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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Pro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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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olbein, The Ambassador)

 

2. 데카르트적 양식의 균열들

들뢰즈와 리쾨르를 우회하여 다시 데카르트 자신으로 돌아와 보자. 들뢰즈와 리쾨르가 공히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이야기할 때 언급하는 그러한 ‘유산성’(불모성)과 ‘양식성’(임의성)이란 사실 우리가 알아 채지 못하고 있는 어떤 텍스트적인 구도 안에서 잉태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그것은 어쩌면 데카르트 자신이 취한 담론의 지향 안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최초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서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방법서설』- 삼중의 질서

우선 나는『방법서설』에 관하여, 그것의 내용에 앞서, 그 텍스트가 담론(discours)인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즉 이 텍스트는 담론으로서의 ‘논문’인가? 아니면 더 넓은 영역의 ‘담론’을 지칭하는 ‘이야기’인가? 이런 질문을 통해 시작하고자 하는 것은 이 텍스트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카르트 자신의 코기토, 즉 어떤 선험적 ‘사실’을 바라보고자 그 텍스트의 ‘외부’에 서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이 텍스트는 논문으로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기보다 단지 에세이나 평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그 명제 “Je pense donc je suis”(Cogito ergo sum)에서 에세이의 필자, 그리고 평전의 그 ‘인물’을 지칭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Je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단일한 ‘자아’로 표기되는 라틴어 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Cogito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분리불가능한 실체(res)로서의 생각함(cogitans)를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문법적인 사항은 실재적인 것의 생략어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법적 언술에서든지 그것이 이런저런 ‘인칭적 표식’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텍스트가 프랑스어로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 버리고 있다 하더라도, 라틴어로 쓰여진 이 명제에서 ‘Je’의 일인칭적인 지시체를 알아채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여기서 ‘생각하는 나’는 무엇인가가 된다. 문법을 벗어나서 본다면 이 명제는 다소 낯선 인칭적인 주체, 또는 인격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의 언급 안에서 이 ‘나’는 (인식론의 질서에서) ‘의심함’(dubitans)을 통해 일구어지는 최종항, 마찬가지로 (존재론의 질서에서) 모든 존재자를 근거 짓는 최초항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질서에 모두 걸쳐 있는 이 ‘나’의 ‘얼굴’이 양면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개념사 안에서 모든 특유한 것들은 철학사에 등장한 이전의 ‘개념적 인물’들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또 그와는 다른 전체적인 형상으로 자신을 빚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 ‘나’가 텍스트 상에 등장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인물일 뿐이라면 철학사는, 또는 데카르트 자신은 『방법서설』에 ‘담론’의 지위를 감히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의심의 최종항인 한 인물, 그리고 존재의 최초항인 이 또 한 인물, 이 두 인물이 얼굴의 양면을 형성하는 단 하나의 ‘질서’(ordo)를 사유하기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récit, mythos)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명제가 솟아오른 그 특이한 사건은 어디에서부터 발생하는가? 네덜란드의 참호 속인가? 그 난로는? 아니면 제4부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그러므로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 ”라고 선언하는 그 구절에서 부터인가?

나는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기술하기 전에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적으로 그는 “던져 버리”고, “결심하”고, “알게되”며,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텍스트 상에 흩어져 있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데카르트 내면의 이야기에 출현하는 ‘사건’을 고지하는 것처럼 일정한 계열을 이루는 이 단언들은 그가 ‘제일 원리’를 논리적 이성에 따라서만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바로 그 ‘사건의 지점’이다. 그리고 거기 ‘이야기’가 속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AT. 31-32). 그리고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렸다”(32). 그리고 이어지기를, “내 꿈의 환영(illusion)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ibid.]. 우선 데카르트는 이 사유의 과정에서 ‘의심’의 최종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폐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신념들’, ‘증명들’, 그리고 이러한 포기/폐기의 과정은 일정한 목적론적 구도를 취하는데, 그것이 겨냥하는 바는 바로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의심의 최종적인 과녁은 바로 ‘확신’이거나 ‘의심의 종식’ 자체가 될 것이다. 그러한 의심의 종식은 사실상 ‘정념의 동요’를 근절하여 의혹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이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환영’을 ‘참’으로 놓는 가정이 필요해진다. 동요를 극복하고 안정에 이르기 위해, 그 동요의 극단을 설정하는 이른바 사고실험은 사실상 어떤 ‘연극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극단적 의심의 상황은 사유의 논리적 과정에서 ‘가정’된다기 보다 하나의 ‘가상’이라는 도식 또는 상상을 동원하는 것, 철학사의 한 국면에 Cogito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터를 다지는 작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Je’는 『방법서설』의 1부에서 6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4부는 어떤 극적인 깨달음(anagnorisis)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여기서 급변(peripateia)이 발생한다. 4부의 이 지면(32면)에서 소위 ‘방법’은 자신의 인식론적 질서의 최종항이 존재론적 질서의 최초항으로 전환되고, 변형(metamorphosis)되는 경험을 그려낸다. 사실은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세상이라는 큰 책’을 찾아 나서는 어린 데카르트와 학교 생활을 지겨워하던 그 데카르트는 Je라고 지칭되는 지칭체 안에서 완연한 과학적인 ‘대상’으로 한 번 화했다가, 다시 ‘주체’(실체)로 변형된다. 즉, ‘데카르트’는 실체적인 모습을 한 대상으로 Je pense라고 말하는 Je 안에서 사유의 가면을 쓰고 있다가, donc라는 단어 속에서 잠시 망설인 후(이 ‘망설임’이라는 정념은 그래서 어떤 ‘전환’을 표시한다), 사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주체로 변형되며, Je suis라고 말하는 Je 안에서 실체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도대체 ‘je’는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1부에서 3부에 이르는 동안 출몰했던 그 수많은 ‘나’들은 이 je라고 말하는 주체와 같은 것인가? 데카르트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을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선언’이라는 효력, 그러니까 수행적인 효력을 발생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이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확고한 것‘처럼’ 보인다. 지혜(sapientia)에서 허구(dokein, simulacre)로의 이 급작스런 사유의 리듬은 사실상 이 맥락에서 독자의 어떤 불분명한 ‘느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느낌‘에 따르면’ 코기토는 확실하다. 느낌‘에 의하면’,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의심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느낌’은 무엇 때문인가? 이때 나는 이 명제의 논리적 알고리듬이 아니라 이 명제가 탄생하게 되는 그 Je의 수동적 사태들, 그 정념들(passion) 그리고 그것에 의해 던지고, 결심하고, 마침내 받아들이는 그 사태들에 주목한다. 수많은 Je들 그리고 여기에 데카르트가 부여하고자 한 중차대한 개념적인 혁명들은 그래서 ‘이야기’라는 허구적 형식과, 평전 또는 주절주절 뇌까리는 고백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명제를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기초이자 최종항이자 ‘제일원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표면을 훑고 지나가는 로고스의 질서, 각각의 ‘부’들이 가지는 논리적 연쇄들, 그 이미 결정된 ‘통합체’가 아니라, 그 계열의 심층에서 사유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어떤 타자의 ‘운동들’, 그 계열체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Je라는 (대)명사가 실체화하는 와중에 데카르트 자신이 드러내는 정념의 동사들이 어떤 잠재적인 층위 속에서 펼쳐지는가를 보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라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5부와 6부가 어떤 우주론적인 담론을 펼칠 수 있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우주론적인 연극을 연기할 수 있는 그 인격적이 ‘된’ 주체로서의 ‘Je’가 ‘분열된 전체’가 되는 과정이 되도록, ‘인식의 질서’(ordo cognoscendi), ‘존재의 질서’(ordo essendi) 외의, 제 3의 질서, 즉 ‘정념의 질서’(ordo passionis, ‘안정된 정념으로서의 이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 질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1)

