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엔 세미나가 없습니다.
한주 쉬고 다음주 2일에 합니다.
오후3시에 시작합니다.
책은 그대로 레이코프와 존슨의 <몸의 철학>입니다.
범위는
12장 마음
13장 자아
14장 도덕성입니다.
발제는 유나님과 오리진입니다.
전시간 공부내용은 댓글로라도 차차 달아보겠습니다.
최양의 "수줍은 영화 읽기" 전 시간엔 <프랭크>였습니다.
노래가 너무 좋았어요. 마이클은 노래도 잘하더라.....
영화평 올려주세요.
영화를 섬세하게 보는 최양 덕분에 이해력이 높아지고 있어요. 대표로 감사드려요.
다음 영화는 무언가요? 공개하랏!
유나님의 아이디어가 어떤 모습일지도 기대해봅니다.
다른 사람한테 피드백 받아보는 소중한 시간 마련하고 있으니 다른 분들도 하시는 작업 가꼬 오세요.
애정어린 훈수를 둬주게쓰...ㅋㅋ
개천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올랐습니다.
머리 까만 청둥오리가 암컷 옆에서 물풀을 뜯고
내외를 하시느라 다른 놈은 빙 둘러 헤엄을 치고
길쭉한 황새는 저쪽에서 수작질을 지켜보고....
3월에 봐요.^^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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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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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
욱! 해도 세미나 책에 관에 토론하다 욱 했어야 했는데...
(아 이 짧은 식견...ㅜ_ㅠ)
애정하는 영화에 대해 혼자 흥분해서...부끄러웠던 시간이 떠오르네요.
제가 그렇게 흥분하기가 쉽지 않은데...선생님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해 주세용.
(그날 이후로 아픈 건 아닌지...막 이러고요...*-_-*)
창작자의 생존에 대한 지점이 좀 달랐던 거 같아요.
사실 프랭크가 많이 거론되는 작품은 아니어서
관련 글을 한번도 못 봤는데,
방금 찾아보니 제가 좋아하는 김중혁 작가님이 쓰신 글이 있네요.
이 글을 보니 아마도 프랭크는 '윌리엄스 중후군'이 아니었을지...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13535
선생님 말씀도 맞지만, 제가 레니 애브러함슨 감독님의 영화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사회적으로 약자? 적응하기 힘든 조건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 이웃으로서 혹은 누군가의 동반자로서 살아갔으면 하는 시선인 거 같아요.
영화 <룸>에서는 아무 죄없는 성폭행 피해자 여성을 다루는데,
언어로 쉽게 후려쳐지는 '정신병자' 혹은 '성폭행 피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난 시선을 보여주는 거 같아서요...
물론 제가 좀 과하게 받아들이는 면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글의 맥락상 뺀 것이 있는데...
탈을 벗었는데 그 안에 마이클 패스벤더 님이 똭!!!!!!!!!!
아무래도 전 이 영화가 너무 좋아요...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몸의 철학'이 제가 좋아하는 류의 책이 아니어서 읽는데 좀 힘들어서요,
비겁하게 다음 영화는 좀 쉴게용. ㅋㅋㅋ...
(기쁨 충만한 영화에 대해 쓰고 싶은데 왜 '렛미인(2008)'이나 '세상의 모든 계절'같은 잔인한 영화만 떠오르는지...ㅠㅠ)
선생님께서 머리카락이 길어서 아픈 거 아니냐고 농담 던져 주셨는데,
집에서 거의 말아올린 똥머리를 하고 있어서 거울로 보니 뭔가 머리통 하나가 더 붙어있는 형상이긴 하네요.
다음 시간엔 봄맞이 이발하고 건강하게 갈게용. ㅋㅋㅋ...
3월 2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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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
확인했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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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니말이 맞다니까.
욱한 줄도 몰랐네... ㅋㅋ
다음주에 영화가 없다니 허전합니다.
며칠 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를 읽고 영화를 찾아 봤습니다.
영화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짧은 순수의 시절
예술가는 순수을 계속 연장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버텨내느냐....
개인의 문제이며 동시에 공동체 체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순수는 괴롭습니다.
감당이 안되요. 그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순수죠.
순수해질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순수를 경멸합니다.
말살하고 싶어합니다.
시기를 부리는 겁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순수는 경멸받고 경멸하는 자는 점점 불행해지고, 자기 환멸에 빠지고
악순환이지만...... 나름 공평합니다.
이런 바보같은!
이런 무능한!
