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혹은 기계적 영매에 대하여

이 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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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은 기술적(技術的)인 측면에서 보면 연속셔터로 찍은 사진을 초당 24회 돌려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의 기법을 그림에 적용한 것이란 점에서 영화의 아류 내지 하위범주에 속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영화란 사진을 돌려 만들어진 ‘동영상’이란 점에서 사진의 일종이고, 사진이란 인간이 어떤 대상을 손으로 그리던 것에서 기계가 그리는 것으로 바꾼 것이란 점에서 회화의 아류라고 보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인 생각이다.

어떤 것의 ‘본성’에 다가가기 위해선 그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것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가령 사진과 다른 영화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사진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하듯이, 애니메이션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진으로 촬영한 상이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면서, 살아 있는 것의 움직임을 이미지 안에 담아 넣어 응결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럼으로써 영화는 살아있기에 가변적인 것을 변함없는 영원성의 시간 속에 ‘봉인’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애니메이터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움직이도록 만듦으로써 죽어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애니메이션(animation)’이란 말의 사전적인 뜻 그대로, 죽어 있는 것에 활기를 불어넣고 죽어 있다고 믿는 것을 산자들의 세계로 불러낸다. 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죽은 자들을 불러내어 말하게 하는 기계적 영매, 혹은 영매-기계다.

따라서 아주 비슷해 보임에도, 영화가 살아있는 것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영원성의 상 안에 봉인하는 것과 반대로 허상임이 분명한 어떤 이미지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더욱더 허구적인 것으로 밀고 간다. 그것은 봉인되어도 영원성을 얻지 못하는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고, 살아 움직이는 힘을 가졌을 때조차 살아있음을 자처하지 않는 ‘부재하는 존재’을 창조한다. 이로써 부재하는 세계를, 현행하는 것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그 가능성의 세계로 산 자들의 삶을 유혹한다. 혹은 현행의 세계를 다시 보게 한다.

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 시뮬라크르를 예찬하는 반플라톤적 ‘영혼’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로 불려나왔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죽은 자이기를 그치게 되고, 부재하는 자들이 존재의 평면 위에서 걷게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부재하는 자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을 따라 새로운 존재론적 평면이 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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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Coca-ColaBottles,1962.)

 

인간만이 영혼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게 단지 데카르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구적 사유의 전통은 일상적 삶 속에서 가질 수 있었던 ‘상식’을 반박하며 ‘생각하는 동물’의 자리를 독점한 인간에 대한 헛된 자긍심을 반복하여 상찬해 왔다. 그러나 동물행동학자들의 세심한 관찰은 동물은 생각하지 않으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많은 인간학적 관념들이 허구임을 증명했다. 최근의 연구는 식물들이 눈은 없어도 보고, 코가 없어도 냄새를 맡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령 인간의 눈은 5개의 광수용체를 갖지만, 애기장대 같은 아주 단순한 풀조차 11개의 광수용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애기장대가 인간보다 열등한 ‘시각’을 갖고 있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자생물학은 유전자를 구성하는 뉴클레오티드조차 자기 짝을 알아보는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인식’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생명 없다고 간주되는 분자적인 사물조차 양상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대로 영혼을 갖고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진지하게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애니메이션은 이런 스피노자적 사유의 친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 저 스피노자적 사유와 손잡고, 인간만이 영혼을 갖고 있다는 오래된 착각에 대해 외로운 투쟁을 해왔던 셈이다. 죽어있다고 믿는 것에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근대의 합리적 사고와 더불어 사라진, ‘원시인’의 ‘미개한’ 사유로 조롱받던 ‘애니미즘’이나 ‘애니미티즘’에서 새로운 존재론의 싹을 남몰래, 아니 자신도 몰래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각각의 애니메이션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영혼을 불러내고 어떤 생명을 불어넣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것이라는 의미의 ‘만화영화’라는 믿음과 아이들을 겨냥한 상인의 영혼으로 원시적 생명 이하의 상투적인 ‘소아적’ 생명을 불어넣는 것인지, 아니면 ‘어른’의 통념적인 영혼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놀라운 모험적 생명을 불어넣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어느 것이 죽어있는 것을 불러내는 애니메이션의 ‘본성’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은 일본의 사회운동사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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