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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영원회귀의 2차원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 13. 세상은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
*니체의 영원회귀는 2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1] 영원회귀의 세계상 :: 우주론적 세계관 (세계의 관점)

하나는 영원회귀에 대한 자연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이해이다. 니체는 세계를 힘(에너지)의 바다처럼 생각한다. 세계가 유한해서 그 양이 제한이 있다고 해도, 세계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변전한다. 영원히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소멸의 운동만이 반복될 것이다. 이것에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다.

[2] 영원회귀에 대한 의지 :: 윤리적 선택 (개체의 관점)

다른 하나는 영원회귀에 대한 윤리적인 이해이다.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를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건강한 변신을 이룰 수 있다. 니체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세계 안에(우리 안에) 있는 잠재성(새로운 존재)을 현실화시킨다. 우리는 모든 사물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교향곡’을 연주하는 연주자이다. 세상에 있었지만 한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멜로디(잠재성)가, 우리를 통해서 울려퍼질 수 있다면(현행화) 얼마나 멋진 일일 것인가?

 

5. 영원회귀의 첫 번째 측면 : 우주론 그리고 물리이론으로서          

 

[1] 최종상태에 대한 비판

영원회귀와 :: 최종상태 <······> 지나가는 순간 > ① (최종상태) 니체가 설명하는 영원회귀는 최종상태(*생성의 최종상태)나 균형상태(*힘들의 균형상태)에 대해 비판한다. “만약 우주에 균형의 지점이 존재한다면, 만약 생성에 목적이나 최종상태가 있다면, 영원회귀는 거기에(*균형지점이나 최종상태)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② (지나가는 순간) 지나가는 순간으로서의 실제순간이 최종상태에 도달하지 못함을 입증하기 때문에, 힘들의 균형은 불가능하다. _『권력의지』2권 312, 322~324, 329~330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균형상태ㆍ최종상태에 도달해야 하는가? 니체는 ‘지나가는 시간의 무한성’이란, 생성은 생성을 시작할 수 없었고, 생성은 생성된 어떤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그리고 생성이 하나만 존재한다면, 생성은 그것의 최종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생성

생성 ::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는 것 > 만약 생성이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이라면, 왜 오래전에 그것은 생성하기를 끝내지 않았는가? 만약 생성이 생성된 어떤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생성을 시작할 수 있었는가? <만약 우주가 영원하고 불변일 수 있다면, 존재의 한 순간만 있다면, 생성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_『권력의지』 2권 333, 330>

그리스 고대철학 비판 > ① (플라톤 비판) 플라톤이 말하길, 만약 생성되고 있는 모든 것이 현재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면,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지마자 생성되길 중단하고, 그것은 그때 생성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그런 고대사유에 신학적인 저의를 지적한다. 어떻게 생성이 시작될 수 있었는지, 왜 생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를 고집스럽게 질문할 때, 넘쳐남ㆍ죄ㆍ벌을 내세우는 고대 철학자들은 엉터리 비극작가들이다. _『그리스 비극시대에서의 철학의 탄생』 ② (아낙시만드로스 비판) <그때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시간의 영원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왜 생성된 모든 것이 오래 전에 소멸되지 않았는가? 어디에서부터 생성의 격류가 오는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제외한 그들은 순수생성의 사유를 대면하지 못했었다. 실제순간은 존재순간도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순간도 아니며,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생성을 사유하도록 강제한다. (*지나가는 순간이) 생성을 시작할 수 없는 것, 생성을 끝낼 수 없는 것으로 사유하도록 강제한다.

 

[3] 생성과 영원회귀의 종합

순수생성과 영원회귀 > 어떻게 순수생성의 사유가 영원회귀의 기초가 되는가? 생성과 구별되고 생성과 대립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순수생성의 사유로 충분하다. 생성의 존재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순수생성의 사유로 충분하다. 생성되고 있는 존재, 생성을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않는 것의 존재란 무엇인가? 되돌아오는 것의 존재, 즉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이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은, 생성의 세계존재의 세계를 최대로 접근시키는 것, 즉 심사숙고의 절정이다. _『권력의지』2권 170>

