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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총총하게 별이 빛나는 (밤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한 겨울 새벽 밤에 노트북 옆에 앉아서 

오른쪽 귀로는 이승환 옹의 4집 앨범 <HUMAN>을 감상하고 왼쪽 눈으로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루마니즘>과 <논리철학논고 읽기>의 겸직 반장 秋男입니다. 

 

1) <루마니즘> 

지난 주(1월 20일)에는 영역본은 89쪽 둘째 문단(The old ...)부터 90쪽 끝(... this manner)까지,

국역본은 186쪽 둘째 문단(예전 세계는...)부터 189쪽 둘째 문단(... 수 있다)까지 읽었습니다. 

一角님과 새로 오신 정웅님의 많은 질문과 적극적인 참여 덕에 풍성한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본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회의 사회>를 이토록 꼼꼼히 읽어갈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저희에게 많은 생각거리와 이야기거리를 던져주는 이 책은 '볼매'네요. 

읽은 부분을 정리하면요. 

예전의 세계는 비밀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 자체가 신비였다. 인식이 아니라 경탄을 위해 만들어졌고, 명명(命名)조차 위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시 (무지의 영역과 인식의 영역을 갈라놓는) 공간적 제약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반면 근대의 세계는 경의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신비가 아니라) 역설로서 접근 불가능하다. 관찰은 세계 안에서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관찰자는 ‘배제된 중간항(배중률)’으로서 관찰 중인 그 자신을 관찰하지 못한다. 세계 관찰자의 역설.

예전의 세계관의 전제는 <세계는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한 세계로서 규정 가능하다>였다. 이 <통일성(1)과 규정 가능성(2)의 메타-통일성>은 근대의 세계관에서 분해되어 사라졌다. 1> 만일 세계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한 것이라면(1), 그것은 규정 불가능하다(~2). 2> 만일 세계가 규정 가능하다면(2), 그것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1). 그러나 사회는, 1>과 2> 중 어느 세계가 전제된다 해도 커뮤니케이션의 자기생산이 계속 가능하도록, 관찰을 세계에 연결해야 한다. 사회는 관찰이 세계와 관계하는 원초적 장소/통로이다. 

이러한 고찰은 인식 이론에 어떤 귀결을 낳는가? 상대주의나 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들 견해는 (신과 같은) ‘세계 없는 관찰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의 입각점은 그 모든 것 외부에 있다. 우리는 다음의 두 요구를 충족시키는 인식 이론을 찾아야 한다. 1> 모든 관찰자는 상이한 세계 투사를 생산한다. 2> 다른 관찰자를 관찰하는 관찰자도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급진적 구성주의. 

세계는 결코 부분들로 분할되는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상이한 방식으로만 관찰될 수 있는 포착 불가능한 통일성이다. 세계는 결코 (부분들로) 분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구성될 수만 있다. 세계는 결코 온전히 기술될 수 없다. 세계의 자기 관찰은 오직 이차 등급 관찰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세계 사회’ 개념의 의미 : 1> 커뮤니케이션적인 전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사회만 있을 수 있다. (구조적, 작동적 측면) 2> 모든 사회는 세계를 구성한다. (이를 통해 세계 관찰자의 역설을 해소한다.) <세계의 의미론은 사회 체계의 구조적 진화와 함께 변화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세계에 속하는 세계 관찰이다. 우리 사회의 이론이고 우리 사회의 역사적 구성물이다. 

이번 주(1월 27일)에는 영역본은 91쪽 첫 문단(With ...)부터, 국역본은 189쪽 셋째 문단(근대세계는 ...)부터 강독합니다. 

조금만 더 나가면 '10절. 세계사회'를 끝낼 수 있겠네요. 

