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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159. 반대의 일치 : 신화적 유형 에 나오는 디오니시우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대담한 사변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검색했더니 아주 유익한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이제서야 인사원"부정신학"이란 말뜻을 알겠네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Dionysius Areopagite)의 영성

  

 

  

 

 

 

 

글 / 류기종 박사 (평화영성신학 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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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엽에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영성의 대가이다. 그의 출생이나 활동한 정확힌 시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희랍철학적 신비주의 특히 플로티누스(Plotinus)의 일자(一者/the One)사상, Philo의 유대교적 신비주의, 그리고 교부들과 성서적 신비주의를 결합시켜 기독교 신비신학이란 큰 물줄기를 이룩해 놓음으로써 기독교의 전 영성사(all history of Christian spirituality)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하나님의 이름들/Divine Names>,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천상의 위계>, <교회적 위계>, 그리고 10여개의 편지가 있다.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의 작품들은 7세기에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의 주해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9세기에 와서 에리게나(John S. Erigena)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영성(영성신학)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영성과 영성신학의 깊은 측면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영성(영성신학 사상)을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디오니시우스와 신플라톤주의

 

기독교 고전 연구의 대가인 한스 발다살(H. Balthasar)은 말하기를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심미 신학자”(aesthetic theologian)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고전 역구가인 거쉬(Gersh)와 하다웨이(Hathaway)는 디오니시우스가 아테네에 있는 “아카데미아”(Platon이 주전 4세기에 세운 것으로 서기 6세기까지 존속했었음)에 가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한 것이 확실시 된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대의 신학의 특징인 영성신학 특히 탁월한 영성가들에 의해 발전된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은 헬레니즘의 핵심 철학사상인 플라톤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불교철학 사상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물 곧 현상세계를 실재가 아닌 그림자(image or shadow)로 보는 플라톤주의 철학은 만물을 연기(緣起)에 의한 일시적/잠정적 존재로 보는 불교철학 사상과도 매우 가까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기독교 영성의 대가들과 신비가들이 플라톤 철학 특히 신플라톤 철학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중에서도 특히 알렉산드리아 및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비롯해서, 고대의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플라톤 사상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보다도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사상과 깊이 통하는 바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으로 보여지며, 그리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Plotinus의 신비철학을 통해서, 기독교 영성(신비신학)과 플라톤 사상 사이에 매우 가까운 친밀성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으로 시료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고대의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가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고대 동방교회 영성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이 사실은 오늘날 큰 사상가/신학자 및 탁월한 영성가 혹은 목회자가 되려면 우주만물의 본질을 규명하는 학문인 철학에 많은 조예를 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한 예로 카파도키아 교부중 하나인 그레고리 나찌안쭈스는 철학적 소양을 가추지 않은 성직자는 성직자로 간주(예우)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깊은 지적(철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특히 Plotinus의 신플라톤 사상을 그의 신학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고대 교회의 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어거스틴도 플라톤 철학 특히 신플라톤 철학 사상을 그의 신학에 도입한 사실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 철학을 단순히 도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독교적 창조 영성신학에 접목시켰음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Plotinus는 우주 만물의 선함을 주장했으나, 물질의 세계를 실재의 가장 저급한 최하위에 둠으로써, 물질을 경멸 내지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생각게 하는데 반해서, 디오니시우스는 만물을 진선미의 근원인 신성(하나님)의 표현으로 봄으로써, 지극히 아름답고 선(신성)한 것으로 보게 한 것이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생각들을 초월한다.

