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지난주에 후기를 써야했는데 늦어져 버렸습니다.
오늘은 지난 셈나에서 제가 발제를 맡았던 부분을 중심으로 후기를 올릴게요.
승엽샘 발제해 주신 4~5장도 시간 나는대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중국에서도 미뇰로가 강의를 했는가 봅니다.ㅎㅎㅎ>
우리 세미나에서는 낯익은 인명과 낯설기만한 인명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피히테, 하이데거, 데리다, 월러스틴, 부르디외가 언급되면서
동시에 안살두아, 카티비, 모라가, 살디바르, 알라르콘이 그들에 대한 반박으로 인용됩니다.
유럽과 미국의 학자들에게 익숙해져와서인지
남미의 학자들의 이야기가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지더라고요. ^ ^
미뇰로는 국가언어들 대신에 경계언어들에서 우리의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치카노 에스파냐어에 주목하죠.
모라가는 치카노 국가를 가리켜 "이중강간을 통해 임신된 메스티조 국가"라고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에스파냐에 의해, 그 다음에는 영미제국에 의한 강간.
언어사용의 견지에서 이러한 강간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다수 라티노들이 '모자란' 혹은 '훼손된' 에스파냐어로 취급하곤 하는 치카노 에스파냐어가
안살두아에게는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언어가 됩니다.
200년 전 피히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함>에서 살아있는 언어와 죽은 언어를 구별하는 기준은
안살두아에 의해 역전되어버립니다.
피히테는 단절되거나 전통이 부서지고 뒤섞인 언어를 가리켜 죽은 언어라고 말한 바 있죠.
그래서 그에게는 단절없이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일어만이
민족혼을 표현할 수 있는 살아있는 유일한 언어가 됩니다.
반면, 안살두아는 에스파냐 사람도 아니고, 에스파냐어가 제1언어인 나라에 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영어가 지배적인 나라에 살지만 앵글로는 아닌 사람들에게,
표준적/공식적인 카스티아식 에스파냐어와도, 표준 영어와도 동일시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언어,
그들 자신에게 절박한 현실과 가치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에스파냐어도 영어도 아니지만, 둘 다 가지고 있는 언어인 치카노 에스파냐어를 창출했다고 말합니다.
<미뇰료는 웃는 모습이 정말 멋짐 폭발입니다. ^ ^ >
저는 이 대목에서 김시종 시인의 일본어를 떠올렸는데요,
그의 시나 에세이에서 구사된 일본어는 일본인들에게 벽을 못으로 긁는 것 같은 불편함/거슬림을 유발시킨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김시종의 일본어는 일본에서 나서 자란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에서 나서 자라 일본에서 유학한 한국인인 저에게도 술술 읽히지 않습니다.
마치 과속방지탑이 10미터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저에겐 <이카이노시집>이 유독 그랬던 것 같아요.
한 편의 시를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의 시에는 일본에서 나서 자란 일본인도, 한국에서 나서 자라 일본에서 유학한 한국인인 저에게도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국가언어가 완전히 알아낼 수 없는 시어들과 표현들이 얼룩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얼룩이나 앙금은 동일성을 추구하는 자들에겐 늘 지워없애고 싶은 혹은 녹여버리고 싶은 불편하고 찜찜한 존재이기도 하죠.
여기에서 2개언어'상용'과 2개언어'사용'의 차이점이 중요해지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미뇰로는 2개언어'사용'을 2개언어'상용'과 구별하고 있는데요,
2개언어'상용'은 체계적 교육인 언어정책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기술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3년동안 프랑스어가 제2외국어였는데 이것은 2개언어'상용'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2개언어'사용'은 안살두아가 말했던 '살아있는 언어'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언어들의 교차점에서
일종의 '삶의 방식'이돠는 순간입니다.
사회운동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지적 프로젝트에 의해 구현되죠.
2개언어사용은 주인의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과 공포감을 주입시키는 법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끌어들이고,
피히테식으로 우리를 민족혼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김시종의 일본어'는 이렇듯 필요를 넘어선 삶의 형식으로서 해방의 정치와 윤리를 수행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일본어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어떤 국가나 제국의 언어의 균열 속에 머물러 살아냄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자이니치의 일본어에 대한 애증 또한
미뇰로가 말하는 '2개언어사용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개 언어사용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써 언명되는 ‘사랑’은
언어들 사이에 있음에 대한 사랑, 식민언어를 탈구시키려는 사랑이고
언어의 탈식민지화로 나아가는 발걸음일 뿐 아니라 ,
초기 식민화와 근대 합리성의 출발 이래 교육과 인식론에서 금지되었던 이차적 성질들,
즉 열정, 정서, 감정과 언어의 불순성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추신) 지난 세미나를 통해
치카노 에스파냐어를 구사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몹시 궁금해졌어요!!!
지난 셈나 내용에서 저는 김시종 시인의 <얼룩>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길지만 붙여 놓을게요~
얼룩
얼룩은
조짐의 징표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일단 스며들면
명확한 한 점의 의지가 되어 자리를 차지한다
얼룩은
겉으로 꾸며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오점과 같은 처우에는
얼룩 자신의 내력이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얼룩은 흔적이 압축된 신념이다
배어들어간 표상에만 집착하고
비렁뱅이의 개선을 조롱하며 산다
강조는 이렇게 말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에 얼룩은
한 패가 되는 것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뜻밖에 아주 지척에서 점잔을 빼며
동공의 한 점을 거뜬히 빼앗고 있다
다투어 치솟는 즐비한 집들 사이에서라면
결국 종유(鍾乳)의 물방울이라도 되어 있으려고
어쩌다 가끔 거꾸로 융기하고
도시의 괴사에는 통각조차 가닿게 할 수 없다
얼룩은
규범에 들러붙은
이단이다
선악의 구분에도 자신을 말하지 않고
도려낼 수 없는 후회를
언어의 깊은 바닥에 가라앉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