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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세미나] 컵과나

아리송 2023.01.29 22:06 조회 수 : 265

컵과나

아리송

 

 얼마 전 맑고 투명한 유리에 노란색 수선화가 예쁘게 프린팅 되어 있는 아담한 사이즈의 레트로 컵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나와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다가 이 컵을 보고는 ‘노란색! 이거다!’를 외치며 바로 골랐다는 지인의 말을 들으며 따듯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컵이다. 깔끔한 투명함 가운데 위쪽에는 얇은 초록색 띠가 있고 그 아래로 노란색 수선화들이 뺑 둘러가며 서있다. 또한 크기는 작지만 컵의 2분에 1보다 조금 아래 지점에 한 단계 층을 두어 위보다 아래가 살짝 오목하고, 컵바닥 쪽으로는 7-80년대 고급 유리컵에서 볼 수 있었던 올록볼록한 물결의 디자인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컵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인가 여기에는 색이 있는 주스를 담아 마셔도, 하얀 우유를 담아 마셔도, 투명한 물을 담아 마셔도 왠지 모르게 그 맛이 업그레이드 되는 기분이 참 좋다. 자꾸만 손이 간다.

 

 사람마다 뭐든 하나씩 꽂히는 물건이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컵이 그렇다. 한때는 작은 커피잔에 꽂혀 쇼핑을 하다가 커피잔이 보이는 매장만 있으면 사지도 않으면서 몇 바퀴나 매장을 돌아보며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도 했고, 또 다른 때는 텀블러에 꽂혀 인터넷으로 온갖 종류의 텀블러를 검색하면서 뚜껑은 어떤지, 색은 어떤지, 디자인은 어떤지 살펴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 번은 커다란 머그컵에 꽂혀 있었는데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의 검은색에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빅머그가 너무 마음에 드는게 아닌가. 그래서 볼 때마다 그 머그잔이 너무 예쁘다며 노래를 불렀더니 퇴직하시면서 그 컵을 나에게 선물로 주고 가셨다. 이런 감사한 일이!! 한동안 학교에서 그 커다란 머그에 차나 커피를 담고 다니면서 얼마나 만족스러워 했는지 모른다.

 

 대형 머그에 대한 나의 욕망은 커피나 차를 더 많이 그득하게 담고 싶어하는 욕심에서 나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편의점 플라스틱 커피 하나를 반나절 이상 마시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 큰 머그에 가득 담은 커피나 차를 다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컵에 담겨 있는 음료를 보면 항상 뭔가 부족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욕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몇 년 전인가 또 한 번 대형 머그에 대한 욕망이 끓어올라 정말 큰 사이즈로 두 개를 구입했는데 사놓고 만족은 했지만 이 컵에 음료를 마실 때마다 어찌나 무거운지 강제로 팔운동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런 커다란 머그의 문제점은 아이스 음료를 담을 경우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따듯한 음료를 담을 경우 오랜 시간을 마시는 내게는 음료가 너무 금방 식어 나중에는 차가운 음료로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몇 번 전자렌지에 돌리거나 따듯한 물을 다시 담아 마시기도 했지만 그럴 경우 처음의 맛을 잃어버리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요즘 관심을 두고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것은 보온이 되는 머그컵이다. 텀블러와는 다르게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 사이즈가 조금 더 작고 뚜껑도 있는 데다 내부는 스테인레스 보냉이 되는 컵. 또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요즘은 머그를 식지 않게 해주는 워머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내 머릿속에는 워머까지 사는건 너무 과한 일일까. 보온 머그컵은 어느 정도 사이즈가 적당하지 등등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고 정말 열심히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기 까지 했지만 아직까지도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지 않은건 더 이상 살림을 늘리면 안된다고 하는 내 마음속 한 자락 남은 양심 덕분일 것이다.

 

