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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세미나] 판단력비판 읽기를 시작합니다.

종윤 2011.08.22 00:32 조회 수 : 5297

[칸트세미나] 드!디!어! 판단력비판을 읽습니다. / 8. 25(목) 10시

 

 

 

실천이성비판과 함께한 지난 석 달간의 여정을 마치고

8월 25일부터는 『판단력비판』(아카넷)을 읽습니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서 이론과 실천, 眞과 善의 문제를 다뤘다면

판단력비판에서는 아름다움과 정서, 그리고 예술과 자연목적을 논의합니다.

 

앞서 두 비판서에서 논의한 존재와 당위, 인식과 실천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술작품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미적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자연의 합목적성이란?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로부터 출발하는 많은 고민과 질문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적 인식의 보편성과 미학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 그리고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판단력비판』은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판단력비판을 함께 읽어 보아요~! 끼야야아아~^^

 

칸트세미나는 관심있는 새로운 구성원들의 접속을 환영합니다.

 

(마지막 무더위를 칸트와 함께 날려보아요~^^ 언제나 환영~ 환영~ㅋㅋ)

- 참여문의 :ㅇㅣㅣ- 957ㅣ -ㅣ5ㅇ9 (언제나 상큼(!?)하고 친절(>_<)하신 유심반장님)

 

본격적인 판단력비판 텍스트 독해에 앞서 역자해제와 입문서를 함께 읽습니다.

이번주 발제는

『판단력비판』해제

Ⅰ. 『판단력비판』의 저술 및 출판

Ⅱ. 『판단력비판』의 구성

Ⅲ. 『판단력비판』의 주요 내용

1. 서론

~p31까지 타락천사님

 

2. 미감적 판단력 비판

1)미감적 판단력의 분석학

(1)미의 분석학

(2)숭고의 분석학

(3)순수한 미감적 판단의 연역

(4)예술과 천재

~p53까지 산책자님

 

2)미감적 판단력의 변증학

3)취미의 방법론

3.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1)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학

2)목적론적 판단력의 변증학

3)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

2. 미감적 판단력 비판

1)미감적 판단력의 분석학

(1)미의 분석학

(2)숭고의 분석학

(3)순수한 미감적 판단의 연역

(4)예술과 천재

~p72 종윤입니다.

 

 

이하, 8월 18일 종윤의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서양 근대 철학 - 칸트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인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긍정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서양의 모든 학파를 불문한 철학적 탐구의 부동의 중심, 아르키메데스의 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호는 수천 년의 세월동안 많은 이들에게 의미심장한 물음이 되었다. 칸트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철학이 해결해야 할 단 하나의 근본물음으로 정리한다. 인간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는가? 칸트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세 가지로 세분한다.

Ⅰ.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론적 인식대상이 되는 현상세계의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한 논의.

Ⅱ.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학적 물음.

Ⅲ.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론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종교적인 물음.

칸트는 첫 번째 질문을 통해 이론적 인식대상인 존재를 다루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윤리적, 종교적 차원의 질문을 통해 실천적 행위의 이념인 당위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인간에게 존재와 당위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면 이 두 영역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이다. 존재와 당위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무관하게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이 두 영역을 오고가며 통일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 둘을 매개하는 것을 ‘느낌’ 또는 ‘정서’라고 칭하며 따라서 네 번째 물음도 성립할 수 있다.

Ⅳ. 인간은 무엇을 느끼는가?

