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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1] 들뢰즈에게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무엇인가?

1. 플라톤주의는 ‘형상’(eidos, idea)과 ‘본질’(to ti ên einai)의 철학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자에게 늘 요구하는 것은 어떤 ‘예(例)’가 아니라 ‘그것 자체’(kath'autos)인 것이다. 누군가 소크라테스에게 경건이란 이러저러한 사람에 의해 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즉각 ‘그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며 내가 묻는 것은 그 자체의 정의(horismos)’라는 답변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는 물론이고 대화 상대자조차 설득할 만한 답변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플라톤에게 이러한 답변불가능성은 특유한 ‘아이러니’를 형성하면서, 변증법의 강점으로 둔갑한다. ‘무지의 지’는 이 ‘보편적 정의’(horismos katholou)의 불가능성에 대한 지식이면서, 대화 상대자가 끝내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릇 ‘영혼을 돌보는 자’는 이 아이러니를 어떤 방법론의 지위에까지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소급하는 질문들을 통해 대화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기존의 자연주의 또는 퓌지스(physis)에 대한 소박한 경험론과 절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연철학자들에게 퓌지스는 ‘생명’(pneuma)이면서 ‘원리’(stoicheion) 이고 ‘원인’(aitia)였는데, 이는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기에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 규정들에는 프쉬케(psyche)가 없다. 아니 오히려 퓌지스가 프쉬케를 단번에 집어 삼키고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프쉬케는 퓌지스와는 다른 특질을 가질 필요가 있었으며, 그 특유한 규정성을 향유하는 것은 마땅히 누스(nous)라야 한다.(1) 왜냐하면 플라톤에 따르면 퓌지스란 겉보기에 생성의 양상을 띠지만 진리의 편에 서면 그것은 영원불변한 ‘존재’(einai)의 면모를 가지고, 이러한 영원불변성을 파악하는 권능은 감각(aisthesis)도 지각(prolepsis)도 아니고, 지성(nous)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의 편’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편 가르기’는 존재론의 영역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를 위한 길’ 즉 ‘페이토(peito, 설득)의 길’ 또는 ‘진리의 길’이 있으며 이것이 ‘존재’로 열려 있다고 확신한다. 그 반대편에는 오직 ‘비존재의 길’만이 있을 뿐이며, 이는 배움의 길이 아니다(DK28B2). 이때 ‘비존재’는 존재하지만 있으나마나한 존재,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를 의미한다. 사유의 역사에서 이토록 선명하게 피아가 구분된 적은 그전에 없었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이 심대한 ‘단절’ 또는 ‘전회’(conversion)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는 이 전회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이 텍스트는 어떤 측면에서는 다소 빙퉁그러진 측면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철학적 아버지라고 할 만한 파르메니데스를 다루면서 그는 어떤 ‘전제’도 구하지 않고, 파르메니데스를 자신의 형상철학의 한 부분으로 우겨 넣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강요와 폭력은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친부살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유가 지성사에 심대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사실상 플라톤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권위에 기대고 있지만, 그 내용은 온전히 파르메니데스와 퓌타고라스의 것을 가져와 변형한다. 전자로부터 형상철학의 ‘이데아론’이 나오며, 후자로부터 그의 ‘영혼론’이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공히 ‘편 가르기’ 즉 ‘이분법’이다. 변증법은 이 두 편 사이에서 차례로 위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나눔의 방법이 동원된다.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존재의 편’에 가까운 것은 형상의 지위로 격상되는 반면 이차적인 것, 모사물들은 ‘생성의 편’으로 몰아내면서 기각된다. 하지만 이 기각의 과정은 늘 모사물들과의 유사성의 관계를 끊어 놓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의 자체’가 있으면 그에 따라 그것을 모사하는 ‘정치가’가 있으며, 또한 그것은 모사하는 ‘웅변술’이 있게 되고, 마침내 가장 하급의 ‘소피스트들’이 한 편에 모이게 되는데, 이 맨 마지막의 것은 그 지위가 매우 모호하게 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어야 하는 것이면서도 끝내는 변증법의 잔여물(residuum)로 남는다. 플라톤은 이를 두고 환영(phantasma, 시뮬라크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2. 들뢰즈에게 문제는 플라톤이 기각해 버린 이 잔여, 즉 ‘환영’에 있다. 『소피스트』편은 이 환영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끈질기게 플라톤을 괴롭혔는지를 증명해주는 문서다. 여기서 플라톤은 하나씩 하나씩 본질과 형상에 지원하는 이런저런 규정들과 예들을 나누어 잘라낸다. 그리고 마침내 소피스트들의 정체를 몇 가지 규정을 통해 밝히는데, 사실상 그렇게 밝혀 놓은 소피스트들의 정체가 어째서 다이달로스의 조상처럼 한 자리에 묶여 있지 않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밝혀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눔의 결과 드러난 소피스트의 본질 그 자체가 오히려 소피스트들의 유일성, 즉 불가피한 성격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일종의 의인화된 시뮬라크르들이다.