 

 

2)『정념론』1부 – 의지와 정념의 전쟁터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서 정념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그의 ‘정념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데카르트는 『정념론』의 1부를 “정념 일반과 부수적으로 인간 본성 전체에 대해”(2)라고 함으로써 정념을 통해 인간본성을 추론할 것임을 예고한다. 하지만 여기서 ‘부수적으로’(par occasion)란 어떤 ‘우연성의 개입’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치 정념에 의해 인간본성을 추론하는 것이 크게 필연적인 방향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텍스트의 첫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고대의 정념론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하는 부분을 지나면서(3), 수동(une passion)과 능동(une action)을 나누는데, 그것이 “두 이름을 지녀도, 항상 동일한 하나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앞에서 그는 “능동인(l’action)과 수동인(la passion)은 대체로 아주 다르다는 단서를 단다. 이것은 능동과 수동을 인과론의 관점에서 ‘규정’할 때는 구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재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 이러한 사유구도는 그가 30항과 47항에서 ‘영혼의 단일성’에 대해 논할 때 반복된다.

우선 그는 영혼(âme)의 기능과 몸(corps)의 기능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구분이 실체적인 구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러한 구분이 “정념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할 따름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영혼과 몸의 구분이 실체적(실제적)이라면 앞의 1항과 30항, 그리고 47항의 ‘단일성’에 대한 논지와 어떻게 정합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3항과 4항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구분은 그것이 마치 실체적인 구분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전체 구도(실체 이원론) 안에서 이러한 모순된 언급들은 매우 심대한 반론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점이다. 철학사적으로 『정념론』이 어떤 스캔들의 요소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지점 때문인데, 이는 이 저작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3항과 4항에서 이루어진 구분에 따라 데카르트는 이후의 논의를 진행한다. 5항의 논의도 흥미로운데, 여기서는 영혼이 가지는 ‘작용인’으로서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 같이 여겨진다. 특히 신체의 작동방식을 ‘기계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영혼이 그러한 기계의 최초의 작용인이라는 사유를 포기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연적 온기와 몸의 모든 움직임이 영혼에 의존한다”는 믿음이 근거 없고, 죽음이란 “영혼의 결여”가 아니라 “몸의 주요 부분 가운데에서 일부분이 손상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첫 번째가 앞서 말한 ‘작용인의 제한’이며 두 번째는 “일부분”(parties)이라는 어구다. 육체의 일부가 손상되는 것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은 바로 육체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그 중 어떤 부분에서 기능부전이 온다면 전체의 기능이 멈출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실재로 우리의 육체는 그렇지 않다. 한 부분의 기능부전이 곧 죽음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 6항의 뒷부분은 어떤 “원리”(principe)를 내세우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곧 ‘작용인’처럼 여겨진다. 이 원리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첫째는 자동기계로서의 신체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기관들(부품들)을 지니는(배치시키는) 것이며, 둘째는 이 원리의 작동이 멈출 때 신체의 작동도 멈춘다는 것, 즉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원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이를 영혼의 작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는 5항과 6항에서 주장하는 바, 그 전제와 모순된다. 두 번째로는 이 ‘원리’를 영혼의 작용이 아니라 ‘신체의 원리’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원리는 신체가 그 스스로 내장하고 있는 ‘작용인’으로 바라볼 수 있다. 사실상 자동기계의 ‘원리’를 영혼에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계 자체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계 자체에 내재하는, 즉 신체에 내재하는 이 ‘원리’는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데, 마치 어떤 ‘추상적인 실체’처럼 데카르트의 이 정념론을 끝까지 추적한다. 마치 운동 자체가 ‘원리’인 것처럼 말이다.(5)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에 와서 데카르트는 몇 가지 기관적인 요소들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감각과 근육의 모든 움직임은 “미세한 실들”(petie filets)이나 “작은 관과 같은 신경”에 의존하며, 또한 그 움직임은 “동물정기”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등장하는 “동물정기”(les esprits animaux)는 이후 10항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이 부분에서는 단지 그것이 “어떤 기체 혹은 아주 섬세한 숨”(un certain air ou vent très subtil)이라고 말하는 데 그친다.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물정기의 특징을, 데카르트가 자신이 폄훼했던 고대 자연철학의 원리(arche)에서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8항과 9항에서 동물정기와 신경의 움직임이 감각에 기여함에 있어서 ‘불’을 상정하면서 그것을 ‘원리’의 지위로 승격시켜 놓는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10항에서 데카르트는 그 의문의 “동물정기”에 대해 논한다. 그것은 우선 “피의 아주 미세한 부분들”로 구성되는데, 그래서 물체(corps)며, 그것도 “아주 작은 물체”다. 또한 이것은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 이것이 움직이는 경로는 뇌와 혈관, 근육, 신경에 모두 걸쳐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동물정기는 운동의 원인인가? 아니면 운동 그 자체인가? 이를테면 모든 근육들이 정기에 의해 부풀고 길어지고 수축되고 이완(11항)된다면, 그것은 어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힘’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힘과 연관된 움직임, 즉 운동은 물질적인 실체(entity)로서의 동물정기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데카르트가 이 동물정기를 분명 신체(corps)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 동물정기의 실체론적 위상은 늘 불안하다.

