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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니콜라스 쿠자누스(Nicholas Cuzanus, 1401-1464)의 영성

   

- '깨달은 무지'와 '반대의 일치'의 개념을 중심으로 -

  

 

 

 

 

 

 

글 / 류기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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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와 주요 저서

 

독일이 낳은 뛰어난 영성가며 또한 철학자인 니콜라스 쿠자누스는 선배인 마이스터 에크할트(Eckhart, 1260-1382)보다 약 140년 후에 태어난 인물로서,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쿠자누스는 1401년에 독일의 서남부의 소도시 쿠에스(Kues)란 곳에서 출생했고, 유년 시절 공동생활 형제단 계통에서 교육받은 후, 하이델베르그에서는 철학을, 파두아(Padua)에서는 법학을, 콜론에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가 되어 일생동안 로마 교회의 개혁에 헌신했으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재결합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는 1448년에 추기경이 되었고 1464년에 움부리아 토디(Todi, Umbria)에서 사망했다. 쿠자누스는 15세기 중반 종교개혁 직전의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며 신학자인 동시에 과학자 및 수학자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신비사상가 곧 탁월한 영성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우리 나라의 세종대왕의 치세기간에 해당한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대부분 영성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그는 지성과 영성을 종합하는 대표적 사상기이도 하였다.

그가 남긴 중요 저서로는 그의 대표작인 <깨달은 무지>(De docta ignorantia/On Learned Ignorance, 1440)가 있으며, 그밖에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대화> (Dialogue on the Hidden God, 1444-1445), <하나님을 봄에 관하여>(On the Vision of God), <명상의 정점> 등은 짧은 글이지만 그의 영성(영적 통찰)의 핵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그가 교회의 고위 공직자이면서도 타인이 추종하기 어려운 깊은 영성적(신비적) 사상이 담긴 저술들을 남긴 일은 참으로 감탄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쿠자누스의 중심 사상

쿠자누스의 중심 사상은 그의 대표작인 「깨달은 무지」(De docta ignorantia)에 잘 나타나 있다. "De docta" 라는 말은 영어로는 "On Learned"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깨달아 안" 또는 "깨친" 혹은 "유식한"이란 뜻을 지닌 말로서, "Docta Ignorantia"를 필자는 '깨달은 무지'라고 번역해 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깨달은 무지'보다 '지혜로운 무지'가 더 적합한 표현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깨달은 무지'는 곧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쿠자누스는 후에 「깨달은 무지에 대한 해설」(Apologia doctae ignorantiae, 1449)에서 밝히기를, 신비 지극한 진리 곧 궁극적 진리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참 지혜를 얻는 일을 어떻게 표현할까 숙고하던 중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이 '깨달은 무지'에 대한 생각을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쿠자누스의 주저인 이 「깨달은 무지」는 모두 세 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절대적 최대'(maximum absolutum)의 개념을 설명한다. '절대적 최대'는 만유를 포괄하는 전일자(全一者) 곧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이것은 안셀무스가 말한 하나님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존재자들) 중에서 "더 이상 큰 자를 상상할 수 없는 궁극의 최대자"(the greatest) 로서의 하나님을 연상시킨다. 제2권에서는 '축소된 최대'(maximum contractum)에 대해서 논하는데, 이 축소된 절대는 하나님 곧 절대적 최대에서 파생된 우주만물을 지칭한다. 우주는 절대적 최대의 축소체 혹은 파생체이며, 모든 파생된 것(피조물)의 총체이다. 제3권에서는 '축소되었으면서도 절대적인 최대'(maximum contractum pariter et absolutum)를 다루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자(하나님)와 합일된 분으로서, 신적 지혜(divine wisdom)를 소유한 분으로 우주 속의 최대이고, 우주의 완성이며, 모든 지성적 특성의 중심이다.

(1) 참된 앎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일이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나 잠언서 저자는 창조주/절대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쿠자누스는 하나님(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무지, 곧 알지 못함과 알 수 없음 즉 인간의 앎(인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바로 참 지식/지혜의 길이라고 말한다. 쿠자누스는 이 책에서 절대적 진리 곧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유한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 인간의 가장 참된 앎은 절대자에 대해서 자신이 전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인간의 앎의 한계)을 일직이 파악한 소크라테스가 만물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무지함과 인식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하여 <네 자신을 알라>(gnothi se auton)고 말했으며, 또한 인간의 이성의 기능과 지식의 한계를 간파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지식은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물질적 현상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감각적 경험들에 의한 종합적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영적 실재인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 곧 사물의 실상(본질 혹은 진여)도 알 수 없다고 말하여, 인간의 지식/인식의 한계를 극명하게 말해 준 바 있다.

