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기'의 해석학과 수동적 초월

nomadia 2018.04.08 20:17 조회 수 :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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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흩어진 주체와 응시자들

1. 동일성의 포기와 대체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데카르트적 주체, 즉 코기토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와는 다른 논의지평에 속하는(하지만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자’라는 테마를 분명히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테마는 단순히 이 논문의 하나의 절로 처리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타자’는 단지 철학사 안에서 인식론이나 윤리학의 지위에만 귀속되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다시 발굴되거나 발명되는 바와 같이 이 개념은 오래된 플라톤-파르메니데스적인 정식화(동일자-타자)에서 연원하여 최근의 들뢰즈와 레비나스에 의해 그 존재론적 함축이 다시 일깨워진 바의 깊이를 가진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중요해지고 다시 발굴되며, 철학의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것은 동일자의 한 양식으로서의 주체의 파산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주체가 형해화되는 과정에서 그것의 본래 의미였던 동일성이 함께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주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는 ‘아래에 던져진 것’(sub-ject)이며 이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태의 기저에 놓여 있는 기체(hypokeimenon)이면서 ‘아래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의 실체(sub-stance)이자 본질(essentia)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란 어떤 인간 실존에만 국한된 협소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 기체이자 실체, 그리고 본질로서의 주체는 플라톤 이래 서구철학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근거가 확고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그 동일성, 지속성은 어떻게 확보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解)는 이미 질문 속에 내장되어 있다. 어떤 것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 확보될 만한 대상이 ‘멈추어 서고’ ‘불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의 주체적 형상(Idea)을 탐구하면서 늘 소피스트들을 대적해야만 했고, 그들을 ‘그물을 빠져 나가는 동물’로 생각했던 것은 소피스트들이 그들의 상대주의적 견해와 회의주의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이데아의 위계구조를 탈주하거나 그것을 위기에 봉착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이 동일성을 거스르는 어떤 ‘다른 것’ 즉 ‘타자성’(hē tou heterou physis)의 인격적 유비물(analogon)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이 타자성을 멀리 추방할수록 그것이 뒤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앞문으로 쫓아낸 타자들은 행성을 한 바퀴 돈 다음 언제나 뒷문으로 줄지어 들어온다. 왜냐하면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성이 존재의 본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올랭피아》의 신체(corp)에 대한 헬라스적인 판본인 물체(somata)가 플라톤에게 불, 흙, 물, 공기였고, 레비나스에게 그것이 어떤 불수의한 ‘요소’로 불린 것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고, 선과 면, 부피로 적분되기 이전의 상태다.

 

그러니까 첫째로, 불, 흙, 물, 공기가 물체들(somata)이라는 것은 아마도 모두에게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물체의 형태(eidos)는 깊이(bathos)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데, 이 깊이를 다시 면의 성질을 갖는 것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직선 형태의 평면들은 삼각형들로 구성되었습니다(『티마이오스』53c).

 

등등 ... . 물체를 형태와 깊이 그리고 면과 선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수학적인 형상들, 즉 동일성을 가지고 길들여지지 않는 타자성을 ‘설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데미우르고스가 그의 우주 제작에서 “동일성과 섞이기 힘든 타자성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게 결합”하는 장면은 이 타자성이 매우 이질적인 상태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역량을 포기하고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을 예견한다.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타자성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고, 또 신적인 동일성이 전일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한 중세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하게 된다. 이제 동일성은 실체가 되고 완연한 능동성을 향유하게 되며, 마침내 신의 형상을 분유하게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중세의 신적인 페르소나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무의식적인 임무로 삼았다. 그래서 근대는 바로 중세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내면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에 있는 중세의 편린들은 체계의 중추에서 빛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일성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동일성으로서의 인간이 이제 ‘주체’의 형상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타자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좀 전에 말했다시피 타자성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간다. 그것이 ‘자기성’이든 ‘수동적 주체’든 또는 ‘애벌레-주체’든 간에 말이다. 이 말들에 붙은 ‘자기’, ‘주체’라는 표상에 이제 어느 누구도 ‘실체’ ‘동일성’의 표지를 붙이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이미 ‘유산된’ 상태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 없이 제정신으로 살아갈 것인ㅂ가? 누가 유기적으로 조직된 《올랭피아》가 아니라 마구 흩어지고, 조각난 그것을 감상하러 애써 시선을 돌릴 것인가?

문제는 리쾨르와 들뢰즈에게서 ‘타자’의 형상은 어떤 식으로 수립되는가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 ‘타자’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이 두 사람의 체계 내에서 타자가 작동하는 본격적인 메커니즘을 해석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것의 최초의 형상을 탐구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절의 제목을 동일성의 포기라고 한 것은 앞서 논의의 말미에서 강조한 것을 되짚어 봤을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포기 ‘이후’라는 뉘앙스를 가진 이 ‘대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오히려 코기토의 가장 중요한 본래적 성격을 상실한 후 그것을 애써 다른 이름으로 명명하려는 헛된 시도는 아닌가? 만약 들뢰즈와 리쾨르가 데카르트의 주체론을 거부하고, 그 ‘이후’ 거기에 다른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면 그것은 충분히 헛되다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대체’는 이 두 철학자가 깊숙이 몸담고 있는 철학의 위기, 또는 늘 되풀이되는 심층으로부터의 어떤 소식, 한 시대의 침체, 너무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혁명에 대한 패배적 분위기로부터 나오는 강제력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적 ‘성찰’이 실행된 그 17세기의 과학적 분위기(Stimmung)가 사실은 철학적 변혁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던 사태와 흡사하다. 그것은 곧 도덕과 철학적 실존의 불안함, 단독자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어떤 확고하다고 선언된 준칙도 임의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임의성을 ‘잠정적 규칙’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사태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녁에 닿기도 전에 멈추어 선 제논의 화살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살은 시위를 떠나기 전에 충분히, 그것도 팽팽히 ‘뒤로’ 잡아당겨져야 한다. 충분히 후퇴한다는 것, 그것은 충분히 긴장한다는 것, 과도할 정도로 분열적인 힘을 축적한다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동시적이다. 과녁을 겨누는 긴장과 뒤로 당겨지는 그 긴장은 모두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돕고 있다. 따라서 동일성은 언제나 반대방향에서 그것의 대체와 함께 가는 것이다.

 

2. ‘자기의 해석학’과 ‘수동적 초월’

1) 자기성과 자체성, 타자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해석학’을 시작한다.

 

고양된 주체, 모멸받은 주체. 언제나 바로 찬성에서 반대로의 이와 같은 전복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주체에 접근한다. 이로부터 끌어내야 할 결론은 주체철학자들의 그 ‘나’가 담론에서 아토포스(atopos)하다는 것, 다시 말해 확실한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 해석학이 코기토와 반코기토의 그 양자택일을 넘어서 위치하는 인식적(그리고 [...] 존재론적) 장소[는 무엇인가?](RSA 27)

 

여기서 주체는 ‘모멸받은’ 상태로 지칭된다. 그리고 그 뒤에 ‘전복’을 통해 다시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이 선언된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곧장 ‘아토포스’, 즉 장소가 부재한다는 말을 통해 재전복된다. 이러한 문장들은 위에서 말한 긴장을 그대로 드러낸다. 리쾨르가 명시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주체철학자들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들, 주체를 중심에 놓고 사유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주체의 위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주체철학자들은 다만 이리저리 강조점들을 옮기면서 다르지만 동일한 진폭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경험주의, 관념론과 유물론, 정치적 주체 등등. 그렇다면 해석학은 어떤 식으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그 기준은 나왔다. 즉 ‘코기토와 반코기토의 양자택일’을 바랄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한다. 리쾨르는 이것을 ‘idem’(자체)과 ‘ipse’(자기)라는 어휘적 차원에서 탐구한다.

 

한 쪽에는 자체성(mêmeneté)(라틴어의 idem, 영어의 sameness, 독일어의 Gleichheit)으로서의 동일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성(라틴어의 ipse, 영어의 selfhood, 독일어의 Selbstheit)으로서의 동일성이 있다. (...) 자기성은 자체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요한 구분이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 개인의 자기동일성의 문제에 가져온 해법들, 이야기적 차원을 무시하는 그 해법들은 실패하는 것이다. (...) 시간 속에 영속성의 질문을 통해서 동일성에 관한 우리의 두 해석 사이의 대면은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다(Ibid. 140).

