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건과 의미의 발생

nomadia 2018.05.23 13:32 조회 수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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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사건과 의미의 발생

해석이 설명과 이해를 포함하고, 그것을 통해 전유되는 어떤 텍스트성이 있다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안정될 것이다. 하지만 전유의 그 정점에서도 모든 것은 해체의 위협에 시달려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달림’ 자체가 해석학적 과정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끌어당기는 그 힘이 없다면 해석은 완성될 것이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기도 전에 대지 위에 얌전히 멈추어 설 것이다. 그것은 곧 해석의 죽음이고 변형의 종말이며, 실존 자체의 사망이다.

 

1. 사건에서 의미로-리쾨르의 경우

1)담화의 사건, 텍스트의 세계성

리쾨르는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에서 “담화는 하나의 사건으로 주어진다”라고 말한다(RHH 133). 달리 말해 이것은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미에 의해 ‘초월’된다. 담화가 사건이 되는 요건은 네 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첫째로 담화는 특유한 자신의 시간성으로 ‘순간’, 즉 ‘담화의 순간’을 가진다. 다시 말해 담화는 현재라는 시간 안에 실현되지 다른 시간 안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담화는 랑그가 하나의 구조로서 주체를 갖지 않는데 반해, 인칭대명사와 같은 지시어들을 동반하면서 화자를 지시함으로써 주체를 표현한다. 셋째로 담화는 타자의 ‘세계’를 지칭한다. 그래서 담화는 인칭적인 단일성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성 차원에서 그것을 도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넷째로 담화는 대화상대자를 가진다. 즉 대화가 수립되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담화라는 단일한 사건성이 가지는 네 가지 측면이다(Ibid. 133-134 참조).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담론은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스스로 초월된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소격화’다. 소격화는 사건의 의미화 과정에서 최초로 드러난다.

 

만약 모든 담화가 사건으로서 실현된다면, 모든 담화는 의미로서 이해된다 (...) 우리가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덧없이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되는 의미이다. (...) 사건과 의미가 분절화되는 것은 담화의 언어학 안에서이다. 이러한 분절화는 전체 해석학의 문제의 핵심이다. 마치 랑그가 담화 안에서 현실화됨으로써 체계로서의 자신을 초월하고 자신을 사건으로 실현하는 것처럼, 담화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의 과정으로 들어감으로써 사건으로서의 그 자체를 초월하고 의미가 된다. 의미가 사건을 초월하는 것은 담화 자체의 성격이다.(1) 이 성격은 바로 언어의 지향성, 즉 언어 안에서의 노에마[의식내재적 인식대상]와 노에시스의 관계를 증언한다. 만약 언어가 ‘의미의 표현’(meinen), 즉 의미 있는 지향이라면, 그것은 바로 의미가 사건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첫 번째 소격화는 ‘말해진 것’(the said)[의미, 노에마] 안에서 발생하는 ‘말하는 것’(the saying)의 소격화이다(Ibid. 134-35).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사건성이 랑그에서 담화로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랑그는 담화 안에서 현실화된다. 그리고 두 번째 초월의 과정은 담화가 이해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해는 분명 해석학적 순환의 초기국면이며, 의미화의 단계에서 가장 기초적이다. 이렇게 해서 의미는 사건을 초월하게 되는데, 리쾨르는 초월의 과정이 전제하는 현상학적인 지향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첫 번째 소격화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첫 번째 소격화의 차원이 바로 의미와 사건을 가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리쾨르적인 의미와 사건이 현상학적인 노에시스, 노에마 구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유심론의 경향이지만, 이 최초의 사건-의미론은 끝까지 지탱되지 않는다. 뒤에 리쾨르는 존재의 ‘현현’이라는 주재, 즉 계시의 문제로 돌아오는데, 이때의 사건은 현상학적인 노에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리쾨르는 그러한 존재론적 차원에까지 육박해 들어가지 않고, 문장 단위, 또는 작품 단위에서 사건을 사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사건을 ‘문체’와 동일하게 보는 논변을 전개한다. 하나의 작품이 의미화 작용, 즉 사건화된다는 것은 문체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건은 문체화(stylisation) 그 자체이다”(Ibid. 137) 그렇다면 문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저자의 경험, 그리고 그를 둘러 싸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 그의 정서적 약동들이라는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인 차원들에서 발생한다. 즉 이것은 어떤 인격적 요소라기 보다는 세계성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효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재구조화’, 즉 상황과 정서와 기획을 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문체는 어쨌든 그러한 재구조화 작업의 결과라고 보인다. 다시 말해 문체화 작업이란 이전의 구조화된 차원으로부터 나온다기보다, 글이 이루어지는 작업의 한 가운데에서 이전까지 해결되지 않은 개방된 차원의 ‘잔여물’들이 재조직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체란 순전히 기획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비합리적인 차원에서 솟아오른다고도 볼 수 없다. 여기서도 리쾨르는 분명한 어조로 낭만주의의 문체론, 즉 천재성에 기반한 문체론을 비판한다. 문체는 분명 언어 안에 기입되는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인식가능한 관념과 구체적인 보편성의 현상을 부여받는다”(Ibid. 137). 그리고 나서 그것은 어떤 특수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사건의 단독성(특이성, singularity)을 증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독성은 문체의 저자를 소급하여 지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언어작업을 하는 본인, 또는 보다 객관화해서 말하자면 ‘장인’이다. 게다가 저자는 해석자 자신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품과 저자는 보편적 가치와 특수한 가치라는 양항관계를 형성하고, 작품 안에 저자가 개별화되는 과정에 작품은 어떤 보편성을 띄는 특유한 관계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문체를 관건적인 매개로 해서 담화 안에서 해석학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은 하나의 의미로 이해된다. 이제 의미(말해진 것)는 ‘발화행위이론’의 도움을 받아 정립되는데, 리쾨르는 이에 대해 3가지의 의미론을 추려낸다. 첫째로는 ‘발화적 행위’의 지향성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문장 안에서 술어의 주체와 객체가 의미화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발화수행적 행위’는 문법적 패러다임으로 외재화되며, 문장의 발화수행적 힘을 표시하게 된다. 셋째로 가장 문제가 되는 의미론은 ‘발화효과적 행위’다 이것은 리쾨르에 따르면 “기록하기가 가장 곤란한 요소”며 “가장 덜 추론적인 측면”이다(Ibid. 135). 왜냐하면 이 행위는 담화를 의미화할 때 지성적 측면이 아니라 대화상대자들의 어떤 감응력(affects)에 기대기 때문이다. 즉 감정과 정서적인 태도가 이 부분을 좌우한다. 리쾨르는 이 담화행위들의 종합을 ‘의미’로 본다. “그러므로 나는 ‘의미’라는 단어에 글과 작품 안에서의 담화의 외재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지향적 외재화’[사건의 의미화]의 모든 측면들과 차원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뜻을 부여한다”(Ibid.).

그런데 이렇게 구성된(또는 사건을 거쳐 마침내 구조화된) 담화는 문장 단위 이상의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데, 이때 텍스트는 어떤 고정화된 대상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담화가 사건의 차원을 거쳐 대상화되면 이제부터 그것의 ‘의미’는 더 이상 저자의 의도대로 유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것을 ‘텍스트의 자율성’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사건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특성이 구조화 이후에까지 전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는 사건은 단지 담화나 문장에서만 국한되지 않는 어떤 존재론적인 역량을 발휘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나의 매개체로서 문체가 그러한 존재론적 역량을 간취하고 어떤 결정(결심) 과정을 거쳐 통합체들을 생산해 낼 때 사건은 여전히 ‘잔여적인 것’(residuum)으로 남는다. 이 잔여성은 저자로부터 텍스트가 분리되는 순간 그 텍스트의 구조 안으로, 아니 그 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리쾨르의 말을 빌리자면 대단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세계가 글로 구조화됨으로써 “저자의 세계를 타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Ibid. 139). 리쾨르는 이것을 ‘탈상황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읽기에 의한 ‘재상황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 읽기를 통한 재상황화는 이해의 과정이다. 이렇게 봤을 때 텍스트의 자율성이 기반하는 소격화는 어떤 인식론이나 방법론에만 국한된 사항이 아니다. 소격화 자체가 담화와 문체 그리고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소격화(Verfremdung)는 해석의 조건”이며 “소격화는 이해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해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Ibid. 140).

이제 이러한 이해는 읽기의 차원에서 해석학과 연관된다. 결론적으로 해석학은 소격화를 매개로 해서 그것을 초월해 나간다. 리쾨르는 해석학의 과제를 ‘텍스트의 세계’를 이해하고 전유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다시 말해 텍스트는 일종의 프레게식의 지시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바, 그 핵심적인 항이 바로 ‘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읽기와 해석은 텍스트의 저자지칭관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지칭하는 그 새로운 세계를 봐야 하는 것이다.(2) 이 세계를 보는 창은 바로 텍스트가 담고 있는 단어와 문장이며, 그것의 지시체겠지만, 리쾨르에게 지칭이란 이러한 일차적인 지시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차적인 지시체는 이차적인 ‘세계’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 담화는 이 이차적인 지시체, 즉 일차적 의미의 잔여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 지시체를 뒤로 물리고, 이차적 지시체를 부각시킴으로써 이제 리쾨르에게는 다른 장르보다 ‘문학’이 중요해진다. 문학은 이른바 ‘실재성’이라는 차원을 ‘허구성’ 위에 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실재성이라는 일차적 관계에 긴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세계의 차원을 표현해낼 수 있다. 리쾨르는 이런 문학적 텍스트의 독특한 현상에 대해 “주어진 실재에 대한 모든 지시가 폐기될 수 있다”고 말한다(Ibid. 141).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와 연관되지 않을 만큼 그렇게 허구적인 담화는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실재와 완전히 절연된 상태라면 거기에 어떤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일차적 질서의 폐기란 “이차적 질서의 지시체를 자유롭게 풀어 놓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며, 그러한 조건으로 잔존한다.

그렇다면 리쾨르가 말하는 ‘세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하이데거적인 세계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이차적 질서의 지시체는 단지 조작가능한 대상의 차원일 뿐만 아니라, 후설이 ‘생활세계’라는 표현으로 지칭했고, 하이데거가 ‘세계 내 존재’라는 표현으로 지칭했던 차원이다. 내 견해로는, 허구와 시 작품의 독특한 지시적 차원은 가장 근본적인 해석학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 해석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해석하는 것은 텍스트 ‘앞에’ 전개되는 세계 내 존재의 유형을 해명하는 것이다. (...) 『존재와 시간』에서, ‘이해’ 이론은 더 이상 타자들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지 않고 세계 내 존재의 구조가 된다 (...) 이해는 ‘처해있음’(Befindlichkeit)에 대한 검증 후에 탐구되는 하나의 구조이다. (...) [따라서] 텍스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내가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내가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들 중 하나를 기획할 수 있는 제안된 세계이다. 이것이 내가 텍스트의 세계, ‘이’ 독특한 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Ibid. 142).

 

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세계는 바로 현존재의 세계성이며, 그가 피투적으로 처해있는 상황 자체를 말한다. 리쾨르는 하이데거의 논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이 지향하는 ‘세계’가 결국은 ‘타자’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학이 최종적인 과정을 통해 전유되는 것이 바로 이 ‘나’ 즉 ‘자기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타자’는 어떤 도구적인 대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기성을 변형시키고, 거기에 어떤 기획을 수반시키며 결국 전유 자체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의 세계는 실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는데, 이를 ‘두 번째 소격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소격화는 사건으로부터 의미의 소격화라는 첫 번째 그것과는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문학’이다.

 

텍스트의 세계는 일상언어의 세계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텍스트의 세계는 실재의 자기 자체로부터의 소격화라고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소격화를 구성한다. 허구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안으로 도입하는 것이 이 소격화이다. (...) [허구의] 지시체는 일상언어의 지시체와 불연속적이다. 허구와 시를 통하여 세계 내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들이 일상적인 실재 안에서 개방된다. 허구와 시는 주어진 존재의 형태가 아니라 존재에의 힘(power-to-be)의 형태 안에 있는 존재를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인 실재는 문학이 실재에 대하여 수행하는 상상적 변경(imaginative variation)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의해서 변형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극이 실재에 대한 모방인 것은 바로 비극이 실재의 가장 심원한 본질에 도달하는 ‘뮈토스’(mythos), 즉 ‘꾸며낸 이야기’에 의해서만 실재를 재창조하기 때문이다(Ibid.).

일상언어와의 소격화를 구성함으로써 오히려 실재에 대한 이해를 도입하게 된다는 것은 허구적 지시체가 가지는 ‘존재에의 힘’으로 드러난다.(3) 이 ‘존재에의 힘’은 일상적 세계를 변경하는 것이며, 이는 곧 현존재 자체의 변형을 수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경 또는 변형은 일상언어나 일차적인 지시체만을 가지는 텍스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문학적이고 허구적인 텍스트의 커다란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력은 바로 우리가 자기성과 자체성을 논하면서 잠시 언급하였던 ‘이야기성’ 즉 ‘뮈토스’의 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허구’는 단지 담화적(담론적) 차원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차원에서 자시의 역량을 증명해 낸다. 그와 더불어 여기서 뮈토스는 어떤 ‘약한 타자성’이 아니라 일종의 ‘강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데, 이는 의미화로부터 시작해서 텍스트적인 고정화와 구조의 잔여성을 거두어들이고 그것을 허구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가능하게끔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구조화는 해석학적 우회의 최종지점인 ‘전유’의 문제를 불러 모은다. 허구적인 재구조화를 통해 해석이 획득하는 것은 바로 ‘세계’다.

 

이 세계는 숨겨진 의도처럼 텍스트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개하고,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으로서 텍스트의 ‘앞에’ 있다.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텍스트 앞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텍스트에 우리의 유한한 이해 능력을 부과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텍스트에 노출시키고, 텍스트로부터 확장된 자아를 수용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자아는 제안된 세계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상응하는 제안된 실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주체가 열쇠를 소유하는 구성행위와는 매우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아’가 텍스트의 ‘주제’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Ibid. 143-44).(4)

 

‘텍스트로부터 확장된 자아’는 자기성의 수동적 형성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성이 텍스트로부터 제안된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전유라고 한다. 그런데 전유는 동시대성이나 동질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유는 거리를 둔 이해이며 거리를 통한 이해”이기 때문이다(Ibid. 143). 그래서 전유는 저자에 응답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유를 통한 자기성의 구성은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허식성을 극복하고, 작품들 안에 침전된 문화적 기호들을 우회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때 독자로서의 ‘나’는 스스로를 변경시키는 과정 즉 ‘자아상실’의 과정을 거쳐야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리쾨르는 이 즈음에서 자기성의 허구적 과정이 초래하는 ‘착각’에 대해 논한다. 즉 이해가 허구라는 결정적 계기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자칫 비전유로 흐를 수 있다. 여기서 초래되는 착각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프로이드와 이데올로기 비판(하버마스)이 긴요해진다. “만일 자기 이해가 독자의 선입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텍스트의 주제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자기 이해가 택하여야만 하는 필수적인 우회로가 된다”(Ibid. 144). 이로써 리쾨르는 가다머와 하버마스 간에 오갔던 논쟁을 자신의 해석학의 틀 내에서 해소시키면서 해석학이 구비해야 할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논의 진행 중에 누락된 하나의 사항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텍스트성’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이러한 텍스트 중심적 사유는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리쾨르는 먼저 말이 글보다 앞선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아주 놀라운 언급을 한다. 즉,

 

글에 의해 고정화되는 것은, 물론 말로 할 수도 있는 담화이지만, 그러나 말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 씌어진 담화이다. 글에 의한 고정화는 바로 말의 자리를 취하며, 말이 출현할 수도 있었을 자리에 생겨난다. 이것은 텍스트가 선행하는 말을 글로 옮겨 적는 것에 국한되지 않을 때에만, 그리고 담화가 의미하는 바가 문자로 직접 기록되어진 것이 될 때에만 진정한 텍스트가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Ibid. 146).