이러한 앎(지식)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우리 인간이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유한자인 우리 인간이 무한자인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는가? 쿠자누스에 따르면, 솔직히 말자자면 모른다/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덜 들어내는 일이란 것이다. 즉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무지함과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을 쿠자누스는 "유식한 무지" 혹은 "깨우친/깨달은 무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은 무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참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지기 때문에 '숭고한 무지' 혹은 '성스러운 무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은 무지'란 참된 지혜자가 되는 길이며 동시에 올바른 인식 곧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된다. 따라서 '깨달은 무지'는 인간의 앎의 한계성 곧 제한성(limitedness) 즉 자신의 무지함을 깊이 깨닫는 일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깨달은 무지'란 바로 자신의 모름(알지 못함)과 알 수 없음의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일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는 우매자 곧 어리석은 자의 무지가 아니라 진정한 지혜자의 무지 곧 자신의 무지를 크게 깨달은 하나의 큰 각성(覺醒, enlightenment/awakening) 곧 영혼의 밝아짐(illumination) 혹은 '영안의 열림'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와 나가주나의 '반야지'(般若智)

우리 인간의 지식의 한계에 대한 통찰을 가장 깊이 한 이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18세기의 임무누엘 칸트라고 한다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2세기 초에 인도에서 활동한 대승불교의 중심교리의 이론체계 수립자인 나가주나(Nagarjuna, 한국명 용수)를 들수 있다. 나가주나는 우리 인간의 이성(적 사유)이나 감성(감각적 경험)에 의한 지식은 현상적 세계(사물들)의 겉모습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궁극적 진리 혹은 참(궁극적)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식의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을 그는 초이성적 지혜인 '반야지'(般若智/Prajna)라고 보았다. 나가주나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 혹은 궁극적 진리인 '순야타'(空 혹은 無)는 인간의 어떠한 언어나 개념이나 상징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일상적 인식의 수단인 이성이나 감각에 의한 인식을 초월하는 특별한 인식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그는 '반야지'(Great-Transcendental Wisdom)라고 말한 것이다.

즉 나가주나에 따르면 반야지의 참 기능은 인간의 마음이나 주관적 감정에 의해서 채색되는 모든 집착들을 다 제거해 버리는 일이다. 따라서 반야지는 우리의 일상적 지식의 형식인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며 또한 사물들의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들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배후에 있는 본질 인 실상(實相) 곧 진여(眞如, tathata)를 파악하는 일을 의미한다(to see things as they really are, not as they appear). 따라서 '반야지'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편견과 임의적(arbitrary) 판단들을 제거하고 실재 자체를 보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반야지는 우리의 인식의 대상을 뛰어넘어 인식하는 하나의 초월적 직관에 의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야지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영성적 조명이나 큰 깨침 곧 대각성(大覺醒)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반야지는 인식자와 피인식자가 대립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양자가 신비적 합일을 이룬 상태 즉 주객 미분의 상태에서 인식하는 하나의 신비적 통찰력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야지는 신유학자 왕양명이 말한 우리 인간의 완전한 초탈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초월적 지혜인 양지(良知)와도 매우 가까운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기독교 영성가들(신비가들)일 말하는 참 지혜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감응된 초월적 지혜인 '영지'(靈智/gnosis) 또는 5세기의 신비가 카씨안(Cassian)이 말한 우리의 심령이 지순(至純)의 경지에 이를 때 얻어지는 '순수지'(theoria)와도 매우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국의 다석 류영모는 이러한 초월적-영적 지혜를 '상대지'가 아닌 '절대지'(絶對知)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절대지'라야 모든 것의 모두며 또한 무궁한 신비인 절대자 하느님을 제대로 알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상대지는 아무리 많아도 절대지에 비하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으며, 절대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반야지는 언제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나가주나에 따르면 바로 우리 인간의 모든 선입견과 집착을 버리고 즉 모든 생각들을 정지시키고 마음을 깨끗이 비울 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공심(空心) 곧 순수심을 이룰 때 주어진다고 말한다. 공심 곧 순수심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공심은 바로 쿠자누스가 말하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마음, 모든 안다는 생각을 버리는 마음 즉 '깨달은 무지'에 이르는 일과 같은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가주나의 '반야지'와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겠다.