☞아름다움과 예술미에 대한 물음.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곧 자연과 자유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자연이 객관화된 현상세계이고 자유가 객관화되지 않은 주체의 활동성을 의미하므로 다시 객관적 현상과 주관적 본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연과 자유, 객관과 주관의 형식적 일치관계를 ‘합목적성’으로, 그 합치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미감적 쾌감’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예술과 자연의 합목적성을 논하는 『판단력 비판』은 이론적 인식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자연을 다루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적 행위근거로서의 주체의 자유를 논하는 『실천이성비판』에 이어 그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진과 선과 미, 이론과 실천과 정서, 과학과 도덕과 예술을 서로 연관지어 논의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철학은 하나의 통일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 선험적 인식과 현상의 규정성

서양의 근대는 자연의 객관적 법칙성이란 무엇인가,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해명하고자 한 시기이다. 자연법칙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등의 경험이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인식의 가능 근거 및 필연성과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험만으로 대답할 수 없는 철학적 물음이 제기된다. 즉, ‘인간 주관이 객관세계에 대해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을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합리론자들은 본유관념을 통해 객관세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의 기반을 정초하고자 시도한다. 본유관념은 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우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의 빛을 통해 세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그 보편적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 본유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이성적 진리는 세계 자체에 필연적인 신적 진리이며 세계에 대한 인간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해준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공통근거로서 신을 전제하는 합리론자들은 중세 스콜라철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경험론자로부터 전통신학을 근거없이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경험론자들은 본유관념이라는 신학적 전제를 거부하고 인간 영혼을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석판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오직 객관세계에 대한 감각경험과 그로부터의 귀납적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험론자들의 답변은 외부세계에 대해 객관적인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으로의 길을 예비한다.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인식은 우연적이고 개연적이기 때문에 이성이 요구하는 필연성이나 보편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 철학이 다루는 인식론의 아포리아가 있다.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신으로부터의 부여받은 본유관념을 전제하는 합리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독단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세계를 경험으로만 설명하고자 할 경우에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회의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근대과학이 이루어놓은 수학적/물리학적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합리주의적 독단론과 경험주의적 회의론도 아닌 제 3의 길은 없는 것일까?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칸트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근대철학의 근본문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적 인식이면서도 단지 세계로부터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설정된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칸트적 해결책, 칸트의 인식론적 혁신의 핵심은 선험적 종합인식의 기원을 신이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인식주체인 인간 자신에서 구하는데 있다. 인간은 인식주체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틀(형식)에 따라 세계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인식대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그 형식에 따라 보여지고 이해되고 해석되기에 그 형식은 인식된 대상세계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 즉, 주관의 인식형식이 곧 인식된 대상세계의 존재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형식은 상호주관적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인간 모두가 공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세계를 그렇게 보고 사유할 수밖에 없는 틀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틀은 경험에 앞선 선험적인 것이지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선험적 틀은 어떤 틀이고 어떤 방식으로 그 틀을 밝혀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직관능력으로서의 감성과 사유능력으로서의 오성이라는 양 측면을 가진다. 직관은 대상을 보고 듣는 등 다섯 개의 감각 기관에 따라 발생하는 감각 또는 지각의 활동이며, 사유는 직관된 표상들을 비교/종합하여 개념을 형성하거나 개념에 따라 판단하는 사유작용을 뜻한다. 먼저, 직관에는 감각된 내용 외에 감각내용을 정리하는 형식이 요구된다. 외적 감각내용을 정리할 때 요구되는 형식이 공간이며, 내적 감각내용을 정리하는 형식이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직관하든지 항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의 것으로 직관하게 되는데, 이 시/공간의 형식은 객관적 사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인식주관의 직관형식이다. 어떤 경험도 시간, 공간이란 형식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리고 그 형식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사유는 능동적으로 표상을 떠올려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떤 양과 질을 가진다는 것, 속성을 지닌 실체라는 것, 특정한 원인의 결과로서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을 미리 전제한다. 대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그 대상의 존재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며 미리 짜여진 개념 틀에 따라 사유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범주라고 하며 직관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틀이다. 그리고 직관형식(내적 직관형식으로서의 시간)과 사유형식(범주)는 선험적 도식에 의해 후자가 전자를 규정하는 관계를 맺게 된다.