12항과 13항은 외부대상의 작용과 그로 인해 비의지적인 근육운동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비의지적인 운동은 “영혼이 없이”(13항) 이루어지는 것이고, 어떤 것(예컨대 눈깜박임)은 의지에 완전히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14항과 15항은 정기의 다양성에 대해 논한다. 이 논의의 기본 전제도 정기의 신체성이다. 데카르트는 특히 비의지적인 운동이 정기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논하고 있다. 정기가 불규칙하고 다양하다는 것은 그것의 ‘힘’이 이런저런 신체의 공간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받고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데카르트는 “이러한 불규칙은 정기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물질(matière)에” 기인한다고 못박는다. 여기서 다른 곳과는 달리 사용하고 있는 ‘matière’라는 명사는 순전히 질료적인 어떤 것을 표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질료적인 ‘물질’에서 기인하는 ‘정기’는 그렇다면, 그 질료의 가장 심층적인 요소로서의 ‘apeiron’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내 생각에 데카르트가 여기서 다른 용어를 사용할 때 이런 고대철학적인(또는 현대에 와서 발견된 사유구도) 존재론적 지층을 의식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물질’이라는 개념의 철학사적 의미는 이것이 결코 corps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사악한 혼돈의 층을 품고 있음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영혼의 기능에 대한 논의는 17항에서 26항까지 이어진다. 앞서 말한 대로 영혼에 속하는 것은 “생각”(pensée) 뿐이다. 생각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영혼의 작용(의지)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정념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지각’과 ‘인식’을 정념으로 지칭할 수 있는 이유가 영혼이 정념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념에 의해 표상되는 것(des choses qui sont représentées par elles)으로부터 정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도대체 이 “표상되는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념이 무엇을 표상하기에 지각과 인식을 정념으로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19항에서 지각을 논하는 바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각은 두 종류(영혼을 원인으로 하는 것, 몸을 원인으로 하는 것)로 나뉘어지는데, 이 중 영혼을 원인으로 하는 지각은 “의지 (...) 모든 상상 혹은 상상에 의존하는 그 외의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이 때 정념은 “원하는 것을 지각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그 ‘표상’은 원하는 것의 표상, 즉 욕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욕망이 상상을 일으키고, 그 상상이 표상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원인으로 하는 지각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는 21항에서 논하는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상상을 “영혼의 작용으로 셈해질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한다. 상상은 단지 ‘정기들의 흐름을 우연히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상상들의 일부는 영혼의 정념”이며 이는 정념을 어떤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로 사용할 때라고 한정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상상들 전부가 영혼의 정념’이 될 수도 있는데, 이때는 정념이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념’과 ‘특수한 의미의 정념’을 이렇게 나누면서 상상의 위상을 가르고, 이런저런 경우에 그것의 기능을 신체와 영혼 양자에 분배하게 하는 그 ‘원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에 대한 논의를 급히 마무리하면서 “어쨌든[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은 “지각들처럼 (...) 결정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그림자와 그림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상들을 잘 구별할 수 있기 전에 지각들 안에 있는 차이”를 보자고 제안한다.(6) 데카르트의 성급한 논점전환을 거슬러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상상이 가지고 있는 저 ‘결정적인 원인의 부재’다. 또한 ‘그림자와 그림’에 불과한 그것의 특징이다. 그림자와 그림이라는 이 비유적 표현 속에는 상상의 ‘원본’이 존재한다는 함의가 있지만, 그것의 ‘원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고백 속에는 그 원본을 데카르트 자신이 인식할 수 없다는 함의가 있다. 인식의 무능력. 상상(력)(imaginations)과 그것의 이마쥬들에 대한 불가피성과 불가능성이 함께 표현되는 이 부분에 『정념론』 전체의 토대가 걸려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지각은 외부 대상과 연관하여 직접 논해진다. 물론 지각이 영혼에 내적으로 연관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감각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지각이다. 영혼은 감각지각에 의해 두 가지 감정(sentiment)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감정의 원인으로서의 주체가 그것을 통해 구성하는 바, ‘대상들로부터 오는 운동’인가, 아니면 ‘대상 자체’인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지각을 통해 주체가 그 대상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대상들로부터 오는 운동은 대상과 다르다.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감각을 통해 어떤 것을 추론, 상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감정의 결을 다르게 만든다.

26항에서는 다시 상상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데, 여기서는 ‘인상’이 개입한다. 신체적으로 이러한 상상을 촉발하는 것은 우선 ‘신경’이다. 그런데 “신경에 의해 뇌 안에 생기는 인상”을 가져온다. 그 뒤에 그는 이러한 인상이 정기가 직접 “뇌에 일으키는 인상”보다 더 생생하고 활력 있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바로 21항에서 말한 바 그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26항에 와서 데카르트가 비로소 ‘인상’을 상상, 그리고 지각 나아가 영혼과 연관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매우 부정적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제 이 그림자들, 시뮬라크르들은 바로 ‘오류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생하고 활력이 있음에도 오류의 원천인 것은 외적인 감각지각이나 신체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념 그 자체의 활동은 오류라고 칭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것은 앞서 말한 구성의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것이다

27항부터는 영혼의 정념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정념은 영혼의 ‘동요’이면서 ‘지각’이고 ‘감정’이다.(7)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정념의 ‘지각’이라는 측면이다. 지각은 우선 영혼과 신체가 ‘밀접한’ 연관을 가질 때 가능해진다. 특기할 만한 것은 여기서 데카르트가 지각을 정념의 수(nombre)를 셀 수 있는 여건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지각은 정념의 종류와 수를 셀 수 있게 함으로써 기여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각은 명석판명하지 않고, “애매 모호”(confuse et obscure)하다. 따라서 정념은 그 지각적인 특성에 의해 매우 애매모호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각이 바로 어떤 인식의 과정(per)에서 붙잡히는(cepere)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각의 특성 자체가 신체와의 연관에서 고찰될 때 그것이 영혼보다는 신체의 ‘과정’에 더 많은 부분 기울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명석판명은 생각(pensée)에 있는 것이고, 영혼은 생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형성된다. 생각하는 자기가 그 스스로를 유아론적인 고립 속에서 인식과정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분명 지각에 의해 생겨난 표상(정념의 표상=인상)을 재료로 삼을 것이고, 그렇다면 과연 코기토는 가능한가? 라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은 코기토의 유아론, 나아가 칸트적인 범주화의 순일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험론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데카르트 자신의 체계 자체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다음에 이어지는 30항의 짧지만 심오한 논지전개에 의해 더 심화될 수 있다. 여기서 데카트르는 영혼이 신체 전체와 “공동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 신체와 관련하여 어떤 ‘형상’(eidos)이 아니라 그것과 이질적인 어떤 것, 즉 연장도 없고, 질료적인 특성과 아무것도 분유(methexis)하지 않는 ‘사유 자체’가 영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논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앞서도 영혼은 정념과 그토록 밀접했으며, 신체와는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영혼은 ‘결합되어 있지만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나는 여기서 데카르트가 영혼을 정의하면서 “기관의 집합 전체에만 연관을 갖는 본성”이라는 규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영혼은 신체와 관련하여 기관들의 전체에 즉 그것의 ‘관계성 자체’, 기계적인 비유를 들자면 그 ‘작동방식’이자 ‘흐름 자체’에 해당된다. 내 생각에 이것은 전체집합을 포함하는 하나의 집합, 불가능한 그러한 집합을 의미한다. 만약 데카르트가 여기에서 영혼을 신체에 의해 구성되는 ‘잔여’적인 어떤 ‘효과’로 지칭했다면 모든 것은 제대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러한 방식은 그의 것이 아니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정념과 지각을 논하는 차례에 와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포리아에 봉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31항부터는 논하는 ‘송과선’(샘)에 대한 논의가 악명높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아포리아가 이 단 하나의 유일하고 특유한 대상에서 응축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기관’은 신체이지만 영혼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어떤 무한퇴행, 유물론과 화해하려고 하는 유심론의 무한퇴행이 있다. 그 유명한 ‘제 3의 인간’ 논변처럼 송과선과 영혼 사이에는 ‘기능’적 연결이라는 비물질적 연결 외에 다른 해결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연결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정기의 유통인가? 그런데 그 정기라는 것의 위상 자체도 매우 불명료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런 불명료성은 34항에 가서 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데카르트가 이러한 사실, 즉 뇌 안의 작은 샘을 “받아들이자”라고 할 때 이론적 드라마의 절정이 느껴진다. 이 작은 샘과 같은 송과선은 이제 어떤 뇌 안의 작은 호문클루스와 같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인상’이 등장한다. 이 항에서 ‘인상’은 내가 보기에 이 죽어가는 작은 호문클루스를 살리기 위한 심폐소생기와 같다. 인상은 ‘피를 통해 온 몸으로 운반되며’ 영혼은 이 인상을 이 작은 아이를 통해 건네받아야 한다(“영혼은 그 작은 샘에서 다양한 운동이 일어나는 정도로 다양한 인상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그런 본성을 지닌다.”).

