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 니체주의자에게도 공동체는 가능한가? (2)

이진경

 

2. 니체주의적 공동체는 가능한가?

니체가 보기에 공동체란 무리짓기를 좋아하는 천한 자들의 욕구의 소산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분석하는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 그는 “‘상호성을 형성하려는 의지, 무리를 형성하려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집회‘를 하려는 의지”를 삶의 고통에서 생겨난 불쾌감을 잊기 위한 ’이웃사랑‘의 ’작은 즐거움‘과 하나로 묶어 비판한다. 이처럼 “무리를 이루는 것은 우울증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진보이며 승리이다....모든 병자나 병약자는 숨 막힐듯한 불쾌감이나 허약한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갈망에서 본능적으로 무리조직을 추구한다.”4) 공동체란 이 병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무리조직의 일종이다.

 

정말 그럴까? 나는 니체의 사유방법에 대해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책을 쓰는 그의 속도와 리듬으로 인해, 근본적으로는 그의 반시대적 사유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그 자신의 사유방법에서 벗어난 판단이나 비판 또한 적지 않다고 본다. 가령 마틴 버날의 유명한 책에 따르면 니체 또한 아주 강하게 반복하고 있는 그리스 예찬은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중반 이후 출현한 유럽의 ‘그리스주의’의 소산이고, 헬레니즘 문화의 이집트적이고 아프리카적인 기원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며 성립된 것이다.5) 로제 폴 드르와의 문헌학적 연구에 따르면, ‘허무에의 의지’를 요체로 하는 그의 불교 비판은 불교철학에 대한 오해와 무지의 산물이다.6) 다른 분석 또한 그렇지만, 공동체에 대한 그의 분석은 니체 자신이 금욕주의 분석에 사용한 ‘의학적·생리학적 분석’이라고 말한 방법에 따라 좀더 차분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7)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현존하는 힘의 분포를 변형시켜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좀더 강한 힘을 갖는 신체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이는 니체 자신의 말로 다시 쓰면, 그 자체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작용이다. 이는 니체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무리조직을 형성하는 것은 “공동체의 힘에 대한 자각”을 동반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공동체의 번영에 대한 쾌감으로 인해 개개인이 자신에 대한 불만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공동체적 연대의 쾌감을 통해 개개인의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말일 것이다.

 

AS7.jpg그러나 이는 유기체를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치’라는 의미에서 individual이라고 보았던 19세기 생물학의 소산이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진화’에 대한 연구 이후 잘 알려진 것처럼8) 모든 생명체는 수많은 박테리아의 군체(群體), 즉 공동체다. 니체가 ‘원숭이와 위버멘쉬(Übermensch) 사이에 걸린 줄’이라고 했던9) 인간 또한 박테리아의 거대한 공동체다.10) 발생요인이 무엇이든 좀더 나은 생존을 위해, 좀더 강한 생명력을 위해 지속성을 얻은 생명체고, 그 자체가 힘의 고양을 향한 힘에의 의지의 산물이다. ‘개인’이란 자신의 ‘번영’을 위해 개개 세포의 ‘고유한’ 불만을 종종 무시하기도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공동체는 어떤 것도 좀더 강한 힘을 향한 ‘힘에의 의지’의 소산이다. 니체는 “강자들은 서로 흩어지려 하며, 약자들은 서로 모이려” 한다고 하지만,11) 약자들도 모이고 강자들도 모인다. 약자든 강자든 더 큰 힘을 향한 ‘힘에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강자들이 모이는 양상과 약자들이 모이는 양상의 차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생리학적 관점에서 굳이 대비하지만 방금 인용한 니체의 말은 오히려 반대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병약자는 무리조직을, 공동체를, 많은 이들의 '집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과 함께 있는 것은, 낯선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신체적으로나 신경학적으로나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남들과 만나기 힘들어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용력(capasity), 즉 능력이 작아서 모이며 함께 할 이질성의 폭이 작은 것이다. 가령 독재정권이 이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능력이 작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약자는 대개 '고립'을 원하며 외로워도 많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질적인 것,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 만큼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니체.jpg니체 말대로 “강자들은 서로 흩어지고 약자들은 서로 모이려 한다”고 한다면, 이는 단지 공간상의 거리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강자들의 흩어짐이란 아무리 가까이 모여 있어도 ‘흩어지려는’ 성향이다. 즉 강자들은 자신의 특이성을 잃지 않기에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축소될 수 없는 특이적 거리를 유지한다. 특이성 간의 거리, 그게 강자들의 흩어짐이다. 약자들은 특이성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쉽게 ‘모이며’, 그런 의미에서만 모이는 게 어렵지 않다. 약자들의 모임이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리지어’ 있음이다. 평균적이고 평범하기에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실은 같은 이들, 그들이 약자인 것이다. 언제나 '여론'이라는 지배적 견해를 나누어 갖고 있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도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여 있음이다. 그들은 모이지 않아도 무리지어 있는 이들이다.

 

 

 

 

 

 

4)니체, 「도덕의 계보」, <<니체전집 14: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역 책세상, 2002, 505쪽.

5)마틴 버날, <<블랙 아테나>>, 1, 오흥식 역, 소나무, 2006.

6)로제 폴 드르와, <<철학자들과 붓다>>, 송태효/신용호 역, 심산, 2006.

7)<<도덕의 계보>> 제1논문은 어원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씌여졌다. 그러나 어원학적 방법은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통념을 보여줄 뿐이며, 그런 통념의 정당성은 증명될 수 없다. 더구나 근대인들의 통념을 강하게 비판하는 니체의 관점에 따르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지 정당화의 이유는 될 수 없다. 반면 제1논문의 말미에 급하게 추가한 주에서 그는 어원학적 비판과 달리 의학적-생리학적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 논문이 다 씌여지고 난 뒤에 ‘아차’하고 덧붙인 주로 보이는데, 후자의 방법이야말로 니체적 사유에 부합한다. 그래서 이후 2, 3논문에서 어원학적 방법은 사라지고, 의학적-생리학적 방법이 두드러지게 사용된다.

8)마굴리스/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 황현숙 역, 지호, 1999.

9)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2000, 20쪽.

10)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휴머니스트, 2011.

11)니체, 「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506쪽.

 

*이어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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