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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것도 아닌 공동체

생강 2018.04.26 22:11 조회 수 : 1165

우선 밝혀둡니다. '남아 있는' 회원 이수정입니다.  

'남아 있는' 을 앞에 붙인 것은 미투 사건에 관해서는 탈퇴회원들과 비교적 같은 생각을 해왔지만, 공동체를 대하는 다른 입장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수유너머N 해체 이후 회원의 한 사람으로 104를 함께 준비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회원으로서는 1년 남짓이지만 2010년 무렵인가, 연희동 굴다리 옆 수유너머N에 친구 따라 요가 하러 처음 온지 8년 정도 된 셈이네요. 과거 '수유+너머' 시절,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지만 연이 닿지 않았다가, 한참 후에야 늦게 만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풍문으로 듣거나 온라인의 부분적 정보만으로 이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는 영화가 떠올라 이 글의 제목을 쓰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공동체의 허상, 공동체의 꿈, 코뮨의 우정 그리고 공동체 내 권위와 위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현재 수유너머104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공동체 혹은 코뮨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이든 공동체든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겠지요.  그럼에도 누군가 저 개인의 해명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면 최대한 노력해서 응답을 했겠지만, 여러 이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체인 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답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섣불리 개인 의견을 표명하는 게 조심스러웠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합의된 입장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어느 단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일듯 합니다. 더구나 이곳은 어떤 권력을 갖는 대표나 운영위원회가 따로 존재하는 명확한 조직체가 아니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위계와 권력관계가 뚜렷한 조직이라면 깔끔하게 처리하고 봉합할테지만, 알 수 없는 다수 회원의 회의에서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과정에서 조사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몇 차례 조사위 일을 하였고, 1-2차 회의와 4차 회의에 밤 12시 넘는 시각까지 참석하였지만  3차와 5차 회의는 다른 일정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수유너머104 입장문 작성 시에 부분적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때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언어 표현의 한계와 함께 다른 분들의 입장 또한 헤아려봐야 하는 이중삼중의 곤란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개인의 문제라면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표현했겠지만, 공동의 것이기에 여러 차례 생각하고, 회의 시간 외에도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서로의 생각들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는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대화의 출발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남겨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처와 피해의식 또한 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다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문제라든가 미투 운동에 있어서도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각자의 목소리들로 '이어 말하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드립니다. 그것이 이 공동체를 뒤흔들고 균열을 낸 사건을 진정한 '사건'으로 만드는 실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다만 여기에서 서로 지켜야 하는 기본 원칙을 따라주시면 좋겠습니다. 

1. 공동체 내 미투 사건이 계기가 된 만큼, 혹여나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

2. 특정인을 지칭한 비난은 삼갈 것. 다만 논지를 펼치기 위해 비판적 내용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

3. 타인의 입장을 비판하며 이야기하기 보다  '자기' 생각과 입장을 기술할 것

......

그외 더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다음 분이 제안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랜 회원들은 이 공동체를 지칭할 때 '연구실'이라고들 합니다.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합니다.

공부하고, 강의하는 일이 직업인 분이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20대부터 60대까지 제가 이곳에서 만났던 분들은 다양합니다.

알바를 하며 공부하는 20대, 아티스트, 교사, 강사, 장애인활동보조인, 변호사, 자영업자, 가사노동자, 회사원, 프리랜서, 학생,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등...

이들은 약 20년 동안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해온 이 공동체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구성하는 개인들이지요.

나와 공동체의 지향이 비슷해 보이면 이곳으로 왔다가 그렇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적지 않은 수의 (세미나/강좌) 회원들이 있는 반면,

온갖 환난과 풍파를 견디며 오랫 동안 이 공동체에서 지켜나가야 할 것을 고민하는 소수의 회원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요가를 시작으로 세미나, 강좌, 화요토론회 등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았고, 지금은 세미나, 요가와 함께 수유너머의 독보적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일상다반'(공동주방과 식사)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는 모든 이들의 공통점이 '공부'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실 줄로 아는데,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 또한 낯선 타자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공동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공간을 청소하고, 밥을 짓고,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이들은 오랫동안 이 공동체를 지켜온 분들이라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이제 고전 철학 뿐 아니라 현대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문학,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연구와 학습,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외부에서는 듣거나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펼쳐가며 각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누구는 학인 혹은 도반이라고도 부르며 서로의 차이들을 통해 영향을 주고 받아왔지요.