 

사실상 이 두 단어는 리쾨르의 그 새로운 주체의 장소를 완전히 포괄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타자성의 차원’이 추가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관념에는 코기토의 명증성이 탈각된 채로 반드시 무언가를 참조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를 회복하는 해석학적 과정(특히 이야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분석을 통한 성찰의 우회”(27)라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과정을 동반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자기성과 자체성의 변증법 마지막으로 자기성과 타자성의 변증법”이다(Iibid.). 자체와 자기를 통한 ‘동일자의 양분’ (1)그리고 성찰의 우회, 변증법. 해석학은 이러한 우회와 타자성과의 변증법을 어디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 첫째로 언어분석철학, 둘째로 행동의 철학, 그리고 이야기성의 차원, 마지막으로 존재론(시간론)이다. 우리는 이 우회의 긴 과정을 지금 다 살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몇몇 리쾨르의 진술들을 더 살펴봄으로써 이 의미의 확실한 윤곽을 잡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체론의 차원에서 논의되지 못한 부분은 의미론과 존재론에서 각각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언어철학에서 리쾨르는 개별자보다 개별화가 중요하다는 점은 내세운다. “우리가 개인보다는 개인화(개별화)에 대해 언급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은 개성들의 부여가 (...) 명시화의 매우 다양한 정도들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모든 언어들에 공통적인 것은 결과보다는 개별화, 곧 작용이다”는 것이다.(2) 이러한 개별화 과정은 곧 언어를 넘어서는 과정, 즉 초월적 과정을 수반한다. 이것은 소위 ‘분류과정’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종별화과정’과 대별된다. “왜냐하면 분류과정은 개념을 위해 특이성들을 폐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인 면들은 사실 우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 쪽으로 이끈다.”(3) 사실상 리쾨르의 개념화는 이러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서 분투한다. 어떤 순환론적 패착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개념들을 통해 사유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개념화를 통해 분류하지만 그것은 개별화의 특이성을 잡아내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언어적 한계에 관한 내용이다. 이러한 언어적 사유 이미지는 들뢰즈에게서도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4)

어쨌든 리쾨르는 언어 속에서 삼인칭과 일인칭의 넘나듦이라고 할 만한 지점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이 구절을 보다 자세히 음미해 보자.

 

어려움은 어떻게 담화에서 삼인칭 인격이 자신을 일인칭으로 지칭하는 누군가로 지칭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일인칭으로서의 자기 지칭을 삼인칭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이 아무리 기이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마 우리가 정신적 사건의 개념 자체에 연결시키는 의식에 부여하는 의미에서 본질적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삼인칭 인격이 정신적 상태들을 느낀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고도 이 제삼자에게 그것들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낀다는 것은 분명 일인칭 경험을 특징짓는 것처럼 보인다. 사정이 그렇다면 정신적 사건들의 개념은 어떤 종류의 실체들에 부여되는 술어들이자, 동시에 우리가 언술행위와 결속된 자기 지칭 때문에 우선적으로 일인칭으로 이해하는 자기 지칭의 운반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여러 인칭들에 술어로 적용될 수 있고 동시에 자기 지칭적인 정신적 사건들의 이런 구조 (...)(Ibid. 48)

 

여기서 리쾨르는 삼인칭으로 지칭되는 대명사의 자기지칭적인 성격을 통해 정신적 사건이 개념화된다는 점에 착안한다. 삼인칭은 문법적으로 타자의 범주며, 우리는 그 인칭을 통해 타자를 지칭하고, 그의 인격적(여기서 리쾨르가 다루는 것은 인격적 타자다) 상태, 즉 정신적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 사건은 ‘느낌’이며 이는 일인칭 주체, 또는 타자의 고유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리쾨르가 이 지점에서 니체적인 방식의 문법적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철학적인 요소의 긍정을 통해 언어의 ‘힘’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리쾨르는 언어철학의 한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성을 최대한 밀어붙이는 이론적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이 가능성은 자기와 타자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다. 리쾨르는 명시적으로 이 동일성을 취한다. 그가 기본 개념으로 가져가는 ‘자기성’과 ‘자체성’은 ‘자기동일성’과 ‘자체동일성’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이 ‘동일성’은 매우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리쾨르에게 이 기반은 매번 보충되고 점진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극복의 과정은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 과정’ 즉 언어적으로 ‘정신적 술어들’에 있어서 “‘같은 사물’이 두 종류의 술어들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나 타자에게 귀속되는 ‘동일한 의미’가 정신적 술어들에 부여되는 것이다.”(Ibid. 50) 주지하다시피 리쾨르는 술어들의 동일성보다 ‘의미의 동일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들뢰즈의 편에서 보았을 때 매우 표면적인 진술이라 할 수 있겠지만, 리쾨르에게는 문법적인 분석과정이 의미론적인 분석과정으로 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형성한다. 이 의미적인 동일성은 바로 타자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관건적인 사항이 된다. 우선 인격으로서의 타자들은 ‘각자’ 존재한다. 이 명확한 현상적 파악으로부터 리쾨르는 ‘귀속’ 개념이 어떻게 각자성으로 함몰되지 않는 이유를 이 ‘정신적 과정의 귀속’으로 파악해 낸다.

 

각자라는 용어의 배분적 성격이 내가 이제 ‘정신적인 것’이라 부르게 될 것의 이해에 본질적이[다.] 물론 정신적 상태들은 언제나 어느 누군가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 누군가는 나 ․ 너 ․ 그 혹은 불특정의 어떤 사람일 수 있다. (...) 출발점에 있는 홀로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 타인에게로의 귀속은 자기 자신에게로의 귀속만큼이나 원시적[원초적]이다. 나는 나의 사유들을 나 아닌 어떤 타자에게 잠재적으로 동시에 귀속시킬 수 없다면 그것들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와 다른 타자에게 귀결되는 귀속이 같다는 주장은 귀속의 기준들, 즉 느껴진 것들과 관찰된 것들이 등가라는 점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등가 이외에도 나라는 누군가와 너라는 타자 사이의 상호성, 해석해야하는 그 상호성도 설명되어야 한다(52-53).

 

즉 ‘각자성’은 정신적 과정으로서의 의미화 과정을 통해 동일성으로 수렴한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법적 요소는 일인칭과 삼인칭의 상호교환가능성이며, ‘사유의 동시귀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자기성은 타자성과 교환 가능한 기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5) 결국 “언어학적 차원에서 자기에 관한 통합된 이론[이란] (...) 본질적[으로] 인칭대명사들 사이의 (...) 교환이다”(Ibid. 56).

그런데 언어철학이 자기성, 즉 리쾨르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빛나는 장소에서 한계 상황이 드러난다.

 

극단적으로 보면, 반성성은 자기 의식이라는 강한 의미의 자기에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언표의 의미 속에 언표의 언술 행위(사실)가 자기를 비춘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기를 비추다(se réflechit)’라는 표현은 ‘반영되다(se refléte)’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반되는 역설은 자기성이 없는 반성성의 역설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없는 어떤 ‘자기(se)’가 있다는 것이다. (...) 우리가 대립되는 두 개의 지시 관계, 즉 의미된 사물로 향한 지시 관계와 무언가를 의미하는 사물을 향한 지시 관계를 언표에 부여하자마자 ‘나’는 ‘나’로서 사라지지 않는가? (...) 보다 심각하게 말하면, 무언가를 지시하고 의미하는 주체는 어떻게 주체로 남아 있으면서도 하나의 사물로 지칭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언술 행위 이론의 가장 값진 정복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망각된 것이 아닌가? 1)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은 언표들도, 나아가 언술 행위들도 아니고, 우리가 앞서 상기했듯이 대화 상황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언표의 의미 및 지시 관계의 자원을 사용하는 말하는 주체들이다. 2) 대화의 상황은 언술 행위의 당사자들이 담화를 통해 행위로 연출되고, 언술자들과 더불어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그들의 경험, 그들의 관점이 살과 뼈로 연출된다는 점에서만 사건의 가치를 지닌다.(Ibid. 63-64)