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대적한 이들은 결코 잡히지 않지만, 늘 플라톤 철학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특이점, 로두스섬이 이 소피스트-시뮬라크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플라톤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그 외부에 있지 않다. 그래서 ‘전복’(subversion)은 들뢰즈가 그 자신의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강제한 결과가 아니라 플라톤주의 자신이 그러한 전복을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시뮬라크르(simulacre)는 그래서 들뢰즈의 용어가 될 수 없고 온전히 플라톤의 용어가 된다. 또 하나, 이런 이유로 ‘전복’이란 어떤 반정립도 그릇된 대립도 아니며 단지 플라톤 안에서 플라톤주의의 ‘차이 자체’ 즉 그것을 추동하는 어떤 이질적인 ‘힘’(puissance)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들뢰즈 자신의 명쾌한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플라톤의 등에 올라탄 후 하나의 괴물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 괴물은 플라톤 이전도 이후도 아니며 플라톤이 사유를 전개하는 곳곳에 존재하면서 사유의 양분이 되고 그것을 추동하는 힘이 되는 그것이다. 때로는 소피스트며, 또 때로는 환영이고, 또 때로는 다(多, polla)인 그것.그런데 이런 철학사적인 배경에는 늘 파르메니데스의 그림자가 따른다. 플라톤의 아이러니는 논의를 상층으로 이끌어가지만 거기에는 어떤 질료적인 그림자, 파르메니데스가 ‘비존재’라고 칭한 그것이 따라 붙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비)존재’라고 해야 맞다. 파르메니데스도 인정하다시피 완전한 비존재는 언표조차 불가능하다. 플라톤에게도 이 구분은 유효하다. 들뢰즈는 『파르메니데스』편의 세밀한 독해 안에서 ‘me on’ 과 ‘ouk on’을 구분해 냄으로써 플라톤 존재론에 드리워진 파르메니데스의 그림자를 더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보다 우주론적인 맥락에서 시뮬라크르는 데미우르고스의 규정, 즉 형상의 각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한 이러한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사성의 위계 안에서 모사물을 형성하지만 그것을 피해가거나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은 그 위계 자체를 전복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티마이오스』편은 이 위계를 전복하는 힘을 ‘수용자’(hypodiche), 또는 코라(chora)에 부여한다. 이것은 순수하게 질료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각에 의해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서출적 추론’이라는 방식은 플라톤에게 일종의 궁여지책이다. 감각되지 않지만 지성의 파악에 가까운, 그렇다고 완전한 지식(episteme)를 형성하지도 못하는 이 대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우르고스 제작술(poiesis)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불가능한 것은 플라톤의 탓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헬라스적인 사유의 한계 자체, 파르메니데스의 (비)존재가 그토록 힘겹게 자신의 존재증명을 날인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유불가능한 것의 한계,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이다. 유사한 것으로부터 무한하게 멀어지는 이 (비)존재로서의 ‘코라’는 따라서 물체적인(corporeal) 것이지만 초재적이지 않고, 심층적이지만 물질적(material)이지 않은 그것(ti)이다. 코라가 ‘비물질적’(immaterial)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초감각적(incorporeal)인 대상을 염두에 둔 언급이 아니다. 그것은 물체적인 것의 아래에 들끓는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에, 형상으로부터 무한히 멀어져서 모사물조차 되지 못하고, 이 때문에 감각가능하지 않지만 불가피하게 감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존재의 증명날인은 데미우르고스가 이런저런 수학적 이념들(삼각형 등등)을 상정하기 전부터 불가피한 어떤 무한자(apeiron)로, 그 이념들의 각각의 나눔 안에서 매순간 이념 전체를 주파하면서 그것을 운동하게 하고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분명 생성의 편에 있으며, 이것은 플라톤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것이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생성’이며, 그것도 어떤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의 생성자체, 차이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생성은 존재와 어떤 대립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만이 유일한 존재이며, 존재는 생성 가운데에서 생성된다. 즉 시뮬라크르는 그 자체로 하나(hen)이며, 이 하나는 시뮬라크르 가운데에서 유일한 시뮬라시옹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주의의 어떤 존재론적 사유공간에서 그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는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시뮬라크르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으며, 플라톤은 이것을 평생에 걸쳐 은폐하고, 배제하고, 추방했으며, 마침내는 시라쿠사까지 좇아가 영원히 격리시켰다. 그가 진리를 ‘드러냄’(aletheia)라고 할 때에도 이 말에는 매우 기만적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도대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 망각된 것을? 