36항과 이어지는 37항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정념에 대한 논의다. 이 정념은 바로 뇌 안에 있는 정기의 활동에 따른다. 그리고 38항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정기가 신경을 통해 심장으로 그리고 신체로 들어갈 때 영혼에 의존하지 않는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36항부터 새롭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과거의 경험’이라는 개념이다. 이 경험은 ‘배치’, ‘의지’, ‘습관’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36항에서 경험은 인상에 대한 반응을 규제한다. 이제 어떤 새로운 반응이 굳어진다는 것은 그러한 경험이 신체적으로 배치되고 응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이 쌓이면 “영혼의 도움 없이 오직 기관들의 배치에 의해서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38항) 반응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배치 자체가 과거의 ‘경험’에 의해, 또는 ‘습관’에 의해 발생하고, 달라질 수 있다는 논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념은 이러한 경험과 습관의 힘을 통해 “몸에 준비시킨 것을 영혼이 원하도록 영혼을 자극하고 배치”하는데 까지 이른다. 경험에 의한 신체의 배치에서 영혼의 배치에 이르기까지의 이 과정을 보자면, 내게는 이 맥락이 흄의 책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일부 자동적이지만 여기에 ‘의지’가 개입함으로써 인위적인 ‘힘’을 발생시킨다. 즉 의지는 자동적인 과정으로서의 습관을 어떤 다른 방향으로 돌려 놓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데카르트는 정념론이라는 인식론적 기반 위에 윤리적인 논변을 전개한다. 46항에서 그는 의지가 할 수 있는 일 중 최고의 것이 “동요의 효과에 동의하지 않고 (...) 운동을 제지하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것은 의지가 어떤 금지의 명령, 즉 의식(양심)의 명령에 따라 정념의 방향을 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지는 47항에 이르러 ‘투쟁’의 양상을 띤다. 투쟁의 당사자 중 한 쪽은 “정기에 의한 몸”이며 다른 한 쪽은 “의지에 의한 영혼”이다. 이 대립의 양태는 그 당사자들의 ‘운동’에 있고, 전쟁터는 다름 아니라 ‘송과선’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아주 심대하고 역설적인 진술을 하는데, 그것은 이 투쟁이 일어나는 이유와 관련된다. 즉,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단 하나의 영혼이 있을 뿐이고 그 영혼은 자신 안에 어떠한 다양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과 같은 것이고, 모든 욕구는 의지다. 영혼이 보통 서로 상반되는 역할[인격]을 하게 하면서 범한 오류는 몸의 기능과 영혼의 기능을 잘 구분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샘에서 상반된 충동들의 밀고 밀리는 싸움을 서술한다. 그리고 나머지 48항부터 마지막까지는 이 싸움에서 의지의 영혼이 승리했음 확인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의지에 의한 정념의 정복과 그것의 지도를 함께 논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정당화될 것인가? 이 ‘정복’과 ‘지도’는 마치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의 윤리학이 가지는 그 간격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론적인 논변전개가 봉착하는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뮈토스를 끌어들이는 이 방식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이 영혼의 지속성을 논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또는 ‘상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그 뮈토스와 닮아 있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상, 데카르트든 플라톤이든 그들이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것과는 달리 ‘즐겨’ 타자의 이마주를 자신들 체계의 심장부에 도입하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우리는 데카르트의 논변 자체를 살펴봄으로써, 들뢰즈와 리쾨르가 발견의 쾌거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그 곳에서 다시 한번 저자의 서명을, 그 희미한 ‘흔적’, ‘표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타자’의 흔적을 살펴볼 차례이다.

 

3. 타자의 왜상(歪像)(8): 프루스트

인간은 세계 위를 기어다닌다. 그 위에서 의미를 섭취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안감은 무의미이며, 무의미의 내부는 심연이다. 따라서 인간은 심연 위에 떠 있는 위태로운 벌레와 같다. 안팎이 모두 공허이기 때문이다. 이 처지는 매우 공고해서 하나의 존재론 전체가 심연을 정당화하거나, 무의미를 벗어나기 위해 작동한다. 여기서 필요해지는 것이 ‘배치’이며, 배치는 기표적 체제에 반하여 자신의 망상을 극단으로 밀어 붙이면서, 주체의 해석학을 정당화해야 한다. 이 정당화의 과정은 마침내 이 해석학을 탈주하는 배치를 발명한다. 즉 “해석적이고 기표적인 방사 대신에, 바로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새로운 소송(과정, procès)을 제시도 할 수 있게 용인해주는 잔여로서, 주체적이고 선형적인 과정”이 생겨나는 것이다(DMP 156). 탈기표적 체제로서의 주체화는 여기에 이르러 해석과는 다른 방향에서 정욕적인 것, 정념적인 배치를 발명하는 것이다. ‘주체화의 점’은 ‘의미화의 중심’을 탈주하여, 언표행위주체와 언표주체의 거리를 확인하면서, 기호적인 섭취물을 욕망하게 된다. 즉, 인간은 의미를 욕망하며, 그 의미를 통해 다시 의미를 벗어나고, 정념적인 윤리학을 완성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더 섭취해야 할 ‘잔여’를 남긴다. 언표행위주체는 결코 언표주체의 모든 그 ‘나’를 자신 아래에 종속시킬 수 없다. 작가는 결코 작품의 완전한 생산자가 아니다. 거꾸로 작품은 작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표주체의 그 ‘나’가 코기토의 양식성을 거슬러 이중으로 삼중으로 쪼개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화의 선은 이중체(le Double)에 의해 완전히 점유되어 있”다(Ibid. 164). 마찬가지로 주체화의 선은 “항상 다시 시작하고, 정욕과 요구(revendication)도 언제나 재반복된다”(Ibid. 167). 즉 여기서 ‘나’가 형성된다고 느끼는 순간, 저기에서 또 다른 탈주선이 그어지고 있다. 그래서 코기토는 어떤 정주적인 망상을 항상 거스르며, 절대적 탈영토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잉여성 또는 잔여성이다. 어떤 잔여적인 것(여기에는 물론 주체화의 잔여성도 포함된다)이 있어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면서 그것을 탈주하게 하는 것일까? 이 탈주의 첨점을 형성하는 ‘끌개’는 무엇인가?

탈주는 ‘탈주체화’라는 통속적인 관념일 수 없다. 주체화의 대립항이 아니라, ‘주체화’의 배치 자체를 전복하는 것이다. 주체화를 경유하여 탈영토화하고, 늘 재영토화되는 코기토의 ‘지층’을 향해, 그것이 무의미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끌고가는 것이다. 이때에 주체화는 더 이상 그 이름을 간직하지 못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도 아니고, ‘인민’이라는 집합적 표상에만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주체화는 탈주선에 끊임없이 그것을 재부정하는 선분성을 부과하며, 끊임없이 차단하고 방향을 돌리게 하는 폐지(abolition)의 점을 절대적 탈영토화에 부과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표현의 형식들 내지 기호체제들은 여전히 지층들이기 때문이다. (...) 주체화는 의미화만큼이나 지층적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주요한 지층, 그것은 유기체일 뿐 아니라 의미화와 해석이기도 하고, 주체화와 예속화이기도 하다. 이 모든 지층의 집합을 우리는 일관성의 구도와 추상기계로부터 분리한다. 그 일관성의 구도와 추상기계는 어떤 기호체제도 없으며, 거기서 탈주선은 자신의 잠재적 긍정성을 실행하고, 탈영토화는 절대적 능력(puissance)을 실행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가장 유리한(favorable) 배치를 뒤엎는 것이다. 즉 지층들을 향해 돌려진 얼굴로부터 일관성의 구도 내지 기관없는 신체를 향해 돌려진 다른 얼굴로 이행토록 하는 것이다(DMP 167, 강조는 인용자).

