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자들의 공동체(이진경)

Edie 2017.08.21 09:40 조회 수 : 2418

무모한 자들의 공동체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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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는 아주 상반되는 두 극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순수하지만 무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무모하고 ‘무섭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공동체 운동을 하려는 이들의 생각이나 의도, 문제의식의 순수함에 대한 호감을 갖지만, 이미 자본과 권력, 개인주의적 태도와 계산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것으로 무얼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런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것이라면 무력한 공상성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뜻하는 것일 게다. 후자의 경우엔 반대로 개인의 욕망이나 의지를 넘어서 집단의 의지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살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거대한 실패의 경험을 충분히 겪었던 과거의 무모하고 무서운 실험을 반복하려는 것이라는 반박을 뜻하는 것 같다. 어느 경우든 공동체나 코뮨이란 지금이라면 무력하거나 기피해야 할 부정적 미래를 불러들이려는 시대착오적 시도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렇다, 나 또한 공동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코뮨주의적 시도들이 순수하고 무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순수함’이란 공동체를 구성해보겠다고 시도하는 이들의 의지나 의도의 깨끗함 같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성하려는 공동체의 이런저런 구체적 조건에서 추상된 잠재성의 ‘순수함’ 같은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시도하려는 이들 모두 자신이 처한 조건 속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기에 모든 공동체는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실험되지만 어느 경우든 기존에 자신들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이탈한 어떤 세계, 자신이 처한 조건을 ‘추상’하는 방식으로 상상되는 부재하는 어떤 세계를 구성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는 모두 현행적인 구성의 행위 속에서도 항상-이미 어떤 잠재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순수성이란 구체적인 조건들 속에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와 다른 조건에서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주어진 규정성에서 이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흔히 상상하는 ‘맑스주의적’ 의미의 ‘이념’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말했던 의미에서 ‘이념’의 순수성에 더 가깝다. 수많은 코뮨적 실험이 조건에 따라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 다른 삶의 꿈을 접을 수 없는 이들을 어느새 슬쩍 잡아당기는 것은 이 ‘이념’이 그 잠재성을 통해 펼쳐질 어떤 사건적인 힘을 예감토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 내지 코뮨적 실험은 또한 모두 무력하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세계에 영향력을 미칠 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더없이 강력해보이는 지배적 가치의 힘에 의해 무력하다고 규정된 것의 힘에 의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같이 지배적인 가치의 화려한 빛에 가려 보이지 않은, 있어도 있는 줄 모르는 그 힘들이 모이며 가동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과 권력 같은 것이 별로 모여들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돈과 권력과 충돌하며 힘의 크기를 과시하는 곳이 아니라 그것을 슬그머니 우회할 수 있는 곳, 그것이 미처 생각지 못한 곳, 혹은 그것이 별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돈이나 권력, 혹은 지배적인 어떤 가치와 다른 종류의 힘이 작동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런 곳이 꼭 눈에 안보이는 곳이나 빈곤이나 범죄로 표상되는 어두운 곳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많은 경우 그런 곳은 역으로 권력과 돈이 어디보다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곳이 되기 십상이다. 차라리 그곳은 파솔리니에 기대어 디디-위베르망이 주목했던 것처럼, 반딧불처럼 약하고 무력한 빛들이 모이며 뜻밖의 힘이 만들어지는 곳이고, 그런 대중들이 모이는 거리나 광장과 더 가까운 곳인지도 모른다.

공동체나 코뮨주의적 시도가 ‘무서운’ 어떤 힘을 갖는다면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의 의지를 대신해 명령하는 집단주의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공산주의 이상의 집단주의이면서 또한 자본주의 이상의 ‘개인주의’라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의 두려움보다는 자본주의라는 차악이 더 낫다는 손쉬운 ‘부정의 부정’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체주의’나 ‘혁명의 포기’라는 오해와 비판 사이로 부재하는 세계를 불러들이려는 무모함이 두려운 것일 게다. 혹은 어떤 공동체를 추종해야 할 모델로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리게 만드는 잠재성의 힘이, 특정한 공동체적 실험을 그대로 지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돈이나 권력 같은 지배적 가치에 대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어떤 여백의 존재를 찾아가게 만드는 미약한 자력들이, 그런 것이 방사하는 어떤 흡인의 예감이 ‘무섭다’고 말하게 하는 것일 게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세계라고 해도, 미약하고 무력한 그 힘들을 어느새 알아보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 다른 가치, 다른 삶의 자력에 감염되어 예전의 삶을 그대로 지속할 수 없게 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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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 104 화요토론회+ 주방달력 + 선물 목록>

 

2

 

