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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주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 : 13~15장

 

1. (13장) 세계를 놀이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관점과 대결하는 것인가?

(p265) 차라투스트는 '세상은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라고 말했다.

(p267) 헤라클레이토스의 '세상이 놀고 있다'고 말했다.

(목적론 거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주사위놀이에서 놀이의 첫번째 성격이 나타난다. 바로 목적론의 거부.

노는데 신성한 목적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성한 목적을 찾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노는 게 아니다.

(도덕론 거부) 아낙시만드로스는 말한다. '태어남은 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으로써 처벌되는 것이다.', '생성이야말로 저주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반복에서 어떤 우울함도 느끼지 않았고, 하나의 놀이처럼 느껴졌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은 저토론 많은 다양성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저기에 무슨 도덕적 책임이 거론될 수 있는가?

(유희의 충동) "다른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은 자만의 욕구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깨어나는 유희의 충동이다.(그리스 비극시대의 철학]"

헤라클레이토스식으로 보자면 세계를 완전히 충족시킬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단히 오만한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찾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더이상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놀이는 '자만'을 모른다. 놀이는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2. (13장) 차라투스트라에게 필연의 억압성우연의 파편성을 해결할 방책이 있을까?

우연이 놀이가 아니라 파편이 되는 / 필연이 운명이 아니라 억압이 되는 / 배치란 무엇인가?

필연(주기.법칙)과 우연(혼돈.우발성)은 어떤 관계에 있나? 생성과 존재(법칙)은 어떤 관계에 있나?

(p273)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와 땅에 떨어진 주사위. (우연의 하늘 / 법칙의 땅)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는 우연을 나타낸다. 하늘에는 우연을 구속할 어떤 이성의 거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법칙이다. 땅에 떨어진 주사위는 새로운 조합을 구성한다.

법칙은 생성 속에서, 생성을 통해서 존재한다. (*법칙이란 우연(생성) 속에 존재한다.)

필연의 법칙이 생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 자체가 생성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이다. 

"니체의 주사위놀이에서 주기와 혼돈은 대립적이지 않다."

 

3. (13장) 학자들과 아이들의 주사위놀이는 어떻게 다른가?

(p275) 통계학자들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큰 수를 얻을 때까지만 던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매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새롭다. 

(p276) 학자들의 주사위는 던지는 횟수가 커질수록 던질 필요성이 줄어들지만, 아이들의 주사위는 던질수록 더 던지게 되는 것이다.

학자들의 주사위는 '동일한 법칙'의 확인, 동일성의 반복으로 나타나지만, 아이들이 경우에는 새로움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4. (13장) 난쟁이의 반복과 차라투스트라의 반복은 어떻게 다른가?

(p276) [난쟁이]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주사위를 던져봐라! 그것은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난쟁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반복, 그것은 법칙이면서 동시에 구속이다.

(p277) [차라투스트라]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그런 게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한번! (환영과 수수께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는 실패작이 아닌가?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얼마나 많은 것이 아닞고 가능한가!"

 

5. (13장) 영원회귀의 2차원은 무엇인가? 2차원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어떤 관계에 있나?

[영원회귀의 세계상 / 세계의 관점] 하나는 자연학적이고 우주론적인 것이다. 니체는 세계를 힘(에너지)의 바다처럼 생각한다. 

영원히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의지 / 우리의 관점] 또다른 차원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를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소멸의 반복 속에 있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6. (14장) 정신의 3가지 변신이란 무엇인가? 낙타의 정신, 사자의 정신, 어린아이의 정신은 어떻게 다른가?

낙타의 정신(복종, 희생)은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드는가? 

사자의 정신(자유, 부정)은 어떻게 사막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드는가? 사자는 낙타, 아이와 어떻게 다른가?

아이의 정신(창조, 긍정, 놀이, 욕망)은 어떻계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가? 어린아이-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자의 정신] (p289) 신과 함께 안락하기보다는 외롭고 굶주리더라도 신 없이 지내는 것, 그때 나의 정신은 사자였다.

                     (p288) "그냥 하고자 한다고?" 용이 받아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이 일체의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따라서 '나는 하고자 한다' 따위의 말은 용납될 수 없다."

[아이의 정신] (p291) 사자의 적수였던 용(신)은 아이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아이의 장남감이 되고 말 것이다.

                     용일 죽일 수 있는 건 사자가 아니라, 아이이다. 아이의 무기는 으르렁거림이 아니라 웃음이다.

                    사자에게 힘든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p292) "모든 어린아이는 어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른도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7. (14장) 니체의 시간성과 니체의 존재론은 어떤 관계에 있나?

