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공지능과 함께 살 수 있을까?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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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 소멸의 시대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그것이 구글의 치밀한 마케팅전술이었다고는 해도 인공지능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그때 선보인 인공지능은 빠른 계산능력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판단 능력을 보여 주었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인간노동자의 경쟁력이다. 인공지능로봇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인간이 하던 거의 대부분의 노동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콜센터나 제조업의 생산라인은 빠르게 무인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이라 전망되고 있고, 의료나 법률관련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이 커버하는 영역은 전 방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실 이런 사태는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산업혁명 이래 기계는 꾸준히 인간 노동력을 대체해 왔고,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다. 맑스도 지적했다시피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가들은 비로소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혁명은 이러한 포섭의 정도를 더욱 심화시켰는데, 그것의 효과는 노동의 현저한 여성화로 나타났다. 정보혁명을 통해 남성들의 영구직장은 위태로워진 반면 전 세계 전자부품공장들에는 제3세계 여성 노동자가 채워졌다. 하지만 노동의 여성화는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증가했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트타임 같은 고용의 질 저하를 통해 노동의 취약화를 야기했다. 노동자는 점차 서비스제공자가 되고 있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은 공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가정으로 확장되고 있다.

2009년부터 자율자동차를 개발한 구글의 행보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자율자동차 기술을 이용해서 사업화하려는 것은 무인택시서비스다. 모바일 차량예약 서비스 회사인 우버에 수억 달러를 투자한 것도 구글이다. 언뜻 보기에 구글은 동일한 택시사업영역에 중복투자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동의 여성화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구글은 한결같다. 우버가 자동화한 것은 전통적으로 택시회사가 하던 일이다. 예약업무와 택시기사의 노무관리영역이 프로그램으로 대체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노무관리 영역은 남성노동자의 일이지만, 이제 자동예약 프로그램과 고객평가시스템이 그 일을 대체한다. 대체 된 것은 노무관리직 남성 노동자만이 아니다. 우버의 운전기사들은 더 이상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서비스제공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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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우버화에 반대하는 시위>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우버 운전기사 중 회사와 계약을 맺고 1년 이상을 버티는 운전자는 절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고객평가 시스템과 연동되는 예약시스템은 운전기사들을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했고, 그만큼 운전자들의 불만도 높다. 이는 노동의 장악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본으로서는 달가운 현상이 아니다. 무인택시는 이에 대한 구글의 솔루션이다. 우버의 모바일 자동예약 시스템과 자율주행 시스템이 결합되면, 운전에서 노무관리까지 모두 시스템이 해결한다. 어디에도 인간의 노동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인간의 일은 완벽히 기계의 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무인택시가 성공적으로 론칭된다면 마침내 자본의 완승인가? 맑스주의자에게 노동은 세상을 변화시킬 필수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특권적인 범주였다. 노동을 통해서, 주체에 대한 지식, 종속과 소외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성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이 마침내 축출되어 버린다면 해방의 가능성은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200년 전의 러다이트들처럼 노동을 빼앗아가 버린 안드로이드기계를 부수기 위해서 망치를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21세기에 걸맞게 망치 대신 악성 바이러스라도 침투시켜야 할 것인가?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 철없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가 쉽게 상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추상적 노동