정리하면,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 우리가 직관하는 현상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으로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그 기원이 신도, 세계도 아니며 바로 인식주체인 인간 자신이다. 인간 자신에 기원을 둔 선험적 인식이 객관적인 대상세계에 대해 보편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바로 선험적 인식의 틀에 따라 질서지워진 현상이기 때문이다. 표상과 대상의 일치관계의 기준을 더 이상 객관대상에서 찾지 않고 인식주관 자체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비판철학을 단순히 인간중심주의라거나 인간이성의 절대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가 현상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인간오성 원칙을 결코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대상세계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인식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지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직관형식에 따라 시/공간 안에 질서지워진 것과 사유형식에 따라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만을 직관하고 사유하여 인식할 수 있다. 인간에게 직관형식과 사유형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기에 하나의 공통된 현상세계를 구성해내는 보편적 형식의 인간 심성으로서의 ‘순수 근원적 통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수학적 원리나 순수 이론물리학적 원리도 합리론자들이 말하듯 신적인 절대적 인식/사유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들 역시 인간의 직관형식인 시/공간의 법칙성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타당하다고 여겨지던 자연필연성의 원리들이 오직 인간이 구성하여 직관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그 적용범위에 한계가 그어진다면, 그 현상너머의 물자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직관대상인 현상이 우리 자신의 선험적 원리인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라면, 물자체란 곧 우리의 인식조건에 의해 제약되지 않은 것-무제약자를 말한다. 제약된 현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자연필연성의 인과법칙이라면, 현상너머의 무제약자는 자연필연성을 벗어난 것, 즉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현상과 물자체, 자연필연성과 자유의 관계는 상호배타성과 양립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이율배반에 대한 논의에서 심도있게 다뤄진다.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을 통해 자유와 필연성으로부터 발생한 이율배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연필연성이 지배하는 영역과 자유가 존재하는 영역을 차원이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이원화 전략을 의미한다.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칸트 변증론의 비판철학적 특징은 현상의 자연필연성을 넘어서는 자유를 전통형이상학에서처럼 제 1원인 또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으로 간주하지 않고, 바로 현상 전체를 규정하는 인간 영혼의 본질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상을 인식하는 선험적 원리와 실체성이나 인과성의 원리가 결코 신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이 현상을 보는 틀로서의 인간적 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신에 의해 창조된 현상 속의 한 현상, 즉 신의 시선의 객체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보는 주체로서 자각하게 되었다. 이는 자기 자신을 현상세계속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현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주체로서 자각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현상적 규정성 또는 자연필연성을 넘어선 자유로 자각하게 된다. 칸트는 이 자아를 ‘초월적 자아’라고 부르며, 이 자아의 자유가 바로 ‘초월적 자유’이다. 그리고 이 초월적 자유는 이미 시작된 인간 삶의 과정 중에서 매순간 결단에 의해 새로운 인과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행위의 본질을 의미한다. 누구나 본질적으로 구성된 전체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 자아로서 초월적 자유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현상 너머의 무제약자는 바로 현상을 구성하는 초월적 자아의 자유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인식대상이 아닌 주체로, 즉 대상으로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적 특성들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 자유와 도덕의 이념