 

이것을 들뢰즈는 탈지층화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주체는 다이어그램으로 기능하게 되며, 주체화 자체는 폐기된다. 폐기된 주체화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모든 잔여적인, 비신체적인 분자들, 기호-입자들이다. 최초의 점은 주체화의 점이지만, 탈주체화의 선을 끌고 가는 끌개는 다이어그램적인 잉여성, 리좀적인 잉여성일 것이다. 이를테면 리좀을 거슬러 수목을 완성하려고 욕망하는 것은 오직 어른들의 세계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그러한 욕망은 단지 ‘놀이’를 망치는 훼방꾼일 뿐이다. 이 아이가 해변의 조약돌을 작은 손에 쥐어 들고, 그 매끈한 감촉을 즐기며, 안방으로 옮겨 놓는 놀이에 열중할 때, 바로 옆의 어른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는 식이다. ‘의미화’라는 과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이 세계는 그래서 어떤 안정된 형태의 사회체를 형성하지만, 아이들은 주워온 조약돌을 그 세계의 한 가운데 던짐으로써 훼방꾼들에게 복수한다. 던져진 그 돌이 끌고 가는 포물선은, 어떤 기호-입자를 방출하는데, 이는 이 의미화의 세계에 균열을 만든다. 사실 의미의 해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제대로 된다. 어른들의 ‘구조’가 아니라 아이들의 ‘반구조’, 그 가벼운 운동 자체에서 말이다.

 

들뢰즈가 선호한 프루스트는 이러한 리좀적 잉여성(잔여성)의 좋은 예가 된다. 사교계의 기호들, 그리고 사랑의 기호들이 펼쳐지는 동안 마르셀/프루스트가 겪는 것은 무엇인가?

샤를뤼스의 기호들에서 시작해보자. 프루스트의 소설(9) 안에서 샤를뤼스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끌개, 즉 사교계의 기호가 탈주체화의 분자적 기호-입자 안으로 진입하게 만드는 첨점으로 기능한다. 마르셀은 샤를뤼스가 속한 귀족적 살롱의 이면과 본질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게르망트 쪽’의 대단원은 그런 귀족적 기질의 숨은 본질이 다름 아니라 잔인함과 이기주의라는 것을 잔잔한 어투로 보여준다. 스완의 모습은 여기서 매우 처연하게 그려지는데, 그것이 게르망트 부부의 무관심한 태도와 대비를 이루기 때문에 더 도드라진다.

 

공작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마누라와 제 몸의 불편함을 늘어놓는데 조금도 거북해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몸에 더 많은 신경을 써서 가장 중대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를 상냥하게 쫓아 버린 후 공작이 문가에서, 이미 안뜰에 나와 있는 스완한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듯 큰 소리로 다음같이 외친 것도, 오로지 교양과 명랑한 기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여보게, 의사들의 그런 어리석은 말에 낙심 말게, 빌어먹을 의사놈들! 그건 돌팔이 의사들이야. 자넨 퐁뇌프(Pont-neuf)만큼이나 튼튼해. 자넨 우리들을 모두 매장해 줄 거야!”(ProustVI 367)

 

그래서 프루스트가 그려나가는 사교계는 그 기호체제 전체가 마치 ‘잔혹한 이기주의’에 의해 점철되는 것처럼 그려진다.(10) 하지만 그러한 이기주의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사교계의 성적 무분별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무분별성’은 단지 이들 사교계 인물들의 내재적인 성차, 즉 자신의 내면이 분자적인 성정체성의 분열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이 아무런 차이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교계의 기호는 주체의 분열, 나아가 그것의 분자적인 성차의 내재적 만화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기호-입자’는 그 본래면목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샤를뤼스의 경우에 이 기호-입자는 샤를뤼스의 파롤 안에서 동성애의 기호를 봉인한 채 마르셀에게 당도한다. 그리고 마르셀은 이 봉인된 기호-입자를 펼친다.(11) 펼쳐진 기호-입자의 다이어그램은 곧 샤를뤼스의 동성애 뿐만 아니라 사교계 전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것은 곧 ‘이기주의’라는 주체성의 점을 출발하여, 소돔과 고모라라는 탈주체화의 절대적 잔여성에 도달하는 탈주선을 그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되기를 위해 사랑을 이용하라. 의식과 사랑을 탈주체화하라”(DMP. 168) 사실 ‘탈주체화’라는 그 주체화의 대립항처럼 보이는 것조차 불필요하다. 실제로 마르셀/프루스트에게 어떤 주체가 애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랑의 기호에서는 이러한 탈주체화가 어떻게 자신 안의 ‘타자’를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결국에는 ‘자신 안’이라는 헛된 규정조차 탈주해 나가게 될 것이다. 우선 알베르틴의 죽음은 한 개성의 죽음이 아니라 수많은 개성들 각각의 죽음이며, 그것이 망각되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신체와 의식, ‘자아들’이 필요하다.

‘소돔과 고모라’ 해당 부분은, 알베르틴의 갑작스러운 떠남으로부터 오는 번민의 기호들(표징들, signes)과 거기에 더쳐, 그녀의 죽음이 마르셀에게 가져다준 충격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으로 점철되어 있다.(12) 이 모든 기호와 그것의 해석과정은 마치 정신분석가의 자기분석과 같은 뉘앙스를 가져다주지만, 사실상 그것은 표면적인 가상이다. 왜냐하면 이 두 번에 이르는 충격의 파동은 자아와 무의식 자체의 파멸을 통고하고, 그것의 긴급한 회복을 요청하는 것이긴 하지만(그래서 소설은 사랑의 기호가 배신의 기호가 되고, 그것이 다시 죽음의 기호가 되는 과정을 역으로 추적한다), 이 배후에는 그 정신분석적 대당을 구성하는 선험적인 ‘자아들’(또는 무의식‘들’)이 정념의 일탈들과 더불어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환원될 수 없는 기호들의 운명, 또는 사랑과 이별을 완성하는 ‘죽음’이라는 ‘대사건’(Événement)에 직면한 마르셀의 분투에서 방사되는 모든 기호들의 어떤 ‘장소’(lieu)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프루스트는 단순히 공간적 명명인,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지만, 여기서 ‘장소’는 보다 선험적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장소나 성서적인 에피소드를 그대로 소설속의 장치로 배치한 것이 아니다. 이 두 장소는 샤를뤼스와 알베르틴을 상징의 매개로 삼아 자신의 환등기를 비추는 어떤 ‘본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전에 샤를뤼스의 소돔은 모렐이 가한 일격으로 그 허약한 본질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이제 알베르틴의 죽음은 고모라의 소멸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의 반복, 그것은 이별과 죽음이다. 한 번은 이렇게. “알베르틴 아가씨가 떠나셨습니다”라는 프랑수아즈의 말로(ProustVIII 7), 또 한 번은 이렇게. “... 우리의 귀여운 알베르틴은 이제 이승에 없사와 ... ”라는 봉탕 부인의 두 줄의 전보로(81). 하나는 하녀의 파롤로, 또 하나는 부르주아 여성의 문자로. 최초의 사건은 마르셀에게 ‘번민’(souffrance, 고통)의 깊이를 더해, 질투를 고양시켜 의심을 극한으로 이끌로 간다면, 두 번째 사건에서 의심은 그 대상을 상실한 채, 추억 속에서만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정념의 강도에 있어서 후자는 전자를 압도한다. 이것은 죽음의 기호가 분리(이별, séperation)의 기호보다 보다 강렬한 의미(사건성)를 가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분리와 죽음 사이에 어떤 계열들의 누승적인 전개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효과라고 보인다. 그것은 바로 편지들의 계열이다. 여기서 편지들은 온통 엇갈리는, 또는 스스로를 배신하는 기호들로 넘쳐난다. 왜냐하면 이 편지들은 표면적으로 상대를 멀리 떼어놓으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시도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둘의 정신적 동선들은 더욱더 무한히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배신의 문자들 뒤에 숨쉬는 근접의 욕망, 이것은 카프카의 편지들과 본질적으로 반대의 효과를 소설에서 달성하는 것이다.