 

여기서 리쾨르는 말과 글이 상응한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의 불일치, 상호배제적 측면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글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고 논변한다. 말로 옮겨 적는 것에 국한된 글은 진정한 텍스트가 될 수 없다는 단언은 말이 수행하는 의미론적 함량이 글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다시피, 파롤의 차원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파롤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이 글에 의해 추구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의미는 더 풍부해진다. 그렇다면 리쾨르의 이 언급은 진정한 텍스트가 글에 의한 고정화라는 단순한 작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의 잔여성들을 포괄하고, 단적으로 “말이 출현할 수 있었을” 그런 자리에 밀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 글은 어떤 문턱을 통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즉 말이 되지 않는, 또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나타낸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실험으로 작가들의 상상력과 문체를 변형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리쾨르가 선호하는 고전적 작가들이 아니라 들뢰즈가 선호하는 현대작가들에게 더 많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텍스트가 지시하는 ‘세계’, 그래서 현존재가 스스로를 증명하고 자신을 자기성으로 충전해 나가야 할 이 ‘세계’가 어떤 심대한 변혁이라도 겪었단 말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당대성과의 거리 두기를 통해 작가들이 또는 독자들이 읽기와 해석을 수행한다면, 그 거리감이 노출시키는 그 본원적인 시대성은 그리스시대와 지금 현격할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석의 객관성은 상대적이다. 문제는 객관성의 함량이지 그것의 ‘소유’ 여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쓰기와 읽기가 대화적 상황과는 달리 어떤 동시적 교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단적으로 대화 상대방 간의 교환과 같은 교환은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글쓰기 행위와 읽기 행위를 완전히 두 편으로 갈라 놓는다”(Ibid.). 결국 읽기는 저자의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이 지향하는 그 세계성으로 인해 더 두드러진다. 해석은 상호주관성이 아니다. 그것은 곧 어떤 소박한 심리주의, 저자 중심성을 불러 일으키고, 정작 해석을 통해 전유해야 할 세계성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텍스트는 ‘유작’이다.(5)

위와 같이 텍스트가 어떤 특유한 실존을 향유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는 과정은 어떤가? 리쾨르는 씌어진 말로서의 텍스트가 곧 말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일상적인 말은 언제나 ‘그 무엇’을 향해 틀지워져 있다. 하지만 텍스트가 중심성을 성취하면 말에 의해 지시되던 그런 일상적인 ‘그 무엇’은 차단된다. 하지만 텍스트는 지시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읽기의 과정이 그 사라진 ‘그 무엇’을 성취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성취되는 것은 애초의 것과는 달리 변형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허구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착각’에 빠지지 않고, 허구의 진정한 힘(존재에로의 힘)을 전유한다면 거기서 실재는 소박한 자연과는 다른 어떤 발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해석의 과정은 지시를 유보하고, 하나의 실험적 세계로서의 유사세계(quasi-world)를 산출해 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과정이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우리는 유사세계로 소위 실재세계를 대체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이로써 “글로 씌어진 말이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 된다”(Ibid. 149). 다시 말해 텍스트가 세계전체가 된다.(6) 여기서 이제 설명과 해석이 분기한다. 이렇게 유사세계에 의해 ‘주위세계’가 소멸함으로써, 우리는 우선 텍스트를 세계와 저자가 없는 상태로 대하면서 그러한 유보 상태에 줄곧 머물수 있다. 구조주의는 바로 이 유보상태에서 가능해진다. 이것은 ‘설명’이다. 둘째로 유보상태를 제거하고 텍스트의 세계와의 소통성을 복원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해석’이다. 이 두 가지 읽기는 해석과정에 통합된다.

그리고 해석은 위에서 언급했던 방식으로 ‘말이 된다.’ 이것은 텍스트의 의미론이 파롤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결정적인 변형의 과정은 바로 의미가 사건이 되는 과정이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읽기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가능성들을 실현하거나 또는 실연한다. (...) 이 실현의 특성은 읽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측면, 즉 읽기가 텍스트의 담화를 파롤(말)의 차원과 유사한 차원에서 완성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파롤(말)이란 (...) 하나의 사건이라는 사실, 즉 그것이 담화의 실제적 경우(순간, instance)라는 사실이다. (...) 말하자면 해석에서 읽기는 파롤(말)처럼 된다. 나는 ‘파롤(말)이 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읽기는 파롤(말)을 주고 받는 대화와 똑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롤(말)이 담화와 연관되는 것처럼, 읽기는 담화의 사건과 실제적 경우로서 텍스트와 연관된 구체적인 행위에서 절정에 이른다.(7) 처음에 텍스트는 오직 의미(sense), 즉 내적인 관계들 또는 구조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텍스트는 의미작용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는 독자의 주체의 담화 안에서 실현된다. 의미(sense)로 말미암아, 텍스트는 단지 기호학적 차원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의미작용으로 말미암아, 텍스트는 의미론적 차원을 갖게 된다(Ibid. 159).

 

리쾨르가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처럼 해석적인 읽기는 말‘처럼’ 된다. 이것은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저자의 상황에서부터 비롯되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처럼 되는 순간을 리쾨르는 ‘의미작용’이라고 명시한다. 텍스트가 가지는 의미론적 차원은 이렇게 어떤 의미적 효과를 달성한다. 그 효과는 말의 효과며, 그것을 통해 자기성의 변형, 그리고 자아의 확대를 달성하는 효과, 즉 전유효과다. 해석은 이렇게 텍스트의 기호학적 차원을 의미론적 차원으로 넓히면서 효과로서의 ‘사건’을 만들어낸다.(8) 그렇다면 이 ‘사건’은 애초의 말의 사건성과 어떻게 다른가? 내 생각에 리쾨르가 이 전유효과로서의 사건성을 말의 사건성과 구분한다면 후자가 세계지칭을 전자가 자기지칭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착안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담화의 지칭은 분명 세계지칭에 방점이 놓인다. 그것이 결국 자기지칭으로 돌아 온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담화가 텍스트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러한 회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담화만으로 흩어지는 의미들을 묶어 놓을 수 없다.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해석 자체가 묶어 놓는 작업이기 때문이다.(9) 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한 시도는 곧 자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2) 은유로서의 사건-의미

다른 한편 리쾨르는 ‘은유’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건과 의미의 대조 (...) 상황의 행위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데 이는 실로 하나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의미는 오직 이 특정한 상황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적 의미는 반복될 수 있으며,(10) 따라서 동일한 것으로 동일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떠오르는 의미’(emerging meaning)의 새로운 도입은 일종의 언어적 창조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영향력 있는 집단이 이 창조된 언어의 의미를 채택한다면, 그것은 일상적 의미가 되어 어휘론적 실재들의 다의성에 추가될 것이며, 그리하여 부호나 체계로서의 언어의 역사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은유라고 부르는 유의미적 효과가 어휘론적 다의성을 증대시키는 의미의 변화에 재합류하는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은유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고 죽은 것이 된다. 오직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은유들만이 ‘사건인 동시에 의미’이다.(Ibid. 170)(11)

 

사건인 동시에 의미인 아주 특유한 경우, 그것이 살아 있는 은유다. 리쾨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텍스트의 차원에서 의미와 사건을 논하는 지점과 대조된다. 살아 있는 은유는 사건과 의미라는 두 가지 계기적 차원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은유는 사건인 동시에 의미가 되는가?

 

설명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상호작용의 관계망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는 상황을 실제적이고 독특하게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은 의미론적 사건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사건은 몇 개의 의미론적 영역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관계망의 구성을 통해 모든 단어들은 함께 더불어 의미가 통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이때에만 ‘은유적 비틀림’은 사건인 동시에 의미이며, 유의미한 사건인 동시에 언어 안에 떠오르는 의미이다.(12)

 

다소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비틀림’이라는 단어는 바로 들뢰즈의 설명과 함축에 해당된다. 은유가 사건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이상, 은유가 단지 언어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영역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어떤 존재사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에의 힘’이라는 허구의 역량이 누승적으로 증가하는 과정 즉 존재론적 탐색과정이 여럿이 교차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은유는 이렇게 해서 언어 안에 진입하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후 은유는 텍스트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전체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 다른 해석학적 순환을 그려낸다.(13)

이 해석학적 순환의 최종지점은 물론 ‘전유’다. 리쾨르는 이러한 전유의 해석학적 양식을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해석의 과정은 이러한 어린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놀이에 열중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놀이에서, 주체는 자신을 망각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놀이에 몰두할 때 다시금 주체성이 얻어진다”(Ibid. 186). 여기서 자신을 망각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의미의 장 안에 몰아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정한 변형(metamorphosis)은 어린아이의 이 놀이에서 일어난다. 몰아적으로 집중하는 놀이자에게 모든 것은 ‘참’으로 비춰진다. 여기 허구의 역량은 이러한 놀이자의 예기된 변형 안으로 들어가 역설적인 진실을 대면시킨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즉 가장 상상적인 창조가 인식을 이끌어낸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 따라서 허구, 상징화, 그리고 본질에 대한 인식 사이에는 중요한 연결점이 있다”(Ibid. 187)(14)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 오면서 리쾨르는 허구와 상징 그리고 그것이 비극적으로 또는 희극적으로 지시하는 세계의 본질을 연결하고자 한다. 나는 리쾨르 해석학의 처음부터 끝까지 노정되고 있는 이런 허상, 또는 허구의 중요성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소급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허구를 ‘거짓’과 ‘착각’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프로이드와 맑스에 기대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는 왜 꼭 ‘참’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저 허구로서 믿어지고, 그렇게 구성과 해체를 거듭하면 안 되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해석학 자체 내에서 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리쾨르에게 주체는 살아 남는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죽음도 회복된다. 작품으로서의 텍스트에는 마치 저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화자만이 또는 목소리만이 들린다. 이러한 저자와 화자의 불일치는 우리에게 ‘분리된 화자’(split speaker)라는 주제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된 화자는 저자-주체의 이중체들이다. 그래서 주체의 사라짐이란 인물들 가운데로 주체의 흩어짐을 의미하게 된다. 흩어진 주체는 주체를 허구로 표상하게 하고, 허구는 여기서도 주체를 구성하는 역능을 발휘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저자는 우주의 창조자로 남는다. 즉 잔여성으로 존재한다. “화자가 결코 저자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언제나 허구적 성격 – 이 허구적 성격은 바로 저자이다 – 안에서 변형되는 존재이다. 심지어는 저자의 죽음까지도 저자가 놀이하는 게임이다”(Ibid. 188).

우리는 여기서 의미와 사건의 변증법이 전유효과를 지나 또 다시 자기성의 충전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본다. 해석학적 주체는 자기성의 방향을 따라 허구의 역량에 기대어 이런저런 주체성의 양식을 균열된 모습이나마 회복한다. 해석학적 순환이 최종적으로 닻을 내리는 곳이 다름 아니라 ‘자기’라면 그것이 항해한 지점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 더 나아가 ‘새로운 세계’이며 그것은 축도(縮圖)로 자기성 안에 남는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사건’이다. 비록 이 사건이 또 다른 발산을 허용하고, 지평간의 융합이 아니라 지평들 간의 갈등을 유발하면서 더 큰 사건을 향해 나아갈 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해석학적인 전유과정이 어떤 잠정적인 항구 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기에 어떤 헤겔적인 절대지식의 정박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대적 지식과 해석학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하여야만 한다”(Ibid. 193).

 

3)오류들로부터 세 번째 소격화로

나는 다른 절보다 상대적으로 긴 이 절을 끝내면서 해석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오류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오해들은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한다.

우선 우리가 아무리 전유를 통해 자기성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데카르트, 칸트, 후설 류의 주체가 가지는 수위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15)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낭만주의적인 천재적 주체가 탄생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첫 번째 범하기 쉬운 오류다(낭만주의의 오류). 두 번째로 해석을 “독자의 유한한 이해 능력에 종속시키는 것”이다(Ibid. 190). 해석학은 주관주의나 실존주의의 아류가 절대 될 수 없다(주관주의의 오류). 이 오류는 하이데거의 선이해를 단순히 독자의 선입견으로 치부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자아를 텍스트로 투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렇다고 해서 해석학이 어떤 상호주관적 등식을 설정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이 단지 독자와 저자 간의 상호주관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상호주관성의 오류). 우리가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전유하는 것은 독자도 저자도 아니라 그들의 ‘세계’다.(16)

이러한 오류를 벗어난 전유는 차라리 ‘계시’라고 리쾨르는 밝힌다. 왜냐하면 “전유는 무엇보다 놓아주는 것(letting-go)”이며, 읽기는 애초에 ‘전유-박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Ibid. 191) 놓아줌과 포기(박탈)는 텍스트가 현현하는 차원이 어떤 계시적 차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하이데거적인 존재든 아니면 들뢰즈적인 사건이든 리쾨르에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이라는 오류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해석은 자아를 비우고 텍스트의 지시체를 향해 이끌려 가도록(홀려 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17) 따라서 해석학에서 전유과 계시를 연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진다. 전유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시의 차원이 ‘증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텍스트와의 만남보다 상호주관적이지 않은 것은 없으며, 대화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텍스트의 매개가 감당하는 상호성은 그런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의 자율성도 확보되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의 심리주의에만 긴박된 상태에서는 어떤 세계도 획득될 수 없다. 이때 세계는 ‘계시’, 하이데거적 의미에서는 존재양태의 탈은폐며,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에서는 ‘삶의 형태’의 드러남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서도 주체는 자기의 수동성으로 남아 있다. 해석학적 주체는 최초의 소여를 위해 늘 개방된 상태로 있다. 그러므로, “오직 텍스트의 명령을 만족시키는 해석만이, 그리고 의미의 ‘화살’을 따라가며 그것에 ‘따라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해석만이 새로운 ‘자기’ 이해를 창출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Ibid. 192).