그런데 인공지능이 야기할 노동의 종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노동의 종말이 말하는 것은 노동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자리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인공지능로봇이 꿰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리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어떨까? 주체의 의식적 활동으로 이해되는 노동의 개념이 실제 벌어지는 구체적 일과는 거리가 먼 허구적인 관념이라면... 우리는 애시 당초 잘못 제시된 문제 앞에서 답을 하려고 끙끙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은 자연을 재료삼아 인간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의식적인 활동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이기에 신체를 사용하는 활동이지만, 신체는 부차적이고 의식의 명령이 주다.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특별히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점인데, 로봇의 강건한 신체가 아니라 명령자의 위치에 서게 될 로봇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질베르 시몽동은 이런 노동의 개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 도식에 기초한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암컷이 수컷을 열망하듯이 질료는 형상을 열망한다고 했는데, 시몽동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세계를 이루는 모양과 바탕의 원초적인 적합성을 포착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가령 다비드 조각상은 바위와 원초적으로 적합하다. 그래서 형상의 명령은 질료인 바위로부터 다비드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적합성은 대개 통념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두부로부터 다비드 상을 만들어야 한다면 어떨까? 두부인 질료는 형상의 명령을 그처럼 갈망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즉 의식의 명령에 따라 결과물을 얻는 신체의 활동으로 단순하게 추상화할 수 있는 이면에는 바탕과 모양이 통념에 비추어 적합한 경우라는 한계가 이미 지워져있다. 그러나 시몽동의 지적대로 이는 우주에 대한 원초적인 직관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벌이는 구체적인 활동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인공물은 대개 이런 통념을 벗어나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얻어진다. 이때에는 애초에 전제된 적합성이란 없고, 오히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은 최종의 결과물이 만들어지기 위해 세계의 모양과 바탕사이에 새로운 적합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새로운 적합성을 구성한다는 의미는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관계가 사물들 사이에 구성된다는 것이다. 어떤 신적인 힘이 있어서 전에 없던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한, 사물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현행화 되어있지는 않았으나 이미 실재하고 있는 사물들의 잠재성으로 부터일 것이다. 그런데 사물들의 잠재성이란 서로 같은 것끼리 보다 서로 이질적인 것에서 더 많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관계 속에 다른 사물들이 추가 될 때 마다 사물들 사이의 이질성(disparity) 때문에 잠재성은 오히려 배가 된다. 질베르 시몽동은 잠재성으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현행화하는 활동을 “노동”과 구별해서 “기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공물을 만드는 인간의 활동은 추상적으로 파악할 때는 “노동”이지만, 구체적인 양상으로 파악할 때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기술”에서 인간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것에 연관된 사물들이 가지고 이질성(disparity)들이고, 그러한 이질성들이 만들어 내는 잠재성이다. 이를 시몽동은 “전개체적 포텐셜”이라 부른다. 흔히 인간 노동의 산물, 혹은 인간의 창작품으로 간주되는 인공물은 실상 점증하는 사물들의 “전개체적 포텐셜”로부터 어떤 계기로 개체화가 실현된 것이다. 이때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개체화를 매개하는 매개자이자 공작자이다.

 

3. 1,2차 AI붐의 실패와 딥러닝의 성공 그리고 그 의미

하지만 인간의 활동이 주체로서의 의식적 활동이라는 구도는 대단히 강고했고, 이는 인공지능(AI) 개발의 핵심 전제였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말까지 인공지능은 추론, 탐색위주의 1차 AI붐의 시대를 구가했다. 추론과 탐색위주의 논리연산은 최종상태를 상정하고 최초의 입력에서 마지막 결과까지 논리적인 흐름으로 수행된다. 이때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컴퓨터로 구현한 것으로, 인간의 신체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로서만 이해되었다. 이렇게 구현된 인공지능은 수학문제의 증명 같은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 했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간다거나 목욕타월을 꺼낸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복잡한 문제를 충분히 잘게 쪼개어서 논리연산으로 해결한다는 이 도식은 복잡도가 늘어남에 따라 연산에 걸리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흔히 모라벡의 역설로 알려진 이 문제는 연산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한다. 일명 “순회세일즈맨 문제”인데, 세일즈맨이 판매를 위해서 A, B, C 세집을 방문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어떤 경로를 잡아야 최소한의 발품을 팔게 될 지를 대충 가늠하고 방문 순서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컴퓨터로 결정한다면 모든 가능한 경로를 다 계산해 보고 가장 적은 수치를 찾는다. 이 경우는 3!, 여섯 가지 경로를 모두 계산하면 최적의 경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일즈맨이 방문해야 될 집이 늘어날수록 계산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지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가령, 방문해야 될 집이 30집이라면 30! ≈ 2.65×10³² 번의 계산을 수행해야 한다. 이정도의 계산은 테라급 컴퓨터로 계산해도 약 8×10¹²년, 우주의 나이인 100억년보다 800배정도 더 긴 시간이 걸린다. 논리적으로는 계산이 가능할 지라도 현실적으로는 계산이 불가능한 셈이다.