 작년에는 좀 예쁜 머그잔을 사고 싶어 위아래 지름이 같은 일반적인 컵이 아닌 위보다 아래쪽이 조금 더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컵을 찾아다니다 결국 스타벅스의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로고가 그려진 시그니처 머그컵을 구매했다. 이 컵을 구매하고 처음에는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역시 사용하다 보니 355ml 밖에 담지 못하는 컵의 크기가 아쉬워졌고, 나중에야 475ml를 담을 수 있는 같은 디자인의 컵을 발견하고는 왜 저걸 보지 못했나 한탄하기도 했다. 이유는 나는 쓴 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아메리카노는 극도로 피곤하거나, 엄청 단 디저트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잘 마시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고로 커피란 우유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우유가 들어간 라떼나 달달한 캬라멜 마끼아토, 바닐라 라떼 등을 즐겨 마시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쉬면서도 이런 커피들을 밖에서 사서 마시는데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열심히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다 결국 라떼의 우유 거품을 만들 수 있는 우유 거품기를 발견하고는 유레카를 외치며 덜컥 집에 들였는데 제품은 아주 만족스러웠지만 문제는 이것을 담을 컵의 크기였다. 쫀쫀하고 두터운 우유의 거품과 함께 적당하게 데워진 우유를 찐하게 내린 커피와 함께 담으려니 355ml 정도의 컵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쁜 잔에 커피를 마셔보고자 한 나의 바램과는 달리 아쉽게도 이전에 사두었던 아주 크고 투박한 대왕 머그를 꺼내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컵에는 커피가 3분에 2밖에 차지 않아 보기에도 아쉽고 양에서도 욕심에 차지 않는다. 그러니 또 새로운 컵을 사야 하나 하는 욕망에 불타올라 또 열심히 컵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름에는 뭐니뭐니해도 투명하고 시원한 유리컵에 음료를 담아 마셔야 제격이다. 지난 여름에 나는 또 투명 유리컵에 꽂혀 온갖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마켓을 돌아다니며 컵을 골랐다. 이렇게 해서 구매하게 된 컵은 총 3개.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유리컵은 자주 매장에서 한 눈에 보고 마음에 들어 구입한 컵인데 웬걸. 내열강도가 엄청 낮았던지 안에 얼음을 넣고 드립 커피를 잔에다가 바로 내렸더니 그 자리에서 깨져버렸다. 아직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한 컵이었는데 어찌나 아쉽고 무정하게 느껴지던지.. 한숨을 푹 쉬며 깨진 유리를 담아 잘 싸서 버리고 다 흘러버린 커피를 닦으며 다음에는 꼭 두꺼운 유리컵을 사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 곰돌이 푸우 캐릭터가 귀엽게 새겨있는 다이소에서 3000원을 주고 구매한 깜찍한 유리컵이다. 사실 이 컵 또한 용량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탄산음료나 색깔이 있는 차가운 음료를 담을 때 잘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온도 차이로 인해 깨지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지금 집에 있는 컵들은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다. 약을 먹기 위한 물을 담는 컵은 노란색과 연두색 세트의 일반 크기 커피잔을 사용하고 차를 마시기 위한 컵은 스타벅스에서 구매한 시그니처 컵과 얼마 전에 구매한 짙은 초록색 몸통에 노란색 뚜껑이 달린 재생 플라스틱 컵을 사용한다. 따듯한 라떼 종류를 마실 때는 회색과 핑크색의 대왕 머그를 사용하고, 따듯한 블랙 커피를 마실 때면 역시 스타벅스 시그니처 컵과 까만색의 아주 평범한 머그를 사용한다. 찬 음료의 경우 투명한 푸우 캐릭터 유리컵이나 아무 무늬가 없는 사각의 유리컵을 사용하고, 아이스 커피의 경우에는 얼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텀블러나 가끔씩 커피와 우유의 섞이는 오묘한 무늬를 보고 싶을 때는 손잡이가 달린 투명 컵을 사용한다. 그리고 나의 취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엄마 손에 들려 온 꽃무늬 찻잔들은 손님용으로만 내놓고 있다. 아! 그리고 미국 뉴욕 스타벅스에서 온 에스프레소잔이 있는데 이건 믹스 커피 한잔을 타먹기에 아주 딱이다.

 

 예전에 아끼던 예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유리컵과 셜록홈즈 유리컵도 생각이 난다. 아이스 라떼나 에이드를 담아 마시기에 참 좋았던 컵들인데 사는 족족 다른 사람이 깨뜨려 버리기에 이후에는 구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컵걸이에는 걸려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 초록색땡땡이가 박힌 투명한 유리컵도 있다. 이건 집에 손님이 아주 많이 올 경우에만 한 번씩 사용하는데 왜 이 컵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지 나도 궁금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컵은 내 집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 중 작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그때그때 나의 기분을 대변해주고, 분위기를 바꿔주는 존재라는 데서 나름의 큰 의미를 가지는 물건인 것 같다. 어떤 컵을 사용할 것이냐를 결정하면서 내가 마실 음료를 정하기도 하고, 어떤 음료가 필요하냐에 따라 어떤 컵을 사용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만족할만한 컵을 선택했을 때는 그 시간이 참 기분 좋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음료를 남기거나 빨리 그 컵을 치워버리고 싶어 벌컥벌컥 마셔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컵은 내게 어떤 감정을 선사하는 물건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한 컵은 다른 물건들처럼 수명이 다하거나, 닳아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꼭 깨지고 나서야만 이별할 수 있게 된다는 특이성이 있다. 깨지지 않은 컵을 일부러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컵은 누군가와의 관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때에 따라 원하는 컵이 달라지듯 때에 따라 필요한, 관계하고 싶은 사람도 달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 컵들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이전 관계들이 완전히 버려지는 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컵들을 꺼내 사용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각나거나 어떤 필요가 있을 때면 또 연락하고 만나는 관계들이 있다. 그리고 항상 컵걸이에 걸려있지만 사용하지는 않는 컵처럼 계속해서 온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지만 거의 쳐다보지 않는 관계도 있다. 컵은 꼭 와장창 깨지지 않고 살짝만 금이 가도 버려야 하는 때가 있다. 긴가민가하다 더 이상의 사용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금이 간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이는 건 참 어렵다. 긴가민가 하는 사이 관계의 금이 점점 커진다. 물론 처음부터 와장창 깨져 버린 관계라면 깨진 컵처럼 어쩔 수 없게 되겠지만..

 

 내 컵들은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나와 함께해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컵들이 내게 오게 될까. 소중했던 컵이 한 순간 와장창 깨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컵이 있을지도 모른다. 깨진 컵의 자리를 어떤 다른 컵이 채우기도 할 것이고, 예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컵이 자주 필요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저 그것들이 깨지지 않게 조심히 다루면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담고 또 깨끗이 씻어 가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마치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수많은 관계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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