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의 아나키스트들과 천 개의 아나키즘
아나키즘 세미나 반장 / 꽁꽁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아나키즘은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을 부정할 뿐입니다. 이것은 질서를 무너뜨린 후 대면할 혼란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질서들이 순환하길 원하는 상상력입니다.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혹은 허무당적인 폭력주의로 번역된 것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는 당대 아나키즘에 대한 비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미나에서는 무정부주의라는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나키즘’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나키즘은 어떤 특정한 이론적 틀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천 명의 아나키스트는 천 개의 아나키즘이라는 것입니다.
세미나는 5월부터 지금까지 4개월간 이어졌고, 러시아 크로포트킨, 류스페이, 리스쩡, 스푸,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가네코 후미코, 신채호 등을 공부했습니다. 앞으로는 푸르동, 바쿠닌 등의 조금 더 과격한 아나키스트들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저희 세미나에서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아나키즘은 국가를 부정하지만 사회를 건설한다. 고로 아나키즘은 건설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2. 아나키즘은 과거에 존재했던 협동적 사회를 다시금 꿈꾼다. 그들은 허공 위에 집을 짓고 있지 않다.
3.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열려있는 가능성 중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결정하고 책임지려 한다.
4. 혁명은 언제나 자본가들이나 파시스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점을 뼈아프게 생각한다.
5. 생물의 진화가 여럿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방향으로 나아가듯,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현상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6. 조화는 불화를 기반한다. 이 때야 말로 죽은 평화가 아닌 살아있는 평화를 구현한다.
우리 세미나에서 얻은 성과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서구의 아나키즘과는 또 다른 동아시아 아나키즘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토쿠 슈스이의 제국주의 인식은 "강도", "위정자들", "문이 없는 무인들의 간악함" 등의 도덕적인 차원의 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감성 혹은 동양적 지사전통에서 제국주의를 이렇게 "간악한 정치체제"로 인식하고 저항했다는 것은 주의깊게 볼 일이었습니다. 이는 류스페이, 리스쩡, 스푸 같은 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아니었지만 한설야 같은 사람도 유교의 신의를 사회주의의 신의로 이해하고 접속했다는 최근의 논의도 있습니다.
모든 사상이 그렇듯 한번에 외부의 것이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것과 맞닿는 순간에 "굴절"되면서 수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습득한 것이 우리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기쁨입니다. 맹자나 공자 등의 동양고전을 인용하며 아나키즘을 이해했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글은 매력적입니다.
근 4개월간 15명 정도의 대형세미나를 유지하다가 이제 사람들이 조금 줄기 시작해서 6-7명 정도 규모가 될 듯 합니다. 이는 더 본격적으로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전망합니다.
시간: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장소: 생명문화연구소
반장: 꽁꽁이 / michidoro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