그렇다면 망각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이데아에 늘 존속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존속은 이데아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라는 외재적인 환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신화는 플라톤이 늘 도피하는 사유공간이다. 『메논』에는 한 노예 소년이 등장하는데, 플라톤은 그 아이를 통해 ‘상기’를 증명해 낸다. 하지만 상기의 대상이 되는 그 수학적 이데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질문에 플라톤은 곧장 ‘사후세계’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미 그 아이는 이전세계의 기억을 잃은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아이의 기억력은 도대체 어떤 이데아를 가지고 삼각형을 증명해 내었다는 것인가? 사실상 이 신화적인 사후세계나 ‘상기’의 기원설은 사유의 게으름이며 도피에 불과하다. 어쨌든 무한을 유한한 환각으로 대체하는 것은 플라톤 자신의 의도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오히려 『메논』에서 주목해야 할 맥락은 아이의 ‘당혹스러움’을 말하는 곳이다. 소크라테스는 아이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도 기하학적 증명을 해내는 자신에게 매우 당혹스러워한다고 언급하는데, 사실상 이 당혹스러움은 플라톤의 깨달음이기도 할 것이다. 당혹스러움, 머뭇거림, 사유의 지체 ... 이 속에서 사유가 어떤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유 안에 존속하는 어떤 능동적인 힘이라기 보다 수용력, 또는 수동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를 상기한다는 것은 따라서 노예 소년이 태어나기 전의 어떤 신화적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 소년을 내부에서부터 추동하여 그로 하여금 ‘증명’을 해 나가게 하는 기이한 ‘응시들’ 또는 ‘지각 불가능한’ 그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다른 것들도 이와 같다. 어떤 것이 생성된다는 것, 그리고 이전과 이후가 나누어지면서 변양(modification)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플라톤의 ‘존재지평’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지평을 감싸고 있는 그 모호한 지대(zone obscure), 어떤 ‘너머’를 가리킨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플라톤주의의 전복에서 스토아 존재론이 개입하는 것은 이 지평에서다. 스토아들은 플라톤의 신화적 시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간론을 전개한다. 이들은 세 가지 시간성과 하나의 시간론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시의적절성’(eukaireia)은 카이로스(Kairos, 최적기(最適期))의 시간론이 접혀 있는 개념이다. 어떤 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신체 혹은 물체들의 최적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가장 좋은(eu) 시기이며, 그래서 필연성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은 카이로스의 시간론에서 자연 자체의 시간으로서 가장 탁월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는 그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카이로스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인과계열, 즉 신체적, 물체적인 것들의 수동-능동의 계열들, 그것들의 발산이다.(2) 이 계열들, 차라리 뒤엉킴은 표면의 코스모스와는 달리 우월한 카오스들로 들끓는다. 심층의 어떤 계열은 근친상간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다른 계열은 식인풍습이나 난교와 같은 것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현행화(actualization)되는 것은 어떤 ‘계기’ 즉 ‘시의적절성’을 만날 때 뿐이다. 하지만 심층과 표면의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이다. 심층의 뒤엉킴은 카오스로서의 필연성, 즉 카오스모스며 표면의 인과계열은 그 결과 또는 최적의 상태가 된다. 이 필연성 전체는 하나의 ‘대사건’을 구성한다. 스토아들에게 이 단 하나의 사건 외에 다른 모든 사건들은 현행화되는 인과계열 안에서 가면을 갈아 쓴다. 그런데 이 가면 쓴 사건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사실상 가면 쓴 사건들은 대사건이 한 양태일 뿐 사건자체의 드러남은 아니다. 사건자체는 결코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의 계열은 다만 ‘공백’일 뿐, 어떤 실체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실재로 공백의 이동들, 이 ‘순간’에 느닷없이 솟아 오르면서 가면을 보여주기만 하는 공백들로 가득차 있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공백을 ‘허공’에만 부여했기 때문에 사건을 사유할 때에도 표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 즉 클리나멘 밖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스토아에게는 두 개의 인과계열, 심층과 표면의 계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건’이 어떻게 우주를 구성하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우주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며, 우발성이면서 동시에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4. 하나의 거대한 사건과 공백으로서의 사건들은 결코 본질적으로 다른 양상이 아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의 사태, 하나의 목소리, 일의성(univocité)을 이룬다. 플라톤주의의 ‘편 가르기’가 결정적으로 전복되는 것은 스토아에서부터다. 