이렇게 전유가 계시성을 띄게 됨에 따라 리쾨르의 해석학은 새로운 차원을 열어 놓는다. 그의 언급을 마지막으로 인용해 보자.

 

해석학적 철학은 (...) 반성철학과 연속성을 갖는다 (...) 그러나 해석학적 철학은 주체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고 기호의 커다란 우회로에 끊임없이 호소함으로써, ‘코기토’(cogito)의 수위성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무엇보다도, 해석학적 철학은 전유의 주제를 현현의 주제에 종속시킴으로써, ‘나는 생각한다’의 해석학보다는 ‘나는 존재한다’의 해석학을 향하여 나아간다.

해석학적 철학[은] (...) 사변적 철학과 더욱 가까워[진다.] (...) 세계의 현현 개념은 (...) 후설의 구성(constitution) 개념보다는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말하는 진리의 ‘자기 제시’(Selbstdarstellung, self-presentation)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이 자기 제시가 끊임없이 언어 사건, 즉 그 안에서 해석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언어 사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철학이 절대적 지식의 상실로 인해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들 간의 충돌이 극복될 수도 없고 회피될 수도 없는 까닭은 절대적 지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Ibid. 193).

 

그래서 해석학적인 사건은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반복된다. 나는 이것을 세 번째 소격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소격화는 바로 해석학의 언어적 기반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 기반을 가리키고 있다. 들뢰즈에게 이 ‘계시’는 바로 ‘사건’의 지평에 놓여 있다. 따라서 리쾨르가 끝나는 곳에서 들뢰즈를 시작한다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그러려면 우리는 리쾨르가 한 번 순환의 지점을 완수한 그 곳(사건)을 기준으로 시위를 뒤로(다시 의미로) 당겨야 한다. 그렇게 긴장된 반복 운동 가운데 처음의 사건에서 의미로 가는 방향이 두 번째 의미에서 사건으로 가는 방향을 어떻게 그려 놓으며, 또한 그 역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길로 단숨에 진입하기 전에 나는 다음 절에서 다시 한 번 텍스트의 우회를 거치고자 한다.

 

4) 설명과 이해, 텍스트와 행동

리쾨르는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담화들 자체가 행동이다.”(RTA vi) 그러므로 텍스트와 행동 사이에는 모방의 관계가 지속된다. 이 관계는 단지 ‘단절’의 계기에 의해 복잡해지고 간접적인 형태를 취할 뿐이다. 사실상 이 단절의 계기는 해석학에서 ‘설명’과 ‘이해’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이 단절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단절일 수도 있다. 인문과학은 이해 편에, 자연과학은 설명 편에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학의 주장이었지만, 리쾨르는 이 견해를 비판한다. 이 비판은 설명과 이해를 아우름으로써 담화와 행동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리쾨르식 해석학의 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야심이 극적으로 완성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세계의 변화에 일조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행동하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Ibid. 172). 딜타이가 ‘기호-텍스트’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리쾨르에게 관심사는 “‘텍스트’와 ‘행위’와 ‘역사’ 사이의 지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텍스트와 행위 사이의 긴밀한 접근성을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단지 ‘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구성체 전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지칭하는 ‘세계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는 리쾨르의 주장에 귀기울일 때 이 접근성은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설명은 이해에서 완성된다”(Ibid. 166).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이해는 반드시 역방향, 즉 말하기 또는 담화로 다시 간다. 이때 이해에서 완성된 이전의 담화는 잠재화(virtual) 된다. 잠재화된 이전의 담론을 배경으로 새로운 담론이 사건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리쾨르-가다머는 ‘적용’(Anwendung)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적용이 반드시 잠재화된 담론을 기반으로 새로운 담론을 사건으로 불러 세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잠재화된 담론이 ‘선이해’를 구성한다.

그리고 중요한 계기가 또 있다. 즉 이 ‘선이해’를 거스르는 이해의 경향이 그것이다. 리쾨르에게 이해와 선이해는 마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백터처럼 보인다. 사건으로 향하면서, 새로운 은유, 살아 있는 은유를 창조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것은 뒤로 가면서 선이해를 반드시 참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이해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의 사물’ 즉 바로 ‘세계성’이다(Ibid. 167). 그런데 바로 이 세계성이 또한 텍스트의 세계성이다. 텍스트가 지칭하는 세계는 또한 세계가 담겨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관계는 어쩌면 해석학의 ‘지평’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쾨르가 언급하다시피 분석과 자기화 사이에는 어떤 갑작스러운 단락은 없다. 거기에는 “텍스트의 세계가, 그 작품의 기의(記意, the work's signified)가 펼쳐져 있다”(Ibid.). 이 텍스트의 세계와 세계의 세계성은 그래서 어떤 경우 구분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이 혼재의 양상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것이 ‘사건’인가? 담론이 바로 행동이고 그것이 사건으로서 세계 안에 나타난다면, 그 출현의 메커니즘은 문법구조의 생성과정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하나의 ‘의미’의 출현, 그것은 들뢰즈에 따르면 ‘사건’의 출현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 사건을 다시 텍스트성 안으로 잡아 가둔다. 그런데 이 텍스트성 자체가 세계성이기에 이러한 메커니즘은 충분히 ‘사건’의 한 축이 될 만하다.

여기서 ‘텍스트성’이 논리적 관계의 사건이라면, ‘세계성’은 인과론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리쾨르가 앤스콤을 인용하면서 정리하듯이, 우리가 “사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 하나의 새로운 언어 유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Ibid. 169). 왜냐하면 사건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 동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어유희에서 만약 ‘때문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때문에’의 의미가 ‘원인’이 아니라 ‘이유’인 것이다. 이때 ‘이유’는 바로 욕망과 관련된다. 이 욕망은 그래서 어떤 강요의 힘이기도 하고, 행동의 이유이기도 하다. 욕망과 관련해서 ‘동기’는 강요된 것이기도 하고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이 의지적 존재이면서도 비의지적인 신체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리쾨르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중간적’이라고 정의한다(Ibid. 171-72). “즉 그것은 설명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인과관계와 순전히 이성적인 이해에 속하는 동기화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다(Ibid. 170). 이 중간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사실 매우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을 거쳐 중세에 이르는 기간동안 인간의 내면은 채찍이 필요한 욕망과 그 채찍을 다루는 이성 간의 투쟁이었으며, 앞서 살펴본 데카르트에 이르러서 그것은 ‘정념과 이성의 투쟁’으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 신체의 위치는 매우 애매하면서도 확고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신체는 다른 것들 가운데 한 신체(즉 사물들 가운데 한 사물)임과 동시에 반성하고, 생각을 바꾸고, 행위를 정당화하는 능력을 가진 한 존재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Ibid. 172).

사실상 이 맥락에서 욕망의 ‘힘’은 어떤 도덕적인 함축을 띠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중간자로서 자리매겨 주는 근본적으로 중립적인 인간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힘을 가지고 세계에 개입하며, 그것이 의지적이든 비의지적이든 상관 없이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 세계의 변화는 ‘행동’의 힘으로의 욕망의 힘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은 어떤 의도적 개입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다시 이해와 설명이라는 지성적인 과정이 삽입된다. 이렇게 되면 무의식적이고 비의지적이던 행동과 욕망의 힘이 “의지적인 개입”(intentional intervention)으로 정의될 수 있게 된다(Ibid. 172). 결국 행동이라는 것이 세계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려면, 거기에는 이해와 설명이라는 조건이 결합되 필요가 있다. 즉 사건은 리쾨르에게 이미 의식의 영역이며, 그것은 반드시 지성의 매개와 우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리쾨르는 여기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어떤 세계에 있어서도 최초의 상태에 이러한 의지적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에, 순전한 정신주의와 물질주의 간의 대립은 허구라는 것이다. “최초의 상태가 없는 체계는 없고, 개입이 없는 최초의 상태는 없으며, 힘의 행사가 없는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로 새길 수 있다(Ibid. 174).

이것은 텍스트와 행동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즉 텍스트는 행동의 패러다임이며, 행동은 텍스트들의 지시다(Ibid. 175). 하나의 정신적인 범주로 취급되었을 때 텍스트는 행동이라는 신체적 방향에 질서를 부여하고, 행동은 그러한 텍스트에 개입함으로써 변형한다는 것이다. 이때 행동은 신체로부터 외부화되면서 하나의 ‘흔적들’을 남기는데, 이것이 최초의 개입 방식으로 보인다. 텍스트에 대한 행동의 개입은 텍스트 ‘위에’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시는 인간을 행동 속에 있는 존재, 행동하는 존재로 보여준다La poésie, dit-il encore, montre les hommes comme agissant, comme en acte.(Ibid.)

 

여기서 특정되는 텍스트가 ‘시’라는 것에 주목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언급이 다음과 같은 아주 오래된 다른 텍스트로부터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지닌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1449b25).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명히 언급하고, 리쾨르가 그 강조점을 비극에서 ‘인간’으로 옮기면서 번안한 이 구절은 시 또는 비극이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고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욕망의 힘을 모방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힘의 증거가 바로 연민과 공포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다. 리쾨르는 이에 대해 『시간과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해석한다. ‘시간론’에 대한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테지만 우선 이 장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주목한 점은, 행동의 모방이나 재현과 사상(事象)들의 배열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처럼 두 가지 표현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섯 개의 부분들 사이에서 ‘무엇에 의해’(수단) - 표현과 노래 - 그리고 ‘어떻게’(양태) - 공연 - 에 비해, 재현의 ‘무엇’(대상) - 줄거리, 성격, 사상 - 에 우위를 두는 1차적 순위매김을 통해, 이어서 ‘무엇’ 내에서 행동을 성격과 사상 위에 두는 2차적 순위 매김 (...)을 통해 확인된다. 행동은 이러한 이중의 순위 매김 끝에 ‘주요 부분’, ‘지향된 목표’ ‘원칙’ 그리고 이를테면 비극의 ‘영혼âme’으로 나타난다. (...) “줄거리가 바로 행동의 재현이다”(50a1).

 

여기서 리쾨르는 1차적 순위와 2차적 순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정의 안에서 나누고, 이것이 바로 ‘행동의 모방[재현]’이 사상(事象)들의 배열과 동일시되는 현상을 확인시켜 준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이 곧 비극의 영혼, 즉 비극이 내포하는 사상들의 배열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뮈토스란 “사상들의 체계적 배열è tôn pragmatôn sustasis”(50a5)이라고 한 지점을 인용하는데, 이는 곧 뮈토스의 핵심에 ‘행동’이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또한 뮈토스는 바로 행동의 미메시스다. 물론 이때의 미메시스는 동일한 것의 재현이 아니다(RTR,I. 34(18)).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사상’(事象)이라는 것은 뮈토스 안에 배열된 행동들의 모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리쾨르에게 있어서 이 ‘사상’과 ‘사건’의 연관성 또는 상이함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반전’(metabolé)에 대해 논할 때 이 두 개념이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비극의 요소를 ‘불협화음’이라고 칭하는데, 이러한 규정에서부터 벌써 일련의 ‘사상’과는 다른 정의를 ‘반전’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반전은 이야기의 줄거리 구성 안에서 불협화음을 도입하지만, 이것을 화음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효과는 반전이 ‘급전(急轉, coup de théâtre, péripétéia)’과 ‘인지(認知, reconnaissance, anagnôrisis)’를 통해 공포와 연민이라는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달성함으로써 성공한다(Ibid. 44 참조). 이때 발생하는 정념의 사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불협화음으로서의 사건들과 공명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지성 안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그 우연이 정념을 통과하자마자 그럴듯한 것, 있음직한 것이 되는 이 화학작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콜러리지라면 이것을 “불신의 자발적 중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일종의 노에시스적 규정으로서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사건과 의미의 유희 안에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리쾨르의 이러한 분석을 좀 더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정념을 통한 이 화학작용은 사건과 사태를 어떤 불분명한 지대로 옮겨가면서 뒤섞어 버린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의 정치적 역할을 논한 『정치학』8권 7장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의 교육적인 선용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는 곧 정치적인 활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또 음악이 단 한 가지 목적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음악은 교육, 감정의 정화 - 정화라는 말을 지금은 설명하지 않고 쓰고 있지만 나중에 『시학』에서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세 번째로 의미 있는 생활 방식 또는 휴식과 긴장 이완에 쓰여야 한다(1341b).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언급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하나의 종합적인 예술로서의 비극작품에서 정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선율’ 즉 음악이라고 보고 있다. 이 저서의 8권 6장 초두부터 논하는 바에 따르면, 음악은 혼의 습관을 올바르게 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으며, 그래서 음악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된다. 하지만 혼의 습관을 바르게 하는 데 있어서 카타르시스가 어떤 ‘여러가지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약속과는 달리 『시학』에도 더 이상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음악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 반드시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방향으로 정향되어야 한다는 점을 매번 강조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악기와 선율 활용을 배우되, “나이 들어 젊을 때 배운 것 덕분에 무엇이 좋은지 판단하고 음악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알게 되면 연주를 그만두어야 한다”(1340b). 그 이유는 분명한데, “음악 교육은 분명 나중의 활동을 저해해서도 안 되고, 몸을 저속하게 만들어 전사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훈련받는 데 쓸모없게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ibid.). 그렇다면 어떤 리듬이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가? 이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로 미루어 모든 선법을 다 쓰되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고, 교육적 목적으로는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법을 써야 하고, 남들이 공연하는 것을 들을 때는 행동을 촉구하는 선법이나 듣는 사람을 열광케 하는 선법을 써야 한다. 공포와 연민과 열광처럼 몇몇 사람의 혼에 강한 영향을 주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감정에 쉽게 휘둘리다가도 혼을 도취시키는 선율을 듣게 되면 신성한 선율의 영향을 받아, 마치 치료나 정화를 받은 양 진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연민이나 공포나 그 밖에 다른 감정에 잘 휘둘리는 사람들도 각자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어, 모두들 일종의 정화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1342a).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치료’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앞의 ‘정화’는 의학적 함축을 가지며, ‘안도감’과 함께 쓰이는 ‘정화’는 윤리적,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생리적인 대사를 윤리정치적인 맥락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주목해야 할 것은 파토스의 정화가 ‘급전’과 ‘인지’를 포함하는 ‘반전’에서 극대화되고, 이것이 심리생리적 맥락 뿐 아니라 윤리정치적 맥락에 이르기까지 응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과 의미라는 우리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용법은 하나의 중차대한 정치적 사건이 심리생리적인 안정화를 거쳐 사태의 맥락 안으로 기입되는 그 과정이 중요해 보인다. 여기서 정화와 함께 쓰이는 ‘치료’와 ‘안도감’이 목표로 하는 지점은 이 텍스트의 맨 마지막 구절이 확증해 준다. 즉,

 

따라서, 음악 교육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은 중용, 가능성, 적합성이다(1342b).