사실 연산의 속도는 여태까지 대단한 발전이 있었다. IC집적도의 지수적인 증가, CPU의 병렬처리, GPU 등이 개발되었고, 양자정보이론에 따르면 0과 1의 이산적 선택 뿐 아니라 동시적 선택도 가능하다. 이는 연산속도의 비약적인 증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향후에는 연산속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일명 폰노이만 병목현상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프로그램과 데이터는 메모리에 기록되는 것이다.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CPU인데 자신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입력데이터와 출력 데이터를 기록하기 위해서 데이터버스가 메모리와 CPU 간을 왔다 갔다 해야만 한다. CPU의 연산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데이터버스의 속도가 전체 연산속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 현상은 캐쉬 메모리를 늘리고 CPU를 병렬화한다고 해도 없어질 수가 없는 연산의 정체현상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70년대 인공지능의 연구는 깊은 침체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80년대 이르러 AI개발은 다시 붐을 일으킨다.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이라 불리는 이 시도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현실의 문제를 풀자는 시도다. 이것은 추론 탐색과는 다른 시도인데, 문제를 풀기 위해 그때그때 논리적인 연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경험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 시스템 역시 고도의 전문지식으로 한정된 분야는 그럭저럭 성과를 발휘했지만 좀 더 넓은 범위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어마무지하게 요구되는 지식의 양도 양이지만 서로 모순적인 지식들도 증가하게 되는데,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전문가 시스템도 실시간으로 계산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인간의 활동을 주체의 의식적인 활동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는 1차 AI 붐에서와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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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딥러닝은 논리 추론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신체적 경험에 대한 기억이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인공지능 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제프리 힌튼이 RBM이라는 새로운 학습 알고리듬을 제안하면서 부터다. “딥러닝”이라 불리는 이 모델은 인지는 논리추론이 아니라 학습에 의한 뉴런의 연결패턴 강화라는 AI 개발 초기부터 대두되었던 가설에 기초하지만, 이 가설의 난제였던 다층적인 학습모델을 성공시키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여기서 학습이란 학습의 결과가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피드백을 달리하는 행동주의적 개념으로, 논리적 추론과 같은 사유 활동이 전제되지 않는다. 대신 매우 다양한 층위의 신체적 경험에 대한 기억이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행동주의적 학습, 즉 신체적 기억을 만들기 위해선 살고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딥러닝에서 컴퓨터에게 시키는 학습이란 컴퓨터를 컴퓨터시간의 스케일로 살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 시스템처럼 이미 만들어진 경험이나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에게 제공되는 데이터는 만들어진 지식이 아니라, 컴퓨터가 그 데이터들, 즉 자신이 아닌 것들의 삶들과 만나서 그들로부터 그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2012년 이미지인식 컴피티션에서 선보인 제프리 힌튼의 딥러닝 알고리듬은 다른 인공지능들이 26%대의 오류률로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15%대의 획기적인 오류률 감소를 보였다. 이때부터 컴퓨터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학습알고리듬은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알고리듬의 여러 문제들이 개선되어 갔다. 더욱이 인터넷의 막대한 데이터와 결합하면서 컴퓨터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훨씬 커졌고, 학습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구글은 딥러닝 기술을 이용하여 유튜브에 등록된 고양이 영상들 속에서 컴퓨터가 스스로 특징을 찾아내고 자동적으로 고양이 얼굴이라는 개념을 획득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구글은 이미지분류 뿐 아니라 바둑 대국을 한 알파고와 자율자동차에도 딥러닝을 적용하고 있고, 페이스 북은 웹에서 딥페이스라는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율자동차는 330만 킬로미터의 시범운전기간 중 총 18차례의 사고를 냈는데 단한번의 사고를 제외하고는 상대 차의 과실이나 인간이 운전할 때 난 것으로 높은 주행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딥페이스의 얼굴인식 성공률은 97.25%로 사람 눈의 인식능력과 거의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딥러닝은 빅데이터와 결합하여 시너지를 내면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어서 한편에서는 이제 사회적인 모든 문제들은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결국 인간의 자리는 사리지게 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전망이 나오게 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인공지능개발의 역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 1,2차 AI 붐의 실패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활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차 AI 경우는 무한대의 계산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고, 2차 AI는 무한대에 이르는 지식의 양과 그 모순적인 관계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의 활동을 주체의 독립적인 활동으로 상정했고, 그것을 컴퓨터로 모사하려 했지만 한번은 무한한 시간, 또 한 번은 무한정한 지식의 양에 가로 막힌 것이다. 이는 거꾸로 인간 활동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상상하듯 그러한 주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물들을 포함한 여러 플레이어들과 함께한 시간과 경험들에 의해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함께한 경험들, 그들이 함께해온 시간들을 단지 단독자인 주체로 환원하려 했을 때 무한의 시간과 무한정한 지식의 양이 요구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딥러닝에서 제공된 데이터는 단순히 비트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들의 경험들이고, 그것을 컴퓨터와 함께 나누면서 컴퓨터와 인간이 “함께 만들기”를 하는 과정이자, 컴퓨터와 인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온갖 것들이 “함께 되기”를 하는 과정이다. 딥러닝의 성공은 우리의 삶이란 언제나 “함께 만들기”의 효과란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다. 학습은 주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 바깥으로부터 뭔가를 본받는 사태이고, 단순히 “되기”가 아니라 “함께 되기”이기 때문이다.