(3)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의 개념

쿠자누스의 사상 중에서 그의 '깨달은 무지'와 함께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하고 또한 가장 독특한/독창적인 개념은 "반대의 일치" 혹은 "대립자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에 관한 개념이다. 쿠자누스는 그의 주저인 「깨달은 무지」에서 바로 이 '반대의 일치'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이 책과 1440년 이후 쿠자누스의 중요한 영성신학 저술들에서 자주 나오는 핵심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와 '깨달은 무지'(docta ignorantia)는 쿠자누스가 유럽사상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쿠자누스는 이 책에서 '깨달은 무지'와 '반대의 일치'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상호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진실 혹은 신비를 밝혀보려고 하였다.

유한한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무수한 대립(반대 개념)들이 존재한다. 즉 영원과 시간, 물질과 정신, 초월과 내재, 신과 우주(만물), 있음과 없음 곧 존재와 비존재(무), 생(生)과 사(死), 선과 악, 일(一)과 다(多), 음과 양, 하늘과 땅, 상과 하, 좌와 우 등 무수하다. 그러나 쿠자누스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대립들은 실상은 유한한 상대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사유에 의한 개념들로서, 절대적 존재인 신(하나님) 안에서는 이러한 모든 대립들은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절대자인 하나님 안에서는 인간적인 모든 상대적 개념들과 대립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절대자인 하나님 안에서는 신간과 영원의 구별은 사라지게 된다. 즉 쿠자누스에 따르면 무한자 곧 절대자인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대립은 완전한 통일성 속에서 조화되며, 따라서 사라지게 된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쿠자누스의 이 반대의 일치의 개념을 그의 신관의 핵심이 되는 신과 우주와의 관계에 적용시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화이트헤드는 신과 우주와의 관계를 쿠자누스가 말한 '반대의 일치'의 관계로 보아 그의 주저인 <과정과 실재>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영원하고 세계는 유동적(in flux)이라고 말함이 옳듯이 세계는 영원하고 신은 유동적이라고 말함도 옳다; 신은 일자(一者)이고 세계는 다자(多者)라고 말함이 옳듯이 세계는 일자이고 신은 다자(만유를 포괄하기 때문에)라고 말함도 옳다; 신은 세계에 대해서 초월적이라고 말함이 옳듯이 세계가 신에 대해서 초월적이라고 말함도 옳다; 신이 만유 안에 내재한다고 말함이 옳듯이 세계(만유)가 신 안에 내재한다고 말함도 옳다".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신과 세계(우주만물)와의 대립 관계를 상호 내재와 조화의 관계로 보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쿠자누스의 반대의 일치는 예수의 중심 교훈인 복음서의 역설적 진리에도 적용된다. 즉 자신을 높이려 하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으며, 으뜸이 되려는 자 곧 앞선자가 뒤선 자/나중 된 자가 되고, 뒤선 자가 앞선자가 된다는 역설(paradox)도 바로 이 반대의 일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쿠자누스는 이 반대의 일치의 개념을 지구상의 여려 종교들에도 적용시켰다. 그는 종교 간의 대립을 근본적인(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종교 간의 대립과 차이점들 밑에는 근본적인 통일성과 일치성 곧 조화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우주적 평화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쿠자누스가 20세기 후반에 와서 겨우 일기 시작한 종교간의 조화와 일치(religious ecumenism)의 자각을 통한 전인류의(우주적) 평화실현의 비전을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말했다는 사실이다.

 

(4) 숨어계신 하나님(On the Hidden God)

한편 쿠자누스는 또한 하나님의 숨으심 곧 자기 감추심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님의 자기 은폐 곧 숨어계신 하나님 사상은 모세의 시내 산에서의 캄캄한 어둠 속에 게신 하나님 체험을 비롯하여, 고대의 기독교 영성가들로부터 시작해서 14세기의 익명의 영성가 <미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그리고 현대의 칼 발트에 이르기 까지 자주 등장하는 개념(사상)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양면성 곧 하나님의 자기 숨김 곧 감추심과 들어내심 (deus absconditus et revelatus)을 말했고, 칼 발트는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 인간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적 타자"(the Wholly Other)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는 한에서만 우리 인간은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쿠자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앎의 한계 밖에 계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진리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자체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신에 대해서 어떤 것을 참으로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며, 진리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말한다.