쓰다보니 불끈해서
막 용기 내고 싶어졌어요.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왔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소설은
"무언가 불행한 일이라도 당하셨나요?
"아니오. 방금 사람과 헤어지고 왔습니다."
나는 무척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는 것을 남이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단지 맑은 만족 속으로 고요히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누가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 주어도 그것을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운 공허함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선실 전등이 꺼져 버렸다. 배에 실은 생선과 바닷물 냄새가 강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소년의 온기를 느끼며
눈물이 나오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것은 머리가 맑은 물이 돼서 주르르 흘러넘치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달콤한 상쾌함이었다."
이렇게 끝납니다.
정미야 빨리 나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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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나름 엄청 흥분한 거 였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
몰랐다고 하시니 너무 웃겨요.
웃으니깐 또 몸이 욱신...ㅋㅋㅋ...아 삶이란....
<이즈의 무희>라는 제목 뭔가 서정적이고 좋아요.
찾아보니 영화 정보 보다는 소설이 많네요.
올려주신 부분도 너무 좋아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의 <마음, 자아, 도덕성>
알고 싶은 단어들의 모음이네요.
열심히 읽고 갈게요~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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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찌롱
지나치게 과감한 추측은 때로 모함이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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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
처음에 모함을 모험으로 읽었네요...^^;;;
닉네임도 그렇고...쉬운 마음으로 쓰신 거 같은데
받아 들이는 입장에서 좋은 단어들의 조합은 아닌 거 같아서요.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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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아잉... 그냥 슬쩍 넘어갈라고 했는데 최양이 성실하게 댓글을 달았넹....
저한테 하신 말씀이라 과감하게 추측해봅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죄가 많다보니 켕기는 게 한둘이 아닙니다.
소심하거든요....
이찌롱님이 뭘 가꼬 말씀하신 거지?
왓? 왔? 왙?
최양말씀대로 털어놔주시기 바래요.
최양은 늘 옳거든요.
궁금하잖아요...
누구신지도 궁금하고
왠지 남자라고 추측도 되고
점 7개 찍은 거 보니 모범생이구나.....
70년대생은 되겠구나....
잘 생겼겠구나...
우리 남편이 설겆이 하기 싫어서 이런 댓글을 달았나?
막 이런 추리도 하고
담주 셈나에 '짠'하고 나타나셔도 환영합니다.
근데 내가 아는 사람이면 막 머리채 잡을거야.
(이 바닥이 다 이런 거지 뭐.)
누구지?
아오... 궁금해라.
암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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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마음은 우리의 신체에서 시작하고 언어는 그 마음의 외화이다....
<몸의 철학>에서는 언어의 태생과 본성에 관해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신체의 체험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내면을 번역하여 밖으로 표현합니다.
귀로 들은 말은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새겨집니다.
아래는 피터 엘보의 <힘 있는 글쓰기>에 나온
말의 마법에 관한 글입니다.
언어의 속성엔 마성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래도 본질적으론....)
마법은 우리 신체에서 벌어집니다.
종이에 검은 잉크들이 읽는 이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눈앞에 그림을 그려보이기도 합니다.
각종 호르몬을 뿜어대게 합니다.
언어는 신체에서 나온 것이라 현대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몸에 직접적입니다.
<몸의 철학>과 피터 엘보의 글을 접목시키면 좋을 듯해서 적어봅니다.
말의 마법
마법 같은 관점은 한마디로 말이란 그것이 나타내려는 바의 일부라는 것이다.
말에는 그것이 가리키는 뭔가의 정수, 혼, 주스가 담겨있다.
(이름, 명칭이 바로 주술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한때 말은 경험이나 사물 자체와 좀 더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옛 사람들이 논리에서 오류를 저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오늘날의 우리들 대부분보다 똑똑했으면서도
우리가 저지르지 않을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키 가 작은 남자는 키가 큰 남자보다 '짧음'이 더 많이 있다는 생각이 그렇다.
논리는 점진적인 개발과 연마를 거쳐 생겨났다. 말을 쉴 새 없이 쓰고 또 써서,
말이 서로 닳고 닳아서 마모되고 부드러워져 마침내 사물과 경험에서 분리된 것이다.
숫자와 연산 부호가 말보다 논리에 더 적합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이 가벼워지고 마법의 힘이 약해져 단순히 실용적인 도구가 된 뒤에야
사람들은 더 이상 거기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된다.
마법이 먼저고, 논리는 나중이다.
시가 먼저고 산문은 나중이다.
