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세미나'로 널리 알려져있는 데카르트 세미나답게,
마지막 시간은 기말고사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40분을 잡고 시작했었는데,
40분이 지나도 다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1시간 넘게 시험을 봤었죠 ㅎㅎ
애초에 에이포 한바닥으로 기본 분량을 설정했음에도 다들 두페이지는 기본이고
무려 4페이지까 넘어가는 분도 있었죠 ㅎㅎ
게다가 다들 매우 완벽하고 꼼꼼한 준비를 해오셔서
'아아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었습니다 ㅎㅎ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는 시험지를 타이핑하기로....ㅋㅋㅋ)
그날은 시험이 끝나고 시간도 너무 지체되고 시험을 봤더니 당 떨어져서
서로 짧게 코멘트 해주는 시간만 갖고 뒷풀이를 하러 갔었는데요,
그날 못다한 코멘트! 댓글로 달아주시면 더욱 좋겠죠? ^.^
참가 인원은 총 9명이었구요, ( 유미샘은 게시판에 미리 제출해주셨었죠 ㅎㅎ)
문제는 바로 이것!
데카르트 'Cogito, ergo Sum' 에 대해 논하시오.
(답안 순서는 당일 발표했던 순서대로 배치했습니다.)
문*샘
데카르트는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했다. "일생에 한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 34쪽) 이를 위해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의심의 시험을 견뎌낸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삼고자 한다. 그래서 감각적 사물, 꿈, 심지어는 수학의 지식까지도 '의심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만은 의심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의심하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였다.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발견한다. 사유(cogitatio)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이 나와 분리(develli)될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성찰>, 46쪽) 이러한 발견을 통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를 제출하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 제 1원리로 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데카르트의 저 명제가 정말로 확실한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저 명제를 통해 확실성을 얻어냈는가? 우선 데카르트가 얻어낸 결론을 보자. 그것은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꿈과 환상의 경험을 그가 확실한 것에서 제외시킨데서 보듯, 가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 "참으로 현존하는 것"(<성찰>, 47쪽), 즉 실재하는 것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내가 사유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음', 즉 '사유하는 내가 나에게 의식 됨' 이라는 것에서 '나의 실재함'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행이 정당한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존재한다' 라고 단언할 때 그것은 '내가 실재함을 의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의 확실성이라는 것이 '의심할 수 없음'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나가 의식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히 현존한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음'이란 여전히 의식 차원에서의 기술인 것이 아닌가? '내 의식에서 의심할 수 없음'에서 데카르트는 어떻게 '나의 실재함'의 정당한 근거를 어어내고 있는가? 아쉽게도 정당한 연결을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식 차원에서 '나의 실재함이 내 의식에 확실함'을 뜻한다면, 코기토 명제는 '나의 의식에 의식되는 것은 의식일 뿐이다'라는 것을 뜻하고, 이는 아무런 새로운 말이 없는 동어반복일 뿐이고, 이는 데카르트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는 존재한다'가 '내 의식과 무관하게 실재함'을 뜻한다면, 이것이 데카르트가 원했던 확실성인데, 의식에서 실재성으로의 이행은 정당하지 못하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음'을 '확실성'으로 곧바로 대체해버렸을 뿐이다.
노*현
'코기토 에르고 숨'이 데카르트에게서 확실한 명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개개인의 '경험적'영역에 있어서 의심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 존재와 같은 단어는 우리에게 따로 정의될 필요가 없다.') 이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직관'이 무엇인가가 잘 드러나는 순간이며, 스스로의 이성은 스스로가 세워야하고, 그렇게 개인적 차원에서만 가능함을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그가 '연역'과정의 출발지점으로서 '직관'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연역'과정 이전에, 즉 논리체계 이전에, 이 논리체계를 가능케하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코기토라는 이 명제만이 확실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논리식', '논리체계'라는 것 자체가 그 자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음을, 즉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코기토 명제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 하나는, 데카르트가 인식론과 존재론의 층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생각하는 나 = 존재하는 나 라는 전제를 당연시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괴델을 떠올리게 한다. 괴델이 천착하고 있는 것은 자기지시 명제인데, 이는 명제 안의 내용이 명제자체를 기반으로하고 있어서 이것의 참/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명제를 말한다. (ex."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크레타사람이 말할 때)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은 제 3자의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모순된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없는 것 처럼, 위의 명 또한 '크레타 인'의 입장에서는 참/거짓을 가르기가 너무나 당연히 가능하며,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크레타인이 아닌 우리가 '크레타인이 저 명제를 말하는 것'을 볼 때 뿐이다.