 

인용문의 뒷 부분에 요약된 바와 같이 언어철학적 해석은 ‘말하는 주체’와 ‘사건의 가치’를 은폐한다. 왜냐하면 언어철학은 명제화되고 진술된 것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담론’과 ‘일상어’의 수준을 곧잘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건’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비물체적이라면 사건이 영역을 지배하는 자기성은 신체적이며 행동적이다. 리쾨르는 이 두 지점을 다시 해석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은 리쾨르에게 ‘세계’로 지칭된다. 그래서 우선 신체는 “세계에 대한 경험의 단편을 구성”하며, “나의 것으로서 (...) 세계의 한계 지시의 지점으로 이해된 ‘나’의 위상을 공유한다.(6) 달리 말하면,

 

신체는 세계의 한 사실이자, 동시에 주체가 말하는 대상들에 속하지 않는 그의 한 기관이다. 고유한 신체의 이와 같은 이상한 구성은 언술의 주체로부터 언술의 행위 자체로 확대된다. 숨결을 통해 밖으로 뻗치고 발성과 온갖 제스처에 의해 분절되는 목소리로서 언술은 물질적 신체의 운명을 공유한다. 말하는 주체가 목표로 하는 의미의 표현으로서 목소리는 언술 행위의 운반체이다. 이 운반체가 세계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전망의 중심인 ‘나’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말이다(Ibid. 72).

 

동시에 신체가 직접 동원되는 행위의 면에서 ‘사건’의 면과 직접 닿아 있다. 왜냐하면 언어적으로 행동의 분석은 그것의 속성상 과도한 귀속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고, 어떤 행위술어는 무한한 지평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분석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사건들 가운데 행동으로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문제에 논쟁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Ibid. 78). 이것은 곧 문장의 ‘누가’라는 영역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과정에서 ‘누가’라는 질문의 “집요한 저항”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칭성의 저항인 것이다. 사실상 행동과 사건의 (들뢰즈의 견해라면) 순수한 비인칭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여기서 이 비인칭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 인칭의 저항이 집요하게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인칭적 차원에서 돌아와 우리가 최초로 정해 놓은 가설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즉 자기성-자체성의 변증법. 먼저 ‘자체성’(idem)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체성은 우선 ‘관계’의 개념이다. 리쾨르는 여기서 상식적인 ‘~자체’라고 하는 고립적이고 유아론적인 상태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자체성은 관계의 개념이고, 그것을 더 심층적으로 표현하면 “관계의 관계”가 된다(Ibid. 141). 이 뒤에 나오는 구절은 어째서 자체성이 이렇게 관계성으로 규정되는지 그 의도를 알게 해 준다.

 

맨 먼저 ①수치적인 동일성이 온다. 예컨대 일상 언어에서 고정된 명칭에 의해 지칭되는 사물이 두 번 나올 경우, 우리는 이 두 번이 두 개의 상이한 사물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사물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동일성은 유일성을 의미한다. 그 반대는 다원성이다. (...) [이것은] 같은 것의 재동일화라는 의미의 동일화 작용이며, 이로 인해 안다(connaître)는 것은 알아본다(reconnaître)는 것이다. <같은 것이 두 번, n번 나오는 것이다.>(7) 두 번째로 오는 것은 ②질적인 동일성, 다시 말해 극단적인 닮음이다. 동일성의 개념에서 세 번째 구성 요소, 즉 우리가 동일한 개인으로 간주하는 것의 처음 단계와 마지막 단계의 전개 사이에 ③중단 없는 연속성에 속한다. (...) 예컨대 우리는 참나무 한 그루가 도토리에서부터 완전히 성장한 나무까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 마리 동물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인류의 단순한 표본으로서 한 인간 – 나는 한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도 마찬가지이다.(Ibid. 140-141).

 

이 세가지 특성이 바로 ‘자체성’에 부여된다. 이것은 모두 일항성이 아니라 이항성, 또는 다항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중 세 번째에 해당되는 ‘연속성’은 자체성이 시간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자체성을 고집하는 주체는 시간적으로 자신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체성의 영역을 지정한 다음 리쾨르는 그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보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성격’과 ‘약속’이며, 마지막으로 ‘이야기성’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인칭적 동일성이 이 세 가지 요인들을 통해 끝내 자신을 지속하려고 하는지 볼 수 있다. 우선 리쾨르의 해석을 살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실 시간 속의 두 개의 영속성 모델을 간직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묘사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두 표현, 즉 성격과 지켜진 약속으로 요약하겠다. (...) 인격의 두 영속성 모델이 드러내는 극성은 성격의 영속성이 자체(idem)의 문제틀과 자기(ipse)의 문제틀이 서로가 서로를 거의 완벽하게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한편, 약속한 말의 유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충실함은 자기의 영속성과 자체의 영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괴리를 나타내며, 따라서 두 문제틀이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음을 전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 극성은 개인의 자기동일성이 지닌 개념적 조직 속에 이야기적 동일성의 개입을 제안한다. 개입의 방법은 자체(idem)와 자기(ipse)가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성격상의 극점과 자기성이 자체성을 벗어나는 자기 유지의 극점 사이에 특수한 중간(médiété)의 방식이다(Ibid. 143).

 

여기서 리쾨르가 중점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①자체성과 자기성은 환원불가능하다. ②이 환원불가능한 두 극성에 이야기적 동일성이 개입하여 매개한다. 첫 번째 논변은 애초의 그 가설 즉 자체성이 ‘확고한’ 동일성과 ‘통일성’을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것이고(그러므로 자체성은 ‘~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 질문이 된다), ‘자기성’이 동일성 가운데에서도 그 코기토의 ‘유산성’을 긍정하면서, 시간 속에 영속성을 ‘계속적으로’ 확보해 가는 움직임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자기성은 ‘~는 누구인가’라는 인격주의적 질문이 된다)는 데에서 수긍된다. 왜냐하면 이 둘이 어떤 식으로든 융합되거나 변증법적으로 해소된다는 것은 리쾨르의 주장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래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점근선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 점근선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적 동일성’이다.

이 구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가 모두 ‘시간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연관성의 윤곽을 그려보도록 하자.

우선 ‘성격’의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의 동일자로서의 개인으로 재인(recognition)된다. 즉 그것은 어떤 인격 A의 속성들 전체로서 ‘표시’될 수 있다. 이러한 묘사적 특징들은 시간 안에서 양적, 질적 동일성을 확보하고, 그럼으로써 영속성을 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격은 인격의 자체성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격은 유한하고 세계라는 지평 안에 놓여 있다. 그래서 리쾨르는 “성격은 사물들, 사상들, 가치들, 인격들의 세계로 향한 나의 개방성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유한한 관점에 따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Ibid. 143 참조). 그런데 성격에 대한 존재론적인 규정이 어떤 식으로 심리적인 관점으로 다가가는가? 이러한 ‘접근’은 물론 ‘시간성’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습관’이다.

 

첫째로 (...) 습관의 개념인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①계속적으로 존재하는 습관과 ②이미 획득된 습관이라는 이중의 유발성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두 특징들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습관은 성격에 역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 침전 (...) 자유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회귀 (...) 이와 같은 침전이 성격에 시간 속의 영속성 같은 것을 부여하는데, 여기서 나는 이런 영속성을 자체에 의한 자기의 은폐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은폐는 [자기성과 자체성의] 문제틀들의 차이를 파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차적 자연으로서 나의 성격은 나이고, 나 자신이며, 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기는 자체로 예고된다. 그리하여 응축되고 획득되어 지속적 성향이 된 각각의 습관은 하나의 특징 - 분명히 말하면 성격의 특징 - 다시 말해 어떤 인격을 알아보고 같은 존재로 재동일화하는 변별적 기호를 구성하는데, 이는 성격이 이와 같은 변별적 기호들 전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Ibid.).