비유가 먼저고 문자 그대로의 언어는 나중에 만들어졌다.
학자와 합리주의자들은 언어의 역사를 우리가 선조들에게는 없던 뭔가를 얻어낸 과정으로 보고 싶어한다.
고대인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에게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은 없는가?
그들의 언어에는 지금 포착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호머의 글을 비롯하여 소위 원시적이라고 하는 시와 송가를 보면,
우리는 문자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단순하고 솔직한 언어로 좋은 시를 쉽게 만들어낸 것 같다는 점을 발견한다.
마치 순전히 평범해 보이는 실용적인 말에 주스를 더 집어넣는 요령을 알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는 같은 말을 쓰더라도 그만큼 집어넣지 못하고,
아니면 적어도 위대한 작가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는 진실한 목소리가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쉽게 시적으로 이야기 한다.
아이들의 언어는 철저하게 단순하다.
전심전력을 다해 자기가 말하는 바를 100퍼센트 의도하고 감추거나 억제하지 않으며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다.
사물과 경험에서 분리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읽은 어린이 시 하나.
기억이 정확하진 않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농촌 어린이가 지은 시입니다. 이름은 기억 못하고.... 아마도 여자 어린이였을 겁니다.
시 제목은
<산>
산은
저기 저렇게
가만히 있다.
산을 이렇게 정확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산을 볼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고
문득 이 시가 생각나면 눈 앞 저 쪽에
우뚝 산이 보입니다.
다시 피터 엘보로 돌아가면
말은 값비쌌고 이미지는 귀했다. 이제 말과 이미지는 값싼 것, 따분한 잡음이 되었다.
합리화되면서 말은 힘을 빼앗겼다.
근대 학문, 득히 철학자와 사회학자를 생각해보아라.
그들의 언어는 목소리도 없고 힘도 없을 때가 많다.
경험과 사물에서 너무나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다른 말이나 다른 개념과의 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거기에 실재하는 자아가 뭔가를 보거나 경험한다는 감각이 없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언어는 모두 범주에 불과하지만,
이 마법의 관점으로 보면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더 간접적이거나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학자 중에도 진짜 힘을 담아 글을 쓸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언어에 마법을 불어넣는 힘과 세련된을 동시에 누릴 수 잇다.
그렇게 하려면 더 힘이 들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헤엄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글이든 학술적인 글이든
글 쓰는 이는 '목소리' 담는 법을 갈고 닦아
힘 있는 글, 즉 독자를 경험하게 하는 글을 쓰자는 게 피터 엘보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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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ㅁ
하지만 반대로 그들에게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은 없는가?
그들의 언어에는 지금 포착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특히 이 부분에서 끄덕끄덕...
내가 너보다 나은가, 인간은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같은 질문이
부질없어 보일 때가 있는 거 같아요.
(내 삶을 인지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랄 뿐...)
예전에, 일요일 대낮에 화상통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4살 된 첫째 조카가 받아서는 아주 진지하게 "이모, 여기는 밤이야~"
이러 면서 거실을 보여주는데 다들 기절한 듯 자고 있더라구요.
어찌나 이해가 되고 웃기던지...
역시 그 나이쯤 된 둘째 조카와 차를 타고 가던 어느날,
차창 밖의 달을 보면서 너무 신기한 듯 "이모, 달이 자꾸 나를 따라와~"
이렇게 말하기도 했구요.
잊고 있었던, 식상하다고만 생각했던 표현들이
누구에게도 들은 적 없을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니까
단어가 환기되고 사물을 다시 보게 되더라는
은유적이어서 기억된 이야기....
전에 읽은 <트라우마와 통증>에서 병명을 직관적이고
다정한(?) 단어로 불러주자는 부분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글 쓰고 싶게 하는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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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달이 따라와... ㅋㅋ
저도 그랬어요. 아주 부담스러웠어요.
집까지 따라오면 어쩌나... 어린 마음에.....
췠, 쓰다보니 슬프네요.
타고 나길 배타적인 성격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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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전 시간 복습을 해 봅니다.
제 9장 철학적 개념들의 인지과학
대표적인 철학적 개념들, 사건, 인과, 시간, 자아, 마음, 도덕성....등은
비은유적인 개념적 골격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각각은 한 가지 방식에 따른 개념적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에 따른 은유에 의해 구체화 된 것들이다.
이 개념들은 순수하게 문자적이긴 커녕 근본적이며 불가피하게 은유적인 잡동사니들이다.
