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율리시스 읽기> 마지막 세미나입니다.
7월 초부터 시작해서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통째로 함께 했습니다.
거의 2000쪽 가량 되는 무거운 책을 낑낑대고 들고 다녔고
어떤 분들은 결국 분책을 하시기도 했고
또 어떤 분들은 두 권으로 나뉜 더 좋은 번역본을 구하시기도 했고
또 어떤 분들은 집에서 열심히 읽어서 아예 책을 가져오지 않기도 했지요.
책을 읽는 과정도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비오는 날, 더운 날 짱돌만한 책을 들고 다닌 것도 모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16장을 읽고 얘기를 나누었지요.
지독히도 읽기 어려웠습니다.
긴 문장, 복잡한 통사, 잡다한 내용, 게다가 나쁜 번역까지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었지요.
그래도 가끔 가다 튀어나오는 좋은 문장들, 다시 한 번 눈길을 주게 되는 장면들도 있었지요.
지리한 문장들도 하나의 스타일이 아닐까?
늪처럼 질척거리는 문장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솟아오른 블룸과 스티븐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스타일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블룸이 스티븐을 정신적 아들로 받아들이는 일이
블룸의 자기 정체성 확립 과정이라고도 설명해 보았고
또 어떤 분은 조이스의 문체 실험을 두고 '동물원 예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박물관 예술'이 다양한 예술적 재료들을 박제해서 유리관 안에 보관하는 것이라면
'동물원 예술'은 작가가 기본 세팅, 즉 동물 우리들을 개략적으로 만들고 거기에 재료들을 풀어넣어 그 나름의 논리, 욕망에 살게 하는 것이랍니다.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 나름의 논리, 욕망에 살아가는 것들이 작가가 설정한 우리를 찢고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가에 반항하는 주인공, 소설 전체를 튀어나오려고 하는 말들.
이제 마지막 세미나입니다.
9월 14일 토요일 저녁 7시 N1 그랜드볼룸에서
17장, 18장을 읽고 만나십시다. 쪽글도 써오십시다.
18장은 전체가 한 문단이라 읽기 어렵겠지만서도
명색이 [율리시스]의 대단원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명색이 [율리시스]의 마지막 뒷풀이는 어떠해야 할까요?
푸닥거리 한 판 크게 해야 하겠습니다.
P.S. 아, 그리고 [율리시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읽어보는 것도 이번 추석을 알차게 보내는 한 방법이겠지요.
마침 데리다의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모은 책 <문학의 행위>(문학과 지성사)가 얼마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7장 율리시스 축음기: 소문으로 들은 조이스의 예스'를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율리시스]는 세미나 다 끝났다고 쉽게 손에서 놓을 책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더 관심 가시는 분은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가 [율리시스]에 대해서 강의한 것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아쉽게도 이 글은 영어로 쓰였고, 번역되지도 않았습니다.
Nabokov, Lectures on Literature, "Ulysses"
철학자 데리다의 글은 [율리시스]를 철학의 재료가 되는 작품으로,
소설가 나보코프의 글은 [율리시스]를 창작의 재료가 되는 작품으로 읽는 것이겠지요.
철학자의 독법과 소설가의 그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습니다.
우리를 찢고 나오는 말들, 인물들은 필연적일 거라 생각해요.. 동물원과 박물관으로 나눈 건 작가의
욕망의 방향이구요ㅎㅎ
푸닥거리 기대된다ㅋㅋ 불태워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