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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날씨가 많이 풀린 덕분에 덜덜 떨지 않고 손끝에 전해지는 키보드 자판의 감촉을 온전히 느끼며 다시 일주일 만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루마니즘>과 <논리철학논고 읽기>의 겸직 반장 秋男입니다. 

 

지난 주 공지글에는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어요. 

아마 두 세미나의 창립 이래로 가장 뜨거운 관심을 표현해 주신 걸로 기억하는 데, 새로운 댓글이 하나하나 올라올 때마다 찾아 읽어보는 재미가 어찌나 크던지 ..., 

덕분에 여기 공지글과는 꽤나 괴리가 있는 세미나의 실제 모습과 분위기가 잘 전달된 거 같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자, 그럼 다시 세미나의 활기차고 재밌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서 글의 추상적이고 딱딱한 관념 세계로 갑니다. 

 

1) <루마니즘> 

지난 주(1월 13일)에는 영역본 87쪽 둘째 문단(Apart ...)부터 89쪽 첫째 문단(... system)까지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국역본으로 '환산'하면, 183쪽 둘째 문단(불분명한 ...)부터 186쪽 첫째 문단(... 총합이다)까지겠네요. 

읽은 부분을 정리해보면, 

커뮤니케이션은 사회 체계의 외적 경계를 분명하게 그려준다. (사회 체계에 대해 환경을 이루는 것은 비-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다.) 세계는 사회 체계로서 작동상의 폐쇄성을 갖는데, 이는 커뮤니케이션과 비-커뮤니케이션 간의 명확한 구별 가능성이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폐쇄성은 체계 내적인 미규정성(자유)의 산출로 이어진다.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사회의 재생산에 중요한 요인은 더 이상 인구 수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망(網)으로 바뀌었다. 

모든 기능 체계들이 이차 등급 관찰에 적응하였다. 체계와 환경 간의 구별(1차)을 각 체계 내부의 관점(2차)에서 수행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학문, 종교, 법 등이 저마다 다르게 관찰하는 세계이 있을 뿐이며, 이들 복수의 세계를 통합하는 구속력 있는 ‘하나의’ 세계는 더 이상 관찰 불가능하다. (관찰 가능했던) 사물 위주의 세계 개념이, <관찰 불가능한 통일성, 모든 구별들의 통일성의 공식>인 세계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텔레비전)은 세계 사회의 형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공간적 위치를 사소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적인’ 사건들로 변화시켰다. (예 : 9.11 테러) 운동과 속도를 향상시키는 기술적 진보는 경험의 준거를 장소에서 운동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지각과 커뮤니케이션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틀>로서의 세계 개념에 부합한다. 

세계 속의 사건들의 동시성은 지역 시간의 환산 가능성에 의존한다. 세계 시간을 기준으로 지구촌을 시간대로 분할한 것이, 사건과 그 커뮤니케이션이 밤에 일어나든 낮에 일어나든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결과 현존과 부재의 공간적 차이는 의미를 잃고 현재(=현존)과 과거/미래(=부재)의 시간적 차이로 대체된다. (지구 반대편에 일어나는 ‘부재하는’ 사건은,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현존한다.’) 

이러한 구조적 이동들은 세계 개념의 변화를 불러온다. 예전의 개념 : 아름다운 생명체, aggregatio corporum, universitas rerum, 가시적 것과 비가시적 것의 전체, 무한한 절대 공간/시간,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속적인 존재. / 변화된 개념 : 모든 의미적 경험의 전체 지평, 의미를 통한 폐쇄성, 작동들의 상관관계, 모든 형식의 통일성의 상관물, (그 경계선이 항상 변화하는) 미표시 상태, 체계와 환경을 구성하는 것의 총체. 

이번 주에는 영역본 89쪽 둘째 문단(The old ...)부터, 국역본으로 '환산'하면 186쪽 둘째 문단(예전 세계는 ...)부터 강독합니다. 

 

2) <논리철학논고 읽기> 

지난 주(1월 13일)에는 3.25와 3.251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행 방식은 전과 똑같이 이 부분에 대한 제 메모를 읽으면서 관련 내용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하였습니다. 

그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추억에 남기도록 하고, (조금 수정된) 메모만 후기 대신 올리도록 할게요. 

아 참, 우리의 희망, 우리의 낭만, '求새酒'님께서 지난 시간에도 맛 좋고 향 좋은 술 한 병을 선사해주셨어요. 