 

성격은 습관으로 구성된다. 이중의 유발성은 시간 안에서 자체성과 자기성의 변증법 안으로 잠긴다. 한 쪽으로는 침전작용, 자연으로의 회귀를 유발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나’와 자기성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자체성은 자기성에 의해 ‘예고된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다만 예고될 뿐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속의 영속성은 어떤 유혹, 홀림(bewitchment)를 유발하는 것이지 않은가? 자기성이 움직여가는 그 지향성은 자체성이 가진 그 허무맹랑한 유혹의 주문 속에 늘 부침을 겪지 않는가? 그렇게 경로의 각 지점에서 실패와 부분적 성공을 통해 응고된 성향은 이제 반복의 역량을 발휘하고, 마치 프랙탈의 한 지점처럼 무한히 계속 반복되면서 그의 생명력에까지 각인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렇게 성격과 습관, 그리고 생명에 이르는 긴 행로를 들뢰즈의 방식으로 가로질러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쾨르는 여기에 한계이자 지평을 설정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한성’, ‘깨지기 쉬움’이라는 인격의 특성이다. 그래서 자체성의 유혹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자기성의 움직임이 없으면 그것은 단지 ‘자연’으로 변전할 뿐이다. 이것은 ‘죽음’이 아닌가? 죽음, 오로지 죽음만이 영속적이다. 만약 내가 자체성을 획득하고 그 안에 영원히 머물고자 한다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죽음의 유혹이란 얼마나 강한가! 그러므로 “자체(idem)가 자기(ipse)를 은폐할 때조차도 자기 없이는 우리가 인격의 자체를 철저히” 유지할 수 없다(Ibid. 147).

하지만 자체성이 자기성의 생명력을 계속적으로 은폐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즉 우리는 언제나 ‘~은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망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유한한 죽음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곧장 지평을 향해 달려가고자 욕망하고 그 ‘중간’에 존재하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전유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자체성이 자기성을 은폐하는 그곳에서 이야기성은 그것을 올바르게 전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다. 그리고 문학(들뢰즈에게는 모든 예술)은 그것을 펼쳐냄으로써 자기성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잔여들(resuduum)을 해방시킨다.

 

자체에 의한 자기의 이와 같은 은폐는 그것들의 구분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정도는 아니다. 혁신과 침전의 변증법은 동일화 과정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의 존재는 성격이 이를테면 응축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여기서 응축된이라는 말은 ‘응축’(contraction)이라는 용어가 지닌 이중의 의미, 즉 축약과 전용의 의미를 띤다. (...) 이 [‘성격’이라는 말의] 용법들은 전개되는 이야기의 인물에 성격을 동일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침전이 응축시킨 것을 이야기는 다시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이다(Ibid. 147-48).

 

‘이야기’는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성격들을 통해 나의 자기성을 전유(appropriation)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마침내 자기성의 응축된 역사를 형성하고,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으로 ‘허구’의 요소가 반드시 가미될 수밖에 없다. 푸네스의 기억력은 허구의 힘에 의해 지탱된다. 왜냐하면 그 기억력을 창조한 보르헤스조차 그것을 허구의 힘을 빌어 우리의 삶 속에 펼쳐 놓으며, 우리는 그 언어들을 ‘기억’함으로써 단속적인 공백들을 허구로 채워넣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유통(또는 소통)되지 않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을 뒤에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리쾨르의 최초의 가설, 즉 자기성과 자체성의 변증법에서 시작해서 언어철학의 우회로와 행위의 우회로를 각각 거쳐 다시 자기성과 자체성으로 돌아 왔다. 이 경로는 해석학적 순환의 방향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나의 가설을 선형상화(prefiguration)하고 그것을 이해(understanding)함으로써 형상화(configuration)하고, 다시 그것을 설명(explanation)하면서 전유(appropriation)한 것이다. 이 와중에 순환은 어떤 작은 원환으로서 주체성을 확보하고, 또한 보다 큰 원환으로서 타자성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타자성은 이때 텍스트를 통해 보이는 3인칭으로서의 타인들이었다. 우리는 이 마지막의 타인의 타자성이 들뢰즈를 거쳐 어떻게 세계성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더 큰 해석학적 순환을 거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로의 우회는 반드시 어떤 충격적인 ‘불가능성’, ‘심연’을 동반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앞서의 내용 중 들뢰즈의 논의를 다시 이을 것이다. 이번에는 곧장 주체성과 타자성의 차원으로 걸어 들어간다.

 

2) 수동적 초월

들뢰즈는 『경험주의와 주체성』을 통해 (비)주체론이라 할 만한 ‘장소’를 열어 놓는다. 들뢰즈-흄의 경우 주체는 원리들에 따른 수동적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는 정념의 최종항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주체성의 문제는 바로 경험주의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문제 자체도 경험주의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인위적 고안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 흄의 진정한 철학사적인 공헌은 주체로부터 소여(the given)의 구성을 연역하지 않고, 소여로부터 주체의 구성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귀납해 낸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소위 칸트적인 구성주의와 흄의 그것을 완전히 구별할 필요를 느낀다. 칸트에게서 ‘구성’이란 초월적 주체의 ‘수반’을 통해 주어진 경험적 ‘잡다’가 학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흄에게 이러한 ‘초월적’인 뭔가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인 것 또는 데카르트의 논변을 통해 보자면 기만과 허위라는 방법적 회의를 넘어서는 Cogito는 ‘발명’되거나 ‘믿어진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자연의 한 부분을 주어지지 않은 다른 부분으로부터 추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명한다는 것은 힘들을 구별하는 것이며 기능적 총체들, 즉 더 이상 자연에 주어지지 않는 총체들을 구성하는 것이다.(DES 91)

 

이렇게 해서 주어진 것들은 스스로를 넘어서는데, 이것이 들뢰즈의 흄에게서 ‘초월’이며, ‘주체’가 된다. 이것은 하나의 기체(hypokeimenon)를 가정하지도, 아래에 놓인 어떤 것(subiectum)을 가정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데카르트적인 주체를 기각하며, 순수하게 내재적이고 ‘표면적’인 하나의 ‘주체’를 고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흐름을 분절하는 교활한(artificieux: 이 단어가 주체성의 맥락에서 쓰인다는 것에 유의하라) ‘기계’며 복합적인 ‘주름’(complexed ‘pli’)에 해당한다. 결국 경험주의에서 주체(sujet)는 주체성(subjectivité)의 비판에 의해서만 성립된다(Ibid. 90 참조).(8) 나는 이러한 들뢰즈-흄의 주체구성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판적 관점을 ‘첫 번째 수동적 초월’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 단계에서 ‘초월’은 곧장 ‘책략’이며, 한 발만 제겨디디면 ‘허구’에 도달한다. 발명과 믿음.

‘두 번째 수동적 초월’은 ‘능력’의 방면에서 발생한다. 우선 들뢰즈는 ‘정신’의 실체적 성격을 박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논리적인 과정으로 봤을 때 이것은 필연적이다. ‘소여’(“인상과 이미지의 다발, 지각의 집합”[Ibid. 92]) 로부터 주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정신 또는 상상력을 “인식능력이나 조직화의 원리가 아니라 어떤 집합, 어떤 다발”(Ibid. 93)로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다발들 집합들의 각각의 원소들은 구별가능한 ‘차이’를 담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경험은 어떤 ‘유일무이한’ 이것(la)이라고 하겠다(Ibid.).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 철학의 스코투스적 경향의 발단을 발견할 수 있다.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도 개별성은 하나의 특이한 ‘이것’(thisness, haecceitas)이라고 지칭된다. 이 관점은 들뢰즈 철학 전반에 걸쳐 지속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분리가능하며, 구별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식별가능한 하나의 단위(unité)로 상정된다는 점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때 들뢰즈-흄에게 또 다른 평면, 즉 ‘식별불가능성의 평면’이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평면(plan)은 무엇인가? 우리가 《올랭피아》로부터 끌어낸 그 식별불가능한 것들의 미분적 영역은 바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후에 다루며, 직접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연관된다.(9) 이 영역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식별가능한 것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주체도, 그것이 변양이나 양태가 되는 어떤 실체도 내포하지 않는다”(Ibid.). 즉 이 유일무이한 경험은 다만 그리고 정확하게 ‘표면운동’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정신은 주체도 아니며 능력도 아니다. 더불어 상상력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유기체와 감각들 자체가 주체인 것도 능력인 것도 아니다. “유기체와 감각들은 다른 곳에서 그것[인간본성이나 주체의 성격]을 받아야 한다. (...) 기관은 그 자체로 단지 인상의 다발일 뿐으로, 이는 인상의 출현 메커니즘 속에서 고찰된다”(Ibid. 96).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신의 자발성’(spontanéité du sujet)은 최초에는 허구며, 다음으로는 구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이 순수하게 인식한다고 생각되는 ‘수학적 대상’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수학적 인식 자체가 정신의 자발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정신을 구성하는 ‘인상’은 분할가능한 최소한의 것이 될 수 있는데, 수학에서는 이를 ‘점’이라고 하며, 물리학에서는 이를 ‘원자’라 한다. 그러나 “가장 작은 관념이나 가장 작은 인상은 수학적 점도 물리적 점도 아닌 감각적 점이다”(Ibid. 98). 이 다음 구절에서 들뢰즈는 놀라운 통찰을 발휘한다.