따라서 '사유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가 다르지 않냐는 문제제기는, 코기토가 명제의 형태로 논리체계 속에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문제가 된다. 애초에 코기토라는 명제가 유효한것은 개인의 경험적 차원에 한정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발상 안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는 당연한 것이 되며, 내가 '나는 생각한다한,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한샘이 이와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애당초 이 명제가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해야하는 사람은 '나' 뿐이기에, 이 비판을 유효하지 못하다. 더불어, 이 명제가 서양 근대 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형식체계에는 (논리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언제나 포함'된다는 괴델이 주장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애초부터 우리의 오성에 확실성을 부여해 줄 '자연의 빛'이라는 말을 통해서 논리, 이성체계의 불완전함을 본의아니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홍*혜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주체에게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윤리학이 존재한다면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덕이란 참된 판단에 근거하여 자유의지를 결여함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53항) 그리고 148항의 소제목 (덕을 훈련하는 것은 정념에 대항하는 최상의 구제책이다.)과 144항의 구절 (도덕의 주요한 유용성은 그 점에 있다.-그점은 '특별히 욕망을 규제하는 것')로 보아, 데카르트에게 도덕이란 욕망하는 대상에 작용하는 자유의지를 규제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먼저 데카르트는 정념론의 2부 144항과 145항에서 욕망을 '일의 결과가 단지 우리에게만 의존하는 욕망'과 '다른 원인에 의존하는 욕망' 두가지로 나눈다. 전자의 욕망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만족을 항상 얻을 수" (144)있는 것이기에, 덕은 이 욕망을 더 열렬히 욕망할 수 있게 작용한다. 그러나 후자의 욕망은 "결코 그것을 정열적으로 욕망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공허한 욕망'이기에 두 개의 구제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후자의 욕망에 대처하는-작용하는- 덕과 데카르트의 해명에서 코기토적 주체의 도덕은 흔히 받는 유아론적이며 독단론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두가지 구제책 중 하나는 "신의 섭리"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이성의 참된 판단에 근거하여 자유의지를 충분히 사용한 경우에도, 항상 좋은 결과를 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데카르트 또한 알고 있었다. (142항 참고) 이런 경우 취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의 섭리에 대한 반성'의 요청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 데카르트는 (152)항에서 이성과 자유의지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신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말했다." 신과 같은" 판단을 내렸음에도 좋지 않은 것을 얻었을 때에는 신의 섭리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또한 이 의견은 도덕판단에 대한 어더한 교정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에게서 실천적 윤리학은 발견할 수 없는가. 두번째 구제책을 살펴보자.
데카르트는 두번째 구제책으로 관대함을 꼽는다. 관대함은 스스로 존경할 수 있는 최대의 경지이며, 존경은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는지를 판단하며 가질 수 있다. (153항) 이 정의에서도 실천적 윤리로서 도덕 판단을 규제하는 원인은 없어보인다. 이는 154항 "관대함에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확인받는다. 즉, 데카르트의 도덕은 실천의 영역에서 사용될 수는 없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판단'과 '자유의지'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확신만을, 그리고 이를 만든 '선한 의지'만을 그의 도덕론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타자가 배제된 윤리학이며, 이성에 고립되어 있는 윤리학이다. '신의 섭리'에 대한 설명은 고립된 주체에게 필요하기에 요청된 것으로 왜소해진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그의 코기토가 비판받는 지점-'유아론적이며 독단론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보인다.
박*윤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떠올리던 순간을 우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철학사를 뒤흔든 하나의 사건 혹은 근대라고 우리가 일컫는 철학적 시대성의 성취와 문제를 불러일으킨 하나의 사건으로 말이다. 하지만 모더니티에 대한 반성의 물결이 유한한 이후 우리는 그서을 또한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코기토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한 시대의 문을 연 중요한 철학적 가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근대 이후 많은 철학적 논의들이 데카르트에 대한 주석 혹은 反주석의 형태를 띄는 현실은 이를 증언한다. 그렇다면 Cogito는 어떤 점에서 문제적인가?
Cogito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우리는 사유와 존재의 관련성, 그리고 주체라고 하는 것의 등장을 목격한다. Cogito가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근대 이후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자 논의의 출발점인 '주체'라고 하는 것이 정초되기 때문일 것이다. Subject-주체는 인식의 출발점이자 근거가 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데카르트가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과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이 개념의 문제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그가 추구하던 것은 인식에 있어 '확실한 것'을 찾고자 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를 그 수단으로 사용한다. 즉 보다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그서의 확실성을 검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회의를 이용하는 것ㅇ다. 이에 따라 그는 감각적 인식 내용과 수학적 지식에 대한 것 등 인식의 대상이나 근원이 되는 것의 확실성을 철저히 검사해 나난다. 이렇게 회의를 통해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을 제거한 이후 도달하게 된 것이 회의 그 자체이며, 이로써 나타나는 사유 그리고 사유의 주어로서 전제되는 하나의 확실성이다. 이렇게 코기토는 방법적 회의과정을 통해, 사유로서, Cogito로서, 인식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의 주체가 정초된다.