먼저 알베르틴의 편지가 있다. “... 내 결심은 변경하기 어렵사와 ... 영원히 안녕 ... ”(9-10). 사실 그 전날 마르셀과의 다툼과 폭언들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 마르셀의 끝없는 의심도 이미 이러한 이별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갇힌 여인과 가두는 남자’라는 구도는 두 주체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함이라는 공통 정념 안에서 형성되는 기호들의 집착은 지성의 기획을 늘 어긋나는 것이라, 소소한 사건들이 그 둘을 더 묶어 놓았다. 그래서 알베르틴의 편지는 ‘변경하기 어려운 안녕’ 또는 ‘영원한 안녕’을 기입함으로써 ‘결심’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수행적이다. 다시 말해 알베르틴의 욕망은 아직 마르셀을 떠날 수 없으며, 그것은 그녀가 죽기 전에 마르셀에게 보낸 또 다른 회한의 편지 속에서 사후적으로 확인될 것이다. 이것은 마르셀의 경우, 그의 정신적 상황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두 가지 정념, 즉 의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증오와 이별로부터 비롯되는 슬픔과 동형적이다. 죽음을 통해서 발견되는 이 연인과의 정신적 동형성은 그래서 더욱 더 큰 회한의 슬픔이 된다.(13) 그러나 더 슬픈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녀는 ‘이미’ 고모라의 일원이며, ‘아직’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영원히’ 죄 안에서 추억될 것이라는 사실. 유폐된 미래 안에서 추억은 정화되지 못하고, 다만 습관에 의해 망각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망각은 또 다른 자아의 지층에 찰싹 달라붙어 언제든 희뿌윰한 실체를 드러내며 일상의 자아를 침범할 수 있다. 본질을 넘어선 진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수다한 자아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지성의 허약함과, 사건의 악마적 잔여성.

그 사건의 악마는 마르셀을 두 번 덮친다. 한 번, “이 떠남을, 설령 예상했더라도,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가상할 수 있었던들, 그런 생각을 전부 모아도, ‘알베르틴 아가씨가 떠나셨습니다’라고 내게 말하면서 프랑수아즈가 장막을 걷어올린, 상상도 못 할 지옥과는 그 강렬함이 비교도 안 되거니와 (...)”(14,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또 한 번, “애정으로 가득 찬 추억의 거센 파도가, 알베르틴은 죽었다는 관념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 상반되는 한사리의 충돌로 나는 압도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일어나다가 얼른 멈춰 그만 쓰러졌다. 아직 그녀의 입맞춤에 따뜻해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알베르틴의 곁을 떠나려 했을 적에 본 것과 같은 새벽이, 이제는 커튼 위에 불길한 칼날을 겨누고 있어, 그 싸늘한, 치밀하고 가혹한 흰 빛이 단도의 일격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89)

장막과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정신과 의지를 마비시키는 사건이란, 언표주체로서의 마르셀과 언표행위주체로서의 프루스트 둘 모두의 동일성을 착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은 최초의 사건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두 번째 ‘죽음’이 소설의 플롯 안에서 터져나온다는 것이고, 언표주체로서의 마르셀이 간절한 전보를 타전하는 동안 언표행위주체로서의 프루스트는 그것의 급변(peripateia)을 미리 예상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의 경우 테이레시아스가 언표주체로서 사건을 급변시키고, 오이디푸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면, 프루스트의 경우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그 자신의 언표 안에서 ‘이미-여기’ 이루어져 있다. 프루스트의 회상과 마르셀의 회상은 하나의 플롯이 아니라, 두 개의 플롯 즉, 텍스트적인 현행성(actualité) 안에서 현시 되는 그것과 프루스트의 경험 안에서 기표화를 기다리는 텍스트 외부적인 잠재성(virtualité)의 그것으로 끝없이 분화된다. 그래서 소포클레스에게 플롯은 아테네의 물질적인 무대 위에서 재현되고, 프루스트에게 플롯은 그 자신의 정신 안에 마련된 비물질적인 무대 위에서 (재)경험된다. 프루스트는 그래서 이 (재)경험이라는 사태를 ‘배움’(apprentissag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랑의 기호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마르셀이 그동안 겪어 왔던 그 모든 착란적인 사태들을 배움의 과정 안으로 수렴시킨다. 죽음이 이별보다 더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가 감각되지 않는다는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모든 가능세계가 모조리 봉인되어 다시는 해석되지 못한다는 ‘사건’인 것이다. 이제 마르셀은 알베르틴의 신체로부터 방사되는 기호의 ‘기미’(사건의 흔적)를 영원히 볼 수 없다. 이 영원한 봉쇄효과는 알베르틴이 ‘영원히’라고 적어 놓은 그 문자 위로 드리워진 마지막 기미를 정말, ‘영원히’ 존속시킬 것이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볼 수는 없게 만든다.

마지막 두 통의 편지. 그것은 연속적으로 와 닿았고, 하나는 여전히 장막과 커튼을 드리우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것들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것이 더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버린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동시에 쓰고, 첫 번째 편지를 하루 전 날짜로 했는지”(83). 이것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들이 죽은 알베르틴으로부터 마르셀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에매를 통해 확인하려는 것은 죽음의 사실이 아니라 편지의 표면 아래에 도사린 진실, 고모라의 실상이다. 즉 ‘모든 가능성들’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성’ 말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러한 필연성마저 ‘전언’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표들의 충실성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르셀의 강박적인 의심은 앙드레와의 대화에서도 반복된다. 편지의 알베르틴, 추억 속의 알베르틴, 의심 속의 알베르틴, 풍문 안의 알베르틴, 그 모든 알베르틴은 사실 표면적인 거짓말 안에 숨 쉬고 있는데, 그 장막을 열려면 우선은 기호들을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마르셀은 에매로부터의 전언과 앙드레와의 대화에서 해석망상에 사로잡힌 채로 끝없이 뭔가를 희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호의 착란, 이것은 기호가 가진 지시기능과 현시성이 모두 헛된 것이라는 것을 마르셀이 알게 되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마르셀/프루스트’로 이루어진 두 면의 얼굴이란 애초부터 현시성을 의심하면서 시작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랑의 기호가 그토록 집착하는 어떤 ‘진실’은 무언가 대상을 지칭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것은 따로 지시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다만 이 양면적 주체는 의미를 욕망하면서, 그것이 이런저런 기미들과 계열을 이루고 상사성을 이루는지 검사하고, 그 무한한 해석계열 안에서 고뇌한다.