그러면서 이곳에 꾸준히 나오며 공부를 지속하는 사람은 회원 권유를 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 공동체를 더욱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생각에 회원이 되어 활동하기를 자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학원에서 공부하듯이 단지 세미나나 강좌만 짧게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곳에 좀 더 오랜 시간 머물며 함께 생활하다보면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회원간 혹은 회원-비회원간의 관계 속에서 그 언어들은 때로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불쾌감을 주거나 누군가에게는 같은 언어라도 폭력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지요. 이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인문학습공동체에서는 '성평등수칙'이라든가 공동의 예절을 위한 매뉴얼 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유너머104에서도 미투 선언이 있기 전 화요회 시간에 이미 비교적 젊은 회원들의 설문조사 결과와 함께 이런 문제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 보다 구체적인 현실적 매뉴얼 등을 준비하고 있던(혹은 마련해야했던) 시점에 미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수유너머104는 존경스러운 선배들과 헌신적인 몇몇 회원, 그리고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수많은 선의의 선물 같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회원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멀리 외부에서 응원하고 지지하거나 혹은 비판적 지지를 하는 사람들, 수유너머를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투 사건을 피해자의 뜻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해결해보려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품었던 환상이 깨지거나 누군가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도 하고,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타자를 마주하게도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수유너머 공동체에 가져다준 아픈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소수자, 약자, 배제된 자의 편에서 사고하고 공부할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던 회원 분들을 이제는 가까이에서 함께 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구조를 뒤흔들고, 당연하고 자명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탈퇴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함께 하기로 선택한 공동체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자 합니다. 

핵심 회원이라고들 표현하는 오랜 회원에 대해서 당연히 그 의견을 경청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원주민, 토착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험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불과 몇 년, 어떤 강제도 없이 오직 자발성에 기초한 느슨한 회원 제도 안에서 편하게 때로는 무책임하게 이곳을 드나들어 왔던 한 사람으로서 섣부른 판단과 규정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던 회원이나 탈퇴 이후 비로소 강력한 비판의 언어를 쏟아내는 구 회원분들의 의견에도 많은 부분 공감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것이 너무 늦게 표명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끼면서요.. 

이 공동체라는 것이 이제 나와 동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만큼, 게시판에 가해지는 비난과 비판, 혹은 악의에 찬 질타에 대해서도 매번 아프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공동체가 폐쇄적이거나 굳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위계와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열려 있는 구조를 표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속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게 됩니다. 저는 이 공동체의 이상을 믿는 쪽에 내기를 겁니다. 누군가 이 곳을 불가능의 장소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 곳을 바로 가능성과 잠재성의 장소로 바꿔 부르겠습니다. 누군가 위계와 권위를 휘두른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굴복했기에 그런 것 아닐까요? 저는 어떤 점에서는 위계와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반면, 그것이 불평등한 구조를 존속시키는 부정적 기능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을 무력화시킬 방법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해보는 방법을 택하고자 합니다.  

현실적으로 수유너머104는 강제가 없고 자율적인 시스템이기에 많은 부분 구멍이 존재합니다. 탈퇴회원 다수도 회의에 자주 참석하지 못 했듯이, 저마다 각자의 생계나 일들에 치여 겨우겨우 세미나와 강좌를 진행하며 자기가 맡은 파트(강좌,세미나 기획팀이라든가 주방팀, 까페팀 등등)의 책임을 다 하기에도 힘겨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어 헌신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미투 사건의 논의 과정에서 두 달간 매주 화요일 시간을 내어 늦은 밤까지 회의를 하고도 모자라 금요일 임시회의까지 자신의 일은 내팽개치거나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모두 애써 왔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치 않았고 몇 차례 회의에서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늦지 않게 경과보고나 사과문, 해명문 등을 함께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글을 쓸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런 실패로부터 다시 시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이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아 끙끙대고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이 되면 이 글이 부끄럽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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