Cogito적 주체의 의미는 그의 실체관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그의 실체관을 요약하면 그에게는 신이라는 하나의 무한 시체가 있고,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무한 실체가 존재한다. Cogito적 주체는, res cogitans 라고 불리는 이것은 바로 자유실체에 대응한다. 그 의미를 간단히 논의해 보자면, res cogitans가 문제적인 이유는 인간이 신 외부의 권위에 기댐 없이 이성과 사유를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Cogito적 주체를 탐구함에 있어 보다 더 나아간 데카르트의 통찰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정념론>이다. 이 책에서는 신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이-단지. Cogito ergo Su에서 나타나는, 사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이 아니라- 논의도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고 주체를 논위하기 위해 그 대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연장이다. 신과 사유를 제외한 세계는 자동장치라는 말로 표상되는 연장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 여기서 주체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res cogitans에 의해 그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할 res extensa가 된다. 앞서 주체를 연장과 신의 관계성에서 살피면, 여기에는 다른 두 실체에 대하여 두가지 함의를 부여할 수 있다. 첫째로 신에 대해 세계는 기계론적 원리에 의해, 그 연장성에 의해이해 될 수 있는 바에 따라 운행된다. 그리고 cogito 주체에 대해서는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방법서설>에 나타난 밀랍의 실험이다. 그 실험에서 밀랍의 본질은 맛, 향도아닌 순한 연장성이다. 연장성을 통해 주체의 대상은 주체에 의해 연장이라는 본질로, 그 본질에 관련되는 한에서 동일성을 표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제 세계는 자체의 원리와 동일성에 보상될 수 있는 '과학'을 하는 주체의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 다시 이 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주체 역시 대상과 마찬가지로 사유를 그 본질로 선언되는 한에 있어서 그 우연적 특성과 내용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즉 , 왜냐하면 사유만이, 이성만이, 그의 본질을 구성하며, 그런 한에서 인식의 주체로서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를 정리하자면, 우리는 Cogito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체의 등장이다. 우리가 Cogito 명제를 어떻게 평가를 내리든 그의 이 명제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도저히 알아볼수가 없어서 제가 최대한 추리해서 썼어요 ㅜㅜ 종윤오빠 고쳐주세요...)
nomadia
1. 『방법서설』이 담론(discours)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담론으로서의 ‘논문’인가? 아니면 더 넓은 영역의 ‘담론’을 지칭하는 ‘이야기’인가? 사실상 이 텍스트는 논문으로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기보다 단지 에세이나 평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그 명제 “Je pense donc je suis”(Cogito ergo sum)에서 에세이의 필자, 그리고 평전의 그 ‘인물’을 지칭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Je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단일한 ‘자아’로 표기되는 라틴어 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Cogito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분리불가능한 실체(res)로서의 생각함(cogitans)를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문법적인 사항은 실재적인 것의 생략어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법적 언술에서든지 그것이 이런저런 ‘인칭적 표식’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텍스트가 프랑스어로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 버리고 있다 하더라도, 라틴어로 쓰여진 이 명제에서 ‘Je’의 일인칭적인 지시체를 알아채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여기서 ‘생각하는 나’는 무엇인가가 된다. 문법을 벗어나서 본다면 이 명제는 다소 낯선 인칭적인 주체, 또는 인격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의 언급 안에서 이 ‘나’는 [인식론의 질서에서] ‘의심함’(dubitans)을 통해 일구어지는 최종항, 마찬가지로 [존재론의 질서에서] 모든 존재자를 근거 짓는 최초항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질서에 모두 걸쳐 있는 이 ‘나’의 ‘얼굴’이 양면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개념사 안에서 모든 특유한 것들은 철학사에 등장한 이전의 ‘개념적 인물’들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또 그와는 다른 전체적인 형상으로 자신을 빚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 ‘나’가 텍스트 상에 등장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인물일 뿐이라면 철학사는, 또는 데카르트 자신은 『방법서설』에 ‘담론’의 지위를 감히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의심이 최종항인 한 인물, 그리고 존재의 최초항인 이 또 한 인물, 이 두 인물이 얼굴의 양면을 형성하는 단 하나의 ‘질서’(ordo)를 사유하기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이야기’(récit, mythos)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명제가 솟아오른 그 특이한 사건은 어디에서부터 발생하는가? 네덜란드의 참호 속인가? 그 난로는? 아니면 제4부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그러므로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 ”라고 선언하는 그 구절에서 부터인가?