배 맛 아니, 복숭아 맛이 나는 달콤한 佛眼智였지요. 감사합니다. 

 

<3.25>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Es gibt eine und nur eine vollständige Analyse des Satzes. 

이 명제를 독일어 원어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있고> 또한 오직 하나밖에 없다.’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있다. 즉 가능하다. (3.23에 의해 명제 뜻은 확정/규정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분석은 (또는 명제 뜻의 확정/규정)은 오직 하나만 있다. 

(3.23에서 말한) 명제 뜻의 확정성/규정성Bestimmtheit가 무엇인가? (바로 아래 명제 3.251에서 말한) 명제 뜻을 일정한bestimmt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3.251의 ‘일정한 방식’의 ‘일정한’은 (3.14의 ‘일정한 방식’보다는 차라리) 3.23의 ‘확정성/규정성’과의 연관에서 해석하는 게 나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3.23과 3.251은 둘다 공히 ‘명제 뜻’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래의 3.251에서 우리는 3.14의 ‘일정한 방식’의 의미와 3.251의 ‘일정한 방식’의 그것을 비교해볼 것이다.) 

3.25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에 대한 둘 이상의 완전한 분석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명제를 분석한다’의 의미, 아니 ‘분석하다’의 의미 : 복합체를 그보다 덜 복합적인/그보다 더 단순한 것들로 환원시키는 것. 따라서 명제를 분석하는 일은 일반 명제를 (그보다 덜 복합적이고 더 단순한) 요소 명제들로 환원시키고, 다시 이 요소 명제들을 (그보다 덜 복합적이고 더 단순한) 단순 기호들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하여튼 어떤 명제에 대해 분석 이전보다 분석 이후에 덜 복합적인/더 단순한 요인이 단 하나라도 나오게 된다면, 이는 명제를 분석한 것이다. 

‘명제를 완전히 분석하다’ : 이렇게 복합체를 단순체들로 환원시키는 일을 가능한 한도까지 밀어붙여 복합체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적으로 단순체들만--여기서는 단순 기호들로만-- 남게 되도록 환원시키는 작업.

  3.201은 ‘완전한 분석’의 의미를 알려 준다. 명제를 분석하여 (복합 기호들은 단 하나도 없이) 전적으로 단순 기호들로만 환원시켜 그 명제의 요소들과 관계들을 전부 다 보여주었을 때, 이 명제는 ‘완전하게’ 분석된 것이다.

  이처럼 명제에 대한 완전한 분석이 그 명제를 구성하는 최종적인ultimate 요소인 단순 기호들로만 환원시키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분석 작업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분석 결과는 논리적으로 둘 이상이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불완전한 분석은 둘 이상이 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무한하게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분석은 오직 하나만 가능하다. 가령 어떤 명제가 100개의 단순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명제를 완전히 분석하여 100개의 단순 기호를 모두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할 때, 이렇게 ‘100개의 단순 기호들 및 그 상호 관계’(완전히 분석된 결과)는 과연 둘 이상이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상호 관계는 이미 단순 기호들 안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고, 100개도 100개이지 100과 다른 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명제를 완전히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둘 이상이라는 것은, ‘100개의 단순 기호들 및 1000개의 상호 관계들’과 ‘101개의 단순 기호들 및 1001개의 상호 관계들’과 등등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그 명제가 100개의 단순 기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이 가정은 틀림 없다,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분석하였을 때도 100개만 나올 수 있지 다른 수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 관계는 이미 단순 기호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대상은 어떤 대상들과 결합하여 사태를 형성할 수 있는지는 그 대상의 본성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현실과 언어의 대응 원리에 따라, 단순 기호 역시 어떤 단순 기호들과 결합하여 요소 명제를 형성할 수 있는지는 그 기호에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 결합 가능성의 수는 <유한>하다. 한 대상이 결합할 수 있는 다른 대상들의 수, 한 단순 기호가 결합할 수 있는 다른 단순 기호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명제를 완전히 분석하여 나온 그 ‘상호 관계’의 수도 유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순 기호들의 수도 100개로서 마찬가지로 유한하다. 한 복합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수도 유한하고 그 요소들 간의 관계들의 수도 유한한 것이다. 완전한 분석을 통해 이렇게 요소와 관계의 유한성을 보여주었을 때, 과연 그 분석은 둘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보면, 복합체의 완전한 분석은 하나만 있든지 무한하게 있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할지 모른다. 그 요소와 관계가 모두 유한할 경우에는 오직 하나의 완전한 분석만 가능하다. 그러나 요소와 관계 중 어느 하나라도 무한할 경우에는 완전한 분석의 수는 무한하다. 정말로 무한한가? 그렇지 않다! 완전한 분석은 무한할 수 없다. 그 수가 무한하다면 그것은 완전한 분석이 아니다. 요소가 무한하게 많건 관계가 무한하게 많건, 아니면 둘 다 무한하게 많건, 이런 경우의 복합체에 대해선 완전한 분석이란 도대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도대체 어디까지 분석을 진행해야 복합체를 완전히 분석한 것이 되는가? 그런데 ‘무한성’은 그 ‘어디까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는 한정, 곧 유한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더 엄밀하게 보면, 복합체의 완전한 분석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직 하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로써 복합체의 요소와 관계가 무한하게 많을 수 없다는 것, 그 수는 유한하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 안에 있는 어떤 복합체도 (세계 자체는 무한한 복합체라고 볼 수 있을 테니, 세계는 제외하고) 결국 ‘유한자’이다. 끝까지 분석해 들어가면 유한한 수의 요소들과 유한한 수의 관계들만 그 결과로 드러나는, 그런 유한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존재에 대한 ‘완전한’ 분석이 도대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3.251> 명제는 그 표현하는 바를 일정한,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명제는 분절되어 있다. 