 

2) <논리철학논고 읽기>

지난 주(1월 20일)에는 지지난 주(1월 13일)에 읽었던 3.25와 3.251에 대한 보충 메모를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一角님과 정웅님께서 이 시간에도 많은 질문과 이야기를 해주셔서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던 세미나에 생기가 더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읽었던 보충 메모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메모는 주로 "항과 관계"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보충>

명제의 뜻을 일정한/규정된 방식으로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결국 어떤 요인이 명제의 뜻을 확정된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문맥으로 보건대 명제를 완전하게 분석하여 얻어낸 그 결과물에, 즉 이름에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복합체를 가리키지 않는, 오직 단순체만을 가리키는 그런 이름의 차원으로까지 분석이 이르렀을 때, ‘완전한 분석’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오직 그런 때에만 명제의 뜻은 애매모호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고 근원적으로 확정될 수 있을 것이다. 

  3.14에 따라 명제 속에서 그 요소들인 이름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맺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기본적으로 명제를 (또 그림과 사실을) ‘요소들 간의 관계’로서 사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일정한 규정성(Bestimmtheit)을 갖기 위해서는, (또 그래야만 명제 역시 확정된/규정된(bestimmt) 뜻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먼저 관계의 관계항인 요소들이 규정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소 자체가 불안정하게 계속 변화하고 있다면, 그것들 간의 관계 역시 확실한 규정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항들과 관계 간의 관계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항들이 우선하는가? 관계가 우선하는가? 항들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이 항들이 모여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 아니면 관계가 우선하며 관계가 있기 전까지는 항들을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항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기능과 의미를 갖게 되는가? 또는 어느 쪽이 더 우선한다고 볼 수 없이 양쪽이 동등한, 그리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가치를 갖는가? 그래서 항들 없이 관계도 없고 관계 없이 항들도 없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순전히 개념적으로 보면 세 번째 해결책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분명히 ‘관계’ 개념은 ‘항’ 개념을 이미 전제하고 있고, ‘항’ 개념 역시 ‘관계’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 개념은 ‘항들 간의 관계’이고 ‘항’ 개념은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항’이다. (그런 점에서 ‘관계항’이란 표현은 동어반복이다. 관계항 아닌 항이 없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보는가? 