나는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기술하기 전에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적으로 그는 “던져 버리”고, “결심하”고, “알게되”며,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텍스트 상에 흩어져 있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데카르트 내면의 이야기에 출현하는 ‘사건’을 고지하는 것처럼 일정한 계열을 이루는 이 단언들은 그가 ‘제일 원리’를 논리적 이성에 따라서만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바로 그 ‘사건의 지점’이다. 그리고 거기 ‘이야기’가 속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31-32]. 그리고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렸다”[32]. 그리고 이어지기를, “내 꿈의 환영(illusion)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ibid.]. 우선 데카르트는 이 사유의 과정에서 ‘의심’의 최종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폐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신념들’, ‘증명들’, 그리고 이러한 포기/폐기의 과정은 일정한 목적론적 구도를 취하는데, 그것이 겨냥하는 바는 바로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의심의 최종적인 과녁은 바로 ‘확신’이거나 ‘의심의 종식’ 자체가 될 것이다. 그러한 의심의 종식은 사실상 ‘정념의 동요’를 근절하여 의혹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이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환영’을 ‘참’으로 놓는 가정이 필요해진다. 동요를 극복하고 안정에 이르기 위해, 그 동요의 극단을 설정하는 이른바 사고실험은 사실상 어떤 ‘연극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극단적 의심의 상황은 사유의 논리적 과정에서 ‘가정’된다기 보다 하나의 ‘가상’이라는 도식 또는 상상을 동원하는 것, 철학사의 한 국면에 Cogito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터를 다지는 작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Je’는 『방법서설』의 1부에서 6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4부는 어떤 극적인 깨달음(anagnorisis)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여기서 급변(peripateia)이 발생한다. 4부의 이 지면(32면)에서 소위 ‘방법’은 자신의 인식론적 질서의 최종항이 존재론적 질서의 최초항으로 전환되고, 변형(metamorphosis)되는 경험을 그려낸다. 사실은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세상이라는 큰 책’을 찾아 나서는 어린 데카르트와 학교 생활을 지겨워하던 그 데카르트는 Je라고 지칭되는 지칭체 안에서 완연한 과학적인 ‘대상’으로 한 번 화했다가, 다시 ‘주체’(실체)로 변형된다. 즉, ‘데카르트’는 실체적인 모습을 한 대상으로 Je pense라고 말하는 Je 안에서 사유의 가면을 쓰고 있다가, donc라는 단어 속에서 잠시 망설인 후(이 ‘망설임’이라는 정념은 그래서 어떤 ‘전환’을 표시한다), 사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주체로 변형되며, Je suis라고 말하는 Je 안에서 실체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도대체 ‘je’는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1부에서 3부에 이르는 동안 출몰했던 그 수많은 ‘나’들은 이 je라고 말하는 주체와 같은 것인가? 데카르트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을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선언’이라는 효력, 그러니까 수행적인 효력을 발생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이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확고한 것‘처럼’ 보인다. 지혜(sapientia)에서 허구(dokein, simulacre)로의 이 급작스런 사유의 리듬은 사실상 이 맥락에서 독자의 어떤 불분명한 ‘느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느낌‘에 따르면’ 코기토는 확실하다. 느낌‘에 의하면’,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의심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느낌’은 무엇 때문인가? 이때 나는 이 명제의 논리적 알고리듬이 아니라 이 명제가 탄생하게 되는 그 Je의 수동적 사태들, 그 정념들(passion) 그리고 그것에 의해 던지고, 결심하고, 마침내 받아들이는 그 사태들에 주목한다. 수 많은 Je들 그리고 여기에 데카르트가 부여하고자 한 중차대한 개념적인 혁명들은 그래서 ‘이야기’라는 허구적 형식과, 평전 또는 주절주절 뇌까리는 고백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명제를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기초이자 최종항이자 ‘제일원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표면을 훑고 지나가는 로고스의 질서, 각각의 ‘부’들이 가지는 논리적 연쇄들, 그 이미 결정된 ‘통합체’가 아니라, 그 계열의 심층에서 사유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어떤 타자의 ‘운동들’, 그 계열체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Je라는 (대)명사가 실체화하는 와중에 데카르트 자신이 드러내는 정념의 동사들이 어떤 잠재적인 층위 속에서 펼쳐지는가를 보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라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5부와 6부가 어떤 우주론적인 담론을 펼칠 수 있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우주론적인 연극을 연기할 수 있는 그 인격적이 ‘된’ 주체로서의 ‘Je’가 ‘분열된 전체’가 되는 과정이 되도록, ‘인식의 질서’(ordo cognoscendi), ‘존재의 질서’(ordo essendi) 외의, 제 3의 질서, 즉 ‘정념의 질서’(ordo passionis, ‘안정된 정념으로서의 이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 질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 세 가지 질서는 양면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세 개의 면을 가진 어떤 희안한 얼굴을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파스칼이 내건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불신’이라는 정념 대신 ‘신’을 더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정념은 그것의 한도를 넘어섰을 때, 바로 하데스의 문턱을 침범하는 것이고, 신은 이러한 정념의 과도함(hybris)을 제어하는 존재의 근거로서 Cogito의 ‘동일성’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서설』은 이러한 동일성의 보증이라는 순진한 발상이나 해석을 뛰어 넘는 잔여(residuum)를 여기저기 남긴다. 이 텍스트가 철학사 내에서 그토록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산책자
무려 4페이지 가량 되는데, 집에 정리해놓은 파일이 있다고 하셔서 따로 올려주시기로 했습니다. ^_^
이*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영혼과 신체가 실재한다는 실체 이원론을 토대로 삼는다. 실재하는 영혼의 모습 중 사유를 중심으로 삼아, 자신의 목표인 확실성을 추구해야하는 근거와 방법을 말한다.
실재하는 사유를 ('나는 생각한다'부분) 가지고, 다시 그 존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생각하는 나'에 대한 강력한 확실성을 데카르트가 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영혼과 신체의 실체성을 부인하는 발언은 하지 않으면서, 영혼과 신체의 다양한 모습 중 보다 확실할 수 있는 것들을 탐색한다. 그는 일찌감치 몸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불확실함을 열거하며 어떤 상화엥서도 확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영혼과 관련되 것들 속에서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신은 아닐지라도 신과 버금가는 것들이 자신을 속일 수 있을음 인지하고, 이를 이겨낼 확실성을 찾고, 또한 은연중에 타인의 영혼에 대한 의심을 품으며, 점차 자신의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사유에만 주목하게 되고, 결국 확실성을 자신 안에서 찾되 나름의 보편성과 확실함을(명석판명함) 갖춘 사유를 선택하게 된다.