Der Satz drückt auf bestimmte, klar angelbare Weise aus, was er ausdrückt: Der Satz ist artikuliert. 

‘명제’ : 물론 3.12에 의해 정의된 의미에서의 ‘명제 기호’를 말한다. (3.12 이하에서) 명제 기호라고 쓰지 않고 명제라고만 쓸 때는 거의 대부분 ‘명제 기호’를 말한다. 따라서 3.251의 ‘명제’ 또한 ‘명제 기호’의 생략된 표현으로 새겨야 한다. 

‘그 표현하는 바’ : 또는 풀어 직역하면 ‘명제가 표현하는 것’. 3.1, 3.12, 3.13, 3.1431에 따르면, 명제가 표현하는 것은 ‘명제의 뜻’이고 ‘사고’이다. 명제의 뜻과 사고는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사고는 thinking이 아니라 thought이다. 곧 (사고가 행해지고 있는 때의) 현실태(사실)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으로서의) 가능태이다. (3.11에 의해 명제 기호는 ‘가능한 상황, 곧 가능태의 투영’이다.) 

‘일정한 방식으로’ : 3.14를 보면 명제 기호 속에서 낱말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다. 3.251의 표현은 이 3.14의 ‘일정한 방식으로’과 동일한 의미일까? 아니면 표현은 동일하지만 어떤 차이를 갖는 의미일까? 일단 독일어 원어는 둘 다 ‘auf bestimmte (Art und) Weise’로 거의 동일하다. 단순히 두 명제에서 사용된 문자만 비교할 경우에 쉽게 발견되는 차이는 있다. 3.14가 낱말들 간의 <관계 방식>을 말하고 있다면, 3.251은 명제의 뜻의 <표현 방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표현은 더 탐구해야 발견될 더 깊은 차이를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14의 ‘일정한 방식’은 물론 3.143에서 말하는 ‘글씨 또는 인쇄의 통상적인 표현 형식’, 즉 가로 방향 내지 세로 방향으로 일렬로 쓰여 있는 감각적인/시각적인 방식은 절대로 아니다.) 

‘명제 속에서 이름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다.(1)’와 ‘명제는 명제의 뜻을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2)’ (1)의 일정한 방식은 이미 (‘bestimmt’가 지닌 모든 의미에서) ‘확정된/결정된/규정된/정해진’ 방식을 뜻하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이름들이 ‘일정하지 않은/가변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다면, 명제의 뜻은 확정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변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명제의 뜻을 일정한bestimmt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름들 간의 관계 방식이 일정하지 못할 때, 그런 이름들이 과연 하나의 명제를 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명제가 주어져 있다면, 동시에 그 안의 이름들의 일정한 관계 역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명제는 이미 그 관계 방식의 규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3.14를 참조하라. 따라서 (1)과 그 ‘일정한 방식’이 (2)와 그 ‘일정한 방식’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명제의 뜻을 일정한 방식으로, 명료하게 제시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뜻을 단 한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점(또는 그 뜻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할 것 같다. 그렇게 되어야만 이 명제가 속해 있는 앞의 3.25와의 연관성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명제의 뜻이 일정하지 않은 방식/명료하게 제시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명제의 뜻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또는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된 뜻만이 뜻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표현되지 않은 경우에 명제는 하나의 뜻은 물론이요 다수의 뜻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뜻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일정한, 명료하게 제시 가능한 방식’ : 명제의 뜻을 ‘이것이다, 저것이 아니다’ 식으로 확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 식의 애매모호한 방식이 아니라. 