 

사건이 가지는 폭발적이고 정념적인 측면이 결국 온건한 질서와 안정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텍스트에 기입된 행동의 흔적을 허구적인 뮈토스의 힘으로 구상화(figuration)함으로써 생생함을 획득하게 하지만, 반전의 단계에 와서 오히려 모든 것이 상상과 정념 안에서 해소되어 안정되는 사태로 전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건은 정치적으로는 모든 소요를 방지하고, 구성원들의 영혼의 안정에 기여한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는 일순간 정념을 극단적인 상태로 몰고 감으로써 발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뮈토스 내부의 갈등해소는 사실상 봉합되거나 연기되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1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눈 먼 상태로 광야를 헤매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의 남은 여정은 보이지 않는 어떤 사건의 흔적, 즉 자신의 죄가 발생한 그 흔적을 찾기 위한 헤맴이면서, 죄의 결과로부터 나온 자식들에게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비극이 불협화음을 준비하지만 화음으로 귀결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는 유예된 사건들을 서서히 불러 모으는 잠재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텍스트 내부적인 이 사건의 흔적들은 대부분 어떤 체계 내부적인 힘으로 정돈되지만, 언제나 잔여를 형성함으로써 불안정힌 상태를 존속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화음 안에 존속하는 이 불협화음의 요소는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면에서 늘 삶 자체를 겨냥하는 것이다(RTR,I 44 참조). 이렇게 해서 허구적 뮈토스는 텍스트 내부성을 벗어나 행동의 윤리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리쾨르라면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변증법’이라고 칭하겠지만 들뢰즈의 입장에서 이는 사건과 의미의 길항이며, 종합을 거부하는 잠재적인 어떤 활동으로 보일 것이다. 뒤에 충분히 논하겠지만 이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은 변증법과 저 길항 사이에 미약한 연관성만이 눈에 보일 뿐인데, 이것은 사건의 의미화와 의미의 사건화 사이의 그 거리가 충분히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쾨르의 경우에 텍스트 내부적인 설명은 이해에 와서 완성되는 것인데, 이 완성은 사실상 ‘완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제 이해를 기반으로 어떤 새로운 담론적 사건이, 또는 실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건은 설명과 이해를 거쳐 다시 어떤 다른 사건이 됨으로써 자신을 완성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사건화이기도 하고, 정념적인 반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 사이에도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간극을 리쾨르의 프로이트 연구로부터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간극은 시간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비로소 들뢰즈의 편에서 논의를 진행해 보자.

 

2. 의미에서 사건으로-들뢰즈의 경우

1) 루이스 캐럴과 스토아

의미는 사건과 동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순차적으로 의미의 장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19)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장, 즉 지각장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전체 장 안으로 단번에 진입한다. 그래서 이것 자체가 ‘사건’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분석적 지성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 존재론의 평면에서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이렇게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의미와 사건의 경계지점을 정확히 나누려고 노력해 보아야 할 것이다. 리쾨르에게서 그러한 경계지점은 ‘소격화’의 양항들이 누적됨으로써 충분히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에게 그 경계지점은 어떤 것인가? 들뢰즈는 의미와 사건을 주로 『의미의 논리』에서 다룬다.

 

들뢰즈는 자신의 이 책을 루이스 캐롤과 스토아학파의 연구로 한정짓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일률적인 의미에서의 ‘한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들뢰즈는 캐롤에게서 의미의 문학적 단서들을, 스토아학파로부터 ‘표면의 철학’이 가지는 (역설적으로) 심오한 측면들을 가지고 온다. 들뢰즈는 캐롤과 스토아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 거기서 어떤 사건의 양상을 살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리쾨르가 우회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반성’하던 것과는 달리 텍스트 내부의 직접성을 신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바로 ‘사건’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캐롤에게서는 의미와 무의미가 “어떤 특이한 방식”으로 만난다(DLS 43). 캐롤에게 와서야 처음으로 ‘의미의 역설’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중요하게 다룬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경우 새로운 철학자상을 제시했다는 것을 중요한 기여로 든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상은 “의미이론의 역설적인 구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20)따라서 들뢰즈가 머리말에서 말하는 이 저작의 독해를 위한 일정한 가이딩은 이 책이 시간적인 계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위상학적인 형상들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이다.(21) 따라서 이 책은 ‘논리’에 대한 것이지만 하나의 소설이며, 무의식의 소설, 즉 주인공이 부재한 소설이다.(22)

먼저 사건들이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커지면서 작아지는 것’이다. 비가역적인 시간을 상정하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역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항상 역방향을 동반한다. 이것을 들뢰즈는 “생성의 동시성”(simultanéité d'un devnir)이라고 밝힌다(Ibid.). 생성의 동시성이란 “현재를 비켜가는(esquiver)” 것을 의미한다.(23)

따라서 이러한 양방향성은 생성이 “이전과 이후, 과거와 미래의 분리도 구분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논리적으로 이것은 ‘역설’(para-doxa=contre-sens)에 해당된다. 즉 양식(bon sens)을 거스르는 역설적인 시간이 생성이다. 철학사적으로 이 ‘생성’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플라톤의] 이원론의 참모습은 (...)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라 복사본들과 시뮬라크르들의 구분이다. 순수생성(Le pure devenir), 즉 무규정적인 것은 그것이 형상의 작용을 비켜가는 한에서, 그리고 원본과 복사본에 동시에 저항하는 한에서 시뮬라크르의 질료이다. 측정된 사물들은 형상들 아래에 있다(subsiste). 그러나 이 사물들 아래에는 그러한 질서 - 형상들이 부과하고 사물들이 받아들이는 질서 - 를 벗어나는 요소가 늘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Ibid. 10)(24)

 

들뢰즈는 이러한 플라톤의 새로운 이분법의 가능성이 『크라틸로스』의 주요 내용 중 하나라고 밝힌다. 이러한 순수생성의 철학사적 가능성은 플라톤의 이 저작에서 우선은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 물어지고 있다. ‘이름’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하나는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정지와 고정”이며, “다른 하나는 이에 저항하는 운동들과 생성”이라는 것이다. 이때 “한 차원은 늘 다른 차원 아래에 은폐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전복하려고’(subvenir)” 한다(Ibid.).(25)

그러므로 이러한 생성의 역설을 들뢰즈가 ‘무한한 동일성’(identité infini)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Ibid. 10). 양방향으로 동시에 무한히 진행되는 이 동일성은 그러나 생성의 동일성이지 존재의 동일성은 아니다.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명사와 형용사의 붕괴’다. 존재로서의 동일성(신, 자아, 세계)은 이 붕괴 또는 동사들의 연결과 사건에 의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동사 안에서 사건들은 일종의 ‘비실재성’(irréalité)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이때 동사 이외의 모든 인칭은 ‘사건의 자체의 객관적 구조’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역설은 상식을 파괴한다.

스토아학파는 사물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는 ‘물체들’ 둘째는 ‘비물체적 효과들’. 전자는 공간 안에 실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물리적 성질’을 띄고서 서로 간에 능동과 수동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때 그때의 사태를 함축한다.

 

오직 물체들(corps)(26)만이 공간 안에 실존하며(existent), 현재만이 시간 안에 현전한다(présent). 물체들 사이에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물체들은 서로와의 관련하에서 또 서로를 위해서 원인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의 통일성은 우주적 현재의 외연(l'étendue du présent cosmique) 안에서 운명(Destin)이라고 불린다.(Ibid. 13)

 

이때 물체는 효과들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효과들은 물체들이 아니다.”(Ibid.) 이것은 말 그대로 ‘비물체적인 것’이다. 이들은 물질이나 속성이라기보다 ‘빈위들’(attributs), 즉 사건이다. 이 빈위-사건들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속한다/내속한다(subsist ou insistent) 말해야 한다. 이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존재함의 최소치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Ibid. 14) 이들은 ‘동사’와 매우 가깝다. 또한 이들은 능동과 수동의 운동이 아니라 그러한 운동의 ‘결과/효과’며, “되돌릴 수 없는 것”(impassibles),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된다. 이들은 물체적인 것들이 ‘현재’에 실존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법’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즉, 이들[사건들]은 한계지어지지 않은 아이온(Aiôn illimité),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이다. 그래서 결국 시간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상보적인 두 방식으로 파악된다. 그 한 방식은 작용을 가하고 받는 ①물체들 속에서 살아 있는 전적인 현재이며, 다른 한 방식은 물체들 및 그들의 작용을 가함/받음에서 유래하는 ②비물체적인 효과들 속에서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심급이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 속에서 실존하며, 과거와 미래를 모으고 흡수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시간 속에서 단지 내속할 수 있을 뿐이며 각각의 현재를 무한히 나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기하는 세 차원들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동시적인 두 독해[물체에 기반한 독해와 사건에 기반한 독해](27)인 것이다(Ibid. 14, 번호는 인용자).

 

‘부정법’은 시제가 통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의 ‘영원한 현재’일 것인데, 들뢰즈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빠진 현재의 역설을 비껴가고 있다.(하지만 리쾨르는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시간론을 세운다는 것을 미리 유념해 놓자.) 즉 논리적인 입장에서 두 가지 논변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들뢰즈가 시간론을 스토아적인 입장에서 정초했기 때문이다. 물체에 기반했을 경우 시간은 투철한 ‘현재’를 기준으로 파악될 것이다. 비물체적인 효과는 현재를 거의 무효에 다가가도록 과거와 미래로 나눈다. 전자는 분명 ‘실존’하며 후자는 ‘내속’한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후자의 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는 스토아의 존재론적 기여에 대해 오마쥬를 바친다. 스토아학파는 철학사상 “처음으로 존재함의 두 평면(deux plans d'être)을 급진적으로(radicalement) 구분”했다는 것이다(Ibid. 14). “하나는 심층적이고 실재하는 존재의 평면이며,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체적인 무한한 복수성의 평면이다.” 여기서 후자는 바로 생성의 평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둘은 과연 이렇게 간단하게 나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속’이라는 표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철학사상 ‘인과관계’의 새로운 배치를 완성한다. “그들은 원인들을 원인들에 연결시켰으며 원인들 사이의 연계(liason, 운명)을 생각해 냈다. 또 결과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했다.”(Ibid. 15) 그런데 이 둘은 어떤 ‘연계’를 가진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사실상 그 연계 자체가 다른 내용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후자의 연계를 ‘준원인들’(quasi-causes)이라고 별칭한다. 스토아학파가 ‘운명과 필연’을 나눈 것은 이로부터 연유한다. 즉 여기에는 두 가지 연계, “원인들의 연계인 운명의 내재성, 그리고 효과들의 연계로서의 사건들의 외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Ibid.).

이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클리나멘을 도입함으로써 원인과 결과 간의 ‘등질성’과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자유를 확보했지만, 이때에는 “필연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 없는 인과관계”만이 가능하게 된다. 들뢰즈는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사건들이 정확히 [스토아적인] 비물체적인 것들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없는 것, 물질 운동의 순수한 결과, 물체의 능동태와 수동태로서 제시된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이 사건론을 충분히 전개시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들은 그것을 등질적 인과 관계의 요청에 귀속시켰고 또 시뮬라크르에 대한 그들 고유의 개념화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리라.(Ibid. 16).

 

어쨌든 스토아 학파의 철학혁명은 이 ‘새로운 이분법’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가 단지 인과관계의 유형을 나눈 것과는 그 시도 자체가 다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와 범주들을 구분함에 그쳤다면, 스토아 학파는 실체와 범주를 ‘물체’로 일원화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할 수 없었던 ‘비물체적인 것’을 이에 대립시킨다. 이를 들뢰즈는 ‘열외 존재’(초과 존재, extra-être)라 부른다. 여기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존재’가 ‘무엇’(aliquid)이 된다.

들뢰즈는 이에 더해 스토아 학파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처음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결정적인 이유로 스토아 철학이 물체들을 실체와 원인으로 설정하고 “플라톤적 형상(l'Idée)이 지닌 특성들”을 열외 존재, “사물들의 표면에 발생하는 이차적인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으로 본다. 즉 “이념적인 것(l'idéel), 물질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것은 이제 단지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된다.”(Ibid.) 따라서 “이제 모든 것이 표면으로 올라온다”라고 들뢰즈는 선언한다. 스토아 학파들에 의해 비로소 시뮬라크르들이 은폐되지 않고 표면에 올라와 ‘효과들’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인과적 성질이 박탈당한 상태로 제멋대로 돌아 다닌다. 이를 들뢰즈는 스토아 학파의 ‘표면효과’(les effets de surface)라고 부른다.

이제 비로소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성은 비물체적인 사건 자체가 된다(Le devenir-illimité devient l'événement lui-même)”(Ibid. 17).(28) 생성과 사건은 ‘동외연적’(coextensif)이다. 그리고 생성은 명제 차원에서 언어와 동외연적이다.(29) 여기서 보다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역설’이다. 들뢰즈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를 가져오면서 스토아 학파가 역설들을 매우 특이한 방식, 즉 ‘언어 분석의 도구’이자 ‘사건들의 종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밝힌다. 이때 “역설은 본래 ‘연쇄추리’, 즉 계속되는 덧붙임과 잘라냄의 과정을 따라 진행하는 의문 명제들의 계열”이 된다(Ibid.).

 

모든 일이 사물들과 명제들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 한편으로 가장 깊은/심오한 것은 직접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인 것은 언어 안에 존재한다. 역설은 깊이의 추방, 표면에서의 사건들의 펼쳐짐, 이 극한을 따라 발생하는 언어의 전개로서 나타난다.(Ibid. 18)

 

이것은 들뢰즈가 스토아에게서 발견한 ‘표면의 철학’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깊이를 전복하고 표면을 내세움으로써 ‘언어’를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다룬다. 언어란 매우 ‘직접적인’ 어떤 것을 표시한다.