 

물리적 점은 이미 연장되어 있고, 또한 분할 가능하다. 수학적 점은 무(néant)이다. 둘 사이에 유일하게 실재적인 장소가 있다. 즉 실재적 연장과 비-존재 사이에, 그 연장이 정밀하게 합성될 실재적 존재가 자리하는 것이다. 감각적 점 또는 원자는 가시적이고 가촉적이며, 색을 가질 뿐 아니라 견고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연장을 갖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 그 구별되는 존재의 근거 안에서 경험주의는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한다. 그것이 연장되지 않는 것은 어떤 연장도 그 자체가 원자나, 입자나, 최소-관념이나, 단순 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루트로 연주한 다섯 음은 우리에게 시간의 인상과 관념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청각이나 다른 감각에 나타나는 여섯 번째 인상은 아니다.”(T. 36) 이와 마찬가지로 공간에 대한 관념은 다만 특정한 질서로 분배된 가시적 또는 가촉적 점들의 관념일 뿐이다. 공간은 가시적이고 가촉적인 대상들의 배치 속에서 발견된다. 흡사 시간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지각 가능한 계속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Ibid. 98-99)(10)

 

이와 같은 것을 들뢰즈는 “경험주의의 한 가지 원리”라고 말한다. 시공간이 가지는 고전적인 관념들이 여기서는 전복된다. 즉 소여가 곧 공간이지 공간이 곧 소여는 아니다.

따라서 주체를 말할 때 우리가 ‘능력’(시공간적인 분별능력을 포함하여)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이라기보다 ‘과정’의 결과물이며, 또는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효과’라고 해야 한다. ‘자발성’은 이 이후에 온다. 정신 또는 상상력이 ‘능력’이 되는 것은 이러한 ‘초월’의 운동, 즉 ‘능력-되기’의 운동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되기’의 운동은 결코 자발적이지 않으며, 인상과 관념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두 번째 수동적 초월’이라 명명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초월운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인식능력이 됨으로써 정신은 인간 본성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체는 발명하고 믿는다. 바로 이것이 종합, 정신의 종합이다”(Ibid. 100). 이 말은 바로 정신이 스스로 주체라고 믿으며 또 종합한다고 믿는다고 상술될 수 있다. 이중의 믿음.

이 구성된 주체, 또는 믿음이 된(습관이 된) 주체의 능동성은 이전의 수동성을 벗어나 시간과 ‘능동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제 주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지속에 대해, 관습에 대해, 습관에 대해, 기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기대는 습관이고, 습관은 기대이다”(Ibid.). 여기서 들뢰즈는 후에 『차이와 반복』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하게 될 ‘시간의 종합’에 대해 이야기 한다. “흄의 독창성은 이런 역동성의 이론에 있다. 말하자면 기대는 습관에 의해 일어나는 현재와 과거의 종합인 것이다. 기대, 또는 미래는 주체가 정신 안에서 구성하는 시간의 종합이다”(Ibid. 101) 이렇게 본다면 통상적인 ‘자아동일성’은 구성된 주체가 행하는 ‘허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가 시간의 종합을 통해 발명해내는 것은 단지 ‘~할 것이야’라는 수행문일 뿐이지만, 자아동일성에 이르러 그것은 ‘~임에 틀림없어’라는 신념이 되기 때문이다.(11)

하지만 이러한 신념은 생생한만큼 허위운동의 결과다. 즉 “과거와 현재를 시간의 구성요소로 보는 것보다는 종합 자체의 산물로 말하는 편이 옳다”(Ibid. 105)는 것이다. 이것은 습관, 즉 “유사한 것의 반복”을 통한 경험에서 유래된다. 습관은 “시간을 우리가 적응해야 하고 적응할 수 있는 영원한 현재로서 조직화하는 것이다.”

정신의 문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동적 초월의 운동을 증명한다면, 신체는 이제 세 번째 수동적 초월의 운동을 도입한다. 들뢰즈는 여기서 보다 직접적으로 유기체의 ‘자발성’에 대해 논한다. 이것이 직접적인 이유는 정신에 대한 논의에서보다 신체에 대해 논할 때 들뢰즈는 어떤 근원적(radical) 지점을 건드리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가 정신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원리들의 영향 아래서 유기체가 이중의 자발성을 취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Ibid. 106). 그 첫 번째는 ‘관계의 자발성’이다. 이것은 어떤 연관된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유기체의 작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관념은 “구별되는 지각들의 메커니즘”을 신체를 통해 재점유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체 자체의 “물리적 자발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신체는 그것이 원리들의 영향 아래 관념들 사이에 수립한 관계의 자발성에서 고려된 주체 자체가 된다”(Ibid.).

두 번째로 ‘배치의 자발성’이다. 즉 “유기체는 정념을 산출할 수 있도록 배치된다”(Ibid. 107). 왜냐하면 감각인상이 신체로부터 직접적으로 형성된다면, “반성인상은 하나의 자발성, 배치에 의해 정의되고 이 자발성의 생물학적 차원으로서 신체를 참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배치는 어떤 관념의 출현, 정념에 응답하는 대상의 관념을 자발적으로 불러일으킨다”(Ibid. 108).

결론적으로 신체는 원초적인 단계에서 인상을 취합하면서, 감각적인 수동성을 노정하지만 정념의 개입에 의해 자발적인 ‘응답’의 형식을 취한다. 이것이 세 번째 수동적 초월의 운동이다.

이제 다시 주체가 정신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살펴보자. 들뢰즈는 앞서의 세 가지 초월의 운동을 정신적 주체의 선결요건으로 생각하는 듯이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무매개적으로 정신과 주체를 엮어내는 것을 ‘일반적 관점’이라고 칭한다. 어쨌든 “정신 안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본성의 원리”이며 이것은 두 가지 즉 ‘연합의 원리’와 ‘정념의 원리’(유용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들을 통해서 “결국 다발은 하나의 체계가 된다. 지각의 다발은 지각들이 조직화될 때, 연결될 때 하나의 체계가 된다”(Ibid. 109).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인 ‘관계’다. 관념들은 하나의 관계로 조직화되며 그것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흄의 관계를 논할 때 일단의 일반원칙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즉 “모든 관계는 그 항들에 외재적이다”. 그러므로 인과성에 있어서 관계는 초월의 운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외재적인 항들이 초월의 운동을 통해 인과성으로 엮어질 때 연합의 원리가 그것을 남김없이 수행하는가? 들뢰즈는 흄에게서 이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올바르게 지적해 낸다.

 

사실 연합은 관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물론 연합만으로 관계는 가능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연합은 비매개적인 또는 직접적인 관계, 즉 다발의 다른 관념이 개입되지 않아도 두 관념 사이사실 연합은 관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물론 연합만으로 관계는 가능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연합은 비매개적인 또는 직접적인 관계, 즉 다발의 다른 관념이 개입되지 않아도 두 관념 사이에서 수립되는 관계를 완전히 설명한다. 예컨대 연합은 바로 이웃한 두 가지 파랑색의 단계들의 관계, 인접한 두 사물의 관계 등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연합이 A=B이고 B=C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해보자. 그렇지만 그것은 A=C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혹은 거리 자체가 하나의 관계임을 설명하지 않는다(Ibid. 113).

