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와 공동체(이진경)

Edie 2017.07.23 02:14 조회 수 : 3401

전체주의와 공동체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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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사냥을 좋아하던 루이 13세의 별궁이 있던 자리에 루이14세가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의 화려한 보 르 비콩트 성을 설계한 루이 르 보와 앙드레 르 노트르, 샤를 르 브룅이 설계하여 만들어졌고 1682년 루이14세가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프랑스 절대왕권의 중심이자 화려한 상징이 된다. 특히 르 노트르가 만든 근30만평 규모의 거대한 정원은 바로크식 정원의 전범이 되었다. 바로크식 정원의 요체가 그러하듯, 이 정원은 대단히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자연적인’ 곡선이나 구부러진 선은 없다. 직선과 호, 사각형과 원 등 매우 기하학적인 선과 도형들로 정원 전체가 분할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바로크식 정원에 속하는 파리 뤽상부르 궁전의 정원은 나무들마저 구나 기하학적 입체 모양으로 ‘이발’을 해놓았다. 프랑스적인 이 정원과 반대되는 컨셉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모조리 지워버린 ‘영국식 정원’이 이후 고안되기도 했지만, 왕국에 맞는 정원은 역시 바로크식 정원이어서, 대부분의 유럽 궁전은 바로크식 정원을 채택하고 있다. 지금도, 비록 이들 궁전 정원처럼 넓은 정원은 가질 여유가 없지만 건물 앞에다 넓은 잔디밭 하나 정도는 갖추려는 많은 건물들, 특히 관공서의 건물들 또한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재단된 정원을 소규모로 갖고 있다.