다른 한편 루이스 캐럴은 스토아학파의 역설을 재형상화한다. 이 지점에서 루이스 캐럴은 스토아의 깊이/심층을 결정적으로 ‘표면화’한 인물로 보인다.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땅을 파고 덮는 이 운동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는 횡단 운동에 자리를 내준다”고 말한다(Ibid.). 이렇게 해서 하나의 넓은 규모 안에 생성이 ‘수용된다.’ “깊이 들어가는 대신 옆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가능한 모든 지식이 커튼의 측면을 따라서 펼쳐졌기 때문”(30)이다. 이렇게 해서 스토아 학파의 발견은 루이스 캐럴의 어린 소녀가 발견한 것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난다. 사건들은 심층을 포기하고, 표면/막/거울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지나가면서 하는 한 마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표면을 “물체들을 잡아늘임으로써 비물체적이 되는 표면”(la surface, incorporel à force de longer les corps)으로 묘사한다(Ibid. 20). 이것은 단지 은유적인 표현인가? 사실상 이 표현은 물체와 비물체적인 평면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두 평면은 동일한 존재론적 평면이며, 최대한 고려한다면 동일한 ‘막’인 것이다. 이 표현은 그 다음 페이지에도 나온다. “현실로부터 꿈으로, 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복수화되고, 완전히 개선되며, 그 완전한 경지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은 언제나 표면을, 가장자리를 늘임으로써 이루어지며, 우리는 띠의 힘에 의해 다른 쪽을 따라간다”(Ibid. 21). 이렇게 해서 결정적으로 “안과 바깥의 연속성은 심층의 모든 층위를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매우 미심쩍게도 니체적인 어투로 “모든 사건들에 관련해 유효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un seul et même Evénement)”에 대해 이야기 한다(Ibid.). 과연 이 ‘대사건’은 무언가? 존재의 일의성? 존재의 일관성?(31)

 

2) 명제들과 사건들

이제 들뢰즈는 명제의 평면에서 의미의 계열에 이르는 길을 탐색한다. 이 모든 논의의 전제는 “사건-효과들과 언어(나아가서는 언어의 가능성) 사이에는 핵심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Ibid. 22). 여기서 ‘관계’는 ‘표현’으로 매개된다. 사건은 표현을 통해 언어로 솟아오른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의 특수한 차원에서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다. 들뢰즈는 이를 탐색하기 위해 언어의 명제적 측면으로 향한다. 명제는 이때 세 가지 ‘관계성’을 가진다. 바로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이 그것이다.

첫 번째 관계인 지시(désignation, 또는 지칭; indication)다. 이 지시작용은 명제와 어떤 사태의 ‘개별성’을 표현한다. 들뢰즈에게 개별성은 분명 스코투스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즉 이때의 개별성은 지시되는 이것임(thisness, haecceitas)인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이것임’은 이러저러한 혼합물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일종의 ‘현상의 잡다’처럼 보이는) 이 복합물은 제한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선택되고 선별”된다(Ibid.).(32) 그렇게 해서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사태는 일종의 “단일성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들뢰즈가 플라톤과 스코투스를 어떤 식으로 통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논지전개 과정으로 보인다. 이 점은 중요한 부분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들과 이마주들의 연합이 본래적인 것인가 파생된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 자의적이 것인가를 아는 문제는 여기서 다룰 필요가 없다. 현재로서 중요한 것은 명제 속의 어떤 말들, 언어적 소사(小辭)들이 이마주들의 선별을 위한, 그래서 결국 각각의 사태를 지시하기 위한 빈 형식들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들을 보편적 개념들로서 다루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이들은 형식적인 단일한 것들로서 순수한 ‘지시자’의 역할을 한다(벤베니스트의 용어로는 ‘지칭자’이다). 이 형식적 지시자들이란 예컨대 ‘이것’, ‘저것’, ‘여기’, ‘저기’, ‘어제’, ‘지금’ 등이다. 고유명사 또한 지시자이지만, 이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적절하게 실질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성들을 이루기 때문이다(Ibid 22-23).

 

그러므로 지시작용으로서의 명제는 하나의 ‘빈 형식’으로 기능하는데, 이는 개별성에 대한 스코투스적인 정의 또는 수학적 변수 개념을 도입했을 때 도달해야만 하는 필연적 과정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사 ‘빈형식’에 주목하는 이유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전체에서 이런 식의 ‘불가지론적인 점(point)’이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변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빈 형식’, ‘어두운 전조’, ‘역설적 심급’, ‘특이점’ ... 이 모든 것들을 융합할 수 있는 설명이나 해석 또는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33)

이렇게 지시작용의 중차대한 본질을 ‘빈 형식’에 둠으로써 들뢰즈는 진리에 대한 어떤 혁신적인 정의에 도달한다.

 

진(眞)이란 하나의 지시작용이 사태에 의해 유효하게 수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시자들이 유효하게 사용되었다는 것, 또는 적절한 이마주가 선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진’(恒眞)은 선별할 필요 없이 말들에 연합할 수 있는 무한의 특수한 이마주들이 빈형식들을 채움을 의미한다. 위(僞)는 지시작용이, 선별된 이마주들의 결함에 의해서건 말들에 연합할 수 있는 이마주를 아예 생산할 수 없음에 기인하건, 수행되지 않음을 의미한다(Ibid. 23).

 

명제적 차원은 이렇게 해서 일종의 ‘표면효과’를 일부분 수행하는데, 그것은 ‘유효성’이라는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것은 ‘효과’를 특화하는 진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행성’이라는 기준도 매우 중요하다. ‘수행’은 명제가 가지는 ‘외부’ 즉 어떤 실존(ex-istenz)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효과’를 발생시켜야 한다. 들뢰즈의 진리론은 이렇게 해서 ‘실천철학’의 함의를 띌 수밖에 없다.(34)

이 명제적 차원은 책의 다른 곳에서 변주된다. 즉 “의미는 명제로부터의 추출물”이라는 것이다(Ibid. 45).

 

사람 없는 미소, 촛대 없는 촛불이 그 예이다. 그리고 무한소급과 얇은 이중화라는 두 역설은 양자택일의 대안( … 아니면 … )을 형성한다. 그리고 전자가 우리에게 최고의 능력과 최대의 무능력을 결합시키게 만든다면, 후자는 우리가 나중에 채워야할 과제를 부과한다(Ibid.).

 

두 번째 관계는 ‘현시’(manifestation)작용이다. 이것은 ‘주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현시는 명제와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주체를 연결한다”(Ibid. 23). 따라서 현시작용은 주체의 욕구와 신념을 표현한다. 들뢰즈가 욕구와 신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흄에 대해 착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흄에게 있어서만 욕구와 신념이 인과율을 형성하는 그 정교한 철학사적 기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시는 들뢰즈에 따르면 지시를 가능하게 한다. 현시는 사태들에 대한 주체의 추론과 관련되며, 이를 통해 체계의 통일성을 약속한다. 이를 흄은 ‘연합’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고유명사가 특권적인 지시자이듯이 ‘나’는 가장 기본적인 현시자이다.”(Ibid.)

이제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철학사적인 의미에서 어떤 역설을 발견한다. 흄과 데카르트 중 보다 근원적인 측면을 발견한 것은 ‘흄’인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흄의 발견을 통해 데카르트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면 추론 가능하다. 그는 ‘신념’과 ‘욕망’을 현시작용에서부터 구성한 다음 지시작용에서의 진리론을 지나 현시작용에서의 ‘진실론’이라고 부를 법한 사안을 진술한다. 이것은 데카르트로부터 흄의 방향이 아니라 바로 그 역방향이다.

 

마지막으로 지시작용으로부터 현시작용으로 나아가면서 코기토에 의해 대변되는 논리적 가치들의 위치이동이 발생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진위(le vrai et le faux)가 아니라 참과 거짓(la verité et la tromperie)이다. 데카르트가 (...) 드러내고자 한 것은 코기토 속에서 현시된 ‘나’가 (...) 동일성을 확인해주는 지시의 판단을 정초한다는 사실이었다(Ibid. 24).

 

앞서 한 논의에 따르면 진위가 참-거짓에 앞선다. 즉 선별과 수행, 유효성이 주체에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코기토는 이러한 질서를 뒤집는다. 즉 ‘나’는 지시의 판단을 정초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선별작용의 유효성이 ‘동일성’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동일성이란 주체성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뒤집어진 질서가 과연 들뢰즈에게 ‘진정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시에서 현시에 이르는 이 과정은 ‘허위운동’ 즉 ‘잔여’를 발생시키는 과정이다.(35)

세 번째 관계는 ‘기호’작용(signification)이다. 이는 보편자(the universal)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야 비로소 명제는 통사적 성격을 띄게 되며 기호작용은 논증이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기호작용으로서의 명제는 언제나 다른 명제들과의 ‘관계’ 내에서 정의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들뢰즈는 ‘논증’이라는 말에 대한 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논증이라는 말을 좁은 뜻으로, 즉 삼단논법이나 수학적 논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또 물리적인 확률법칙이나 약속과 참여라는 도덕적 의미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약속이나 참여에 있어 결론의 주장은 결국 약속이 잘 지켜진 순간을 통해 성립하기 때문이다(Ibid.).

 

유의해서 볼 점은 기호작용에서도 지시작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행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수행’은 미래의 약속이 지켜진다는 것을 전제하며, 따라서 논증 전체는 이러한 수행성의 측면에서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조건, 즉 한 명제를 진‘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조건들의 집합이다”(Ibid.). 이 조건은 마치 프랑스어 문법의 ‘전미래시제’와 같다.(36) 따라서,

 

기호작용이 진리를 정초할 때면 동시에 가능한 오류도 정초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의 조건은 위에 대립하기보다는 부조리에 대립한다. 부조리란 곧 기호 작용이 부재하는 상황, 진도 위도 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Ibid. 25).

 

그래서 ‘진/위’라는 이항관계가 아니라 ‘진-위/부조리’라는 삼항 관계가 형성된다. 이것인 지시작용이 정초하는 진리론이 기호작용에 의해 국지화(localization)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호작용이 보다 넒은 ‘담론’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시작용은 하나의 변항을 가지지만 기호작용은 이제 무수한 변항들끼리의 ‘지시’를 다룬다. 말 그대로 이것은 지시작용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킨 후에야 비로소 이 세 가지 명제적 관계들의 선후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현시작용이 지시작용을 정초한다는 앞서의 언급을 상기시키며 그것이 오직 특수한 하나의 관점, 즉 ‘파롤의 관점’에서만 타당하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허위운동’이라는 과정을 가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호작용의 개념성은 기각된다. 기호작용은 ‘나’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직접적으로 포함된(comprise) 하나의 기호작용을 지니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며, 그 자신의 현시작용과 동일한 ‘나’에 의해 종속되는(sous-entendues) 것들로 머문다”(Ibid.). 따라서 현시작용은 파롤의 경우에 있어서만 ‘세계와 신에 관련해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다시 ‘파롤’이다. 어째서 현시는 파롤이 되는가? ‘파롤’은 들뢰즈가 기호작용의 우선성을 논하면서 제기한 ‘랑그’와는 달리 ‘입말’에 해당된다. 그것은 랑그가 쳐 놓은 구조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기호들’이며 보편적 차원이 아니라 개별적 차원에서 의미를 수송하는 소(素)다. 들뢰즈가 파롤을 현시작용에 특화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결국 들뢰즈에게 ‘자아’는 이 파롤들의 ‘놀이’일 것이다.(37)

예고한 것처럼 ‘랑그’에 기반하는 기호작용은 파롤이 자연스럽게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랑그는 “기호화된 개념들이 현시하는 인칭적 존재로서의 자아 그리고 지시된 대상으로서의 사물들과 관련해 일차적인 것이 되는” 그런 지점이다(Ibid.). 이것은 명백하게 구조주의의 관점이며, 말과 개념이 필연적 관련성을 맺게 되는 것이 이러한 관점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지시작용이 유의미해지는 것도 이 개념들의 질서 즉 랑그의 질서 아래서다. 그렇지 않다면 “욕구들은 단순한 필요의 닦달과 구분되는 요구나 의무의 질서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며 신념들은 단순한 의견들과 구분되는 추론들의 질서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Ibid. 26).

논의가 이렇게 진행된다면 필연적으로 기호작용이 지시작용을 앞선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것은 각각의 명제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작용들이 어떤 순환을 형성하는지 알기 위해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지시작용에 대한 기호작용의 우선성이라는 생각 또한 미묘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므로’라고 말할 때, 즉 하나의 명제를 결론지어진 것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한 확언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는 전제들을 한편으로 제쳐놓고 그 명제를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그 명제를, 그것의 기호 작용을 구성하는 논리적 함축들과 독립적으로,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에 관련짓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전제들이 실질상 참인 것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들[전제들] 자체를 하나의 사태에 관련시키기 위해 순수 함축의 질서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또한 전제들 A와 B가 참되다고 가정할 때에도 우리는 그로부터 문제의 명제 Z를 결론으로 제시할 수가 없다. 즉, 우리는 이 명제 Z를 그 전제들로부터 떼어내 논리적 함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긍정할 수는 없다. 그 명제Z를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A와 B가 진일 때 Z도 진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다. 이는 곧 함축의 질서 안에 머무는 명제 C[“A와 B가 진이라면 Z도 진이다”라는 명제]를 구성하며, C또한 “A, B, C가 참이라면 Z는 참이다”라고 말하는 명제 D를 요청하기 때문에 이러한 연쇄를 끝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 다시 말해 기호작용은 결코 등질적이지 않다. ‘함축하다’과 ‘그러므로’라는 두 기호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함축 작용은, 한 번은 전제들 안에서 또 한 번은 결론 안에서, 완수된 지시 작용을 포함함으로써만 지시작용을 정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시에서 현시로 또 기호작용으로, 그러나 또한 기호작용에서 현시로 또 지시로 가면서, 우리는 명제의 원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원환 속으로 끌려들어간다.(Ibid. 26-27).

 

결국 기호작용은 역설로 마무리된다. 기호작용은 지시작용이 가능하지 않으면 스스로 정초될 수 없지만, 지시작용을 통해서는 무한소급에 빠진다.

이 세가지 작용의 순환을 언급한 것은 이 다음의 논변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건’ 즉 ‘의미’의 차원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네 번째 차원’이라고 말한다. 이 차원은 “순간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바깥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차원”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사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다”(Ibid. 28). 이 언급을 두고 보았을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의미’가 결코 ‘경험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것이 ‘초재적’인 차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이 차원을 ‘권리’의 문제라고 언급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즉 이 차원은 내재적인 장에서 요구되는 것이지 경험을 넘어서 경험을 향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의미의 차원은 곧 사건의 차원이다. “즉 순간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바깥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차원[사건의 차원]을 도입해야 한다.”(Ibid.) 하지만 이 차원에서도 단서가 될 만한 하나의 사실적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의미와 지시’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의미는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의 세 차원 중 하나 안에 놓일 수 있는가 (...) 의미의 역할은 분명 명제를 진이나 위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으며, 또 이 값들이 효과화되는 차원에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지시작용이 의미를 전제한다는 것, 그리고 지시 작용을 시행하기 위해 우리가 의미 안에 단번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하다.(Ibid.)

