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1)

Edie 2017.09.24 14:21 조회 수 : 3087

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 니체주의자에게도 공동체는 가능한가? (1)

이진경

 

1. <디 벨레>, 액체적 공동체의 힘

 

전체주의라는 혐의를 씌워 공동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쉽고도 흔한 일이다. 개인들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려는 것이 공동체인 한, 공동체는 정의상 전체주의의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또한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 개인의 의지 또한 자신을 구성하는 기관이나 세포들에 대해 행사하는 전체주의적 지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자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자다. 개인이란 유기체는 어떤 ‘공동체’보다도 더 강력하고 획일적인 공동체다.1) 그렇기에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던지는 흔한 공동체 비판은 너무 안이하고 너무 피상적이다.

공동체가 갖는 힘과 ‘유용성’에 대한 통찰 없이 행해지는 공동체 비판은 사실 대체로 피상성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게 전체주의의 위험이 있음에도, 자신의 ‘개인적’ 의지가 잠식될 것이 분명함에도 사람들이 반복하여 공동체를 만들려 하고, 또 공동체를 지속하려는 이유에 시선이 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판은 공동체에 대해서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구 던지는 돌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니스 간첼의 영화 <디 벨레(Die Welle)>는 공동체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자신들이, 심지어 그 실험을 주도했던 교사 라이너마저도 그렇게 되리라고 누구도 예상 못한 상태로 휘말려 들어갔던 강력한 힘이 공동체에 존재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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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인 라이너는 ‘독재(Autokratie)’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 파시즘의 재발가능성을 웃어넘기려는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수업을 하자며 클래스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조직한다. ‘디 벨레’라는 이름의 공동체, 그것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왕따였던 팀에겐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돕고 구해주는 동료들과의 새로운 세계를 뜻했고, ‘산다’ 싶게 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동료들의 개인주의로 인해 단 한 번도 뜻대로 연습 한 번 못했던 연극연출자 데니스에게 공동체란 합심하여 연극연습을 시작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였다. 개인플레이로 매번 경기를 망치던 수구팀에게 공동체는 팀플레이가 가능하게 만들어준 비약의 계기였다. 그렇기에 모두들 마치 광기에 휘말린 듯 ‘디 벨레’라는 공동체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력한 힘을 만들어낸 공동체가, 단합을 위해, 좀더 강력한 힘을 위해, 자신의 지속을 위해, 다른 의견을 가진 자, 다르게 행동하는 자를 배제하고 그에 대해 폭력을, 자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한다. 이러한 힘은 ‘독재자’의 역할을 맡았던 아나키스트 교사 라이너마저 휘어잡고, 그의 통제를 벗어나서 작동하며, 급기야 독재자를 초과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사실 이것이 전체주의와 다른 파시즘의 힘이다. 다시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빌면, 몰적인(molar) 전체성의 권력을 가동시키는 고체적인 전체주의와 달리, 이웃에서 이웃으로 분자적 감염에 의해 형성되고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액체적인 파시즘의 고유한 힘은 공동체가 갖는 이 구성적이고 긍정적인 힘에서, 그것의 유용성에서 나온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유용하고 생산적이기에 더욱 강력한 권력, 그것이 자발적 공동체의 심부(深部)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되면, 더욱 빠르고 더욱 강력한 속도로 죽음을 향해 치달리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 파시즘의 위험이 제거된 공동체는 불가능할까? 공동체에 대해 던져져야 할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시즘의 이유가 되는 요인을 분석적으로 얼른 제거함으로써 ‘안전한 공동체’, ‘위험 없는 공동체’의 지도를 확보했다고 믿는다면, 무력한 공동체로 가거나 아니면 말려든 줄도 모르는 채 파시즘에 말려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도, 파시즘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도 동일하게 내부자들로 하여금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스피노자라면 ‘공통통념(common notion)’이라고 불렀을 공동성이기 때문이다. 개체들을 묶어서 집합적 신체로 만들어주는 것, 그렇기에 그렇게 연결된 신체들을 가깝고 친숙하게 해주며 그렇지 않은 신체들과 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이런 내부성과 반하는 ‘외부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내부성을 요체로 하는 공동체나 공동체주의와 반하여 외부성을 요체로 하는 코뮨이나 코뮨주의를 개념화하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부화의 위험을 피하기는 결코 쉽지 않음 또한 잘 안다. 어떤 공동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성이 강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부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공동체에겐 일종의 ‘운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외부성의 공동체’, 즉 ‘코뮨’이란 자신의 가장 중요한 힘과 스스로 대결하는 역설적인 공동체인 셈이다.

이런 공동체의 힘을 니체라면 ‘무리짓기’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이점에서 니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공동체에 대해 비판하며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니체의 사유가 갖는 힘을 아는 코뮨주의자라면, 공동체에 대한 니체의 이 비판처럼 곤혹스런 것이 없을 것이다. 니체적 사유 안에서 공동체란 불가능한 것인가? 니체주의적 공동체란 불가능한 것인가?

<이어서 계속>

각주

1)들뢰즈/가타리가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를 앞세워 ‘유기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던 것(Deleuze/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196)을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다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동일성(identity)’이 개인의 행동이나 삶을 동일하게 지속하게 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기관이나 세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해야 한다. 하나의 기관을 ‘동일성’의 권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른 ‘기관’(‘기계’라고 바꾸어 써야 정확하지만)으로 바꾸려는 시도, 유기체로부터 기관의 동일성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는 유기체 이하의 수준에서 동일성의 권력과 대결하려는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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