공동체를 ‘이념’이나 ‘개념’으로 추구하려는 이들만이 그것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서울역 맞은 편 동자동 쪽방촌에서 공동체운동을 하겠다며 ‘사랑방’을 만들어 활동하는 분에게 들은 얘기다. 동자동은 한때 ‘양동’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유명한 집창촌이 있던 지역이다. ‘쪽방’이란 1.5평 정도의 작은 방인데, 쪽방촌이란 짐작하다시피 먹고살기 힘든 이들이 떠밀리듯 들어오는 곳이다. 주민의 60% 정도가 기초생활수급금을 받는, 노동능력이 없다고 판정받은 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정이 좀 나아져서 쪽방촌을 빠져나간 분들이 좀 있는데, 적지 않은 분들이 쪽방촌을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다시 곤궁해져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쪽방촌으로 ‘놀러’ 오는 것이다. 가난과 궁핍의 기억이 있는 곳이고 궁상스러운 모습을 눈에서 지우기 어려운 곳인데, 그렇기에 떠나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거 같은데, 왜 다시 ‘놀러’ 오는 것일까? 그 쪽방촌에는 서울역 부근에서 노숙하다 돈이 조금 생겨 들어와 사는 이들도 꽤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반대로 일이 없는 날 낮이면 쪽방촌을 벗어나 서울역 인근, 노숙자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이들 역시 거기로 ‘놀러’ 가는 것이다. 쪽방에서 노숙의 장소로 ‘놀러’ 가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현재의 거주지보다 더 가난하고 궁상스런 곳으로 ‘놀러’오게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함께 사는 삶이 형성한 어떤 ‘공동성’이 불러들이는 것이고, 그 공동성이 작동하는 일종의 ‘공동체’가 불러들이는 것일 게다. 그 공동체에 불려-들어가는 것일 게다. 특히 동자동의 쪽방촌은 다른 곳과 달리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확실하게 있어서,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많은 이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게 아마도 공동체의 힘일 것이다. 떠난 이들마저 다시 불러들이는 힘, 힘들고 가난해도 다시 되돌아오게 하는 힘.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어느 것이나 매력 내지 매혹의 힘을 갖는다. 쪽방촌에 있는 공동체적 관계는 그 불러들이는 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도 가난과 곤궁 같은 장벽이 없는 곳이라면, 그 힘은 더 강하게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 공동체를 욕망한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계산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들 열심히 돈 버는 일에 삶을 밀어넣지만, 틈만 나면 그에 반하는 어떤 관계, 이해관계를 떠나 무언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빠져나가고자 한다. 없는 돈을 털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연인처럼 계산이나 이해관계를 떠난 어떤 관계를 항상 소망한다. 그저 기쁘다는 이유만으로 만날 수 있는 관계, 옆에 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는 관계, 그렇기에 존재 그 자체가 선물처럼 다가오는 관계를.

대지적인 성격의 공동체로부터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힘일 것이다. 앞서 충분히 말한 것처럼,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공동체란 단지 같이 생활하는 인간들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소나 함께 ‘사는’ 가축들, 그리고 벼나 밀, 채소와 과일을 ‘키워주는’ 토지, 그리고 그렇게 어우러진 삶을 둘러싼 채 매일의 일상 속으로, 그 일상의 신체 속으로 스며들어 있는 산과 내, 대기와 물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하이데거 말처럼 사방이 합일된 세계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포섭되어 팔기 위해 농사를 짓고 좀더 나은 생산을 위해 기계나 농약, 비료의 힘을 비는 곳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흔히 ‘자연’이라는 말로 불리는 이 대지적 세계와 함께 산다. 그것들과 함께 형성한 공동체 속에서 산다.