이 방식은 '생각하는 나'가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는 종류의 증명은 어느 정도 되지만, 이 존재성이 진리를 판단하는 혹은 학문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확실성이 되는 증명이라고는 볼 수 없다. 확실한 것이 왜 확실하냐 혹은 어느 정도 확실하냐는 종류의 물음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수 밖에 없게 된다.
데카르트 명제 뒷부분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가지고 또 다른 방식으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접근할 수 있다. 이는 개체화 원리를 둘러 싼 후기 스콜라주의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다. 개체화에 관련된 논의는 인간이라는 개별자에 대한 개체화의 원리가 '사유'라고 할 수 있다면 '생각하는 나'에 대한 확실성은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즉 첫번째 증명은 어떻게 흘러갈까 하는 점이다. (이는 다음 기회로...)
최*미
http://www.nomadist.org/xe/1927405
정*자
1950년대 말 고등학교 공민 선생님. 개똥철학자 라는 별명을 갖고 계셨는데, 여러분들의 어깨에 오천년이 걸려 있다고 말씀하시고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도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하게 살아야 된다는 경구로 받아들이는 수준이었고 때로 많은 사람들이 "코기토 에르고 숨"을 단지 명언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부모의 양육을 받고 제도교육을 받고 사회 생활을 하고 <고령화>라는 떠밀림 속에서 덤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날.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 유지를 어떻게 해야하나 하던 때, 지난 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귀동냥하고, 이번 겨울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틈에 끼어 공감하는 언어로, 또는 잘 모르는 논리고 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원해서 태어난게 아니라는 세상- 그우주 속에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가 죽은 후의 흐름 중 생·몰의 사이에서 잘 적응하며 때로는 자존감, 때로는 자괴감, 또는 모멸감을 삭이며 세월에 실려가는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이제 "Cogito ergo Sum"의 현존. 자연의 빛 속에 나의 존재가 사유하는 능력을 갖고 현존해야 하는 육체와 영혼의 실재로 확인되는 나. 몸의 떨림이 영혼의 동요로 순환. 혼탁한 생각들에 휘둘리기 보다는 명석한 생각들로 실천하는 행. 완성을 향해 가자고 조용히 외칩니다. 정애자는 명석한 생각을 하는 정애자다!
두달 동안 함께 공부해서 즐거웠습니다 헤헤
다들 고생많으셨어요~ ^ㅠ^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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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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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ia
승환의 글이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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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ㅅ
응 승환아 앞문단에 대해 나름 댓글을 달자면/
의식과 실재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영역이지만
그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해주는 차원을 생각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 들뢰즈 등등의 질문이었던 것 같아.
즉 의식과 실재라는 것은 불변하는 질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발생'을 생각하자는 거겠지.
(그게 니가 말한 "원래 기원은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에서 나왔다"와 완전히 일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발생에 대해 생각할 때 과학의 영향이 크다고는 하더만)
들뢰즈는 그 발생의 영역을 '차이'와 연관짓던데.
"그것은 본연의 차이 자체의 발견을 구성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는 더 이상 두 규정 사이의 경험적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 규정 자체와 그것이 규정하는 것 사이의 초월론적 차이다 -
존재와 사유를 분리하는 외면적 차이가 아니라 그 둘을 선험적으로 관계시키는 내적 차이."
(<차이와 반복> 202쪽)
이 '본래적 규정'을 통한 개체화가 의식 역시도 발생시키는 걸로 설명을 하는 듯.
이런 접근은 현상학의 접근과는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유(의식)와 존재(실재)라는 구도를 허물기 위한 시도가 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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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대해 논하시오.
데카르트의 회의는 자신의 현존확실성에 대한 인식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된다. 이에 대한 증명은 세 마디로 요약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명제가 논증이냐 아니면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냐는 계속 논란거리 였다. 데카르트는 이 문구를 일종의 증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보면 논증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 자신도 이것을 ‘추론’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회의에 대한 사고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 결론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명제를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 말들이 그의 논증계기가 되는 하나의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그 말의 진실성이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에 의해 회의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전쟈의 견해는 대륙에서, 후자의 경우는 영미철학의 전통에 속한다. 이들 중 어느 해석의 결과로도 ‘나는 생각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나는 생각한다.’를 거치지 않고도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의 확실성은 동일한 기준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확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자신도 ‘ 모든 사람은 자신이 존재함을 직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힌티카(J. Hintikka)는 이 문구의 추론적 측면과 자기확증적 입장에서 해석된 측면을 철저히 탐구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논증이 압축되어 있다. 만일 어떤 개체가 속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개체는 현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논리적 진리의 실예로 취급한다. 이 문구는 ‘나는 걷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과 다만 그 전제가 더 확실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렇게 된다면, 햄릿은 수 많은 것을 생각하였지만 그는 실제로 현존하지 않으므로 이 문구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구는 항상 자기 모순적이다. 이런 해석에 대하여 데카르트의 문구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말의 역할은 ‘나는 존재한다.’는 말의, 존재와 관련된 자기검증성 자체가 나타내는, 사고와 행위의 관련성을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런 시도 자체의 자기모순성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과 ‘나는 존재한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전제와 결론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그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나의 사고로부터 연유한 내 자신의 존재의 확실성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문구는 추론이 아니라 일종의 수행인 것이다.