 

4.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함께 되기.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고,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개념으로 도나 해러웨이의 심포이에시스(sym-poiesis)를 제안하고자 한다. 심포이에시스는 움메르토 마뚜라나와 프랜시스코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자기생성)”에 맞서서 해러웨이가 제안하는 개념이다. 사실 오토포이에시스는 생명의 개체성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에 대해 답하려고 하는 이론으로, 생명의 개체성이란 유기적 구조나 피부 같은 항구적인 경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생성(auto-poiesis)하는 단위를 산출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경계에 의해서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주체와 객체, 동일자와 타자를 나누는 강고한 경계를 의문시 하는 급진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녀는 생성하는 것은 “자기(auto)”가 아니라 존재는 함께 생성된다(sym-poiesis)고 주장한다. 오토포이에시스가 아무리 경계의 가변성을 주장할지라도, 살아있는 것을 특권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살아있음의 단위인 개체성은 여전히 최종의 심급일 수밖에 없다. 정치학의 입장에서 그것은 여전히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것이고 생명과 죽음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심포이에시스에는 개체성이라는 최종의 심급이 없다. 우리 몸 만해도 인간게놈을 가진 세포는 전체의 10%에 불과하고 90%는 인간의 것이 아닌 미생물들이다. 오토포이에시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몸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기생성의 단위로서 특권적으로 제시되지만, 심포이에시스에 따르면 10%의 인간게놈과 90%의 다른 것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정치적 장이다. 여기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이 특권적이 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특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친하게 지내는 관계를 확대해야 한다. 말하자면 정치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정치학이 아니라 친소관계에 의한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할 수 있다. 무엇과 더 친한가에 따른 정치학은 적과 동지만큼 대립적인 개념도 아니고 적대를 만들거나 동일성을 만들지 않고도 상호 협동의 정치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상호 협동이라고 해서 언제나 우애와 사랑이 넘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해러웨이는 일찍이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사이보그”로 포착한 바 있다. “사이보그”라는 말은 기계와 유기체가 결합된 존재를 일컫는 말로 196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는 냉전시대로 우주개발전쟁이 한창이었던 때였는데, 뉴욕의 록랜드 주립병원의 과학자였던 맨프레드 클라인즈(Manfred Clynes)과 병원장이자 정신과 의사인 네이선 클라인(Nathan Kline)이 앞으로의 우주정복에 적합한 사이보그적인 인간-기계 잡종을 제안했다. 그들의 논문에는 실험용 쥐에 삼투펌프를 이식해서 생리학적인 파라미터들을 조절하게 한 사례가 나온다. 이들은 삼투펌프기계와 유기체의 결합으로부터 사이보그 쥐라는 아주 특별한 실체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클라인즈와 클라인이 상상한 인간-기계 잡종은 우주정복의 첨병으로 유기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강화된 인간에 다름 아니었고, 서양의 전형적인 창조신화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상상력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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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정복의 첨병으로 고안된 사이보그에 대한 기사>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런 식의 사이보그 신화와는 다른 정치신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인간(남성)중심주의가 하이테크의 도움으로 잉태한 것과는 다른 신화의 사이보그를 포착하는데 반도체공장과 결부된 유색인종의 여성노동자들이 그들이다. 반도체 산업은 C3 - 명령, 통제, 소통 (command, control, communication)의 지배적 정보통신체계의 역사적 산물이자, 자본주의지배와 우주전쟁의 물적 기반이었다. 하지만 반도체를 위시한 하이테크산업은 여성들을 생식의 체계에서 끄집어내어서 남성 고유의 영역이었던 생산의 체계로 밀어 넣었다. 생식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생산으로의 침입이 하이테크와 결합된 새로운 사이보그가 해낸 일이고, 결국 생식과 생산의 이분법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 사이보그들은 여성-남성의 이분법을 또한 흔든다. 사이보그의 한 부분이 비록 여성 유기체일지라도, 사이보그 자체는 생식이라는 여성의 특이성과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들은 그들의 기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생아들이라고 말한다. 그/그녀들은 자본주의, 군사주의의 첨병이자, 또한 가장 소외된 노동자이고, 생식의 체계로부터 해방된 존재이자, 자신의 남편들을 생산의 체계에서 내쫓아버린 존재들이다. 해러웨이식으로 말하면 사이보그는 죄 없는 존재자가 아니다. 해러웨이는 이런 모순을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전통적인 페미니즘이나 맑스주의가 기대고 있는 소외당하는 자, 지배받는 자의 인식론적인 특권적 위치에 기대지 않고 사이보그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신화를 만들고자 했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에서 제시했던 새로운 신화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획일적인 서사가 난무하는 지금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해러웨이는 최근 사라 프랭클린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이보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이보그’는 로봇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그건 반짝 반짝 빛나는 금속성이나 그런 것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벨 전화회사와 같은 기업적 통신 산업들, 그리고 2차 대전과 냉전의 전개들과의 협업, 특히, 그 군사적 그리고 감시 기구들의 협업에 의해 현저하게 유발된 통신 과학들과 기구들과 관련된 사이버네틱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이보그가 그러한 역사성들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리고 언제나 그런 역사성들을 넘어서고, 처음부터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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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공장의 그녀/그 들은 이미 사이보그다>