 

들뢰즈의 이 언급 안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우리의 지성이 단번에 사태에 진입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유일한 사실의 문제는 의미와 지시 작용 간의 관계가 매우 ‘즉자적’이라는 데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의미와 현시의 관계를 논하면서 들뢰즈는 이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분명하게도, “지시자들 자체가 명제 속에서 현시되는 ‘나’의 기능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가능성조차도 단서를 달아야 한다. 그것이 세 번째 관계인 의미와 기호작용과의 관계다. 말하자면 현시작용에서의 ‘나’(자아)는 파롤의 담지자이지만, 그것이 의미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랑그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그 ‘구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호작용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랑그의 질서 안에서 자체적으로 전개되는(développée) 기호 작용들을 포함하는(enveloppe) 한에서만 파롤의 질서 안에서 일차적이고 또 충분하다. 이 기호 작용들이 무너진다면(s'effonfrent) 또는 자체로서 수립되지 못한다면 (...) 인칭적 동일성은 신, 세계, 자아가 잘못 규정된 누군가의 꿈이 만들어낸 몽상적인 존재들이 되는 한에서 상실된다.(Ibid. 29)

 

하지만 들뢰즈는 기호작용 조차도 “최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호작용은 (...) 환원불가능한 지시작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Ibid.) 이렇게 되면 이들 삼항의 의미와의 관계는 이상한 악순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조건지어진 것을 조건에, 그리고 조건을 조건지어진 것에 끊임없이 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Ibid.) 이 패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들뢰즈는 의미의 차원을 이들 악순환적인 관계 외부에 설정함으로써 이를 해결한다.

 

참의 조건이 이 결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건지어진 것의 형식과는 구분되는 하나의 고유한 요소를 사용해야 할 것이며, 또 그 조건은 지시작용 및 명제의 다른 차원들의 실질적인/물질적인(réellle) 생성을 확보해줄 무조건적인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참의 조건은 개념적 가능성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내용으로서 또는 이념적인(idéelle) ‘자리’(couche)로서, 다시 말해 기호작용이 아니라 의미로서 정의될 것이다(Ibid. 29).

 

이렇게 보았을 때, 이전의 시도들, 즉 지시, 현시, 기호 작용과의 ‘관계’를 탐구했던 것은 귀류법적인 깨달음의 과정이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세 작용들의 ‘의미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그 ‘형식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내용’이며, 그것은 어떤 “이념적인(비물체적인) 자리”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표면효과’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빈자리’로서 그 효과는 의미의 ‘내용’을 이룬다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내용이 ‘빈자리’일 수 있는가?

의미는 명제로 ‘표현’된 것이며, 사건이다. 또한 이것은 “사물들의 표면에 존재하는 이념적인(비물체적인) 것이며, 환원 불가능한 복합적 존재이며, 명제 속에 내속하거나 존속하는 순수한 사건이다.”(Ibid. 30)

이와 같은 사건-의미 해석은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토아적인 어투로 “명제 또는 명제의 항들과도, 또 명제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사태와도, 또 체험된 것, 표상, 또는 명제 속에 표현된 것의 정신적 행위와도, 나아가 개념들 또는 기호화된 본질들과도 혼동되지 않는 어떤 것(aliquid)이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Ibid.)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의미’다.

스토아학파에게 있어서 의미는 말이나 물체, 표상 심지어 인칭과도 무관한 ‘중성적’인 것이다. 이렇게 사건을 간파하려는 시도를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Snark) 사냥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의미는 스나크 자체다. 의미가 잡히지 않는 스나크인 이유는 이것이 물체적인 평면에도 정신적인 평면에도 속하지 않는 비물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미의 비물체성을 보다 적확하게 지적하기 위해 들뢰즈의 언급을 음미해 보기로 하겠다.

 

의미와 관련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existe) 말할 수조차 없[다.] 즉, 그것은 사물들 속에 존재하는 것도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물리적 존재인 것도 정신적 존재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의미는 무효하고(inefficace), 되돌릴 수 없고 비생산적인 광휘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Ibid. 31)

 

이것은 어쩌면 들뢰즈가 스토아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음성을 발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의미가 정신에도 사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유용하지도 않으며 생산적이지도 않다. 또한 이것은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의 인식은 오로지 간접적인 경로만을 허용하는 것이다.(38) 그리고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학이 경험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의미의 차원이 그 자체로서, 그 환원 불가능한 모습으로, 나아가 명제의 경험 독립적이고 내적인 모델을 활성화시키는 생성의 힘과 더불어 등장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그 원환을 찢을 때, 그것을 길게 펼칠 때, 그것을 쭉 펼 때뿐이다. 의미의 논리학은 경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 경험주의는 플라톤적 형상들에 떨어지지 않고서 가시적인 것의 실험적 차원들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리고 길게 펼쳐진 경험의 극단에서 하나의 환영을 추적하고 자극하고 아마도 생산하기까지 할 그러한 경험주의이다.(Ibid. 31-32)

 

따라서 이러한 경험주의는 물체적인 대상에만 천착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물체적인 것이 효과로서 환영들의 배치를 통해 하나의 인식을 달성하는 것이다.(39)

의미는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의미-사건은 명제 안에 내속한다(또는 존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가 명제 자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즉 “그것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객체성’(objectivité)(40)을 지닌다.”(Ibid. 32) 이렇게 ‘표현된 것’(의미)과 ‘표현’(명제)의 본질적인 구분은 의미를 사태의 부대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의미’는 하나의 주어로서 관건적인 표현의 형식을 획득하지만, 사건의 차원에서(존재론적 층위에서) 그것은 오히려 사소해 보인다. 그래서 들뢰즈는 의미를 ‘열외 존재’(extra-être)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의미는 분명 명제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41) 아니 그게 과연 ‘존재’하기라는 규정성 안에 포착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의미는 명제로 표현된 것 또는 표현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사태의 부대물(l'attribut de l'etat de choses)이다. 그것의 한쪽 얼굴은 사물들로 향하며, 다른 쪽 얼굴은 명제들로 향한다. 그러나 의미를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명제가 지시하는 사태나 성질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미는 정확히 명제들과 사물들의 경계선이다(Il est exactement la frontière des proposition et des choses)(Ibid. 34).(42)

 

이렇게 경계 있는 의미-사건은 정확히 스토아적 의미의 ‘무엇’(aliquid)과 일치한다.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이념적인 것은 물체적인 것의 경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사건을 어떤 사태와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사건을 한 사태에서의 그것의 사공간적 현실화와 혼동하지 않는 한에서”(à condition de ne pas confondre l'événement aves son effectuation spatio-temporelle dans un état de choses)만 사건은 의미가 된다(Ibid.). 따라서 우리가 통상 역사적 사건이라 일컫는 것은 ‘사건’이라기보다 ‘사태’에 가까운 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일종의 ‘통속적인 사건론’ 또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사건론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란 곧 의미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명제’라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명제 자체는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건은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지 역사적 사건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명제와 그 역사적 사건에 내속하는 그 ‘무엇’(aliquid)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3)

 

3) 사건의 개념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들뢰즈의 의미-사건론에서 구분되는 개념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état de chose(사태), événement(사건), accident(사고)=l’effectuation temporelle de l’événement(사건의 현실화[효과화]). “사건을 한 사태에서의 그것의 사공간적 현실화와 혼동하지 않는 한에서”만 사건은 의미가 된다(Ibid. 34)는 구절. 여기서 ‘한 사태에서의 그것의 시공간적 현실화’는 바로 ‘accident’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태란 ‘물체’(somata) 자체의 능동/수동 관계이기 때문에 보다 심층적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공-간(spatium)에서는 사건들이 무한속도로 발생한다. 그것이 사태 안에서 현실화(effectuation)될 경우 ‘사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événement pur(순수사건)에 관한 다음 구절도 유의하자. “이 불모성 또는 이 빛나는 중성. (...) 요컨대 모든 대립물들에 무관한 상태. (...) 모든 대립을 뛰어넘는다는 바로 이 점이 순수 사건,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스토아적] 운명의 지위가 아닌가? 사적인 것도 공적인 것도 아닌, 집단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아닌, 동시적이라는 점에서 이 중성 안에서 그만큼 무섭고 능력 있는 지위.” “그들[부조리한 존재들]은 ‘열외 존재’이자 또 구체적인 사태로[사태 안에서] 현실화되지 못하는[ineffectuable] 이념적인 순수 사건들이다.”(Ibid. 96-97) “직선이자 빈 형식인 이 아이온은 사건-효과들의 시간이다. (...) 순수사건은 이야기[소문, 중편소설, nouvelle]와 뉴스[동화, 단편소설, conte]일 뿐 현실성(현행성, actualité)은 아니다. 사건들이 기호들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Ibid. 138) 따라서 사건 중에서도 ‘순수사건’은 현실화(효과화)되지 못한 사건들이며, ‘사고’가 되지 못한 사태들 또는 사건들 자체이다. 그리고 l’Evénement(대사건). 대사건은 이러한 사건들 모두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영원회귀와 연관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아이온의 시간과 관련하여 효과화[현실화, effectuation]되는 것, 즉 ‘사고’는 그것의 ‘사태’와의 육화[구현, incarnation]와 물체화[incorporation]를 통해 측정(나는 이 측정을 스토아의 용어를 빌려, eukairia[최적기]라고 부른다)된다는 것. 이상의 복잡한 개념들의 얼개를 반드시 구별해야 들뢰즈 의미론, 사건론과 시간론의 단초가 잡힌다. 또한 우리는 ‘effectuation’과 구별하여 ‘actualisation’을 구별할 필요도 있다. “우선 특이성-사건들은, 계열들 간의 차이들을 분포시키는 포텐셜 에네르기를 갖춤으로써, 안정적이지도 또 불안정적이지도 않은, 정확히 말해 ‘준안정적인’(métastable) 한 체계 안에서 조직되는 이질적 계열들에 상응한다(에네르기 포텐셜은 순수사건의 에네르기이다. 반면 현실화[현행화, actualisation]의 형태들[formes]은 사건의 효과화들[현실화들, effectuations]에 상응한다).”(Ibid. 195)(44) 즉 들뢰즈에게 ‘현행화’(actualisation)라는 규정은 대개 순수 사건의 잠재적인 에네르기가 특이성(sigularité)-사건으로 효과화(현실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행화되는 특이성들의 형식은 따라서 현실화(효과화)되는 사건들[사고들]에 상응한다. 여기서 미묘한 구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현행화(actualisation)가 효과화(현실화, effectuation)에 앞서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상응한다’(correspondent)는, 준안정적인 장(lieu, champ)에서의 이질적인 계열들로 현행화되고 그 형태들(formes)에 ‘맞춰’ 사고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준안정적인 장은 곧장 시몽동의 ‘전개체적 특이성의 장’과 연동된다.(45) 다시 말해 특이성이란 전개체적인 장에 속하면서, 이 장을 지나 이질적으로 개열화되는 것은 바로 특이성이며, 이 특이성이 사고로 현실화되는 것(이것은 ‘특이점’이다)은 개체화(individuation)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개체들은 사고들의 계열화를 이룬다. 개별화(individualisation)는 이 다음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개별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안다는 것은 우선 ‘권리상’의 문제가 된다.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논리학적 저서들과 문학적 저서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사건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 단초를 설명하고자 한다.

 

캐럴의 모든 논리학적 저작들이 직접적으로 기호작용, 그리고 논리적 함축들과 결론들에 관련되며, 단지 간접적으로만(기호 작용이 해결하지 못하는, 나아가 그것이 유발하는 역설들의 매개에 의해) 의미에 관련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반면, 그의 환상적인 작품들은 즉각적으로 의미에 관련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역설의 잠재력에 연결시킨다. 이는 의미의 두 상태-사실상과 권리상, 후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en fait et en droit, a posteriori et a priori)-에 제대로 상응한다. 전자에 의해 우리는 명제의 원환으로부터 의미를 간접적으로 추론(infère)하며, 후자에 의해 명제들과 사실들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원환을 펼침(dépliant)으로써 의미를 그 자체로서 드러나게 만든다.(Ibid. 34-35)

 

들뢰즈는 여기서 캐럴의 논리학을 ‘추론’을 통한 간접적 구성으로 문학을 ‘펼침’을 통한 직접적 구성으로 바라보고 있다.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은 상상력의 펼침을 추월하지 못한다. 이 방면에서도 들뢰즈는 일정하게 플라톤적 전통을 전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플라톤에게 ‘추론’은 dianoia로서 수학적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플라톤(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이 그의 최고의 지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한 noesis는 이런 단순한 추론에 해당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추론적 지식이 아니라 nous에 따라 ‘단번에 직관’하는 지식을 진정한 지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그래서 들뢰즈의 반플라톤주의가 가지고 있는 급진성이 어떤 경로를 거쳐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 살필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과연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도발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도 생각하게 만든다.

어쨌든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경우를 분석하면서 계열 간의 ‘공명’에 대해 논한다. 우선 심층에서는 신체적 배치가 드러난다. 캐럴의 『실비와 브루노』를 인용하면서 들뢰즈는 어떤 신체성의 단위를 떼어와 예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먹는 것/먹히는 것’은 심층적 혼합물의 유형이며, 말은 표면에서의 사건의 운동이다.(46) 그러나 말은 심층의 작용이 상승되도록 한다. 즉 말(parole)은 심층으로부터 물체들을 떼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표면의 환각들[환상들, phantasmes=시뮬라크르]이 심층의 환상들[환각들, hallucinations]을 대체”한다(Ibid. 36). 이 관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사물들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편으로 사물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성질들과 객체적(réelle) 관계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비물체적인 사건들을 나타내는 이념적이고(idéaux) 논리적인 부대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명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편으로 사태를 지시하는 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사건들이나 논리적 부대물들을 표현하는 동사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단수 고유 명사들과 척도, 멈춤과 정지, 현존들을 표식하는 주어들/명사들과 일반 형용사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생성과 [이 생성의] 가역적 사건들의 연쇄를 동반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쪼개지는 현재를 가진 동사들이 존재한다.(Ibid. 37)

 

이 ‘투과불가능성’(impénétrabilité)은 이 말뜻 그대로의 어떤 사물의 성격으로서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스토아적 의미에서 이것은 사물에 부대하는 이념적 대상이다. 이것은 “두께 없는 비물체적 투과 불가능성”으로 표현되며, “사건들이 되돌릴 수 없음(impassibilité)”을 지시한다.

그런데 사건의 차원에서 이러한 경계지점은 ‘표현’의 관계로 요약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거울의 저편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지시작용의 관계에서 표현의 관계로 중간 매개 없이, 즉 현시작용과 기호 작용 없이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언어가 지시된 것들과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고 다만 표현된 것들 즉 의미와 관계 맺을 뿐인 영역에 다다랐음을 말한다.” 지시와 현시와는 무관한 이러한 도약은 주체와 기호의 불가피성을 논하는 고전적 논의를 거스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원성의 마지막 자리옮김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원성]은 이제 명제의 내부로 이행한다”(Ibid. 38)

 

3. 이 장의 결론-긴장과 울림

이제 다른 장들에 비해 훨씬 긴 이 장의 종합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우선 리쾨르의 사건-의미와 들뢰즈의 의미-사건은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서로 유사하면서 차이가 난다.