정원을 베르사유처럼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하학적 형태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전의 정원이란 궁전의 주인이신 왕들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궁전에서 내려다 볼 왕의 시선에게 바쳐진 것이다. “왕이시여, 여기 당신의 땅이, 당신께서 지배하시는 땅이 있나이다!” 그런데 그 땅이 ‘자연 그대로’의 형상이라면, 멋대로 자라는 나무들로 가득 차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야생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건 왕이 지배하는 땅이라 할 수 없다. 거기엔 왕의 지배가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한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질서, 적어도 17세기에 그것은 기하학적 질서를 뜻했다. 잘 알지 않는가, 케플러가 행성들의 운동이 타원의 궤적을 따라 기하학적 질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만든 신에 대한 경외감에 경탄했다는 것을. 지하학적 형상의 자연, 그것은 과학이나 지식 등 인간의 지식에 의해 포착된 세계이고, 인간의 손에 장악된 세계를 뜻한다. 독일어 개념을 뜻하는 Begriff는 ‘포착’과 ‘장악’을 동시에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 is power)’라고 했을 때, 그 힘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힘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식(knowledge)이 자연에 대한 권력(power)이 되어주리라는 베이컨의 확신은 자연을 계산하려는 근대 과학을 통해 매우 빠른 속도로 현실이 되었음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베르사유의 기하학적 정원, 그것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포착된 세계고, 그런 지식에 의해 질서지워진 세계, 그런 만큼 지배자인 왕의 손에 장악된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장소가 아무리 작아도 여전히 기하학적 ‘정원’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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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중심인 거울의 방, 다시 말하면 왕이 있는 곳에서 보았다면 이렇게 보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정원의 모습은 꼭 베르사유가 아니어도 흔히 보이는 형상인지라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익숙할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 사진을 그 옆에 놓고 보면 당혹스런 유사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이리도 비슷하단 말인가! 다른 점은 한쪽이 자연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해 놓았다면, 다른 한쪽은 사람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해 놓았다는 것뿐이다. 전자가 그걸 내려다보는 왕의 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그걸 내려다보는 총통의 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배열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총통이시여, 여기 당신의 인민이, 당신께서 지배하시는 인민이 있나이다!”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일, 정연하게 질서지워진 인민이 여기 있으니 명령만 내리소서! 사열을 위해 기하학적으로 배열된 인민들을 통해 총통에게 보내려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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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열된 질서의 이러한 동형성을 보면서 절대왕정 시절의 전제정과 나치즘의 전체주의를 얼른 연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전체주의’라는 말은 이를 얼른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집회 사진에 등장하는 인민의 배열이 나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이나 중국의 또 다른 ‘전체주의’ 국가는 물론 한국이나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 아닌가. 그렇다면 자연이나 인민들 지배자의 눈앞에 ‘뜻대로 하소서’라며 헌정하는 것은 왕정이나 나치즘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하는 국가 모두에 공통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인민들을 하나의 명령에 움직이는 ‘전체’로 만들려는 체제를 전체주의라고 한다면, 전체주의는 왕정이나 파시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 하나로 통합하고 지배하려는 국가 자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체주의의 단서를 개인의 자유나 의지를 전체의 의지 아래 억압하는 공동체나 코뮨에서 찾으려는 이들이라면 국가라는 ‘공동체’에 속하는 문제라며 익숙한 대답을 다시 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 이전의 공동체, 서구인들이 한때 미개하여 국가 같은 복잡한 조직을 이해할 수도 만들 수도 없었다고 비난하던 북미 인디언들의 사회나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수많은 원시사회를 보면 이런 대답이 무지에 근거한 통념인지를 보여준다.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에는 어디나 두 개의 중심이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일들을 조정하는 추장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일들을 조정하는 주술사다. 가령 주술사가 점을 치거나 날을 잡거나 하는 것은 모두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어떤 일을 하기 적당한 때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주술사가 추장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듯이 추장 또한 주술사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그 둘은 사회의 지도자고 중심이지만, 결코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중심이다. 이는 사회가 하나의 의지로 단일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사회의 중심을 이렇게 둘 이상으로 분할하는 것은 거꾸로 사회가 하나의 의지 아래 움직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적 통합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강조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1) 또한 정치적 중심으로 다른 권력의 요소들이 집중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이 또한 사회가 하나의 중심에 의해 통합된 전체주의로 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조치들이라고 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본성에 속하지 공동체 내지 코뮨에 속하지 않는다. 적어도 중심을 복수화하려는 국가 없는 공동체는 이처럼 단일한 의지에 모든 것을 복속시키는 전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전체주의는 오직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고 그 ‘하나’의 권력으로 다른 것을 지배하는 국가의 본성에 짝하는 것이다. 좀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사고에 속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사고가 그러했다. 모든 현상이라 법칙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 아래 통합하려는 현대 과학의 주류적 성향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이는 과학 자체에 속한다기 보다는 들뢰즈/가타리가 유목적 과학과 대비하여 ‘왕립과학(Royal Science)’, ‘국가과학’이라고 했던2) 것에 속한다).

공동체는 집합적 신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하나의 신체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점으로 인해 어떤 중심을 항상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하나의 중심을 가져야 함을 뜻하진 않는다. 심지어 원시사회에서는 ‘하나의 일’로 분류되었던 인간 간의 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조차, 가령 일상적인 생활을 조정하는 일과 함께 어떤 작품을 만드는 일, 혹은 함께 작은 시위를 조직하는 일, 함께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활동하는 일 등 일의 종류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중심이 있을 수 있다. 국가적 집단과 원시적 집단의 차이는 이 이 중심을 최대한 하나로 단일화하려 하는가 아니면 단일화할 수 없는 거리를 중심 사이에 만들려 하는가에 있었다고 해도 좋을 터이다. 다수결에 의한 것이든, ‘민주집중제’에 의한 것이든 이견의 다양성을 허용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로 집결된 의지 아래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체’라면 국가적 집단에 속한다고 해야 한다. 이른바 ‘원시사회’보다 낫다고 스스로 믿는 공동체라면 2개라는 최소치의 복수성 이상으로 중심을 증식시켜야 한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각각의 중심이 다른 중심으로 환원불가능한 어떤 특이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적인 복수성에 속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홍성흡 역, 이산; 󰡔폭력의 고고학󰡕, 변지현·이종영 역, 울력.

2)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2권, 이진경 외 역,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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