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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송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다른 사람.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억을 가진다. 기억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우리가 만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에 진실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누구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각자의, 자기만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주머니. 이들은 모두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의 기억이 진실이라 믿으며 지금도 그 기억을 근거로 꾸역꾸역 산다. 한 평론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었다고 했다. 나는 소설을 다 읽고 하루가 지나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쉽사리 멈추지 않는 눈물이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너무 아파서. 인간의 기억이 모두 너무 하찮아서. 인간의 기억이 누군가를 살리고. 인간의 기억이 누군가를 죽이게 돼서.

계속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렇게 수많은 기억들이 얽혀 만들어낸 어떤 진실, 어떤 오류들을 안고 우리는 산다. 계속해서 질문이 든다. 우리의 삶은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왜 그렇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외치며 사는가. 또 왜 그렇게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외치며 사는가. 왜 그렇게 열심히 나의 옳음과 당신의 틀림을 갈라내어 스스로를 증명하며 살아가려 하는가. 결국 모든 것은 세상의 정의 보다는 자신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가는 건 아닌가.

『인간이란 그 미술관에서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관람객 같아.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그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때는 그 순간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미술관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야. 그런 방법으로도 미술관에 있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 어떤 사람은 짧은 코스를 걸으면서도 알차게 작품을 감상할 테고, 어떤 사람은 여러 전시관을 돌면서도 별생각 없이 작품들을 지나치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미술관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모든 전시관을 다 돌려볼 수는 없어. p142-3』

남자는 자신에게 학교폭력을 휘두르던 영훈을 칼로 찔러 죽인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들 영훈을 자신이 만들어준 카레를 좋아했던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들로 기억하며 출소한 남자를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그의 모든 일에 어깃장을 놓는다. 여자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큰보람에 대해,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자기가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었던 것만을 품고 살아간다. 소설 속 등장인물 어느 하나도 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 같이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악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악이 되는 과정은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다. 자신이 지금 믿는 그것이 옳은 일,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누군가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으로 행해질 때 인간은 누구나 악이 된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악은 스스로 깨닫기에는 너무 자신과 맞닿아 있어 인지할 수 없게 행해지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 찬다. 결국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소망하고 기대하는 존재다.
책의 마지막 여자는 자신의 소원을 깨닫는다.
“훨훨 날아가고 싶어. 나의 시간을 살고 싶어. 자유로워지고 싶어.”
누구나 한 번쯤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혼자가 아닌 함께여야 하는, 함께이지만 자기만의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 가능성은 어쩌면 평범한 악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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