- 니체의 시간성 : 시대성 - 반시대성 - 비시대성 (*9장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다)

- 니체의 존재론 : 낙타 - 사자 - 어린아이

 

8. (14장) 긍정에 대한 3가지 오해란 무엇인가? 저 세계에 대한 긍정 / 부정을 모르는 긍정 / 자기보존의 긍정

 

9. (14장) 니체적 긍정-부정은 나귀의 긍정 / 사자의 부정과 어떻게 다른가?

(p296~297) 긍정이란 부정과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긍정] 부정조차 긍정하는 긍정 / 긍정은 자기 안에 부정을 갖는다. (*나귀의 긍정 : 부정을 모르는 긍정)

[니체의 부정] 긍정 안에 있는 부정 / 긍정의 한 단계로서의 부정 (*사자의 부정 : 긍정 밖에 있는 부정, 긍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정)

 

10. (14장. p287~298)

- 어떤 행위가 긍정인지 부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 파괴가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 한번의 생성(긍정)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 생성이 집착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1. (15장) 신의 죽음, 위버멘쉬의 출현과 인간의 죽음은 어떤 관계에 있나? 인간의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p301)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모두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인간에 관한 물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이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욕망할 수 있는가.

(p307)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가르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경멸부터 가르쳤다. 

"너희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더없이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다. 

너희들의 행복이, 너희들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런 때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너희들이 최고이상으로 섬기는 모든 것들, 너희들이 '인간적'이라며 자부심을 갖는 모든 것들.

너희가 그것들을 다시 느낄 때에, 비로소 너희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너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희는 스스로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

 

12. (15장. p305~306) '인간이 19세기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란 무엇인가?

 

13 (15장 p310)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이라고 했다!?

 

14. (15장 p311~312) 헤겔의 역사철학과 다윈의 진화론은 어떤 점에서 동형적인가?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무엇이 문제인가?

- 헤겔의 역사철학이 '역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왔다'고 생각했다면,

- 다윈의 진화론 역시 '자연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해왔다'고 생각했다!

 

15. (15장 p313~314) 헤겔적 의미의 '발전'이나 다윈적 의미의 '진화'와 차라투스트라의 '변신'은 어떻게 다른가?

- 사자는 낙타를 통해서(긍정/부정) 출현한 것이 아니며, 이 둘은 전혀 다른 종이다.

- 어린아이는 사자와 전혀 닮지 않았다(긍정이든, 부정이든)  아이는 사자가 '발전'한 모습이 아니라 '변신'한 것이다.

= 인간이 벌레나 원숭이를 갖고 있다면, 아이는 낙타나 사자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16. (15장) 보다 높은 인간들이 양상은 다르지만 허무주의인 이유는?

이들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란 무엇인가? 이들의 긍정성과 부정성은 무엇인가?

(p314~321) 늙은 예언자 / 두 명의 왕 / 거머리두뇌 연구자(정신의 양심가) / 고약한 마술사 / 마지막 교황(실직한 교황. 외눈박이) 

가장 추악한 인간 /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방랑자)

(p321) 비록 허무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변신의 기본인 '위대한 경멸'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대들이 경멸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도록 한다. ... 그대들은 절망했다 바로 거기에 존경할 만한 점들이 많이 있다."

"순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p326)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 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너에게는 너 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너는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은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 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만 한다. (유고, 1882~1883/4)"

 

17. (15장) 위버멘쉬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어떻게 위버멘쉬-되기를 할 것인가?

(p327)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자기극복)"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임이 무수히 많아야 한다 (지복의 섬)"

(p328) 차라투스트라가 택한 길은 스스로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경험했는지 알 수 있다.

그를 시험하고 유혹했던 많은 악마들과 광대들은 어찌보면 그가 죽여야 했던 그 자신인지도 모른다. 

줄광대를 죽게 한 어릿광대 / 난쟁이 /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 / 보다 높은 인간들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닮은 자신의 분신들을 극복해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는 다시한번 죽음을 통한 변신을 감행했다. 그의 마지막 깨달음은 '연민과 집착'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연민이나 집탁도 없는 말 그대로의 '떠남', 그것이 그의 위버멘쉬로의 변신이었다....

(p329) 위버멘쉬란 '인간을 넘어섬,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런 규정들은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위버멘쉬란 이런 규정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p330) 위버멘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명사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위버멘쉬를 항상 넘어서는 자들로, 넘어섬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자들로 불러야 할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을 유일한 정체성으로 갖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굳이 정체성을 말한다면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만을 정체성으로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내가 되어있는 방식으로 그랬다."(p52)

그래서 나는 위버멘쉬를 동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변신하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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