이 은유들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신체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것으로 뽑아내 사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을 순수하게 추상적으로 사유가능한 것처럼 펼쳐보이는 철학자분들은 사실 분열되어 있는 거라고 보여짐.... 뭔가 자신의 내면 한 부분을 외면해야 가능한 일.....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작업을 진행하기에 결국 은폐된 자신의 논리 근거, 그곳으로 자꾸 돌아가는 환원주의에 빠지곤 함....
좌뇌가 부리는 재주에 속지말라.
심부름꾼이 주인이 되면 분열이라는 재앙을 피할 수 없나니....
좀 다른 각도의 아이러니인데요.
영화 컨텍트 원작자 테드 창의 소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탑을 위로 위로 쌓아 올렸는데 몇백년 후에 정말 하늘 끝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거대한 반원을 그려 도로 지상에 도착한 거지요.
추상적 개념은 결국 신체로 귀환?
어떤 철학적 물음의 의미도 그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개념체게가 이용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경험적 문제인데, 일반적으로는 인지과학, 특별히 인지의미론이 떠맡아야 할 문제이다.
철학자의 개념체계는 다른 사람의 개념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접근 가능하지 않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개념체계 속에서만 철학적 질문은 가능하다.
선험적 개념에 근거한 질문은 그 자체가 이미 결론을 통제한 것이다.
철학을 통한 인간의 이해, 철학의 탐구 방식은 변화해야 한다.
제10장 시간
우리는 시간을 개념화하고 사유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개념체계의 일부인 무의식이며 자동적으로 사용되는 관습적인 시간 개념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시간을 재는 도구, 즉 시계와 사건의 비교로 파악된다.
사건은 시간량으로 시계를 통해 측정된다.
우리의 몸에도 생체 시계가 있다. 초당 40번의 전자파가 두뇌에서 발생한다.
이 파는 몸의 리듬을 통제한다.
이로써 우리는 시간 조절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건드르이 비교 근거가 되는 반복적인 사건들이 있다.
(계절, 밤낮, 밀물 썰물....)
우리의 실제적 시간 경험은 우리의 실제적 사건 경험에 상대적이다.
시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이해는 운동, 공간, 사건과 같은 다른 개념들과 관계가 있다.
시간은 방향성이 있고(전후), 공간적으로 배치되기도 하고(가깝거나 먼 시간),
선형적 물질(흐름, 강물)로, 그릇으로, 위치로, 돈으로 개념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을 신체화된 은유와 환유로 개념화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사건들과 독립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인지적 관점에서 볼 때, 사건과 운동은 시간보다 더 기본적이다.
사건과 운동은 은유적 개념이 아니지만
시간은 독립적으로 사유가능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와 인지의 기본 토대가 은유인 걸 의식해야 과학적 사고가 가능하다.
은유는 추론을 보존하고 추론들이 비은유적인 결과를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은유가 적절한지 시험해야 한다.
(메타언어 분석, 프레임 분석, 개념조작 분석, 범주 분석, 모형 분석...등)
은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때 오류가 발생한다.
(자연화된 개념과 신화화된 관념을 의심해야 함.)
산책길에 보니 어떤 가게 앞에 이런 글이 써있었어요.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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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제 11장 사건과 원인
전통적으로
사유는 실체-성질 구도에서 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고전철학이 제기하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존재론적인 문제.....
반면 사건은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 남자와 연애한 구체적인 경험, 즉 사고친 거는
순간적인 것, 특수한 것, 덧없는 것이지만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이냐....는 당당히 철학적 사유의 주제가 되는 거지요.
실재적이라는 건 지속적이고 영원한 것과 동일시 됩니다.
사건은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을 갖습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사건과 원인을
인간의 개념, 인간 생물학에서 발생하는 개념으로 봅니다.
마음과 무관한 객관적인 원인이 있다는 식의 논리
그리고 순수하게 주관적이고 역사적이고 우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인과개념,
이 둘 다를 부정하고
제 3의 길 원인과 사건에 대한 체험주의적 접근방식을 따릅니다.
근데 꽤 지겹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역자주가 어마어마하게 달려야 할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개도 안 달렸네요.
읽다보면 몽롱해집니다.
급기야 레이코프는 외모에 대한 불만까지....
언어학자가 뻐꾸기 너무 못 날리시네...
그놈의 체크남방까지 싫어졌습니다...
뭐, 그랬다고 칩시다.
아무튼 우리는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그래서 11장의 결론, 훅 쳐서 말하면 바로 이것.