영원회귀와 이행의 문제 > 과거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현재는 어떻게 지나갈 수 있는가? ① (지나가는 순간 ≠ 현재와 동시에) 지나가는 순간이 현재와 동시에 지나갔고, 현재와 동시에 도래할 것이라면, 지나가는 순간은 결코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현재가 자신 곁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현재를 기다려야 한다면, 과거는 시간 속에서 결코 구성될 수 없을 것이고 현재는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다릴 수 없다. ② (지나가는 순간 = 현재인 동시에) 순간들은 현재인 동시에 지나갔어야 하고, 현재인 동시에 도래해야 할 것이다. 현재는 지나간 것으로, 또 도래할 것으로 자신과 더불어 공존해야 한다. 순간과 다른 순간들의 관계를 기초짓는 것은 순간과 현재지나간 것도래할 것으로서의 자신과의 종합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는 이행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_『차라투스트라』3부 ‘봄에 관해서, 그리고 수수께끼에 관해서’

영원회귀 :: 동일자의 회귀 <······> 동일성의 회귀 > ① (영원회귀 ≠ 동일자의 회귀) 그런 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인 어떤 것 혹은 똑같은 어떤 것의 회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영원회귀>를 동일자의 회귀로 이해할 때 항상 오해를 낳는다. ② (영원회귀 = 동일성의 회귀) 되돌아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자체는 자신을 생성으로ㆍ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ㆍ다수로 긍정하는 하나이다. 달리 말하면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이 아니라,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③ (영원회귀 : 하나의 종합) 영원회귀는 하나의 종합이다.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른 것과 그것의 재생산과의 종합, 생성과 자신을 생성으로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이중적 긍정의 종합이다. 그때 영원회귀는 동일성(*잠재성)이 아닌 어떤 원리, 참된 충분이유를 충족시켜야하는 어떤 원리(*권력의지-현행화)에 의존한다.

영원회귀와 :: 기계론 <······> 권력의지 > ① (영원회귀와 기계론) 왜 기계론은 영원회귀에 대한 그릇된 해석인가? 기계론은 영원회귀를 함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최종상태의 그룻된 결과만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최종상태를 최초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고려함에 따라, 기계론적 가정은 동일한 차이들로 되돌아온다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니체는 순환적 가정으로 비판한다. 그 과정이 단 한번도 차이들 곁을 거쳐가지 않을 때, 어떻게 최초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최종상태에서 다시 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동일한 차이들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순환적 가정이 설명할 수 없는 2가지가 있는데, 공존하는 순환들의 차이순환 속에서의 다른 것의 현존이다. ② (영원회귀와 권력의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회귀를 차별자와 그것의 재생산 이유인 어떤 원리의 표현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그 원리를 권력의지라고 말한다. 권력의지에 의해서 <나는 그 질서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기계적 질서로부터 제거할 수 없는 특징을 표현한다. _『권력의지』2권 374>

*생기론과 기계론

생기론은 “생물은 무생물과 달리 목적을 실현하는 특별한 생기력(vital force. 정령, 영혼)이 있다”는 주장이고,

기계론은 “모든 사물은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해서 설명가능하고, 생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 참고 : 힘의 유형학          

① 힘의 양적 차이 & 힘의 질적 방향

[힘의 양적 차이 :: 힘의 양, 힘의 차이] 능동적 힘 ······ 반동적 힘

(ex. 망각/기억, 시작/반응, 작용/반작용, ~을 향한 자유/~부터의 자유)

[힘의 질적 방향 :: 힘의 질, 힘의 방향] 긍정적 의지 ······ 부정적 의지

(ex. 사태에 대한 태도 : 사건/사고, 변화ㆍ고통에 대한 태도 : 긍정/부정)

② 능동적 힘 & 반동적 힘

능동적 힘이란 시작하는 힘이다. 무구성이란 바로 이런 시작하는 힘의 표현이다.

반동적 힘이란 자극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힘이다.

앙심ㆍ원한ㆍ분노는 모두 반동적 힘의 표현이다. 기억보다도 망각이 능동적인 힘이다.

③ 긍정적 의지 & 부정적 의지

긍정적 의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의지고,

부정적 의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의지이다.

의지로부터 힘을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의지다.

④ 강자와 약자

강자 : 능동적 힘, 긍정적 의지로 정의되는 존재(힘의 유형)

약자 : 반동적인 힘, 부정적 의지로 정의되는 존재(힘의 유형)

⑤ 힘의 전환, 의지의 전환

능동적 힘 > 반동적 힘 :: 능동적 힘이 주도할 때, 반동적 힘은 능동으로 전환한다.

긍정적 의지 > 부정적 의지 :: 긍정적 의지가 주도할 때, 부정적 의지는 긍정으로 전환한다.

ex1> 허무주의와 영원회귀

- 영원회귀 속에서 허무주의는 더이상 약자의 승리가 아니라, 약자의 몰락을 표현된다.