힌티카의 해석이 지니고 있는 난점중 하나는 ‘나는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전체 문구가 하나의 추론이라면 ‘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의식의 모든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나는 의욕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따위의 논증과 동등하게 된다.
라틴어 동사 ‘cogitare'는 영어의 사고하다(think)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사고(cogitatio, penseé)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의지, 지성, 상상력 그리고 모든 감각작용까지도 사고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광범위한 정신활동의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내가 회의하고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회의한다.’는 말로부터 ‘내가 회의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말에 이르는 추론은 가능하다. 이는 단순한 논리학의 한량이론의 문제로서 존재 일반화의 실예이다. 즉 나의 화의는 그 자체 안에 회의의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내린 사고의 정의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이때 회의는 사고의 일종이거나 아니면 사고의 양식이다.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동사 φ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일종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내가 φ를 행할 때 나는 내가 φ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참인가 그렇지 않은가?’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결국 데카르트는 사고에 대한 정의를 통하여 만일 내가 사고한다면 나는 내가 사고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 참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구에서 전제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가 의식적 행위들 - 사고하고, 회의하고, 의욕하고, 감각하는 등의 행위들-에 관여하고 있을 때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항상 참인 명제이다. 사고라는 말의 정의에 따라서 사고는 항상 사고 하는 자에게 인식되고 있으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인식되고 있는 것은 회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제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결론은 자연의 빛을 통해서 전제로부터 도된 것이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의 구조를 살펴보자.
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구가 삼단논법의 결론이 아닌가? (1648년 버만이 제기함)
존재한다는 말을 술어로 여긴다면 간단한 삼단 논법으로 정식화 될 수 있다. ‘모든 사고하는 것은 존재한다. 나도 사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내 자신의 경우에만, 즉 ‘나는 사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에만 주의하고 ‘모든 사고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일반적 공리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이런 명제들을 개별적 사물에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경우로서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인 명제들을 특정한 개별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형성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문구에서 직관은 존재에 대한 직관이 아니라 그러한 전제에서 그러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사실에 대한 직관일 것이다.
2)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명제를 추론으로 보는 경우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결론을 이끌어 내는 표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가 참이며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이 참이며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다.
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직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고하는 것이 사고하는 자가 직접 의심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 된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의 의심 불가능성이 그말 자체의 진리성에서 연유된다.
4)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 수행적 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전제 부분을 참으로 만들어 주는 특정한 사건이 정신적 수행의 일종 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
5) 제2성찰에서 제시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 대신에 네가지 논증이 제시된다. 이 명제 보다 더욱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1) 나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2) 전지 전능한 기만자가 나를 속인다. ...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3)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4) 나는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생각한다. ...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다.
(1)은 ‘나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았다.’는 말을 특정한 사고로 지칭하는 전제로 삼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변경한 것이다.
(2) 악령의 가설을 도입하여도 반박할 수 없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전제가 아니라 가설적인 전제를 사용하고 사고의 주체가 아니라 속임의 대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있다.
(3) 전제에 대해 결론은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때에는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4) 전제와 결론 모두 간단하고 데카르트는 사고할 때마다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고 사고할 때마다 그리고 사고의 내용이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한 사고는 참일 뿐만 아니라 확실한 것이다. 즉 생각하지 않고는 그것이 회의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 조차 고려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참이 아니고서는 사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의 타당성은 어디에서 얻어지는가?
1) ‘나는 생각한다.’에서의 ‘나’
‘나’라는 단어가 등장할 수 없다. 전제가 ‘사고들이 존재 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문법적으로는 편리하나 어떤 내용을 기술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나는 추론된 어떤 것이다. ‘나’가 어떤 지시대상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라는 단어의 사용이 다른 사람들이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구별됨으로서 오직 내면을 응시함으로서만 인식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고 있다. 원래 ‘나’라는 단어는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후 관계를 볼 때 ‘나’라는 단어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라틴어 문법에서는 이 대명사가 불필요하다. 사고는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다. 이 속성은 실체에 속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지각하는 사고를 속성으로 삼고 있는 실체가 존재한다. ‘나’는 이 실체를 지시하고 있고, 이는 결코 문법적인 편리함에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이 의식적 사고를 조금씩 이라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각각의 인식 내용들은 우리의 사고하는 영혼 또는 실체를 인식하게 하는 성질 또는 속성이다.