 

디오니시우스의 영성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사상(인식)에 집중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개념들을 무한이 초월하시는 절대 초월자 또는 무한자(the infinite)로서, 우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명칭들, 개념들(ideas/conceptions), 상상, 느낌, 상징적 표현들을 다 초월하며 무한히 초월하신다. 따라서 유한자인 우리 인간은 무한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말이나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최상의 겸손한 태도는 침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보기 위해 시내산 산정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직접 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이 깜깜한 암흑 속에 계속 머물러 계심으로 보여주지 않은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초월성을 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어떠하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아는 것같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 무지를 들어내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이름 혹은 언어나 상징으로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이 무한히 초월하시는 신비 지극한 실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란 이름 마자도 초월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이름도 적합하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폴 틸리히 같은 신학자는 디오니시우스가 이해한 하나님을 "하나님 위의(넘어의) 하나님"(God above God or God beyond God)이라고 표현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나 유대교인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명칭인 야훼나 엘로힘 같은 고유명사 대신에 "존재 자체"(Being-Itself) 혹은 존재의 근거(Ground of all beings)라는 말을 사용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에서 사용되는 신의 이름들 즉 부라마 비쉬누 시바 혹은 크리슈나 같은 신들의 명칭을 거부하고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순야타"(Sunyata, 空 또는 無)란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사료된다.

3. 부정의 방법(Via Negativa)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는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방법 즉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의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신비지극하고 너무도 크신 절대 초월의 실재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 인간의 지식의 부정(negation of all knowledges), 앎의 부정, 생각의 부정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진정한 "모름"(unknowing)을 통해서 즉 자신의 무지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긍정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부정의 방법으로 밖에는 알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캄캄한 "어둠"(darkness) 속에 숨어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며 빛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밝기 때문에 감각적인 우리 인간에게는 캄캄한 어둠으로 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참 빛인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 어둠 속을 통과해야 하며, 어둠 속으로 직접 뛰어 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리 인간의 생각들은 어떻게 되는 가? 그 어둠 속에서는 우리 인간의 이성과 언어와 상상과 사유는 정지되고 해체되며,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이성)가 전적한 수동태가 되어 질 때, 우리의 영혼이 깨여나게 되고, 영안이 열리게 됨으로써 신비 지극한 하나님을 감지하게 되고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무지함을 철저히 깨닫게 될 때 즉 자신의 "모름"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의 부정의 방법의 핵심 내용이다.

4. 영혼의 정화와 초탈 및 관상(觀想)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신적 어둠을 통과하여 그 어둠 숙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기 되는 길은 우리 인간의 무지의 자각과 함께 철저한 자아의 부정과 초탈 즉 모든 집착과 얽매임으로부터의 놓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정관(靜觀) 곧 관상(觀想)을 통해서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영혼의 목표 즉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목표는 우리의 영혼(존재 혹은 생명)이 맑게 정화되고 밝아져서 우리 영혼의 근원자인 하나님과 접촉(합일)을 이루는 일인데, 이것은 참 지혜인 그노시스(gnosis/靈知) 곧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적 직관인 관상(觀想/contemplatio)에 의해 도달된다. 즉 우리 인간이 감각적인 세계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하고 단편적이며 또한 지극히 황당한 생각들로 가득 찬 자아를 철저히 부정할 때, 다시 말하면 전적인 자기포기와 영혼의 정화와 조명(illumination/enlightenment)을 통해 도달한 관상(觀想/순수영적직관)에 의해서만 신비 지극한 영적 실재인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적 직관인 관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이성에 대해서 캄캄한 어둠으로 보이는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 관상은 우리의 영혼의 온전한 정화를 통해서 얻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심령)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마5:8)고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청결함이란 바로 우리 심령(영혼)의 완전한 정화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를 고대의 영성가들은 "관상"(contemplatio)이란 말로 표현했으며, 그리고 이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기도의 최종 목표 혹은 기도의 최고의 단계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의 소원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인식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곧 구원을 얻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오는 말

 

우리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의 영성을 통해서 깨닫는 점은 우리(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가 신비의 극치인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며 쉽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님이 바로 내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것처럼 말하고 설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는 영원자/무한자/절대자/순수영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확실하게/정확히 아는 것은 "제로/없음"(zero)이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가장 온당한 표현은 "저는 주님에 대해서 정말 무지합니다"고 고백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의 한 지혜자인 욥(Job)에게서 배워야할 점은 바로 그의 마지막 회개의 고백이 아닐까 사료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출처 : 햇볕같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