- 영원회귀는 부정을 반동적 힘들의 부정(*반동의 부정)으로 만든다.

ex2> 위버멘쉬와 노동의 거부

- 위버멘쉬를 향한 인간의 몰락은 능동적 파괴(능동적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다.

-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거부(반동적 힘의 부정)는 능동적이 된다.

 

14. 영원회귀의 두 번째 측면 :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로서          

*윤리적 사유로서 영원회귀의 2가지 선택 : ① 불완전한 의욕의 제거 ② 허무주의의 완성ㆍ부정의 전환

 

[1] 위안적 사고로서의 영원회귀

영원회귀가 혐오의 대상에서 혐오를 극복하게 한다 > 감지ㆍ인식되지 않는 반동적 생성은 선택selection의 산물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선택이란 힘의 활동성의지 속의 긍정이라는 이중적ㆍ동시적인 선택을 말한다. 이때, 영원회귀가 선택을 하고, 영원회귀가 선택적 원리의 구실을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전에 혐오의 대상이었던 영원회귀가, 혐오를 극복하고 차라투스트라를 <회복기 환자>, <위안받은 자>로 만든다. _『차라투스트라』3부 ‘회복기 환자’

 

[2] 첫 번째 선택 : 불완전한 의욕의 제거

① 어떤 의미에서 영원회귀가 선택적인가? 윤리적 사유로서 실천적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

윤리적 선택으로서 영원회귀 > 우선 영원회귀는 사유로서 의지에게 실천적 규칙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칸트의 규칙만큼이나, 의지에게 엄격한 규칙을 제공한다. 물리 이론으로서의 영원회귀가 사변적 종합의 새로운 진술이었다면, 윤리적 사유로서의 영원회귀는 실천적 종합의 새로운 진술이다. “네가 의욕하는 것을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원하라.” (*칸트의 정언명령 :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 <만약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기를 원하는지. 『권력의지』4부 242>

*칸트의 정언명령, 가언명령 : 특정한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명령(혹은 순수한 내면의 도덕률을 따르는 명령,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수행이 요구되는 명령)을 정언명령’(定言 categorical imperative)이라 한다. (ex. 약자를 도와줘라.) 반면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조건부 명령(혹은 목적ㆍ의도가 존재하는 명령)을 ‘가언명령’(假言 hypothetical imperative)이라 한다. (ex. 네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약자를 도와줘라.) 칸트의 정언명령에는 크게 2가지 원리가 있다. 보편주의 원리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고, 인격주의 원리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② 영원회귀가 어떻게 선택하는가? 불완전한 의욕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불완전한 의욕 :: 작은 의욕, 강박에 사로잡힌 의욕 > 작은 보상들, 작은 쾌락들, 작은 기쁨들 / 단 한번만 스스로에게 동의하는 것 / 강박에 사로잡힌 자의 의식. 이런 것은 니체를 역겹게 한다. 우리는 단 한번만 자신에게 과도함을 허용하는 노파들과 같다. <슬프도다. 당신들은 불완전한 의욕으로 수척해지고, 행동을 선택하듯이 게으름을 선택하다니! 당신들은 내 말을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항상 하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우선 원할 수 있는 자들에 속하라. *아, 너희(*왜소한 도덕군자)가 반푼어치의 의욕을 모두 털어버리고, 나태든 행위든 결심이 서 있다면! “어느 때고 너희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너희는 그에 앞서 원할 줄 아는(*의욕, 능력) 자들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나의 이 말을 이해한다면. _『차라투스트라』3부 왜소하게 만드는 덕>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속좁은 생각들이다. 속좁게 생각하기보다는 악행을 저지르는 편이 낫다! “사소한 악행에서 느끼는 쾌감이 엄청난 악행을 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너희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절제를 할 상황이 아니다. _『차라투스트라』2부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영원회귀의 사유는 불완전한 의욕을 제거한다 > 영원회귀를 원할 게으름은 더 이상 동일한 게으름이 아니고, 영원회귀를 원할 어리석음은 더 이상 동일한 어리석음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선택하는 것은 영원회귀의 사유이다. 영원회귀의 사유는 의욕을 전적인 것으로 만든다. 영원회귀의 사유는 영원회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욕에서 제거하고, 의욕을 창조로 만들며, 의욕=창조라는 등식을 실현한다.