『순수이성비판』에서 논의된 초월적 자유, 현상을 구성하는 궁극적 주체로서의 초월적 자기의식 그 자체는 이론적으로 대상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차원에서 자각되는 것이다. 이론적 인식의 최종근거인 초월적 주체의 초월적 자유가 행위주체에게는 ‘실천적 자유’로서 인식되는 것이므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하나임을 의미하게 된다. 『실천이성비판』은 현상초월적인 자아의 자유를 기반으로 인간 행위의 도덕적 기준과 도덕적 이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합당하게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 모든 현상적 제약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규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법칙은 자유인으로서 의지규정을 하라는 당위성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의지를 오직 이성의 자율성에 따라 규정해야 하며, 자연의 인과율에 따른 현상적 요인들, 예를 들어 나의 사적인 욕구나 경향성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지규정의 주체는 보편적인 초월적 자아로서 사유해야 하므로 경험적이고 사적인 요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지를 결정해야 한다. 보편적 관점에서 사유가 이루어졌는가, 주체의 의지규정이 사적 특수성을 넘어섰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원칙을 칸트는 제시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일반적 법칙부여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초월적 자아로 자각한다는 것은 개체적 자아 안에 내재된 보편적 본질의 자각을 의미하므로, 이는 곧 현상적으로 나와 구별되는 타자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초월적 자아임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초월적 자아로서 행위한다는 것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 그를 자연의 인과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현상적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현상초월적 자아, 즉 자유로운 인격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칸트 도덕철학의 또 다른 원칙이 이 지점에서 도출될 수 있다. ‘타인에 대해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현상적 차원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초월적 이성의 관점에서 사유하여 보편화 가능한 규칙만을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이지만, 칸트의 비판철학 체계가 도덕의 절대화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덕적 심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가’라는 물음에 칸트는 도덕 자체가 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선은 아니라고 답한다. 칸트에 있어서 최고선이란 덕과 복의 결합, 다시 말해 이성적 도덕과 감성적 행복의 결합이다. 이는 덕과 복이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이성의 정언명령에 따르는 도덕의지를 통해 주관적 감성 자체가 도덕적 감정으로 바뀌어야 하며, 나아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덕에 상응하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현실 자체가 도덕적 인격들의 모임인 도덕적 현실로 변화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적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최고선이 실현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덕있는 자가 오히려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하고, 덕이 없는 자가 자기이익에 충실하여 더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기도 한다.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칸트는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최고선, 즉 덕과 복의 종합적 결합이 실현되려면 일단 각자의 도덕성이 완성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그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생의 유한한 삶만으로는 도덕성의 완성이 충분하게 실현될 수 없다. 인간 영혼이 무한한 시간을 살면서 도덕적이고자 노력하는 조건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영원불멸은 도덕적 이성이 최고선을 추구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최고선은 단지 도덕성의 완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복이 주어져야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나의 도덕적 심성뿐 아니라 현상계의 일원으로서의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감성, 개인적 욕망과 경향성까지도 완전히 도덕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덕에 상응하는 복의 향유가 실제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완전한 도덕화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는 바로 이성과 감성, 개인과 전체 모두를 포괄하는 절대적인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신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성은 신을 요청한다. 칸트에게 자유가 도덕적 인간의 본질이라면 그 자유의 실현조건으로서의 도덕은 궁극적으로 최고선을 지향하며, 그 최고선의 실현 가능조건이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 자연과 자유의 조화

『판단력비판』은 자연(인과필연성)/자유, 현상/물자체(무제약자), 객체/주체, 인식/실천의 두 영역을 매개하는 우리의 반성적 판단력을 고찰한다. 여기서 반성적 판단력은 일반원리에 따라 구체적인 개별사태를 규정하는 이론적 인식에서의 판단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주어진 개별사태를 반성함으로써 일반원리를 찾아가나는 판단이다. 즉, 규정적 판단에서는 구체적 자연이 기계적 인과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현상으로 객관화되는데 반해, 반성적 판단에서 자연은 객관적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주관적으로 반성될 뿐이다. 한편, 한 개체의 현실성의 근거를 인과필연성의 현상계가 아니라 이념적 차원에서 구할 때 현상 개체가 그 이념이나 목적에 합치할 경우 이것을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합목적성은 대상 구성적인 원리가 아니라 대상을 반성하기 위한 반성적 원리라는 점에서 주관적이며,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는 주관적인 대상 반성의 원리로서 ‘주관적 합목적성’이다. 칸트는 광의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대상형식과 주관적 능력의 합치에서 오는 쾌감에 근거한 미감적 판단의 주관적 합목적성과 대상형식과 목적의 합치인 객관적 합목적성으로 구분한다.