 

오늘날 사이보그가 이해되는 방식은 단 두 가지다. 한 가지 방식은 기계와 인간의 강력한 결합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하이테크의 힘으로 극복한 궁극의 존재, 포스트휴먼이다. 포스트휴먼은 사이보그이긴 하지만 역사성의 관점에서 이해된 것이 아니라 역사성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혹은 역사를 초월한 창조신화의 틀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우리가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또 다른 이해의 방식은 사이보그가 아니라 자동기계로 이해되는 방식이다. 여기서 사이보그는 안드로이드 로봇과 무능한 유기체로 분리되고, 역사는 오직 인간의 몫이다. 이 이야기들 속에도 해러웨이가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사이보그가 깃들 곳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이보그였다.

오늘날 사이보그의 노동은 자동화 API를 사이에 두고, 데이터를 생성하는 API 하부의 일과 자동화 모듈이 처리한 일들을 받아서 처리하는 API 상부의 일로 양분되어 있다. API를 사이에 두고 두 가지 노동이 포진함으로써 자본의 자동화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된다. 이 두 가지 노동은 지극히 계급적이지만 또한 여성화되어있다. 알다시피 API 상부의 일은 인공지능의 시대에 가장 유망한 것으로 꼽힌다.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인 관리업무와는 달리 소위 제 1, 2세계의 교육받은, 비교적 운이 좋은 여성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반면에 API 하부영역의 일은 대개 영어가 가능한 제 3세계 실업자들의 차지다. 자동화의 범위가 광범위 해 질수록 API 하부 일의 수요는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왜냐하면 딥러닝 같은 훌륭한 성능을 가지는 프로그램에게는 학습 데이터를 제공하는 API하부의 일이 필수적이고, 아직 인간과 동일한 성능을 내지 못하는 프로그램에게는 사람이 대신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마존의 매커니컬 터크(mechanical turk)인데, 여기서는 매일 40만개 이상의 데이터 처리를 요하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포스팅되고 있고 전세계 50 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커니컬 터크에 들어와서 건당 10원꼴도 안 되는 대가를 받으며 데이터를 처리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광고를 클릭해서 성인물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일부터, 이미지에 태그를 붙이는 일, 검색결과에 대한 평가, 번역결과 체크 등이다. 일명 클라우드 소싱이라 불리는 이 일들에는 자동화에 의해 실직한 사무직 노동자나 영어가 가능하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한 제3세계의 교육받은 자들이 이 일에 매달려 있다.

이처럼 기계는 인간 유기체 없이 그 작동이 불가능하고, 인간은 또 그것들이 없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담보하는 강한 의미의 사이보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그로부터 기계적인 부분과 유기체를 분리하고서 둘의 자리바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남성)중심의 정치신화를 반복하려는 시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지구에 가져올 미래는 적대와 파괴 외에 더 무엇이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대와 파괴, 그리고 공포가 아니라 기계와 “함께 되기”이자 “함께 만들기”의 더 나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모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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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7년 진보평론 여름호에 일반 논문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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