  그런데 (앞의 3.25와 연관하여) 이렇게 명제 뜻을 일정한/명료한 제시가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하려면, 명제를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가? 완전한 분석이 완료되기 이전에는 그렇게 명료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그러한 분석 이전에는 여전히 일정하지 않은/명료하게 제시할 수 없는 방식으로만 명제 뜻이 표현되는가? 거꾸로 명제를 완전히 분석한다 함은 그 뜻을 그렇게 일정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분석한다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완전하게’의 의미를 3.201뿐만 아니라 3.251도 또한 해명해주고 있는 것인가? 

  명제에 대한 완전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명제를 분석하여 획득한 요소들 중 일부가 여전히 단순체의 기호가 아니라 복합체의 기호라는 것이다. 이렇게 분석이 덜 된 기호가 단 하나라도 남게 된다면, 그 명제의 뜻은 여전히 복수의 다양한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명제의 뜻은 확정될 수 없다. 99%의 뜻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1%가 여전히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는, 따라서 명제 전체로 보면 여전히 뜻이 미확정된 그런 명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추론이 옳다면,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그 뜻의 일정한/명료한 제시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명제의 뜻 자체는 (또는 가능한 상황은) (이 뜻도 하나의 상황인 한에서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가지고 있을 법 한데) 그 뜻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를 ‘이름의 의미’(3.203)라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없겠다. 이름의 의미는 대상인데 대상은 현실태이다. (표현은 좀 이상해도) ‘이름의 가능한 대상’은 가능하겠다--간의 일정한 방식의 상호 관계를 함축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 

  (‘이름의 가능한 대상’은 가능하다? 우리는 가능성이 성립하는 차원은 대상/이름에서가 아니라 사실/대상에서라고 앞에서 논한 바 있다. 대상은 영원불멸하고 확고부동한 존재자로서 이 존재 영역에서는 가능성은 하나도 없다. 가능성이 성립한다면, 이는 오직 그 대상들 간의 상호 관계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명제의 뜻을 하나의 가능태라고 본다면, 이 가능태는 ‘가능한 요소들[이름들] 간의 가능한 상호 관계’가 아니라, ‘현실적인 요소들 간의 가능한 상호 관계’로 해석하는 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자들 간의, 역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상호 관계가 아니다. 무조건 절대적으로 있는 그런 존재자들 간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상호 관계이다.) 

  명제는 그 명제의 뜻을 일정한 방식,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뜻 자체는 일정한 방식, 명료한 제시의 방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일까? 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 

  이 명제가 3.25에 딸려 있는 것이라는 점. 두 명제의 관계는? 이게 어려운 문제 같다. 

  둘째 문장은 3.141의 두번째 문장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 의미는? 

  첫째 문장과 둘째 문장의 관계는? 가령 첫째 문장이 주장, 둘째 문장이 근거(분절되어 있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다), 또는 그 반대(그런 방식으로 표현하니까 분절되어 있다). 또는 (3.141처럼) 주장/근거의 관계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등가. 또는 분절의 의미를 더 상세히 밝혀주는/설명하는 표현? 

  첫째-주장/둘째-근거로 볼 수 있는 이유 : 둘째 문장이 이미 3.141에서 제시되어 일종의 증명된 정리 역할을 한다고 봐서. 

 

이번 주(1월 20일)에는 위 두 명제에 대한 보충 메모로 시작하여 3.26 이하로 이어갑니다. 

 

그럼 이제 몇일 안 남은, 즐거운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일시 :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 6시 00분 (<루마니즘>) /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 10시 00분 (<논리철학논고 읽기>)

- 장소 : 수유너머104 1층 좌측 세미나실 (<루마니즘> & <논리철학논고 읽기>)

- 회비 : 한 달에 2만원 (회비를 '한 번' 내시면 '모든' 세미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plateaux1000@hanmail.net (<루마니즘>) / 010-7799-O181 (<논리철학논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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