 

그렇다면 무엇인가? 들뢰즈는 매우 섬세하게도 흄이 여기저기 언급해 놓은 ‘정황’이라는 개념을 짚어낸다. “관계에 그 충족이유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정황(circonstance)이다”(Ibid. 115).

 

이 정황이라는 개념은 흄 철학에서 줄곧 나타난다. 정황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 특수한 것의 과학과 미분적 심리학을 가능케 한다. (...) [프로이트와 베르그손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흄은 다만 표면적인 것, 형식적인 것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런 과업이 어떤 의미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머지에 대해서 흄은 정황을 내세운다. 흄에게 이 개념은 늘 감응성(affectivité)을 가리킨다.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념과 우리의 이해를 정의하는 변수들이다. 이렇게 이해된 정황들의 집합은 항상 주체를 특이화한다. 왜냐하면 그 정황들의 집합은 그것의 정념과 욕구의 상태, 그 이해관계의 할당, 그것의 믿음과 생생함의 배분을 표상하기 때문이다(Ibid. 115-16).

 

따라서 정신적 주체의 가능성은 ‘원리’에 있다기보다 정황을 구성하는 정념의 원리에 놓이게 된다. 또한 이 주체의 허위운동 전체가 여기에 달렸다. 즉 “오직 정념의 원리만이 어떤 순간에 다른 관념이 아닌 그 관념이 연합되는 것을, 저 관념이 아닌 이 관념이 연합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정황이 주체구성에 있어서 관건적이라면 주체성이 “본질적으로 실천적(pratique)”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그 자신과 정황들의 관계의 통일성이 드러나는 것은 동기와 행위의 관계,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결국 수단-목적, 동기-행위의 이런 관계는 관계이지만 또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이론적 주체성이라는 것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은 경험주의의 근본 명제가 된다. (...) 주체가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면 결국 실천적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Ibid. 117).

 

우리가 빠트리지 말고 봐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들이다. 들뢰즈가 흄의 ‘정황’을 섬세하게 추출했듯이 들뢰즈에게서 우리는 “또한 다른 것이기도 하다”라는 언급을 추출할 수 있다. 이 “또한 다른 것” 들뢰즈-흄이 남겨 놓은 이론적 잔여는 바로 ‘실천’이며 이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그의 다음 저작(『스피노자-실천철학』)에서 궁리될 것이다. 또한 이 ‘정황’은 리쾨르에 있어서 ‘자기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또는 정치적, 윤리적 요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뒤에 리쾨르과 들뢰즈의 윤리정치적 지평을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절을 마치기 전에 들뢰즈가 주체의 형상을 허구로 그려내는 또 다른 지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의미의 논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부분은 앞서 우리가 논했던 삼중의 초월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그것이 들뢰즈-정신분석 차원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 보여 준다. 이 긴 인용문은 핵심적으로 주체화과정이 수동성과 능동성 초월해가면서 환각 가운데 ‘사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신분석에서] 환각의 두 번째 특성은 에고에 관련해서의 그 상황, 아니면 차라리 환각 자체 내에서의 에고의 상황이다. (...) 에고가 이런저런 순간에 행위하는 존재로서, 하나의 행위를 겪는 존재로서, 관찰하는 제3자로서 환각 안에 나타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능동도 수동도 아니며, 또 어느 순간에도 하나의 장소에(이것이 가역적이라 해도) 스스로 고정되지 않는다. (...) 주체는, 시원적인 환각에 가까운 형태에 있어, 하나의 자리를 할당받지 못하면서도 장면(scéne)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 대립자들의 그 어떤 동일성에 의한, 능동이 수동이 되는 일종의 전복[351]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능동과 수동의 초월에 관해 대명동사를 취급하면서] 프로이트가 여전히 그러한 ‘헤겔적인’ 관점에 머물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초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에고의 해소(dissolution)는 무한한 또는 반성된 주체성의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12) (...) 그것은 능동들과 수동들의 결과, 표면효과, 또는 사건이다. 환각에서 나타나는 것은 에고를 표면으로 개방하고 그것이 가두고 있는 무(無)우주적, 비인칭적, 전개체적 특이성들을 해방시키는 운동이다. 문자 그대로, 운동은 특이성들을 홀씨들처럼 흩뿌리고 이 흩뿌림을 통해 파열한다. (...) 그래서 에고의 [개별성이 아니라] 개체성은 환각 자체라는 사건과 혼동된다. 물론 대가는 있다. 사건이 환각에서 나타내는 것은 한 다른 개체로서, 아니면 차라리 해소된 에고를 통과시키는 다른 개체들의 계열로서 포착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각은 그것이 드러내는 주사위놀이들 또는 우발적인(fortuits) 경우들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 매번 선언들 내에 배분된 특이성들의 솟아오름 (...) 모든 특이성들은 매 경우 사건 안에서 소통하며, 모든 사건들은 한 동일한 던짐에서의 주사위놀이들에서처럼 하나 안에서 소통하다. (...) 선언적 종합(모순의 종합이 아니라)의 긍정적인 사용 (...)(DLS 247-49)

 

여기서 들뢰즈는 리쾨르가 ‘반성적 주체’의 방향에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폐기한다. 또한 들뢰즈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주체화 과정을 어떤 착란적인 솟아오름과 우발성들의 개체화, 즉 선언적 종합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이것은 리쾨르가 착안한 그 지점, 즉 해석학적 순환에 따라 주체성을 전유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입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들뢰즈의 ‘타자’-응시와 설명, 함축

들뢰즈가 타자 또는 타인에 대해 명시적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논문은 〈미셀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이다. 여기서 타인은 ‘타자화된 타인’이다. 즉 이 타인은 그것의 부재를 통해 그 존재론적으로 막강한 힘을 고지한다. 타자의 철학이 존재론이 되는 지점이 여기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존재론적 전회라고 할 만한 논변의 변화는 정신분석과 대결하는 『차이와 반복』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텍스트의 2장 4절에서 무의식의 세 번째 종합이라고 붙여진 제목 하에 어떤 임상적 예가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구절은 애초에 우리가 논의했던 ‘시선’ 즉 ‘응시’의 정신분석을 타자성의 차원으로 올려 놓는다.

 

읽을 줄도 모르면서 책 읽는 시늉을 내기 시작하는 아이는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책을 거꾸로 집는 것이다. 아이는 타인에게 책을 내밀 때, 마치 그가 자신의 능동적 활동의 현실적 종착점인 양 내민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책의 반대쪽을 잡되,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수동성과 심화된 응시의 잠재적 초점인 양 붙든다. (...)이런 이중적 초점 (...)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초점 중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아의 행동들이 이른바 ‘자기중심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유아적 나르시시즘이 다른 사물의 응시를 배제하는 현상으로 해석되어온 것은 바로 이 점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묶기의 수동적 종합, 묶인 흥분들로부터 출발하여 어린아이는 이중의 계열 위에서 자신을 구축해간다. 그러나 이 두 계열 모두 대상적이다. 즉 하나는 능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심화되는 수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이다. 수동적 자아는 바로 이 잠재적 초점들을 응시하면서 심화되고 또 이제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된다. 하나의 계열은 다른 계열 없이는 현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계열은 서로 닮지 않았다.(13)(DDR 132-33)

 

여기서 말하는 ‘이중의 초점’을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하나의 초점은 타인으로 향하는 초점, 또 다른 하나는 ‘수동적 자아’의 초점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대상적’이다. 타인으로 향하는 초점은 현실적인 것에 머물고 있으며 능동적 계열이며, 수동적 자아가 향하는 초점은 잠재적인 것에 머문다. 이렇게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은 함께 간다. 하지만 능동적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 달성하는 어떤 매번의 ‘쾌락’이 없으면 수동적 종합 위에 구축되지 못한다. 이 ‘이중의 초점’은 그래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상호참조를 넘어 능동적 ‘주체’의 구성, 그리고 ‘타자’의 구성으로 다가간다. 나는 타자의 ‘구성’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모든 타자의 절대화, 그로 인한 불가지론과 초재적 사유구도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주체도 타자도 결국 사건의 차원에서는 ‘환상’일 뿐이다. 다만 이 모든 환상들은 윤리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 진리는 ‘긴급성’을 앞지르지 못하며, 긴급성은 진리보다 더 진실되다. ‘충실성’은 여기에 있다.