‘나는 생각 한다’의 전제는 참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가? 내가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라도 ‘나는 생각 한다’는 여전히 참으로 남게된다
2) ‘그러므로’라는 단어의 역할
사고로부터 존재로 넘어가는 것이다. 햄릿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데카르트의 이 문구를 상용할 수 없는 것은 어느 누구도 데카르트가 자신의 사고를 의식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햄릿의 사고를 의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속성이 존재할 경우 실체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명제는 버클리, 흄 이후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속성을 지닌 것은 존재하여야 한다는 원리는 데카르트 자신의 존재론적 논증에 의해 거부된다.
‘나’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바는 ‘너’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바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사고를 속성으로 지니는 그 어떤 실체에 대하여 이러한 가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 1641년 히퍼라스피스테스가 데카르트에게 보낸 글에서 비판하고 있다. ‘당신은 사고하는 자가 당신 자신인지 플라톤주의자들이 믿고 있듯이 당신 안에 있는 세계정신인지도 모르고 있다.’
만일 현존하지 않는 것도 속성을 지닐 수가 있다면 그는 어쩌면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현존은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현존하지 않는 것은 속성을 지닐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도,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는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과 존재론적 논증 모두가 타당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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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잘 봤습니다. 코기토 명제와 관련하여 힌티카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논쟁지점들을 정리해 주셨군요. 제 생각에 이들 논의들은 코기토 명제의 '참/거짓'의 규명이라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데카르트가 그러한 '참/거짓'의 지평에'만' 자신의 코기토 명제를 수립하였는지 전 참 의심스럽습니다. 앞으로 이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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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
아름다워요^^* 너무 훌륭합니다 우리 세미나ㅋㅋ
기말고사의 열기는 잊지 못할 거에요 다음에 또 봐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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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너무 시험에 집착한 거 같습니다. 만약 시험이 아니라면 선생님 말씀대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험 준비를 하면서 이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명제가 점점 새롭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체나 속성이나. 관념, 존재.. 등은 사실 중세적인 논의의 형식이었습니다. 이것들의 논의는 데카르트가 그렇게 경멸하던 스콜라 철학의 주요 테마였습니다. 그러나 사유와 연장에 무한과 유한을 연결시켜 실체화 하며, 인식을 새롭게 조건 지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과정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경이 자체였습니다. 물리학, 광학, 기상학, 지구론. 우주론, ... 그리고 정념론까지 모든 지식의 체계가 새로 정리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이 명제로 시작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도 당연하게 속성이라고 생각했던, 사유를 속성이 아니라 실체라고 했을 뿐인데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명제를 끝까지 밀어 붙여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은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생각와 존재의 연결이 직관에 따른 시간(순간)에 의해 명석 판명해지는 부분까지 접근했으면 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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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사유가 속성에서 실체로 전화, 변형되는 그 순간이 바로 이론적으로 근대적인 인간학의 정초가 이루어지는 시간이겠지요. 이 '순간'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게 남은 문제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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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
세미나의 감동은 감동이고,,
의현이가 답안에서 -황송하게도- 대놓고 저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재반박을 해봅니다.
내가 기말고사 답안에서 주장한 것은 데카르트가 '의식에서 의심할 수 없음'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가 실재함'으로 이행하고 있는데 이는 '의심할 수 없음'을 '실재의 확실성'으로 곧바로 대체해버린 것일 뿐 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의현의 표현처럼 '인식론과 존재론의 층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의현은 이러한 나의 비판이 데카르트의 의도와 애초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 '코기토 에르고 숨'이 데카르트에게서 확실한 명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개개인의 '경험적'영역에 있어서 의심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의현이 볼 때 데카르트에게서 '확실성'이란 애초에 '나의 경험상의 확실성'이며 따라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한지, 그래서 '내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지' 따위의 문제가 제기될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데카르트가 '나의 의식에 있어서의 의심할 수 없음'이라는 것에서 '나의 의식과 무관한 객관적 확실성'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행의 근거가 없다고 한 나의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현은, 여기서 데카르트의 확실성이라는 것도 애초부터 주체의 의식에 있어서의 확실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1. 의현의 답안에 있는 '경험적 영역'을 '의식의 영역'과 같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데카르트가 말하는 확실성이란 개인의 경험적 차원, 즉 의식의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데카르트의 의도에 비추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단언을 통해 데카르트가 확립하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참으로 현존하는 것"(<성찰>, 47쪽)이라는 것이다. 의현의 견해에 따르면 이 "참으로 현존하는 것" 역시 객관적 실재성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에서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그런 차원의 확실성일까? 그 확실성이 의식의 차원인 한에서의 확실성이라면,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내 의식에 있어 의심할 수 없다, 고로 내 의식에 있어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내 의식에 대한 내 의식의 확실성. ‘내 의식이 내 의식에게 확실하다’는 것. 내 답안에도 썼듯이,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새로운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의현도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애당초 이 명제가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라고 표현했듯, 저 명제는 당연한 명제다. 그 당연한 명제를 도출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그렇게 지난한 부정의 과정을 거쳤던 것일까? 그리고 이것이 데카르트가 얻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는 그것을 ‘존재한다’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을까? 반대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실재성을 어디서도 보장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데카르트의 불안함 속에서 터져나온 명제가 아닐까? 그 불안함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그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정초를 발견한 후에야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확실한 정초를 얻었다고 하는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가 의식하는 한 내 의식을 의심할 수 없음’이 곧바로 ‘나의 실재성을 의심할 수 없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확실성이 개인의 경험적 차원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하는 의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그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나에 대한 반박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의현의 논리 전개는 대단히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의현의 해결법이 놀랍게도 -그녀가 하이데거를 대강 읽었으며 하이데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현상학의 그것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이라는 인식론적인 것으로부터 실재 세계라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어떻게 이행할까? 나의 의식이라는 주관으로부터 실재 세계라는 객관으로 어떻게 이행할까? 데카르트가 코기토 명제로 확립하려 했고 많은 철학자들이 달려들었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저 어려운 문제에 대해 현상학은 내 의식과 객관세계라는 이분법을 무너뜨림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나에게 만나지는 현상이 바로 ‘사태 자체’이며 우리는 그 사태 자체에 직접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내 의식에 주어진 것은 인식론적인 것이고 그 외부에 있는 것이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구도가 깨어진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할 그것[곧 존재]으로 나가는 접근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58쪽) 주관과 객관의 구분 역시 현상학의 입장에서는 현상을 현상으로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객관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하이데거는 논리학 역시 배격한다. "객관적" 표상들로 짜여져 있는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현상과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의현 답안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런 하이데거의 맥락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사유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가 다르지 않냐는 문제제기는, 코기토가 명제의 형태로 논리체계 속에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문제가 된다.”