칸트에게 자연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미감적 판단은 규정적 판단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이다. 미감적 판단은 이성 또는 오성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예술품이 불러일으키는 미적 쾌감, 즉 감정에 근거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쾌감에 의거해 판단하는 능력’ 혹은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을 ‘취미’라고 부르고 이러한 쾌감에 근거한 미감적 판단을 ‘취미판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취미판단은 사적인 욕구 및 경향성으로부터 독립된, 관조적인 무관심한 판단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즉, 인식차원의 자연법칙이나 실천차원의 도덕원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에 있어서도 사적 차별성을 넘어서는 인간 공통의 보편적 구조-‘공통감’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이 공통감, 보편적일 수 있는 미적 쾌감의 근거는 표상되는 대상에 대한 주관의 인식 능력들간의 유동적 조화관계(주관적 합목적성)와 특정한 목적 내용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합목적성(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그리고 조화관계를 이루는 주관의 인식능력이란 대상을 현시하는 능력으로서의 구상력과 다양한 대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으로서의 오성을 의미하며 두 형식이 자유로운 유동과 조화의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끼면서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 구상력의 한계로 인해 단번에 현시될 수 없는 무한히 큰 것 또는 무한히 작은 것을 접할 경우, 우리는 구상력형식과 오성형식의 유동적 합치가 아니라 오히려 이의 절대적 불일치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불쾌는 구상력의 한계로 인해 주어지는 무한을 직관하거나 표상할 수는 없지만 이성의 이념에 따라 무한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불일치이다. 그러나 이성은 대상 앞에서의 무한이 자신 안의 것임을 자각하면서 불쾌는 점차 쾌로 바뀌게 된다. 한계상황의 불쾌감으로부터 회복되는 쾌감이 바로 숭고의 느낌이다. 아름다움이든 숭고함이든 미감적 쾌감은 우리의 인식능력들 간의 유동에서 발생하는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느낌이다. 그것은 대상형식 또는 인식형식과 관계된 것이기에 대상의 특정한 내용에 따라 규정될 수 없으며, 또한 그들 형식간의 자유로운 유동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에 추상적 규칙이나 원리로 일반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없다.

미감적 판단에서의 주관적 합목적성이 대상형식과 주관적 인식능력의 합치를 뜻한다면,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판단에 있어서의 객관적 합목적성은 자연 자체의 자기목적성을 의미한다. 이 객관적 합목적성은 외적 합목적성과 내적 합목적성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다시 인간의 목적에 대한 유용성과 다른 자연의 요소들에 대한 유익성을 기준으로 유용성의 합목적성과 유익성의 합목적성으로 구분된다. 한편으로 내적 합목적성은 자연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질 때의 합목적성이다. 자연이 목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원을 자연의 기계적 조직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념적 목적이 현실화된 결과로서 간주함으로서 가능하다. 자연의 궁극적인 내적 합목적성은 자연이 단순히 원인의 결과로 간주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 스스로가 결과인 동시에 그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으로 간주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같이 자연물 그 자체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인 것을 칸트는 자연목적이라고 하며 이 때, 자연은 그 자체 안에 변화와 생성의 힘을 지니며, 구체적 자연물은 그와 같은 내적 생성력의 자기발현결과로 이해된다. 칸트는 목적론적 판단력 분석을 통해 자연 안에는 자기형성의 힘을 가진 유기체로서의 자연목적이 존재하며, 이러한 자연에 대해서는 오성의 인과론적 자연필연성의 기계론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자연목적으로서의 자연은 더 이상 오성원칙에 지배받는 자연필연성에 따른 기계론적 자연, 인간 자아에 의해 대상화된 객관이 아니라 주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즉, 객관화되어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자아와 마찬가지로 현상초월적 주체 또는 자유로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기계적 인과성을 벗어난 무제약자로서 확인된 인간 주체의 자유가 자연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이 된다. 이는 오성적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자연의 생명력과 활동성을 자연의 현상초월적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며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이원론적 도식을 벗어나 현상과 물자체, 자연과 자유, 객관과 주관을 하나로 이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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