어쨌든 ‘자아’는 여기서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머문다. 그리고 그 자아는 어떤 응시(시선)의 홀림 아래에, 그 쾌락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 불안한 시선의 선적인 움직임 안에 요람의 끈을 묶고 메달려 있다. 그런데 이 수동적 자아는 특히 잠재적 초점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여기서는 최초의 ‘타자성’이 등장한다. 그것은 어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타인’이 아니라 발생 중인 주체의 한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시선을 잡아끄는 그 수동성 자체다. 이것은 사실상 식별불가능성의 지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중이다. 여기서 이 수동성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인격적’인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정신분석적인 연극무대에서 아직 가면을 완성하지 못한채 미숙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와 같은 모습을 취한다는 것 뿐이다. 즉 이것은 ‘전개체적인 타인’의 형상이다.

이와 다른 지점에서 들뢰즈는 타인의 타자화에 대해 논한다.

 

밖-주름 운동 중에 있는 (...) 어떤 안-주름운동 (...) 개체화 요인들을 위해 증언하는 어떤 봉인의 중심들 (...) 이 중심들은 오히려 나-자아 체계에 속하는 어떤 전적으로 다른 구조에 의해 구성된다. 이 구조는 타인autrui이라는 이름으로서 지칭되어야 한다. 이 구조는 그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나에 대한 자아를, 자아에 대한 다른 나를 가리킬 따름이다. (...) 타인은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 두 체계 안에서 성립하는 - 타자에 대한 자아이자 자아에 대한 타자이다. 이런 타인은 어떤 선험적 타인이고, 이런 선험적 타인은 각 체계 안에서 자신의 표현적 가치, 다시 말해 함축적이고 봉인하는 가치를 통해 정의된다. (...) 우리의 가능자들은 언제나 다른 것들, 타자들이다. (...) 반면 나와 자아를 특징짓는 것은 어떤 개봉[전개]이나 밖-주름운동[설명]의 기능들이다. 즉 나와 자아는 질들 일반을 이미 자신들 체계의 연장 안에서 개봉된 것으로 체험할 뿐 아니라 타인에 의해 표현된 세계를 - 그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든 그 세계를 부인하기 위해서든 - 설명하고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나는 겁먹은 타인의 얼굴을 펼쳐내고, 그 얼굴을 어떤 위협적인 세계 - 그 실재성이 나를 장악하거나 그 비실재성을 내가 비난하는 세계 - 안에서 개봉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시도는] 타인을 대상의 신분으로 환원하는가 하면 다른 한 경우에는 타인을 주체의 신분으로 끌어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 타인은 어떤 가능한 세계의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떤 나-자아의 심리적 체계 안에서 타인은 감싸기(enroulment), 봉인, 안-주름운동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타인은 바로 개체화 요인들의 대리자(representant)이다.(14) (...) 심리적 체계들 안에서 타인은 엔트로피의 국소적 상승들을 형성하는 반면, 자아에 의한 타인의 설명은 법칙에 합치하는 어떤 점진적 감소를 나타낸다. (...) 표현들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이 표현되는 것들이 모두 우리의 세계에 서식하도록 만들면서 이 세계를 증식시키라는 것 (...). 왜냐하면 어떤 다른 나에 해당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어떤 타자, 어떤 균열된 나이기 때문이다(15).(DDR 334-335)

 

여기서 어떤 애매모호한 표현들 때문에 길을 잃지는 말자. 이런저런 주름 운동들은 이렇게 주체와 타자의 평면에서도 쓰이지만 존재론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주름운동이라는 것이 매우 포괄적인 도구로 들뢰즈 철학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쨌든 이 구절에서 핵심적인 것은 타인은 구조이며, 가능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단어는 타인의 구조가 타자라는 구조 즉 세계 안에서 균열된 나의 봉인된 가능성이라는 것을 환기한다. 그것이 봉인된 상태로 존재할 때 그 역량은 고점에 놓이지만 봉인이 해제되고 밖-주름 운동, 즉 설명될 때 그것의 역량은 점차 감소한다. 자아는 이러한 주름운동을 ‘체험’하면서 수동적으로 머문다. 우리는 여기서 타인이란 선험적 구조임을 알 수 있다. 타인구조는 이렇게 해서 ‘세계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타인의 ‘세계성’이란 곧 타자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단순히 ‘autre’ 또는 ‘autrui’가 아니라, ‘autre personne’이면서 ‘autre chose’인 이 타자는 어떤 ‘수동적 종합’의 후견과 더불어 ‘지각의 장’을 형성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지각장은 선험적 장이다. 여기서 자아는 이러한 타자의 세계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 구조를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가능세계 속에 있는 타자는 이러한 자아의 수동적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것은 들뢰즈가 흄을 취급할 때 말했던 그 ‘정황’(circonstance)에 해당된다. 그리고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에서는 어떤 ‘응시’ 즉 ‘수동성 자체’에 해당된다. 그리고 리쾨르에게 있어서 이러한 수동적 초월의 과정을 떠받치는 응시와 정황, 그리고 타자-구조의 지각장은 오로지 ‘설명’(explication)될 수 (펼쳐 질 수)있어야 한다. 들뢰즈의 밖-주름 운동은 리쾨르에게 있어서 해석학적 주체의 탄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학적 주체는 앞서도 보았듯이 자기성과 자체성이라는 극성에 의해 찢겨져 있으며, 밖-주름 운동이라는 존재론적 바탕 하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꿈 꿀 수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들뢰즈는 이러한 자아에 의해 형성되는 설명의 반성적 움직임이 오히려 타자의 함량을 떨어트리며, 그 구조를 더 깊이 봉인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정황이나 타인을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그(것)에 대해 더 미궁으로 빠지는데, 그것은 정황이나 타인이 설명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설명의 존재론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밖-주름 운동은 언제나 안-주름 운동을 동반하며, 구조의 탈은폐는 언제나 그것의 은폐를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수동적 주체의 능동성으로의 고양은 언제나 환영을 동반하고, 그렇게 균열된 주체가 고안해 내는 타자성은 언제든지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리쾨르는 언제나 자기성의 움직임이 어떤 최종적인 전유(appropriation)에 도달함으로써 그 충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들뢰즈는 그렇게 전진적으로 무언가를 고안하거나 발명함으로써 ‘전체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본다. 요컨대 리쾨르에게 있어서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타자로의) 해석학적 우회로와 (자기로의) 전유라는 최종지점은 들뢰즈에게 있어서 주체성의 해체라는 끈질긴 수동성의 환영들과 타인-구조의 선험성에 의해 늘 훼손되지만, 그 과녁은 한 곳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감각과 신체와 정신의 ‘변형’(metamorphosis), 즉 (비)주체의 역진성과 주체의 전진성, 타자의 심층성과 자아의 표면성이라는 각기 다른 힘의 방향이 수렴되는 그 지점이다.