인과 이론의 수수께기, 상이한 여러 이론들을 동일한 한 가지의 이론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맨 처음의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으로서 본질은 무엇인가?
자연철학자들은
물이다, 불이다, 오원소다, 원자다, 종자다, 숫자다..... 등을 말하고
그리스철학자들은 형상과 질료를 말하고
동아시에서는 리와 기와 도를
힌두철학에서는 브라만과 아트만....
셈족들은 그분의 말씀....
이성, 절대정신, 구조, 물질.....
어떤 궁극의 실재라고 여겨지는 것은
모든 것의 본질이기에 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一元論의 그 元은 原因의 原이 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건
결국 환원주의에 대한 반기랄까....
은유에서 출발한 언어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서구철학은 그 함정 안에서 구축되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애를 씁니다.
(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 환원주의적) 단일 인과 관계는 그 철학을 전개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인과 개념들 가운데서
그들이 생각건대 유일하게 올바른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이 세상의 유일한 객관적 존재를 그것의 속성이라고 단정내린다.
마음과 무관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단일의 논리는 없다.
상황은 그보다 더 복합적이다.
인과관계는 다가적(多價的)이다.
즉 그 개념은 행위성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확장물이 있는, 전체적인 방사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심에는 인간 행위가 있다. 인간 행위는 비은유적이지만 그 행위는 은유적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여러 차원의 다양한 일원론이 발생한다.
각각의 일원론은 장소와 역사에 부응하여 펼쳐진다. 그
러므로 하나의 참된 인과 관계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이 세계에는 결정 요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진리 대응설을 포기하고
신체화된 이해에 근거한 체험주의적 진리 이론을 받아들이면
인과관계에 관해 충분히 의미 있는 견해가 주어질 것이다.
신체화된 실재론은 공약불가능한 두 이론을 동일하게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반상대성 이론과 초끈이론은 통일이론으로 정리는 안 되지만
상대적으로 적용가능한 적정 영역이 있다.
중력과 공간시간 만곡은
<대상 사건-구조> 은유와 <위치 사건- 구조> 은유는
형태-배경 역전에 의해 달라지는 이중체이다.
이들은 상호 배타적인 대안이 아니다.
일상의 개념체계 시각에서 볼 때 둘 다 은유적이며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신체화된 기본층위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일반화는 기본층위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한다.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몸을 갖고 있기에
진리는 적정성의 문제이며 허용의 문제이다.
(진리 참 쉽죠잉...)
만약 우리가 과학적 이론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은유적 개념 구조로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적인 방식과 비과학적인 방식을 포함해서 이 세계를 개념화하는 다중적 방식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과학적 견해들과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일상적 견해를 다 유지할 수 있다.
프랭크 / 레니 에이브러햄슨
뮤지션을 꿈꾸는 직장인 존은 우연한 기회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 ‘SORONPRFBS’의 키보드를 하루 맡게 되고, 그 날 밴드의 상징이자 천재적 재능을 지닌 ‘프랭크’의 눈에 들어 밴드에 합류한다. 그렇게 아일랜드의 어느 숲 속 별장에서 약 1년간의 녹음 합숙에 참여하게 되는 존은 독특한 얼굴의 탈을 쓰고 절대 벗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랭크’에 자극받아 작곡에 눈을 떴다고 자부하는데, 그 모든 과정을 SNS에 올렸던 존 덕에 ‘SORONPRFBS’는 미국에서 열리는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인기라는 시선이 피부로 와 닿는 공간에서 드러난 프랭크의 내면의 불안을 알아채고, 대중의 인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려했던 다른 멤버들의 반발로 무대에는 프랭크와 그의 덕에 꿈을 이룰 기회를 잡은 존, 둘만이 오르게 되는데, 과연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들이 바라던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독특한 인물들과 상황으로 창작자로서의 꿈을 지닌 사람들에게 보편적 진리에 대한 울림을 준다. 자신을 일상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해 목숨처럼 탈을 지키는 ‘프랭크’의 선택은 창작자에게 ‘공간’을 인식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데, 그의 기행이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존은 프랭크가 캔자스, 블러프 출신이라는 정보를 듣고 음울한 동네의 중산층 집안에서 학대받는 어린 시절을 보낸 상처를 통해 얻은 정신병이자 재능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 등장한 프랭크의 집은 영화 초기 그려진 존이 살던 동네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는 단지 절대 음감을 지닌, 남들보다 소리에 더 예민한 존재였던 것이다. 