물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면 갖지 못할 것이기에 저 포도는 시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소유하는 집에 발목이 묶이고 내가 소유하는 물건에 종속된 삶은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들뢰즈가 말하는 노매드가 되어 매순간 새로이 눈뜨고 탈영토화되는 삶을 꿈꾼다.

 

  영화 안에서 등장하는 이름들은 상징적이다. 주인공 펀의 이름은 fern(양치류. 홀씨로 번식하는 민꽃식물. 지구상에는 1만여 종의 양치류가 있으며, 크기나 모양은 매우 다양하다. 포자로 번식하는데, 포자는 바람에 의해 널리 흩어지며, 마른 상태에서도 오랫동안 살 수 있다. 한국에는 50여 속, 200여 종의 양치류가 분포한다. 우리가 먹는 고사리가 대표적이다). 펀이 살던 도시는 엠파이어empire (제국), 펀의 반려자동차 밴 이름은 뱅가드vanguard(전위)....

 

그러니, 이제 제국은 가고 아방가르드 펀 fern 과 같은 삶을!

                                                                                                                                                                    - 2021.05.13. 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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