모든 것은 차이 나는 것들의 일의적 표현들이지 모순관계나 대립관계가 아니며, 사건의 시간은 신화의 시간과 달리 어떤 단절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연속적이며, 불연속면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사건으로 메워진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자리 즉 표면으로 끌어내려 진다. 이미 영원불변성은 사라진 것이고, 생성의 편에서도 이데아는 그 탁월성이 사라진다. 탁월성이 사라진 자리는 이데아(형상)의 바로 그 자리다. 탁월성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 한번의 역량으로 탄생한 우주 자체의 속성일 뿐이다. 따라서 탁월성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들뢰즈는 이런 전복의 역사적 계기를 더 멀리까지 밀어부쳐, 니체에 이르러 완성한다. 영원회귀. 여기서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며, 차이는 시뮬라크르 자체고, 공백들이다. 심층으로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역능)이고, 강도들이고 운동들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실체도, 주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들이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5. 요컨대 들뢰즈에게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세 가지 구도 하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형상론을 거스르는 시뮬라크르, 둘째, 존재를 거스르는 사건, 셋째, 동일성의 시간(신화의 시간)을 거스르는 차이나는 것들의 영원회귀. 이로써 플라톤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가 끊어진다.

 

이제 본질과 형상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s), ‘다양체’(le multiple), 혹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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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가 아낙사고라스의 nous를 매우 반갑게 여겼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이 반가운 감정은 실제로는 아낙사고라스에 대한 잘못된 파악이 불러온 것이라 여겨진다. 애초부터 아낙사고라스의 nous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추구했던 ‘형상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매우 물질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그 자신이 물질주의자였으며, 그래서 nous는 어떤 흙이거나 공기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모든 요소들을 아우르는 질료적인 실체였던 것이다.

(2) 나는 카이로스의 층위의 표면과 바로 아래에서 발생하는 이 사태들을 리쾨르의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상호성 (...) 비의지적인 것은 그 자신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는 위에서 아래로 진행하는 것이지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의지적인 것이 비의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반대로 의지적인 것의 이해이다. 나는 나 자신을 처음에는 “나는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로서 이해한다. 비의지적인 것은 의지와 관련이 있는데, 이때 그것은 의지에 동기, 능력, 그것의 기초 심지어 한계까지 부여하는 것이다. (...) 인간의 부분적 기능들 전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지향 원리(헤게모니, directing principle)라고 불렀던 중심 기능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설명의 측면에서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을 위한 근거이고, 기술과 이해의 측면에서 다수성(多. the many)의 근거라는 의미이다. 의지는 비의지적이 것의 다수성에 질서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 하지만 여기에 어떤 잔여(residuum)가 남는다. 의지는 텅 빈 투사와 그것의 행위에서의 실천적 수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의지는 어떤 제안도 할 수 없고 변화도 불가능한 [비의지적인 것의] 필연성의 묵인에 놓여 있다. (...) 따라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상호성의 원칙에 의해, 우리가 여기서 대강을 그려보는 의지작용의 결합들은 차례대로 비의지적인 것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RVI 8~11. 따라서 의지적인 카이로스와 비의지적인 카이로스는 의지적인 것의 능동성과 비의지적인 것의 수동성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의지적인 것은 어떤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비의지적인 것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자신만의 질서’로 축소되며, 이때 비의지적인 것은 자신의 잔여적 역량을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이 잔여적 역량 또는 신체적 역량을 전유함으로써 어떤 ‘발명’으로, 또는 신체적 변용(modification)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또한 앞서 시몽동을 논했을 떄, 그가 “이것은 인간 안의 인간성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서의 아페이론이며,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 자연스러운 고유한 매체를 사용하면서 발명한다”라고 했던 부분을 떠올린다면, 이제 이 비의지적인 카이로스가 아페이론의 층위와 절합(articualtion)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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