프랭크의 재능이 부럽지만 솔직히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존에게 프랭크의 부모는 우리는 화목하기까지 한 평범한 집안 이라고 말하는데, 그 부분을 보며 평화가 곧 행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생각할 수 없이 꽉 막힌, 생존할 수 없는 공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평범함이 불편하지 않던 존은 영화 첫 장면처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기만 할 뿐, 겪으려 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타인의 음악을 듣고 자신의 작업을 한탄하며 창작욕을 불태우지만, 다른 감각에 대한 체험의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달랐다.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익명 게시판도 같은 탈을 쓰고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는 친구들과 함께 몸을 쓰고 자연을 겪으면서 창작을 해 나간다. 프랭크 무리가 아일랜드로 떠나 자연 속에서 음을 찾고 몸을 단련하는 장면은 흡사 무예를 닦는 장면과도 같은데 가만히 걸으며 흥얼대다 뇌에서 뿅하고 곡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 하나하나를 깨우며 매우 섬세하게 작업하는 장인과도 같은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에게도 무의식으로 존재하던 간신이 있었으니, 바로 대중적인 인기였다. 창작의 기쁨과 밴드 멤버들과의 조화로 한껏 들뜬 그에게 존의 제안은 내면의 간신을 깨웠고 결국 거부하지 못하는데, 내가 꿈꾸던 창작자의 모습을 보이던 프랭크가 존이 말한 SNS 동영상 조회 수에 반응하며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부터 창작자로서 겪을 법한 희노애락이 다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가슴 아팠던 장면이 페스티벌과 맞지 않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흥분한 프랭크에게 존이 ‘지금까지는 관객에게 우리의 음악을 만나려면 마음을 열라고 했지만, 누구나 만날 수 있게 조금만 타협해서 가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하는 부분이다. 이 말은 마법처럼 프랭크가 본질을 잃고 오히려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음악을 만들게 하는데, 창작에서 이 ‘누구나와 만날 수 있는 적당한 타협’처럼 공허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프랭크를 내면의 간신으로부터 지키려했던 클라라 또한 영혼의 짝을 잃을 두려움에 폭력을 행사하다 경찰에 잡혀가고 결국 남은 멤버들까지 떠나려하는 상황에서 존이 유튜브에서 76만 7천 918명이 우리의 영상을 봤기 때문에 공연을 해야 한다고 하자 불안 증세로 지쳐 죽은 듯 누워있던 프랭크가 ’그렇게 많이? 많이도 봤네.‘ 하며 숫자에 반응하는 장면이 슬프면서도 너무 웃겼다. 솔직히...창작자로서 숫자로 치환되는 인기에 누가 의연할 수 있을까 싶은 공감 때문이었다.
<폭력과 성스러움>이라는 책에서 타인과 똑같아 지려는 욕망이 ‘폭력’을 부른다고 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때는 그 폭력의 모습을 타인에 대한 물리적인 충돌과 갈등으로 떠올렸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 모방 욕망이 부르는 폭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의 천재성이 부러워서 프랭크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돈, 루카스)은 자신의 가치와 개성을 잊고 내적 학대를 하게 되는데 프랭크의 가면 속 신상이 궁금하지 않았던 다른 멤버들은 프랭크의 개성을 인정할 뿐 그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있기에 프랭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주기에 생기는 내 자리에 대한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이는 인기에 대한 허상으로 멤버들을 외면한 결과, 홀로 고향으로 돌아 가 더 이상 창작할 수 없는 생기 잃은 프랭크의 모습으로 극화 되어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깨달은 존의 노력으로 다시 만난 멤버들은 처음 보는 프랭크의 민낯을 천천히 알아보며 그가 부르는 참회의 노래를 듣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 준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하는 멤버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환희를, 악기를 다루는 몸으로 보여주며.
흥얼거리며 드넓은 바다를 관찰하던 존의 뒷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 이었다면, 마지막 장면 역시 멤버들이 서로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며 하나가 되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자리를 떠나 혼자 걸어가는 존의 뒷모습이다. 그러나 존 또한 자신의 꿈을 위해 과감히 희생하고 애쓴 과정을 겪었으므로, 아닌 것을 아는 것도 얻는 것이지 잃는 것은 아니므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진정성과 소통하지 못하고 관찰자로서 남아 형이상학적 숫자와 교감하려 했던 존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내 내면의 어떤 욕망인 것 같아서,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돌아보면 분명 다른 즐거움이 있을 거라고, 삶이 곧 기회라고, 나에게도 위로가 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