  대상은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언어적 존재인 이름은) ‘항’이다. 이 항은 독특하게도 관계의 가능성은 자신 안에 본질로 갖지만 관계의 현실성은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2.011 이하에 따라) 대상은 특정의(따라서 유한한) 다른 대상들과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특정의(따라서 유한한) 사태 속에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만 관여하고 있지, 반드시 이 가능성이 현실 속에서 구현될 필연성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우주가 탄생한 이래로 단 한번도, 수 백억년 동안 단 한번도 어떤 사실 안의 구성 성분으로 실현되지 않은 그런 대상들조차 있을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세계 안의 어떤 대상들은 다른 대상들과 관계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 자체로만 존립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논리철학논고>의 처음 명제에 모순되는 이야기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사실 속에 관계항으로 구현되지 않고, 오직 자기 혼자서 존재하는 그런 대상은 세계 안에 없다. 단 하나도 없다. 대상이 존재하는 한, 이미 그 대상은 어떤 사실 속에, 그 맥락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상은 반드시 언제나 특정한 사실 속에 구현되어야만 하는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대상이 사실 속에 존재하고 존재해야 한다는 점은 옳지만, 그 사실이 특정의 사실일 필연성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대상 a는 사태 A, 사태 B, 사태 C에서만 관계항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상이 세계 안에 존립하는 방식은 이 세 가지 방식 밖에 없다. 그것이 대상의 논리적 필연성이다. 그러나 대상 a가 A, B, C 중 어떤 사태 속에 출현할 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져 있다. 이것의 대상의 경험적 우연성이다.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가 1부터 6까지 밖에 나올 수없다. 이는 주사위 눈이 갖고 있는 필연성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수가 나올지, 1이 나올지 2가 나올지는 실제로 주사위를 던져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대상이 지닌 이 양분된 특징, 논리적 필연성과 경험적 우연성 때문에, 가령 2.0271에서 “대상은 확고한 것, 존속하는 것이다; 배열은 변하는 것, 비영속적인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논고>에서는 ‘항’의 관계의 필연성과 관계의 우연성을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항은 관계 맺음이 필연적이지만 또한 우연적이다. 항이 존재하려면 항상 이미 다른 항들과 관계 맺고 있어야 하지만, 그 관계가 반드시 특정의 관계이어야 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항이 관계 맺는 다른 항들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항들이 아니라 매우 제한된 소수의 항들 뿐이다. 만일 항이 모든 항들과 관계 맺을 수 있다면, 2.0122에 따라 ‘사물은 그것이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 자립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모든 항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존재하기 위하여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전통적 의미의 ‘실체(substance)’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논고>의 대상은 (2.021에 따라) 분명 ‘실체’이긴 하지만(2.02에 따라 그것은 단순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의 실체는 아니다. 세계는 (1.1에 따라) 실체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은 항과 관계 중에 한 쪽에 개념적 우위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항은 논리적/개념적/가능적으로 관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포함한다. 현실적으로 관계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관계는 항의 논리적 본질이기 때문에, 항은 거꾸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본질인 관계를 현실적으로 구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항이 관계 속에 구현되고 있지 않다면, 항은 자신의 본질과 별도로 존재하는 셈이 된다. 본질의 정의는 어떤 것을 바로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거라서, 본질이 없다면 어떤 것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라서, 항이 그 본질인 관계를 도외시하고 자기 혼자 존재하는 순간, 항은 더 이상 항이길 그치게 된다. 그래서 항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관계를 논리적으로 포함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직 현실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이 구현되고 있는 그 현실적 관계가 특정의, 구체적인 현실적 관계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른바 <본질과 실존의 관계> 문제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중세의 스콜라 철학 이래로 오랫동안 매우 심도 있게 논의되어 온 중요한 철학 주제이기도 한데, 비트겐슈타인은 대상과 사태(관계)에 대해 사유하면서 그 주제를 자기 방식대로 건드리며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본질은 실존과 구별된다. 마치 논리적 가능성이 경험적 현실성과 구별되는 것처럼. 그러나 본질은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없으며 항상 이미 어떤 실존 안에 구현된 채로만 있다. 경험적 현실성에서 유리된, 순수한 논리적 가능성 그 자체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처럼. 헤겔은 말했다. ‘이념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명제의 뜻이 확고한 규정성을 가지려면 명제를 구성하는 관계가 확고한 규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그 관계가 확고한 규정성을 가지려면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이 확고한 규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항들의 규정성이 명제 뜻의 규정성을 위한 최종의, 궁극적인 조건이다.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단순한 대상들이 존재하고 있어야만, 이에 대응하는 이름들이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이름들 간의 일정한 상호 관계로 구성되는 명제의 뜻이 확정될 수 있다. 3.23 참조. 

  이 단순한 대상은 그러나 단순하지 않게도 언제나 이미 특정의 사태 속에서 다른 단순한 대상들과 관계 맺고 있다. 또는 대상은 다른 대상들과 관계 맺는 한에서, 그런 한에서만 단순하다. 나는 예전에 바로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이 어떤 모순 내지 문제점이 있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항상 이미 다른 대상들과 관계를 이루어 특정의 사태 속에 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대상은, 과연 어떤 점에서 ‘단순하다’고 봐야 하는가? 그런 대상은 다른 것들과 관계를 이루는 한 이미 ‘복합적인’ 것이 아닌가?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하다’, ‘복합적이다’를 이와는 뭔가 다른 의미로 생각해야 하는가? 