후설이 데카르트적으로 성찰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해법이 아니라 현상학으로 나아간 것은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이분법을 유지하는 한에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현 역시, 구체적인 방향은 다르다 해도, '주관과 객관의 불일치 혹은 인식과 존재의 불일치라는 문제는 언제 발생하는가' 라고 발본적으로 묻고 있다. 의현의 이런 식의 입장은 데카르트의 논지 전개 과정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전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의현의 비판은 내가 아니라 데카르트의 문제 설정 자체를 향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 설정을 하고 있는 현상학의 접근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후설은 순수 철학을 첨예화한 것이자 순수 철학 자체의 역사를 위한 가능성의 토대일 반성 속에서 서양의 라티오를 서양의 라티오에 의해 탐구함으로써 서양의 라티오가 지닌 가장 깊은 소명을 되살렸을지 모른다."(푸코, 이규현 역, <말과 사물>, 민음사, 445쪽)
의현아 현상학 해야지?.. 후설 원래 수학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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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횬
오빠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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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ia
야... 제대로 논쟁해야지. ^^ 모든 인문학은 아공(agon)에서 시작되는 거야. 도망가면, 불명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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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아니예요. 의혼님이 발표할 때 저는 속으로 베리굿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쾌델의 이론을 가지고 데카르트의 나를 확실하게 못을 박을 수 있지. 이명제의 중요성은 '나'에 있습니다. 너도 그들도 그녀도 그것도 아니고 햄릿도 아닌 나가 아니면 이 명제는 무의미해 집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타당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근대의 주체성이 세워지는 것이자 근대의 문제가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노마디아님이 이야기 했듯이, 이 명제는 라틴어가 아니라 불어로 처음 쓰여졌습니다. 여기서도 'je'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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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ㅅ
ㅋㅋㅋ의현아 여기 원래 개미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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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ㅅ
휴 다른 분들 재밌는 부분에 대해서도 코멘트하고 싶은데 내일 할게요..
지금 바빠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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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
뭐...뭐야 부담없이 후련한 마음으로 읽고있었는데 왜 댓글에서 콜로세움이 시작되려하는거죠... 코멘트는 뭐야...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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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잼나요~ 데카르트 셈나 시즌2가 시작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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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다
아...이게 모야.
이 중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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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
뭔가 무섭다.....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요. 저는 쓰지 않았는데, 앞에 글을 읽고 생각해본 걸 댓글로 달게요.;;;
앞서, 한샘형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비판한 지점은,
의식의 차원에서 얻은 결과가 어떻게 실재의 차원의 확실성으로 이행이 가능한가? 인데요. 그런데 의식의 차원에서 실재의 확실성을 생각할 수 없을까요? 데카르트는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을 “송과선”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제는 의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다를 듯한데요. 저는 의식은 활동하는 모습에서 그 기원과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원래 기원은 물리화학적인 메커니즘에서 나왔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이라고 알고 있어요. 의식을 사변적 활동으로만 생각했을 때는, 실재와는 절대 이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는 이행할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물론 본인이 세미나를 해보았을 때 느낀 건, 데카르트가 의식을 사변적 활동만으로 생각한 것 같네요.
의현님의 말대로 데카르트의 명제가 개개인의 ‘경험적’영역에서 확실한 것이라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존재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한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장받아야 할 듯한데요. 만약 보장 받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반대로, 보장받을 수 있다면, 확실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여러 개가 되고 데카르트의 하나의 명제는 하나일 수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데카르트의 명제와 괴델의 자기지시 명제와의 관련성이 잘 이해가 안되요. 좀더 자세한 설명좀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