 

따라서 쿠자누스는 유한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또한 자신이 신에 대해서 알고(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신을 닮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볼 수도 없으면서 전우주를 보고 알려는 행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 혹은 절대적 진리로서, 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생각들과 관념들을 무한히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한자는 아무리 그의 생각을 확대한다고 하더라고 무한자에 미칠 수 없으며, 참으로 유치한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5세기의 신비가 디오니수스 아레오파지트가 그의 저서 <신비 신학>과 <신의 이름>에서 누누히 말해 준바 있다.

그러나 쿠자누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시고 아무리 숨어계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무(無)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는 무라는 이름(개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무가 아닌 어떤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모든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 모든 것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무를 넘어서 계시며 또한 어떤 것을 넘어서 계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모든 것을 넘어서 계시며, 고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 자체로서, 비존재를 존재하게도 하고, 존재를 비존재가 되게도 하시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쿠자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어떠한 이름도 부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어떠한 언어나 개념으로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름도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규정도 거부했다. 이점은 바로 그의 신비주의적 측면을 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쿠자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한한 신비 곧 신비 자체로서 어떤 것도 아니며, 또한 어떤 것이 아닌 것 즉 무(無)도 아니며, 무엇이면서 또한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니며, 무(無)이면서 또한 무(無)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승불교의 나가주나(Nagarjuna)의 4중 부정(fourfold negation) 이론, 즉 참 실재를 지칭하는 '순야타'(Sunyata) 곧 무(無) 또는 공(空)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非有)도 아니며, 있음과 없음의 둘을 합한 것도 아니며 또한 그것의 아닌 것도 아니며, 그리고 그것의 아닌 것의 아닌 것도 아니라는 논리와 매우 흡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나가주나는 그의 <중관론>(中觀論)에서 궁극적 실재에 해당하는 공(空)의 실재는 인간의 어떠한 언어나 개념이나 상징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아, 참 실재인 '무'는 '불가표현'(inexpressible)', '불가기술'(indescribable), '불가파악'(inconceivable)이란 표현을 했다. 그것은 다만 큰 지혜 곧 초월적 지혜인 '반야지'(般若智)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반야지'는 앞에서 말한 쿠자누스의 자신의 모름(무지)을 깨닫는 지혜 곧 '깨달은(유식한) 무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는 대승불교의 '반야지' 이론과 매우 근접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오는 말: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와 '반대의 일치'의 개념은 실제로는 신비 지극한 하나님의 실재를 좀 더 깊이 알기 위한 방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쿠자누스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며 오류일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는 우리에게 유한한 우리 인간이 전능자인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은 불가능함을 알려주어 우리의 종교적 지식이나 태도에 있어서 지극히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하며 얼마나 깊이 사색해야하며 또한 묵상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 준다. 또한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함부로 쉽게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행위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일은 우리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하게 아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1:17-19>.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을 지칭한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신비의 극치이신 하나님을 깊이 알게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차적 목적은 나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신비인 하나님을 깊이 알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 성령 충만하고 말하는 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면 성령은 먼저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먼저 겸손한 자가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참 지혜'를 얻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의 닫힌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는 바로 우리의 닫힌 영안이 열린 상태 곧 참 지혜/반야지를 얻은 상태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쿠자누스가 깨달은 영적 통찰은 영의 눈뜸이 없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내용을 다 아는 것 같이 주장하는 독선주의와 문자주의 및 독단주의(dogmatism)의 틀에 갇혀있는 현대의 많은 종교인들 특히 목표를 상실한 채 사상적으로나 또는 영성적으로 심히 혼탁하고 혼미한 분위기 속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귀중한 교훈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5)쿠자누스의 '깨달은 무지'와 욥과 사도 바울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의 중요성과 함께 또한 그것의 상대성과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말씀들이다. 즉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많고 깊고 또한 광대하다하더라도 해 아래서는(이 세상에는) 새것이란 없는 것이어서 세월이 가면 낡은 것이 되며, 또한 끝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와 솜씨를 현시하였으나 하나님 자신이 지닌 지혜와 또한 이 우주 만물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신비)는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
서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
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9-10)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이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그리고 잠언서는 이 세상 사물들을 통해 얻는 우리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모두 상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참 지혜가 될 수 없으며, 참 지혜를 얻는 길은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고 믿고 경외함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지혜)의 근본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무한대의 이 우주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경외 할 때에 비로써 신비의 극치 속에 기려져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이 우주 만물이 왜 존재하며, 또한 나의 존재와 함께 만물들 하나하나의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짐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참된 믿음이 참된 앎(깨달음/지혜)을 가져온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이치를 중세의 현자 안셀무스는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말로 표현했다.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잠언서는 우리 인간의 참 지혜는 우리 인간 자신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쿠자누스에 따르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될 때에, 아니 하나님을 올바로(깊이) 아는 일이 참 믿음이기 때문에, 참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실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바로 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자신의 무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쿠자누스가 말한 것 같이 '깨달은 무지'를 통해 참 지혜에 이른 인물로는 구약에서는 욥과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을 둘 수 있다. 욥은 당시에 동방의 의인 혹은 지혜자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인물이었지만, 자신(인간)의 종교적 지식의 한계성을 깊이/철저히 깨닫지 못했으며 동시에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와 또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의 절대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차마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지식(지혜)의 미천함과 어리석음(무지함) 그리고 인간의 어떠한 생각이나 상상으로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실재의) 절대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말을
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두어드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
나이다"(욥42:3-6).