첫째, 이 둘은 공히 의미와 사건을 연결하면서, 의미로서의 사건이자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여기서 ‘의미’는 사건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인데, 리쾨르는 이것을 담론적(명제적) 차원에서 ‘문체로서의 사건’이 발화행위 차원에서 의미화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리쾨르의 ‘의미’는 사건화된 것을 문장과 텍스트 내에서 수용하면서 해석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리쾨르의 의미는 네 번째 항을 형성하지 않고, 들뢰즈의 삼항 안에서 움직인다. 즉 그것은 지시하고 현시하며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재료로서의 의미는 해석과 더불어 출현하는 것이지, 의미가 파악되고 해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미의 파악이란 이미 해석적인 과정 즉, 이해의 과정이 선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리쾨르에게서도 의미는 단번에 그 장에 진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를 사건의 차원과 존재론적으로 ‘붙어 있는’ 비물체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점은 들뢰즈에게 의미가 사건이라는 존재론적인 항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스토아적 확신이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 ‘사건’의 차원이 드러난다.

둘째, ‘사건’에 있어서 리쾨르와 들뢰즈는 그것이 발생하는 지점을 어떤 ‘표면’으로 상정한다는 것에서 일치한다. 리쾨르는 사건이 명제의 차원, 즉 언어적 표면에서 의미와 더불어 발생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해석되고 순환하면서 의미를 ‘충전’하는데, 최종적인 단계인 전유에 이르러 이것은 다시 사건화된다. 즉 리쾨르의 ‘사건’은 의미를 매개로 하여 순환하면서 ‘자기’에게 되돌아 오는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사건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사고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그 특유한 ‘잠재태’라는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그것은 리쾨르에게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문맥과 텍스트 또는 파롤에서 명시적으로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해석’의 망을 벗어나는 시뮬라크르거나 잠재적인 장으로 물러나는 특이성-사건이다. 여기서 바로 시간성의 차원이 들뢰즈에게는 존재론적인 특성을 더 많이 가지게 되는데, 리쾨르에게서 시간이란 바로 ‘이야기성’의 차원에서 펼쳐질 어떤 이념적인 것이 된다. 또한 들뢰즈에게 사건이란 하나의 대사건이 가지는 우발성이 점차적으로 실현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도대체 잠재적인 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함축을 가지지만 비물체적이고 이념적이지만 그 ‘효과’의 측면에서 분명히 물질성을 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은 잠재적 장에서 솟아오르면서 표면효과(사고)를 발생시키지만,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단지 과학적인 유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탐구를 더 진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렇게 해서 리쾨르의 ‘사건-의미’는 무한한 해석학적 순환을 거쳐 지평을 확대해 가는 특성을 가지면서, 자기성으로 회귀하지만, 들뢰즈의 ‘의미-사건’은 무한성 자체, 즉 잠재적 장 자체로 계속해서 물러나고, 함축된다. 요컨대 리쾨르의 편에서 그것은 분명 ‘탈은폐’의 과정이지만 들뢰즈의 편에서 그것은 ‘은폐’의 과정에 더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리쾨르에게 ‘해석’은 일정한 갈등을 드러내는 ‘논쟁’적 지점을 늘 간직하지만, 들뢰즈에게 ‘해석’은 늘 유예되거나 단지 ‘사고’나 ‘사태’로서 소극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사건과 의미는 어떤 ‘이야기’, ‘소설’, ‘허구적인 것’ 안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 모두 이러한 허구적인 것들이 형성하는 하나의 장이 예술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것이다.(47)

따라서, 리쾨르는 과녁을 정조준 하는 화살의 긴장이며, 들뢰즈는 한껏 뒤로 젖혀진 활의 긴장이지만, 그 안에서 어떤 풍부한 음악적 울림, 문학과 예술의 리듬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둘의 울림, ‘공명’을 다음 두 장에서 살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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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뢰즈와 리쾨르를 비교하고, 사건과 의미의 차원에서 이들을 대면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여기서 ‘사건 자체’라는 잠재성의 차원이 ‘사건화된 사건’이라는 현실성의 차원으로 진행하는 데 있어서 ‘의미’의 지도리를 본다. 그런데 이런 둘의 접면에서도 ‘의미’는 그 내용에 있어서 상이하다. 이 상이성을 존재론과 시간성의 차원에서 정위하는 것이 나의 과제다.

(2) “문학적 텍스트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인가? 나는 작품의 세계인 어떤 세계에 관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겠다. 나는 결코 텍스트가 어떤 세계 없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 안에서 이제야 인간은 상황(Umwelt)이 아닌 세계(Welt)를 가진다>고 말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심리적 의도의 보호감독으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해방시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물적 지시체의 한계로부터 자신의 지시체를 해방시킨다.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는 텍스트에 의해 열려지는 지시체들의 전체이다.> (...)[텍스트는] 상황이 소멸된 후에도 지속되는 비상황적 지시체를 묘사[한다.] 이 비상황적 지시체는 가능한 존재양태들로서, 그리고 우리의 세계-내-존재의 가능한 상징적 차원들로서 제시된다”(RHH 177). 이 진술과 바로 뒤에 나오는 진술은 거의 해석학적 ‘선언’에 가깝다. 인간의 유한성은 바로 ‘상황’이다. 하지만 해석학은 텍스트를 다룸으로써 그 상황을 넘어 ‘세계’ 자체를 전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의 ‘세계성’이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와의 비교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들뢰즈에게는 이 진술이 뒤집어져 있다. 즉 ‘세계는 텍스트이다’ 세계는 펼쳐지고, 함축되고, 되펼쳐지거나 복잡화된다. 리쾨르는 텍스트에서 세계로 가며, 들뢰즈는 세계에서 텍스트로 간다.

(3) “문학작품의 맥락에서의 지시체의 성격은 해석의 개념을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텍스트의 의미가 텍스트의 뒤가 아니라 텍스트의 앞에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는 감추어진 무엇이 아니라 탈은폐되는 무엇이다. 텍스트의 비실물적 지시에 의해 어떤 가능성들의 세계가 지시됨으로써 이해가 일어나게 된다. (...) 말해진 언어에서 실물적 지시가 하는 역할과 동일한 역할을 씌어진 텍스트에서는 탈은폐가 수행한다. 따라서, 해석은 텍스트의 비실물적 지시들에 의해 열려지는 제안된 세계에 대한 이해(apprehension)가 된다. (...) 이해하는 것은 (...) 독자로서의 나의 상황 너머로, 그리고 저자의 상황 너머로, 나는 텍스트가 내게 열어 보여 주는 세계-내-존재의 가능한 양태에 나를 내어준다. 이것이 바로 가다머가 역사적 지식에서의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Ibid. 177). 따라서 이해에 따른 지평융합이 존재한다.

(4) 이 두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So understanding is quite different from a constitution of which the subject would possess the key. In this respect, it would be more correct to say that the self is constituted by the ‘matter’ of the text.” 여기서는 ‘이해’의 실체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주체는 처음부터 어떤 이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상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해의 능동성으로조차 상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쾨르는 이 부분에서 어떤 ‘구성하는 주체의 이해’가 아니라 ‘이해하는 자아(자기, the self)의 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아’는 이해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의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자아며, 수동성의 형상을 띄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수동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리쾨르에 따르면 이 출처는 ‘담화-사건→의미화’의 과정이며, 들뢰즈의 편이라면 ‘의미화→사건’일 것이다. 전자는 의미론적 응축의 과정이며, 후자는 사건론적 소산의 과정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사건의 철학과 두 개의 의미의 철학을 본다. ‘의미--->[사건 >의미]--->사건’(실선은 리쾨르, 점선은 들뢰즈). 이 과정은 다른 곳에서 더 복잡한 사유 이미지로 나타날 것이다.

(5) 나는 이렇게 어떤 실존의 기반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역설을 ‘비극적 역설’이라고 하고 싶다. 이런 방식의 역설은 보통 우리 삶의 ‘유한성’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6) 글의 말로의 역류. 리쾨르는 이것을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텍스트의 행위 결정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 사건으로 전화하는 순간이 바로 이 ‘역류’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글이 가지는 이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가 될 것이다.

(7) 텍스트가 ‘파롤’이 됨으로서 ‘사건’이 되는 것, 그것은 원초적인 ‘말’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의 계기가 되었던 그 사건 즉 “들고 읽어라(tolle lege), 들고 읽어라”라고 했던 그 사건, 그리고 그가 그 텍스트를 읽고(로마서 13장 13절) 결정적인 신앙의 회심을 겪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예가 특유한 것은 ‘(원초적) 말→텍스트(글)→(사건의) 말’로 가는 그 순환성이다. 리쾨르라면 최초의 이 원초적인 말을 ‘계시’라고 명명할 것이다.

(8) 다른 곳에서 리쾨르는 이 ‘전유’를 사건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전유로서, 해석은 사건이 된다”[326].

(9) “모든 해석학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거리와 싸우는 것 (...) 세속적 소외와의 싸움 (...) 의미 자체로부터의 소외, 다시 말하면 텍스트가 근거하고 있는 가치체계로부터의 소외와의 싸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석은 ‘함께 모으며’, ‘같게 만들며’, ‘동시대적이고 유사한 것으로’ 만들며, 그리하여 처음에는 ‘낯설었던’(alien) 것을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own) 것으로 만든다.”(Ibid. 159) 하지만 해석은 모아지지 않는 것, 다른 것, 비동시대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끝내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이것은 해석 자체의 지평이다.

(10) 여기서 리쾨르가 ‘의미적 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사건적 의미’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 방점은 사건이 아니라 의미에 두어져 있다. 하지만 뒤의 문장들은 명백하게 ‘의미’가 ‘사건’이 된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리쾨르 해석학의 ‘잔여성’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리쾨르가 들뢰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맥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사건과 의미는 항상 동시적이며, 그 동시성은 ‘아이온’이라는 시간성의 차원에서 가능한 것이다. 사건론과 의미론이 어째서 겹치며, 그것이 어떻게 시간론과 연결되고, 또한 전체 존재론의 구도를 완전히 일신하는가라는 것은 여기에 달렸다.

(11) 이 놀라운 규정을 잘 봐야 한다. ‘은유들만이 사건인 동시에 의미’이다. 의미와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은유의 지평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12) 이 ‘은유적 비틀림’과 ‘의미론적 사건’은 리쾨르의 의미론과 들뢰즈의 의미론을 이어준다.

(13) 이와 관련하여 리쾨르는 상상력의 ‘힘’, 즉 은유를 만들어내는 힘이 ‘상’의 생산이 아니라 ‘의미’의 확보와 생산이라는 특별한 주장을 한다. “상상력의 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상’(像, image)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도록 하는 능력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 상상력의 힘은 상에 의해 운반되지 않고 우리의 언어 안에서 떠오르는 의미에 의해 운반될 것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언어의 차원으로서 다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상력과 은유 사이에 새로운 연결점이 나타날 것이다”(Ibid. 189).

(14) 허구와 상징은 곧 삶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것은 들뢰즈에게서 허상의 역할과 같다. 가면을 바꿔쓰는 그 허상들과 어린아이같은 놀이자, 이 둘은 동일하다.

(15) 특히 후설의 후기 현상학에 대한 리쾨르의 비판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후설은 하나의 근본적인 사실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의 경험적 실재성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미 주어진 의지의 약화와 격정(열정, passion) 안에서의 의지의 은폐에 관한 것이었다. 반대로 우리는 이 잘 알려지고 불분명한 초월적 환원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항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환원이 인격적 신체(personal body)에 대한 원초적 이해에 있어서 장애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RVI 7.

(16) 어떤 세계인가? 의미론에서 존재론으로 가는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17) 지칭의 힘은 그러므로 ‘계시’로부터 나온다.

(18) 『시간과 이야기』는 영역판의 쪽수를 기재한다.

(19)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 우리는 ‘단번에’ 의미 안에 자리잡는다. (...) 의미는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 늘 전제되어 있다. 나는 이 전제 없이는 말을 시작할 수 없다. (...) [그런데 이것은] 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말할 수 없으며 또 어떤 사물과 그것의 의미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과 말들에 대해 말하는 언어의 무한한 능력을 증명해준다. 요컨대, 하나의 사태를 지시하는 하나의 명제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명제의 의미를 다른 명제에 의해 지시되는 것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DLS 41)이와 같은 방식, 즉 언술주체의 무능력이 언어의 무한한 능력을 증명하는 방식, 또는 의미의 재현이 의미 자체의 은폐를 가중시키는 이런 방식은 사건과 사태에 그대로 적용된다.

(20) 이 부분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이 있다. 재번역한다: “스토아 학파의 특권적 위치는 철학자의 새로운 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소크라테스주의와 플라톤주의와는 결별한다.(en rupture avec les présocratiques, avec le socratisme et le platonisme) 이 누락된 곳에서 주목할 점은 들뢰즈가 스토아 철학자들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변별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반부에 엠페도클레스를 데려오는 부분은 이 언급과는 다소 괴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21) 다소 수학적이고 과장된 표현들을 동원하며 말하고자 했던 바란 간단히 말해서 각각의 계열이 다른 계열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별이 다른 별자리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는 ‘성좌’란 그것을 의미한다. 이때 주사위 놀이는 별자리들의 운행에 역동적인 특징을 부여하는 것이며, 들뢰즈가 이 책 전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우발성’의 상징이고, 또한 aion의 놀이(헤라클레이토스에게 바치는 오마쥬)인 것이다.

(22) “그래서 각각의 계열에는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학적이고 위상학적인(topiques) 형상들(figures)이 대응한다. 마치 순수한 표면에서처럼(Comme sur une surface pure), 한 계열 내의 일정한 형태를 구성하는 점들은 다른 형태들의 어떤 점들을 가리킨다(renvoient). 주사위놀이와 조화를 이루는 문제들의 별자리들은 이야기들과 장소들, 하나의 복잡한 장소, ‘얽힌 이야기’에 대응한다(l'ensemble des constellations-problèmes avec les coups de dés correspondants, les histories et les lieux, un lieu complexe, une 'histoire embrouillée'). 이 책은 논리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소설이 되고자 한다(Ibid. 9).” 물론 이 때의 ‘이야기’(histoire)가 리쾨르의 이야기(récit)와 동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친연성은 어쩌면 매우 크다. 리쾨르이 이야기든 들뢰즈의 이 이야기든, 허구적인 것을 통해 실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중요한 매듭이다.

(23) 시간론을 다루는 장(章)에서 말할 테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들뢰즈에 유비해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시간이란 현재를 ‘기점’으로 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후에야 그는 현재라는 시간의 ‘덧없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때의 ‘비켜간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현재는 비켜가며 과거는 응축되고, 미래는 이완(기대)되는 것이다. 들뢰즈와는 반대 편에서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적극 수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에 보게 될 것이다.

(24)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수생성 즉 형상의 작용을 비켜가는 시뮬라크르를 고려하지 않고 일차적인 구분에 머물러 진행된 논쟁이 중세보편논쟁이다. 그 예외는 둔스 스코투스로 보인다. 그는 개별자가 순수생성의 한 측면 즉, ‘이것임’(haecceitas, thisness)을 간파했다. 중세적 사유 이미지로부터 가장 멀었던 중세철학자 오캄의 경우조차도 개별자는 존재자였지 생성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발견은 매우 놀랍다.