  다행하게도 이 개념적 모순을 해결할 실마리가 바로 위에서 말한 ‘본질과 실존의 관계’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질은 항상 이미 실존 속에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실존과 구별되기 때문에, 어떤 실존 속에 구현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동일성을 바꾸지 않는다. 본질은 본질인 한 영원하다. 다만 그 영원한 본질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 실존 속에 구현되기도 하고, 저 실존 속에 구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논고>의 논점은 한편으로는 본질의 영원성을 전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본질의 시간 구속성 역시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영원한 본질은 항상 이미 시간적 실존 속에 구현되어 있다. 대상은 항상 이미 (자신이 결합할 수 있는 다른 대상들과 결합하여) 특정의 사태 속에 그 요소로서 출현한다. 대상은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대상은 어떠한 사태 속에 출현하더라도 자신의 본질, 또는 자신의 동일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대상은 언제 어디서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대상은 영원 불변하는 본질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대상이 지닌 이러한 ‘영원성’과 ‘불변성’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의 ‘단순성’과 등치시킨 것은 아닐까? 거꾸로 사태나 사실이 지닌 ‘시간성’과 ‘가변성’을, 그것들의 ‘복합성’과 등치시킨 것은 아닐까? 또는 적어도 단순성과 복합성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바로 거기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논고>에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어째서 대상은 다른 대상들과 결합하는 것, 곧 관계를 자신의 본질로 가지고 있는가, 어째서 대상은 전통적 의미의 실체처럼 자기 혼자서 존재하면 안 되는가,  결국 어째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물들의 총체이어서는 안 되는가, 에 있는 것 같다.) 

  본질은 단순하다. 또는 단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성은 본질의 본질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본질은 사물의 자기 동일성을 설명해주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함을, 같음을 근거지워주는 요인이 본질이다. ‘어떤 것이 그 자신과 같다’는 말에서 이미 둘 또는 여럿(즉, 그 어떤 것과 상이한 것들의 존재)은 배제되고 있다. 오직 그 어떤 것 ‘하나’만 관심사가 되고 있다. 본질은 이 ‘하나’에 관계되는 개념이다. 이 점에서 identity의 한자 번역어인 ‘同一性’은 함축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한자어는 이미 ‘같음(同)’과 ‘하나(一)’ 간의 어떤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 언어는 ‘같음’과 ‘하나’를 ‘하나의 같은’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의 ‘one and the same’ 같은 관용적 표현을 봐도 그렇고, 우리말의 ‘우리는 하나다’(이는 ‘우리는 같다’와 ‘하나의 같은’ 표현이다) 같은 문장을 봐도 그렇다. 개념적/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어떤 것이 그 자신과 같은 한에서 그것은 하나의 존재이고, 또한 하나의 존재인 한에서 그것은 자기 자신과 같다. 본질이 대상의 같음과 하나에 근거를 부여하는 요인이라면, 본질은 단순성과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본질 그 자체가 단순해야 한다. 복합적인, 따라서 다름(差)과 여럿(多)의 성격을 지닌 본질로는 대상의 같음(同)과 하나(一)임을 보증해줄 수 없을 것이다. 

  (‘같음’과 ‘하나’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는 철학사적으로 아마 더 깊고 방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이 자신의 후기 철학에서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이른바 ‘이데아 이론’에 있는데, 이데아의 성격이 바로 ‘같음’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본질’과 ‘단순성’에 관한 논의 역시 역사적으로 보면 플라톤 철학부터 이어져 오는 기나긴 사상적 맥락 안에 서 있다.) 

이번 주(1월 27일)에는 예정대로 3.26부터 강독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영하 19도까지 떨어진다고 하네요. 정말 기록적인 한파입니다. 

다들 무사태평한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 일시 :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 6시 00분 (<루마니즘>) /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 10시 00분 (<논리철학논고 읽기>)

- 장소 : 수유너머104 1층 좌측 세미나실 (<루마니즘> & <논리철학논고 읽기>)

- 회비 : 한 달에 2만원 (회비를 '한 번' 내시면 '모든' 세미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plateaux1000@hanmail.net (<루마니즘>) / 010-7799-O181 (<논리철학논고 읽기>) 

 

P.S.

공지글을 거의 다 쓰고 보니, 계속 오른쪽 귀로 듣고 있었던 이승환 옹의 앨범이 이제 11번 트랙 '멋있게 사는 거야'를 들려 주네요. 

앨범 속지에서 제 마음에 드는 가사를 한 꼭지 뽑아 공지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꼭 뭔가 이뤄야 한단건 없어. 중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지. 우정, 아주 커다란 믿음. 이젠 함께 가는거야. 멋있게 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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