토지에 대한 농민의 애착은 소부르주아적 소유욕이 아니라 바로 이 공동성에 기인한다. 토지나 집을 그저 돈으로 계산되는 재산으로만 아는 도시인이나, 사는 곳을 옮기도록 하기 위해선 ‘보상금’이면 충분하다고 믿는 자본가나 관료들로서는 ‘충분한 보상금’을 준다는 데도, 보상금 필요 없으니 그냥 여기서 살겠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10여년을 군사기지를 만들겠다는 정부와 가망없어 보이는 투쟁을 계속 해온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이나, 죽음을 불사하며 송전탑에 반대하는 밀양의 노인들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단지 받을 보상금을 좀더 올려받기 위한 ‘땡깡’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살던 곳에서 계속 농사짓고 살겠다며 오랜 기간을 격렬하게 투쟁한 산리즈카 주민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투쟁이 저물어가게 되자 안타깝게도 자살을 선택한 젊은 농민도, 이미 공항이 들어선 뒤에도 끝내 땅을 팔지 않고 몇 분마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소음을 견디며 사는 몇몇 농민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절망적인 땅이건만, “이제 우린 결혼도 할 수 없을 거야”라고 가슴 아픈 농담을 하는 자식들과 함께 여전히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후쿠시마 인근의 주민들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확실히 이런 점에서 공동체의 힘에 사로잡힌 자들은 무모하고 무섭다. 방사능이라는 해결할 수 없는 오염마저 감수하며 살겠다는 이들처럼 무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어디 있을 것인가? 거대한 국가적 폭력과 맞서 말도 안되는 투쟁을 벌이는 이 무모한 이들, 아무리 봐도 승산 없어 보이는 투쟁을 집요하게 십년 이상 지속하는 이 무모한 이들처럼 무서운 게 어디 있을 것인가? 가망 없어 보이는 낡은 시대착오적 시도를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도 다시 재개하는 코뮨주의자들처럼 두려운 게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코뮨적 시도들의 시대착오(anachronism)란 ‘시대정신’이라고 흔히 표현되는 지배적인 것의 시간 앞에서 ‘때 아닌(unzeitlich) 것’, ‘반시대적인(contre-temps) 것’을 실행하는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의 지배를 뜻하는 시간적 질서 속에 다른 시간을 끼워 넣으려는 시간의 아나키즘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 시간의 아나키즘에는 신화적 어원에 부합하는 단어(anachronism)가 아니라, 시간의 신(chronos)의 신체 속에 부재하는 수를 표시하는 수학적 문자( )를 끼워 넣는 ‘아나키로니즘(anach ronism)’이란 단어의 언어학적 무모함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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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뮨주의자들은 무모한 자들이다. ‘무모함’이란 계산하지 않음이고, 성패(成敗)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음이며, 흔히들 말하는 ‘손익’을 분별하지 않음이다. 하고자 한다면, 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계산 없이 덤벼드는 것이다. 계산적인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행동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마음이다.

계산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에서, 이해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구성되는 모든 공동체(코뮨)는 그런 무모함에서 비롯된다. 공동체란 계산에 ‘앞서’ 존재하고, 계산을 넘어선 행동이 만들어내며, 손익의 분별을 넘어선 마음이 끌고가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공동체란 손익의 계산이나 그에 따른 예측을 넘어선 삶을 만들겠다는 무모함 속에,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한이 있어도 ‘지금 여기’에서 만들겠다고 덤벼드는 그 무모한 용기 속에 있다. 그 용기를 먹고 피어나는 상상력 속에 있다. 돈과 권력, 계산과 이해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필경 대면하게 될 ‘실패’란 다시 새로 시작할 기회를 뜻할 뿐이라고 믿는 미련한 우직함 속에 있다. 다른 세계, 지금은 부재하는 세계를 만들겠다며 반복하여 시도하는 무모한 이들의 창조적 행위 속에 있을 것이다.

계산 없는 무모함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동체, 그것은 목적 없이 존재하거나, 목적에 개의치 않고 존재한다. 물론 대부분의 공동체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어떤 목적을 갖는다. 함께 생산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근대 이전에 존재하던 공동체의 ‘목적’이었다. 함께 공부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지식을 나누는 것, 그런 나눔의 장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지식공동체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는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구성된 합목적적으로 구성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공동체의 존속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처럼 ‘목적’이란 말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것을 칸트의 말을 비틀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란 말을 미적 판단을 정의하기 위해 제안했다. 지금은 미적 판단마저 이해관계에 따른 합목적성에, 투자가치를 따지는 경제적 계산에 포섭된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과, 그런 목적 없이 만들어졌는데 성공한 작품이, 결과는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 본성을 달리 한다는 것을. 예술가는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조차,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추구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산다.

이는 공동체와 미적 판단, 공동체와 예술의 인접성 내지 유사성을 시사한다. 공동체는 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통해 돈이라는 ‘보편적’ 목적이나 이득의 계산, 공리적 효율성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낸다. 예술가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통해 지배적인 스타일이나 지배적인 감각, 그리고 지배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어떤 것을 창조한다. 지배적인 가치에 반하여 살고자 하며, ‘성공’이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무모함, 직접적인 이득을 계산할 줄 모르는 무모함을 우리는 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근방에서 발견한다. 그것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이들과 창조적인 예술을 하려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지대는, 지배적인 것에서 벗어난 삶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곳이다. 뒤샹이나 백남준 같은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우정의 연대를 통해 작업하고 공동체 인근을 배회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나 파시즘에 실망했지만 공동체를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바타유 같은 이가 또 다른 종류의 공동체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 무모한 자들의 공동체라면, 이 첫 번째 무모함만으로 만족해선 안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어떤 하나의 경계 안에 닫히려는 경향을 갖는다. ‘내부화’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념이나 이상을 통해 구성된 조직이나 집단이 자신의 익숙한 이념과 이상 안에 닫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동체 또한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이상’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이상을 유지하고자 하면서 그 이상 안에 닫힌다. 공동의 이상이 따로 없다 해도 어느새 형성된 공동체의 ‘양식(bon sens)’이 그 ‘이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상만은 아니다. 공동체는 그 지속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강하게 어떤 감각을 공유한다. 아니, 이런 공통의 감각이 없다면 공동체는 존속하기 어렵다. 이 공유된 감각이 다른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 감각은 그 공동체의 ‘공통감각(sens commun)’이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공유된 감각 안에서 편해진다. 모든 공동체는 사실 감각의 공동체다.