남은 것은 망각이다. 그러나 이 망각의 과정은 배움의 과정만큼이나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과정 안에서 알베르틴은 수많은 것으로 쪼개지고, 그 각각이 마르셀의 신체 안에서 제각각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기억에 담아 둔 순간은 여전히 계속해 살아, 그것과 함께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순간이라는 부스러기는 죽은 사람을 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갖가지 모양으로 증가시킨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무수한 알베르틴이다. 어느 하나의 알베르틴을 잃은 슬픔에 내가 겨우 견딜 만하게 되자, 또 하나의 알베르틴, 백이나 되는 알베르틴과 다시 시작해야 한다(84).(14)

 

한 가지 방법은 이렇게 여전히 살아 있는 알베르틴을 경험 안에서 횡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질베르트나 할머니를 망각하듯이 ‘잔인한 형별’ 안에서 무관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89). 이 잔인한 형벌을 통한 무관심은 그 과정에서 무수한 환영을 동반한다. 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경험, 그녀와 지나온 모든 풍경들이 공격적으로 의식을 할퀴고 지나가는 경험. 다시 말해 망각의 과정은 이렇게 세계 전체가 온유한 계열이었던 과거를 배반하고, 악마적인 원소들, 분자들로 신체와 의식을 침투하는 과정이다.(15) 그래서 정신은 간헐적으로 타오른다. “나의 정신이 알베르틴을 품지 않게 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불똥이 옛 전류를 지나갈 적마다 여전히 타올랐다”(151).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죄의 표상이다. 하지만 고모라의 낙인은 그것이 수도 없이 찍힐 때마다 한 순간씩 잊혀질 것이다. “알베르틴이 죄가 있다는 이 관념에 대해서도, 여기에 습관이 작용한다면, 나의 인생에서 이미 경험한 것과 같은 법칙에 따라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155). 즉 고통은 습관이 되어 가면서 망각된다. “알베르틴에게 죄가 있다는 이 관념이 나에게 진실다워 보이고, 그것이 습관적으로 될수록, 그런 관념은 고통이 덜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시간이라는 대사건이 끈질긴 것은 우리의 욕망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인간은 삶을 욕망하기보다 그 삶의 의미를 욕망하고 (의미 없는 삶은 자살을 부른다), 그 의미는 자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그것도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événement)의 간헐적인 폭력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베르틴이라는 이 한 세계가 자신의 주름을 다 펼치고, 소진되었을 때조차, 마르셀/프루스트가 해석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마르셀은 또 다른 주름, 또 다른 여인을 만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조차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지 않겠는가?(16)

이 욕망은 주체화와 의미화를 하나의 선 안에서 수렴하도록 만든다. 의미화가 주체화고 주체화가 곧 의미화다. 그렇다면 이 주체화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이다. 데카르트의 주체화는 이제 하나의 단순한 수준에 놓인다. 이성이라는 짧은 선 안에서, 사유하는 자아만을 논하는 데카르트에 비해 프루스트의 경우 주체화는 아주 긴 경로를 우회하면서, 의미화의 욕망 안에서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의미화는 곧 흔적(기미)을 해석하는 것이며, 그러한 해석 가운데, 자신의 에토스가 변형되는 배움의 과정에서 의미는 곧 사건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주체’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리쾨르와 프로이트, 흄과 들뢰즈, 그리고 프루스트에 이르기까지 주체화의 점이란 거기서부터 멀어질수록 ‘타자’의 왜상을 형성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흄의 경험적 주체, 리쾨르의 유산된 코기토, 프로이트의 무의식, 그리고 들뢰즈의 탈기표적 주체화에 이르기까지 해석의 주체는 자기충족적인 상태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된다. 그것은 타자를 통해 다시 해석되어야 할 미지의 사건이지 않을까?

위의 논의들에서 결론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코기토가 대략적으로만 상정되듯이 그런 근대적 주체의 ‘개별성’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론은 놀랍게도 ‘주체’의 견고한 틀에 그것과 다른 이상한 ‘타자의 요소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흔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타자의 ‘왜상’(anamorphos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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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이제 이 세 가지 질서는 양면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세 개의 면을 가진 어떤 희한한 얼굴을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파스칼이 내건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불신’이라는 정념 대신 ‘신’을 더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정념은 그것의 한도를 넘어섰을 때, 바로 하데스의 문턱을 침범하는 것이고, 신은 이러한 정념의 과도함(hybris)을 제어하는 존재의 근거로서 Cogito의 ‘동일성’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서설』은 이러한 동일성의 보증이라는 순진한 발상이나 해석을 뛰어 넘는 잔여(residuum)를 여기저기 남긴다. 이 텍스트가 철학사 내에서 그토록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2) DES PASSIONS EN GÉENÉERAL : et par occasion, de toute la nature de l’homme

(3) 여기서의 데카르트의 평가는 대체로 편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념론 자체는 고대의 유물론자들이 전개한 정념론의 기본적인 구도를 변형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4) 철학의 원리』에서 그는 ‘실체적 구분’과 ‘형식적 구분’을 나누는데, 인과론의 구분은 형식적 구분, 또는 이성에 의한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구도는 데카르트의 전 저작에서 반복되는 중세철학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의 질서(ordo cognoscendi)’와 ‘존재의 질서(ordo essendi)’의 구분. 이런 측면에서 지성과 정념은 구분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5) 나는 5항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 ‘원리’가 데카르트의 ‘추상기계’며, 실체 이원론과 그의 신학이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는 체계 내의 시뮬라크르라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6) 중요한 부분이므로 원문을 옮긴다: toutefois, parce qu’elles n’ont pas une cause si notable et si déterminée que les perceptions que l’âme reçoit par l’entremise des nerfs, et qu’elles semblent n’en être que l’ombre et la peinture, avant que nous les puissions bien distinguer, il faut considérer la différence qui est entre ces autres.

(7)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감정’(sentiments)는 ‘정념’(passion)에 속하는 것이지, 감정이라는 주관적인 요소가 정념이라는 보다 객관적인 요소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데카르트의 이론 안에서는 그러하다.

(8) 나는 이 ‘왜상’(anamorphosis)이라는 단어를 Jean-Luc Marion에게서 가져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상의 ‘자신(self)’은-현상에 대해 정립되자마자- 왜상(anamorphosis)의 강제성에 따라, 나(the I)를 증인으로 변형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것은 주격(문법적으로 정위하는 것으로서의 주체)에서 보다 근원적인 여격으로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라서 (다시 문법적으로) 그 수여자의 “~에게로(unto whom/which)"를 지칭한다. … [이러한] 수여자는 더 이상 현상을 생산하거나, 소유하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현상에 대한 소유의 관계에 서 있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임의 관계에 서 있다.” Marion op. cit., p. 249

(9)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국일미디어, 1998. 원문대조가 필요할 경우 Galimard판을 사용하였다.