요컨대 들뢰즈의 ‘타자’는 늘 ‘자아’의 곁에서 그것과 함께 운동하는 주름의 한 묶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름운동은 사실상 존재론의 층위에서 다시 활동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의 문제에서는 단지 타자의 형상을 전진적으로 구성하면서, 자아의 형상은 퇴행적으로 함축하는 기작으로 드러난다. 타자가 선험적 장이라는 것은 그것이 지각장을 구성하면서, 자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를 더욱더 분열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쾨르는 이러한 분열적 양상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의미화의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리쾨르가 들뢰즈와는 달리 ‘타자’를 해석의 우회로에 놓은 어떤 극복가능한 장애 또는 해석대상으로 정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타자’란 늘 해석을 빠져 달아나는 잔여적인 기호-분자이며, 소피스트들이다. 하지만 이 둘에게 있어 타자는 자아 또는 주체의 형상을 구축하는 관건적인 어떤 것이기도 하다. 희안하게도 리쾨르와 들뢰즈에게 ‘타자’는 이렇듯 유일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활동하는 ‘장’은 판이해 보인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나는 이것을 이 논문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시간론에 이르러서야 규명할 수 있다고 본다. 미리 말하자면, 이 두 철학자의 ‘타자’는 상이한 존재론적 평면, 상이한 시간의 장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서로 좁디 좁은 문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사태가 주체의 해체 이후에 등장하는 철학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석의 편에서 타자는 어떤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는 창이자, 텍스트이며, 사건의 철학에서 타자는 그 세계의 세계성, 즉 선험적 구조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사건의 발생에 대해 리쾨르와 들뢰즈에게 의뢰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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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일자’의 해체는 리쾨르에게서 다소 온건한 형태로 제기되는 문제다. 특히 주체의 자기동일성은 이렇게 양분되지만 ‘자기성’으로의 인력(引力)을 매우 강하게 내포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서 동일성은 그의 ‘초월적 경험론’*의 관점에서 불필요한 것이 된다. 리쾨르의 경우 동일성은 자기성이 가진 분열양상(유산된 코기토)을 극복하기 위해 매번 되돌아 오는 역량을 발휘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서는 ‘허상’ 즉 ‘차이와 반복’이 매번 동일성을 압도한다. 철학사적으로 잔여적인 것에 불과했던 이 허상들의 침범, 범람에서는 일종의 ‘잔여의 역전’이라는 사유이미지가 존재한다. 이것은 오캄의 면도날이 보편자들을 잘라 내던 때부터 경험론의 작업가설이 되었다. 동일자는 불필요한 잔여다. 예를들어, 맑스적인 구도에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도와 연관된다. 부르주아는 생산관계 내에서 불필요한 기생계급이며, 이들의 ‘폐절’이 역사적 경험의 요청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다음 언급은 ‘차이’가 가지는 이런 전복적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제들[차이들, 허상들]은 각각의 고유한 실증성의 등급에 도달할 때, 그리고 차이가 그에 상응하는 긍정의 대상이 될 때, 어떤 공격과 선별의 역량을 분비한다.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 허상은 원형들마저 전복하는 가운데 모든 모상들을 전복한다. 즉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DDR 2). 즉 동일성이 차이들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이 동일성을 전복하고, 파괴하여 차이들의 단순한 결과로 만든다. 이 ‘전복’의 역량에 대해서 나는 결론부에서 한 번 더 강조할 것이다.

(2) 과연 언어에 대한 이런 일반화가 타당한 것일까? 문제는 그러한 과정들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명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고정화에 대한 분투를 애써 무시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러한 분투과정이 더 관건적이지 않은가? 따라서 결과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물론 과정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3) 이러한 리쾨르의 방법론적 과정이 들뢰즈의 의미론과 일정부분 통한다는 것은 수긍될 만하다 하지만 들뢰즈가 의미화를 사건의 출현으로 상정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존재론으로 이행한다면, 리쾨르는 사건을 의미와 동렬에 놓기는 하지만 먼저 관심을 두는 것은 언어분석철학의 담론분석과정이다. 여기서도 리쾨르는 먼 에움길을 들뢰즈는 짧은 지름길을 택한다.

(4) 들뢰즈에게 ‘개념’은 이중적인데, 그것이 단순히 ‘규정자’이자 ‘(피)정의항’으로 기능할 때 그 개념은 단지 재현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외연과 내포의 틀을 깨고 ‘영향권’(des sphéres d’influence)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면 다르다. “그 영향권 안에서 개념들은 ‘드라마’들과 한데 묶여서 어떤 ‘잔혹성’[신체성]의 길을 통해 힘을 행사한다”(DDR 3). 이제 개념들은 단순히 개념에만 머물지 않고 개념의 창조와 발명으로 향한다. 개념 그 자체가 역량을 발휘하면서 차이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이 ‘기호’를 기반으로 어떤 ‘사건’이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개념의 성격을 들뢰즈는 ‘경험론의 비밀’이라고 한다. “이것이 경험론의 비밀이다. (...) 경험론은 이제까지 결코 보거나 듣지 못했던 지극히 광적인 개념 창조를 시도한다. (...) 경험론은 개념을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지금-여기로 다룬다. (...) 결코 다 길어 낼 수 없는 것들, ‘지금들’과 ‘여기들’이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르게 분배되는 가운데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 어떤 에레혼Erewhon인 것처럼 개념을 다룬다 (...) 개념들은 사물들 자체 (...) 이다.”(DDR 3).여기서 더 나아가면 개념들은 ‘다양체’(mutiplicité)로서의 잠재적장, 또는 강도장에서의 사건들이 된다.

(5) 하지만 이러한 타자와의 의미 교환과 동일귀속성은 ‘평등성’을 전제한다. 리쾨르는 이런 관점에서 타자와의 절대적 불평등성을 강조하며, 타자를 절대화하는 레비나스를 비판한다.

(6) 여기서 신체는 우리가 《올랭피아》를 사유할 때 ‘살’(chair)이 등장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은 어쨌든 이렇게 개별성의 차원에서 시작되고, 사건의 지점을 가리킨다.

(7) 동일성의 양적 규정에 해당되는 이 진술은 들뢰즈가 첫 번째 반복을 설명하는 방식과 많은 부분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알아 본다’는 것은 재인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습관의 종합을 의미한다.

(8) 이 방면에서 흄의 주체를 리쾨르의 용어를 빌어 ‘반성적 주체’라고 단번에 논하기는 힘들다. 둘 모두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심오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리쾨르의 주체성 논의가 만나는 그 최초의 단초는 여기다. 즉 들뢰즈의 ‘경험’(또는 소여), 리쾨르의 ‘의지’(또는 ‘욕망’).

(9) 나는 이 ‘식별불가능한 것들’의 평면에서 발생하는 미분적 계열들의 요소를 참조할 때, 들뢰즈-흄이 어떤 초월적 유물론의 지평, 또는 우리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유물론의 지평을 열고 있다고 본다.

(10) 중요한 구절이므로 원문을 옮겨 놓는다: Le point physique est déjà étendu, il est eccore divisible; le point mathématique est un néant. Entre les deux, il y a un milieu, seul réel; entre une étendue réelle et une non-existence, il y a l'existence réelle dont l'étendue va pré챤ément se composer. Le point sensible ou atome est visible et tangible, coloré et solide. Il n'a pas d'étendue par luo-même. il existe pourtnat. (...) dans la possibilité de son existence, dans la raison de son existence, dans la raison de son existence distincte, l'emprisme trouve un principe. Il n'est pas étendu, parce qu'aucune étendue n'est elle-même un atome, un corpuscule, une idée-minimum, une impression simple. 《Cinq notes jouées sur une flûte nous donnent l'impression et l'idée de temps, bien que le temps ne soit pas une 6e impression qui se présente à nl'ouïe ou à un autre sens》; de même l'idée de l'espace est seulment l'isée de points visibles ou tangibles distribués dans un certain order. L'espace se découvre dans la dispoeition des objets visibleset tangibles, comme le temps, dans la succession perdeptible des objets changeants.

(11) 이러한 ‘생생한’ 신념이 ‘생생한’ 정념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생생한 인상을 배제하는 사유과정을 거쳐 명석판명성을 옹호한다.

(12) 이는 분명 리쾨르에 대한 반대를 형성한다.

(13) 현실적 계열과 잠재적 계열의 이 비대칭성과 비동일성은 정신분석적이 자아론에서부터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들뢰즈의 주장이다. 따라서 어떤 잠재적 계열이 분화되어 현실적 계열이 된다고 할 때, 이 말은 반만 타당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단서가 붙는다. 즉 현실적 계열은 잠재적 계열과 완전히 다르다. 또는 “대립된다.”

(14) 여기서 들뢰즈는 ‘타인’을 ‘타자’로 보고 있다. 이때 타인은 ‘강도적 장’이며, 「미셀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에서의 타인에서의 논의와는 약간 결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거기서는 타인은 ‘지각장’으로 지칭된다.

(15) 여기서 들뢰즈의 ‘해석의 과잉’은 곧 개체적 요인들의 축소를 가져 온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반비례 관계, 아니 다른 어떤 이름이라도 좋다. 중요한 것은 해석과 사건이 이렇게 각각 밖-주름과 안-주름을 형성할 때, 세계(우주)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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