(25) 

플라톤의 이 구분은 『국가』편의 ‘선분의 비유’에는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다. 즉 플라톤이 이러한 생성의 사유이미지를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후기에 와서다.

eidolon[환영]

※현대어: fantôme

eikônes[모상]

: 형상(Idée) 수용

phantasmata[환상, 허상] (pahntasie, phantasme, simulacre)

: 형상 거부

여기서 개념과 관련해서 짚고 넘어 가야 할 점이 있다. 국역본 91쪽의 주에서 역자는 ‘phantasme’을 ‘환각’으로, ‘fantom’을 ‘환영’으로 hallusination은 ‘환상’으로 한다는 번역지침을 밝혔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나오지 않는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 말들은 모두 플라톤 ‘선분이 비유’에서 최하위의 실재들과 관련이 된다. 그것은 ‘eikones’며 이는 ‘모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데아의 모방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상의 더 아래 단계에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phantasmata’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것이 더 하위의 단계인 이유는 그것이 형상적 규정을 거부하거나 피하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phantasmata’는 들뢰즈도 그렇게 말하듯이 바로 ‘simulacre’(‘허상’ 또는 ‘환상’)다. 따라서 ‘phantasme’은 내 생각에 ‘환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smulacre가 가지는 ‘허상’의 의미를 더 주기 위해서는 그대로 ‘시뮬라크르’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는 한 가지 용어가 더 있는데, 그것이 ‘eidolon’이다. 이것은 이마쥬, 즉 ‘영상(映像)’이라고 옮기는 것이 옳다. 이마쥬는 어떤 경우 ‘모상’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 ‘허상’이기도 하므로, 어떤 불분명한 형태를 가진, 어떤 규정성을 가지지 못하는 미지의 것이란 의미에서 ‘환영(幻影)’이라고 하는 것도 맞다. 여기 들뢰즈가 사용하는 fantom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므로, 마땅히 fantom도 ‘환영’이 적당하다 하겠다. 그런데 hallusination을 ‘환영’이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다 적확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게 되면 phantasmata에 해당되는 phantasm이나 simulacre를 옮길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hallusination을 ‘환각’이라 하고 phantasme을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사적으로도 아귀가 맞고, 들뢰즈의 맥락에서도 통한다. hallusination은 phantasme이 가지는 실증성과는 달리 어떤 심리적인 미약성이나 약물을 섭취한데서 오는 초월적인 정신효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 ‘물체들’의 원어는 ‘sômata’다. 그리고 asômata가 여기 대응한다. 물체와 비물체는 ‘사태’와 ‘사건’을 구분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한다.

(27) 리쾨르의 시간론을 ‘사건론’과 함께 놓는다면, 그것은 바로 사건적 독해 방식이 될 것이다.

(28) 여기서 우리는 생성과 사건의 미묘한 차이를 알게 된다. 즉 생성이 사건으로 되는 것이다. 사건이 생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 둘은 (뒤에서 들뢰즈가 말하다시피) 동외연적이다.

(29) 사건과 생성과 언어 간의 연관성에 대한 중요한 진술이 이 페이지의 이 문장에 담겨 있다.

(30) 들뢰즈의 이 페이지의 언급들에는 “심층에서의 주름잡힘은 사라진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 저작 이후 라이프니츠에 관한 저작에서 ‘주름’은 관건적인 개념이 될 것이다.

(31)  지금까지의 들뢰즈의 논의를 거칠게 도시화하면 다음과 같다.

asomata - Aion - evénement pur(→Evénement) - devenir - pasée/futur

⟰effets=les effets de surface

somata - Chronos - présent

(32) 따라서 지시작용으로서의 명제의 사태는 플라톤적인 선별작업에 긴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3) 나는 이런 지점들이 들뢰즈의 체계가 가지는 ‘해석학적 요청’이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들뢰즈는 해석학을 ‘늘’ 비껴가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들뢰즈를 ‘반플라톤주의자’ 또는 ‘반헤겔주의자’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기만 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는 해석학자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집스럽게 ‘들뢰지앙’임을 선언하는 일군의 해석가들에게 이런 질문 자체가 매우 의아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34) 들뢰즈는 그의 철학 초기부터 ‘실천철학’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경험론과 주체성』은 궁극적으로 실천철학자로서의 흄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35)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잔여화’ 과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즉 이것은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사태가 발산하는 과정이며, 반드시 해석적 과정이 요구된다. 허위 운동으로서의 잔여화과정은 해석을 통해 진정한 실천적 차원으로 이동할 준비를 끝낼 수 있다. 잔여는 허위운동의 동인이다.

(36) 이런 ‘전미래시제’적인 사유방식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알튀세르 이후 네그리에 이르기까지 혁명론 나아가 시간론을 사유하는 좌파적 방식에는 항상 ‘도래하는 것’에 대한 수행의 신념이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가 이 수행론을 논하는 부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적 측면이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 ‘수행’이 가지는 의미를 탐색한다(『한 타자로서의 자기자신』). 윤리적 평면과 정치적 평면, 해석의 평면과 해체의 평면이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는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37) 파롤은 음성차원에서 펼쳐진다. 음성차원은 반드시 중심성을 해체한다. 이런 면에서 여기서 들뢰즈가 주체를 강조하는 것은 농담처럼 들린다. 논지를 비틀어 간접적으로 주장을 내세우는 이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에이로네이아를 닮았다.

(38) 여기서 들뢰즈의 스나크 사냥(의미파악)이 리쾨르의 해석학적 ‘우회’와 닮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리쾨르에게 있어서도 의미는 지난한 텍스트로의 우회를 통해 획득된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자체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39) 이런 의미에서 후설의 노에마는 경험주의의 특성을 공유하지만 이때 일정 정도의 교정이 필요해 진다. 그것은 지각에서 포착되는 대상이길 그쳐야 한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색이나 성질은 객관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지각에 현시된 사건인 것이다.

(40) 이 ‘객체성’은 뒤에 등장할 또 다른 객체성(objectité)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41) 따라서 들뢰즈의 의미는 리쾨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 차이점은 리쾨르의 의미가 명제 차원에서 ‘탈은폐’되는 것이라면, 들뢰즈의 그것은 명제 차원으로부터 뒤로 물러나 물체적인 것과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리쾨르의 명제들은 해석의 대상으로 그 언어학적 본질을 통해 설명되지만, 들뢰즈의 의미는 설명되는 것과 동시에 그 존재론적인 역량, 즉 사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컨대 들뢰즈에게서 ‘사태(물체)-의미-사건-명제’인 것이 리쾨르에게는 ‘사태(텍스트)-명제-의미-사건’이 된다.

(42) 이와 동일한 취지의 언급이 들뢰즈의 이후 논의에서도 반복된다. “사건이 언어 안에 존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사물과 더불어 발생한다. 사물들과 명제들은 근본적인 이원성을 형성하기보다는 의미를 경계선으로 해서 맞붙어 있다. 이 경계선이 그들을 혼합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다시 통합하는 것도 아니다(여기에는 이원론과 마찬가지로 일원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의 차이의 절속(articulation)-물체/언어-과도 같다.”(Ibid. 37)

(43) 우리는 이 부분에서 ‘표현’과 ‘표현된 것’ 간에 무한한 자리바꿈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명제화되며 그럼으로써 거기 내속하고 있는 ‘사건’을 은폐한다. 이 사건은 언젠가 제 차례에 와서 다시 ‘역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될 경우 이제 예전의 사건은 바로 사태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사건들을 결정짓는 커다란 우연으로서의 ‘대사건’(Événement)은 완전히 이해되지도 해석되지도 못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고, 이때 명제는 내가 보기에 분명 어떤 ‘해석학적 잔여’를 가리키고 있다.

(44) 원문은 다음과 같다: En premier lieu, les singualarités-événements correspondent à des séries hétérogènes qui s’organisent en un système ni stable ni instable, mais 《métastable》, pourvu d’une énergie potentielle où se distribuent les différences entre séries (L’énergie potentielle est l’énergie de l’événement pur, tandis que les formes d’actualisation correspondent aux effectuations de l’événement.

(45) [질베르 시몽동에 관하여] 들뢰즈에게 ‘개체화’는 매우 심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시몽동(Simondon Silbert)과 직접적 연관을 가지지만 그로부터 더 급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몽동의 철학적 중요성을 발견한 사람은 들뢰즈 외에 샤틀레(Gilles Châelet)가 있다. 이 두 사람에게 시몽동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는 Gilles Châelet, ‘Gilbert Simondon (1924-1989)’, in L’Enchantement du Virtuel: Mathéatique, Physique, Philosophie, Paris: Éitions Rue d’Ulm/Presses de L’Éole Normale Supéieure, 2010, 210-214. Gilles Deleuze, ‘Gilbert Simondon, L’individu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 David Lapoujade, Minuit, 2002, pp.다. 이들이 주로 인용하는 시몽동의 텍스트는 시몽동의 박사학위 논문(『형상과 정보의 관점에서 본 개체화』,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이하 IFI)과 그것의 일부가 출판된 『개체와 그것의 물리생물학적 발생』(L'individu et sa génèse physico-biologique)이다. 시몽동 사상에 대한 선구적 논평자에 해당되는 질 들뢰즈와 질 샤틀레는 공통적으로 그의 철학사적 기여를 고전적인 ‘질료-형상설’에 대한 비판에서 찾는다. 샤틀레의 경우 철학은 늘 선재(先在)된 개체를 실체론적으로 가정했으며, 이것은 구성적인 단위로서 ‘질료와 형상’에 의해 작동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즉 “개체화의 원리가 늘 개체화 앞에 놓인다”(Châelet2010, 210)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늘 개체화를 개체 뒤에 놓았고, 마치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고, 의문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양 취급하면서, “개체화가 완료된 존재의 특징이 무엇인지만 물을 뿐이다. (...) 그들은 개체화를 모든 존재와 개념 외부에 놓인 우선적인 계기로 취급한다”(Deleuze2002, 120) 그런데 문제는 이 우선성이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와서 중세의 보편 논쟁을 거치면서 공고화된 철학사 내의 개념적 소외라고도 할 만하다. 그래서 시몽동은 질료형상설 이전의 철학적 개념들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페이론’(apeiron, ἄπειρον)이다. 사실상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내에서도 소극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이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전개한 ‘서출적 추론’의 대상으로서의 원인에 대한 논변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논구된다. 발생적 추론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러한 사유구도는 철학사 내에서 일종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유의 도식이 기하학화하면서 존재의 ‘생성’이라는 심층의 모습이 억압된 것이다. 1. 시몽동이 ‘생성’(또는 더 중요하게는 ‘사건’)을 철학의 새로운 사유로 꺼내드는 배경에는 현대과학의 성과가 놓여 있다. 이것은 과학에서 다루는 ‘계’가 거시적인 평면에서 미시적인 평면으로 더 나아가 그 두 평면의 상호작용으로 옮겨갔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질료형상론에서 질료의 능동적 작용이라든가, 에너지의 변조능력이기보다 질료와 형상, 또는 질료화된 형상과 형상화된 질료 사이의 생성운동의 기작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피는 것이 되었다. 이를테면 ‘양자적 도약’이라는 양자역학의 미시적 운동-생성 과정과 mRNA가 생식질에서 세포질로 이행하는 복사과정, 또는 새롭게 발견되어 연구되는 정크DNA의 역할, 후성생물학에서 논하는 환경과 조건의 역할, 진화론에서의 논쟁(굴드와 도킨스), 결정의 변칙성(anomaly) 등등은 시몽동의 개체화이론이 어떤 ‘보다’ 잠재적인 층위의 존재론적인 개념(‘준안정성’보다 더 잠재적인 층위)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내 생각에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에서 이런 보다 잠재적인 층위에 다가가는 개념은 ‘싹’(특이성)과 ‘바탕’이라는 개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발생론적 사유구도를 함축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2. 시몽동은 물리적 개체화와 생명적 개체화의 차이를 말하면서, 그 두 개체화의 선후를 논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생명적 개체화가 물리적 개체화 안에 ‘삽입’되어 흐름을 ‘유보’하고, ‘지연’하면서, 안정화를 방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증폭’시킨다고 한다[IFI 152]. 그런데 이런 방식의 기작 외에 그는 어떤 ‘미시물리적인 질서’를 상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IFI 151]. 이 미시물리적인 질서는 그에 따르면 ‘전물리적’(préphysique), ‘전생명적’(prévital)이다[Ibid.]. 3. 시몽동의 존재론(사실 이 말도 어폐가 있다. ‘존재생성론’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이 준안정적 시스템의 물리-생물학적 구도를 밝힌다면, 그의 기술론에서는 이를 ‘소외’ 현상의 해결을 위한 정치사회적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그는 맑스의 ‘소외론’을 에둘러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의 ‘소외’는 소외의 원천을 ‘노동 바깥’ 즉 경제적 요인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일견 노동이 경제학적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맑스의 소외는 소외의 한 양상일 뿐이라고 말한다(EO 357). 그리고 이러한 소외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체를 초월하는(trans - 횡단하는?) ‘개체초월적 집단성’(collectif transindividuel)이라는 테제를 내세운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도 상호개체적인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초월적 집단성을 획득하기 위해 기술과 새로운 발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EO 356). 발명과 기술을 통해 새로운 집단성을 창출하는 이 ‘주체’(시몽동은 직접적으로 이것을 ‘주체’라고 지칭한다)가 담지하는 소외 극복의 역량에 주목하는 것이다. 4. 시몽동이 들뢰즈에게 준 영향력은 막대한 것으로 보인다. 굉장히 많은 개념들과 사유의 단초들이 시몽동으로부터 유래한다. 베르그송과 시몽동의 관련성이 프랑스 생기론의 전통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시몽동과 들뢰즈와의 관련성은 어떤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리고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시몽동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즉 ‘전개체적인 것에서 개체화를 통해 개체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면서 시몽동이 혹시, 원래 다상화된(polyphasé) 존재인 개체를 버리고, 어떤 자아(Moi)의 형태를 복권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Deleuze2002, 124)

(46) 파롤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바로 리쾨르의 그것과 연동된다.

(47) 이야기, 소설에 대해 들뢰즈와 리쾨르는 공히 중점적인 관심을 보인다. 들뢰즈의 경우 그의 사건론의 중심에 이러한 허구적인 이야기의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은 이런저런 곳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구조는 탈물질적인 사건들[이념적 사건들, événements ideaux]의 목록을, 즉 그에 내부적인 하나의 이야기[역사, histoire=récit]를 포함한다(예컨대 계열들이 ‘인물들’을 포함할 경우, 하나의 이야기는 두 계열 내에서 인물들이 서로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위치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을 재결합시킨다)”는 식이다(DLS. 66). 그런데 리쾨르의 이야기는 어떤 모방, 즉 미메시스의 차원에서 움직이지만, 들뢰즈의 그것은 모상과 허상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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