(10) 우리는 사교계의 기호가 어떤 에소테릭한 감성을 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양극성을 가지고 있는 계열인데, 하나는 의례적인 어투와 거동, 그리고 아이러니한 문법의 계열이며, 다른 쪽은 그러한 표면들을 생성해 내는 잔인성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계열이 우연하게 만나는 지점에 마르셀이 서 있는 셈이다. 마르셀은 그래서 게르망트 살롱에서 느낀 의례적인 상투성을 자신의 것으로 ‘동조’해 내면서 즐거움을 가장하지만, 샤를뤼스의 잔인무도한 태도 앞에서 그러한 가장이 쉽게 부서져 버리는 극심한 동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념이 발출하는 질투나 의혹의 동요보다 더욱 광기에 접근한다. 사랑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거나 망각됨으로써 은폐되지만, 사교계의 인상이 남긴 흔적은 어떤 유혹적인 퇴행의 인력을 간직하면서 지속적으로 마르셀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광기는 늘 잠복하면서 사교계의 기호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마르셀의 태도를 결정하게 하고, 폭력적으로 신체를 움직일 것이다. 사춘기를 벗어난 마르셀이 영혼과 신체에 각인하는 배움의 내용에 대한 대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변형’(metatmorphosis)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한 변형의 과정에서 주요한 변수는, 사랑의 경우에 분별심의 발로에서 생겨났다면, 이제는 그러한 분별심이 통하지 않는 지대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게르망트 기질에 대한 마르셀의 해석과 경험, 샤를뤼스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그것이 이기심과 잔혹함으로 판명된 이후에도 윤리적 판단은 유보된다. 다시 말해 이 변형의 변수는 소설의 서사 안에서 직접 드러난다기 보다, 간접적으로 암시된다. 마르셀이 이들의 잔인한 이기주의를 깨달았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하지만 게르망트 기질이 이러하다는 것은 확연하다. 하나의 개별체로서의 게르망트 가문과 특유한 개성으로서의 마르셀은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결정적인 측면에서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측면이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요컨대 이 ‘의례적인 잔혹성’이라는 귀족주의 앞에 완전히 헐벗은 채로 등장하는 마르셀(또는 병든 스완)에게 마땅히 교전할 수 있을 만한 무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 이 부의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혹시 프루스트-마르셀은 어쨌든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들의 잔혹함에 복수한 것일까?

(11) 가장 중요한 장면은 게르망트 살롱을 떠나 샤를뤼스에게로 가는 마차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두 힘 중의 어느 하나를 골라 거기에 몸 맡길 수 있다. 하나는 우리 자신에게서 솟아나, 우리의 깊은 인상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밖에서 온다”(303). 이 두 경우 중 즉각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발적인 인상의 경우지만, 밖에서 오는 수동적인(또는 폭력적인) 인상에 있어서도 ‘도취’를 통해 즐거움이 부여될 수 있다(Ibid.). 마르셀은 이러한 종류의 흥분이 이전의 마차 내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 정념(passion)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어떤 역사적인 신분의 위치로 고양되는 그런 체험 같은 것이다. “나를 빌헬름 2세와 잘 아는 사이이며 그 사람에 대해 아무튼 재치 있는 일화를 이야기해 준 인물과 만찬을 함께 한 나이 행복에 스스로 감탄하였다”(304). 이런 인상은 이제 사교계와 일상적인 다른 사회를 구별하는 준거점이 된다. “따라서 [사교계가] 다른 사회와 다른 점보다는 도리어 공통된 점을 통해 우선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건만, 사교계는 내 앞에 점점 별개의 것으로 나타났다”(306). 하지만 이러한 사교계의 개별성은 ‘개성’과는 다른 것으로 묘사된다. 개성에 대한 자각은 마들렌 경험과 같은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사교계의 인상들은 “잠시 내 몸 안에 들어와, 내가 육체상으로밖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런 이야기”이며, “개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교적인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내 안에 머물러 침전되는 것이 아니라 “한시바삐 내게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조바심치”는 것들이다(308). 그래서 사교계의 기호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 그 기호는 주체화의 점을 이루면서, 개성을 드러내지만 신체 안에 침전되어 에토스(습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금방 빠져나오고, 달아난다.

(12) 여기서부터는 프루스트의 책 8권이다.

(13) “그러나 (...) 진실을 파악하는 데 지성이 반드시 가장 치밀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적당한 연장이 아니라는 것, 그만큼 더욱 먼저 지성으로 시작해야지, 무의식의 직관력이나 이미 다 된 예감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에 가장 소중한 것은, 추리나 추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힘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사실 (...) 그런 때, 지성 자체가 그런 다른 히의 우세를 깨달아, 스스로 그런 것 앞에 자리를 양보[한다.] (...) 이야말로 체험적 신념. 내가 직면하고 있는 뜻하지 않은 불행도 또한(알베르틴과 두 레스보스의 여자하고의 친밀한 관계처럼) 허다한 표징(signes) 속에서 읽어 내 벌써 나는 익히 아는 성싶었다. 이런 표징에서(내 이성이야 알베르틴 자신의 말을 근거삼아 부인하였지만) 그녀가 그렇듯 노예같이 사는 권태로움이나 지긋지긋함을 나는 판별했었고, 눈에 안 보이는 잉크로 그려졌듯이, 알베르틴의 쓸쓸하고도 온순한 눈동자 속에, 갑자기 불가해한 홍조로 빨개지는 두 뺨 위에, 거칠게 열리는 창문 소리 속에 나타났다고 생각되었던 수많은 표징! 물론 나는 이러 표징을 끝까지 해석하며, 그녀의 돌연한 떠남이라는 생각을 명백히 해 보려고 하지 않았었다. 알베르틴이 곁에 있다는 안정된 기분으로, 아직은 언제라고 결정되지 않은 시기에 내 쪽에서 준비하는 떠남, 즉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그녀가 나가는 일, 오직 그것밖에 생각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단지 떠남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막상 죽음이 가까우면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게 뻔하지만, 건강한 동안 순 부정적인 사념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때 죽음을 생각해도 겁나지 않듯”(13-14). 

(14) 이와 같은 알베르틴-다중체의 모습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자주 묘사된다. “그러니 내 마음속에서 내 손으로 없애야 할 것은 하나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수많은 알베르틴, 심상(image)마다 한순간에 한 시기에 결부되어 있어서, 그 알베르틴을 상기하였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놓이는 걸 느꼈다”(96).

(15) 이렇게 타자의 부재로 인한 세계의 위협적인 변화는 들뢰즈가「미셀 투르니에와 타인없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논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한다.

(16) 이 소설 안에서 모든 것은 표정, 즉 얼굴과 풍경이 어떻게 주체와 배치되는가에 따라 의미화를 달리하게 된다. 고유명사조차 그러한 얼굴과 풍경에 의해 그 의미의 왜상(歪像)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사건들의 계열이 존재한다. 즉 해석의 과정과 사건의 과정이 한 소설에서 무수한 겹침을 달성하는 것이다. 소설의 이 부분에는 특히 두 개의 큰 사건, 즉 이별과 죽음이라는 사건이 하나의 추상적 배치물로서 양 끝점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에서 세 개의 결정적인 파롤(프랑수아즈-생 루-에매)과 편지의 순환(알베르틴과 마르셀 간의 편지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언표주체로서의 마르셀은 언표행위주체로서의 프루스트와 분간되지 않고, 알베르틴은 죽음에 잇닿은 소멸하는 신체로서 소설의 이야기성에 극적인 심상을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주체화의 점들, 편지의 계열과 사건의 계열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언표주체들이 언표행위주체와 엇갈리고 중첩됨으로써 발휘되는 효과다. 그 효과는 직접적으로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즉 ‘사건-편지-파롤’이라는 배치와 계열로서 주체화의 끝점인 각각의 언표주체와 언표행위주체가 수렴하거나 발산하면서 ‘주체’라는 망상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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