그렇기에 어느새 그 편한 감각 안에 스스로를 닫기 쉽다. 공통감각은 동일화하는 힘을 가동시킨다. 다른 감각, 다른 스타일에 대해 어느새 밀쳐내는 힘을 발동시킨다. 공동체의 양식이 다른 종류의 생각이나 행동을 밀쳐내는 힘을 발동시키듯이. 양식의 공동체는 자신의 양식 안에 갇히고, 감각의 공동체는 공통의 감각 안에 닫힌다. 양식 안에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양식이 지배하는 곳에서 양식은 사유하기 이전에 작동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판단한다. 공통의 감각 또한 그렇다. 공통의 감각은 말이 없다. 말없이 당기고, 말없이 밀쳐낸다. 그렇기에 감각의 공통성은 양식이나 ‘이상’보다 훨씬 인지되지 않은 채 작동한다. 닫혀도 닫힌 줄 모르게 닫힌다.

또 한 번의 무모함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공동체의 양식 안에 갇히는 것과 대결하기 위해선 양식을 교란하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말없는 감각적 닫힘과 대결하기 위해선 공동체의 공통감각을 교란하고 변형시키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양식 안에 새로운 사유를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하고, 공통의 감각 안에 다른 종류의 감각을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한다. 공유된 양식 안에 다른 생각을 끼워넣는 것, 공유된 감각 안에서 새로운 틈을 만들고 감각적 공통성을 교란시키는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고 촉발하는 것, 그럼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감각적 각성을 야기하는 것. 그것이 ‘무모함’인 것은 그로 인해 야기될 결과를 예측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로부터 얻을 득실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도달할 목표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하기 때문이다. 공동성을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공동체를 해체할 수도 있는 실패의 위험을 떠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지 못하고 계산하지 않은 채, 촉발의 힘을 지속하고 확장하며 심화하는 끈기와 일관성, 그것이 공동체에 필요한 두 번째 무모함이다. 그것은 어쩌면 공동체를 붕괴로 이끌지도 모르고, 실험을 실패로 끝나게 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두 번째의 무모함이다.

공동체에 철학자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자’란 철학을 전공하는 자가 아니라 양식 안에서 이방인이 되는 자이고, 양식 안에 사유되지 않은 것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유의 벡터를 가동시키는 자이기에. 공동체에 예술가들이 중요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예술가란 예술을 전공한 자가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 속에 부재하는 감각을 불러들이는 자고, 그것을 통해 현존하는 감각을 바꾸는 자이기에. 개념적인 설득력이면 충분한 사유와 달리, 감각은 말이 없기에 더욱더 끈질기다. 부재하는 감각을 불러들이는 것은 생각 이전에 작동하는 낯설고 불편한 감각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그 낯설고 불편한 감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려면, 불편함의 정도를 넘어서는 매혹의 힘을 발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유에 낯섦의 불편함을 넘는 매력을 불어넣는 것, 새로운 감각에 이질적인 것의 어색함을 넘어서는 매혹의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동체 안에서 철학자와 예술가의 능력이자 역할이다. 그것이 두 번째 무모함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지속할 있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양식은 지식이나 명제의 형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공통감각은 감각의 형식으로 드러나며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양식에 갇히는 것도, 공통감각에 안주하는 것도 알기 어렵다. 아마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데 머뭇거리게 된다면, 과거에 했던 것들이나 과거에 결정한 것들에 현재를 복속시키게 된다면, 혹은 ‘해선 안 될 것’에 대해 민감해져버리고 어느새 시작해버리게 된 것에 ‘해서 안될 이유’를 발견하는데 익숙해지게 된다면, 누군가가 좋아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을 활동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면, 내부자와 외부자,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높아지기 시작한다면, 거기서 우리는 양식과 공통감각의 벽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내부화하는 공동체의 벽에 어느새 갇히기 시작한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무모함이란 공동체의 존속과 늘 함께 해야 하지만, 이런 지각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철학자가 되기를 ‘마음먹고’ 자처해야 하고 예술가가 되기를 ‘마음먹고’ 시도해야 한다. 무모함에 대한 두 번의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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