욥의 이 고백은 자신의 무지의 깨달음과 함께 그의 영적 대각성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욥이 말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란 표현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영의 눈이 떠지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하게 선조들이 말해준 전승이나 관습에 의해서나(현대적 용어로 표현하면, 전해진 신학사상이나 교리에 의해서) 추상적으로 아니면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남들이 말해준 지식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참 자식이 아니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생각이나 언어나 관념들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지금까지 희미하고 막연하게 밖에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을 자신의 닫혔던 영의 눈이 떠짐으로 말미암아 새롭게(마치 자신의 영안/심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확실하고 생생하게 알게 되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무지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참 지혜로 나가게 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학문의 도시 다소 출신으로 일찍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자유인이었으나 스스로 유대에 와서 당시의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헤브라이즘의 진수를 터득한 석학 중 하나였으며, 그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깊은 영적(신비) 체험을 여러 번 한(삼층천 하늘에까지 올라가 본)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종교적 지식의 한계성 곧 유한성(무지함)을 깊이 깨달았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지식의 무한성과 절대성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절대자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빈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신비의 극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어떠한 생각이나 상상으로도 짐작도 할 수 없는 분(실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
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솔직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unlimited)하기 때문에 유한한 우리 인간의 생각은 미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고 또한 그의 길을 찾을 수도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특히 그는 하나님과 만물의 신비한 관계에 대해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되돌아간다고 말하여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는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분리의 신비한 관계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우리 인간의 지식/지혜의 한계/유한성을 깊이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의 신비한 관계를깊이 깨달은 참 지혜인 중 하나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사실은 만물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깨달음과 통찰이 모든 종교 혹은 철학 (형이상학)의 근본이 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일직이 만물이 궁극적 일자인 도(道/Tao)에서 나와서 다시 이 일자인 도로 돌아간다고 말했으며, 붓다는 만물이 무에서 나와서 다시 무로 돌아가며, 또한 색계(보이는 세계)와 공계(보이지 않는 세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하나)라고 하여 공즉시색 색즉시공을 말했고, 인도의 불이학파(不二學派)인 우파니샤트 철학에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 곧 신과 우주 만물은 둘이 아니라 하나 곧 같은 것이라고 말해준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쿠자누스가 말하는 '깨달은 무지'와 '반대의 일치' 사상의 근본의도(목적)는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과 우주 만물이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신비한 관계 즉 궁극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신비한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의 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유 곧 보이는(가시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킨다고 말했으며(엡1:10), 또한 자신의 지혜(신적 지혜/divine wisdom)를 지닌 깨달은 사람들(다석 류영모는 그리스도인을 '깨달은 자들'이라고 불렀다)의 모임인 교회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도구로, 다시 말하면 만유(여기에는 인류 전체도 포함된다)를 하나로 조화 통합시키는 방편으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다(엡1:22-23). 요컨대 바울은 하나님과 만물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불가표현의 신비한 관계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를 포함한) 이 우주와 만물이 잠시 있다가 없어져버리는 무의미한 존재들이 아니라 창조주 곧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과 뗄 수 없는 신비한 관계를 지닌 즉 지극히 소중한 의미를 지닌 존재들임을 깨닫게 되며, 동시에 만인과 만유를 조화롭게 하나로 통합시키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충만으로 채워야 할 교회의 사명과 존재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출처 : 당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