첫번째 선택에서 두번째 선택으로 > ① (첫번째 선택) 그 같은 선택(*불완전한 의욕을 제거하는 선택)은 차라투스트라의 야심보다는 열등한 것이다. 그 같은 선택은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몇몇 반동적 상태, 몇몇 반동적 힘들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② (두번째 선택) 그러나 (자기 식으로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며, 허무주의적 의지 속에서 강력한 동력을 발견하는) 반동적 힘들은 최초의 선택(*불완전한 의욕을 제거하는 선택)에 저항한다. 반동적 힘들은 영원회귀 밖으로 떨어지기는커녕, 영원회귀 속으로 들어가며 영원회귀와 더불어 되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첫번째 선택과는 아주 다른 두번째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3] 두 번째 선택 : 허무주의의 완성, 부정의 긍정으로 전환

두번째 선택 > 그러나 두번째 선택은 니체철학의 가장 모호한 부분들을 문제삼고, 영원회귀론 속에서 입문적 요소를 형성한다. 우리는 니체적 테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영원회귀 : 허무주의의 완성

왜 영원회귀는 소위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인가? 영원회귀가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라면, 영원회귀에서 분리되고 떼어낸 허무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멀리가고 아무리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불완전한 허무주의>이다.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적 의지를 완전하고 전적인 의지로 만든다.

(2) 무의 의지와 반동적 힘들과의 동맹

왜냐하면 무의 의지가 항상 반동적 힘들과의 동맹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의 의지의 본질이었다. 무의 의지는 능동적 힘들을 부정했고, 능동적 힘으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고 등을 돌리게 했다. 동시에 무의 의지는 반동적 힘들의 보존ㆍ승리ㆍ전염에 기초했다. 무의 의지는 보편적 반동적 생성이며,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었다.

그 점이 “허무주의가 어떤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는 항상 불완전한가” 하는 이유이다. <금욕적 이상조차 삶을 보존하는 기술에 있어 하나의 미봉책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나약하고 쇠약해진 반동적 삶의 보존원리이다. 삶의 비하ㆍ삶의 부정은 허무주의의 보호 아래에서, 반동적 삶이 자신을 보존하고 생존하고 승리하며 전염성을 갖는 원리를 형성한다.

(3) 무의 의지와 반동적 힘들의 동맹결렬

무의 의지가 영원회귀와 비교될 때, 반동적 힘들과 자신(*무의 의지)의 동맹을 결렬시킨다. 허무주의를 완전한 허무주의로 만드는 것은 영원회귀인데, 영원회귀는 부정을 반동적 힘들의 부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에 의해서, 영원회귀 속에서 허무주의는 더이상 약자의 승리가 아니라, 약자들의 파괴ㆍ자멸로 표현된다. <그런 소멸은 파괴, 파괴적 힘의 충동적 선택의 측면에서 나타난다. 파괴의 의지, 보다 심오한 충동, 자기파괴의 의지의 표현, 즉 무의 의지로 드러난다. _『권력의지』3권 8>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서문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몰락을 원하는 자>의 찬가를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보존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저없이 다리를 건널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은 영원회귀의 시기상조적 비밀로서 다음을 포함한다.

(4) 반동적 힘들의 부정 ······> 부정의 긍정으로의 전환

반동적 과정≠반동적 힘들의 부정 (반동≠반동의 부정) >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반동)과 그런 자기파괴자기소멸(*반동의 부정)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반동) 속에서는 능동적 힘이 반동적이 된다. 자기소멸(*반동의 부정) 속에서는 반동적 힘들이 부인되고 무로 인도된다.

반동적 생성 > 그래서 자멸(*몰락)은 능동적 활동ㆍ파괴이다. 힘들의 반동적 생성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것, 바로 그것뿐이다!! 왜냐하면 반동적 힘들이 그것들의 보존ㆍ승리를 보장했던 원리(*허무주의) 아래서 자신을 부인ㆍ제거함에 따라, 힘들은 능동적이 되기 때문이다.

능동적 부정negation active > 능동적 부정ㆍ파괴는 강한 정신들의 몰락을 의욕하면서, 반동적인 것을 영원회귀의 시련에 종속시키고, 그 시련에서 자기 자신을 제거하면서, 반동적인 것을 자신 속에서 파괴하는 강한 정신들의 상태이다. <그것은 강한 정신들ㆍ의지들의 상태이다. 강한 정신들ㆍ의지들은 부정판단으로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능동적 부정은 강한 정신들ㆍ의지들의 심오한 본성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반동적 힘들이 능동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부정의 전환transmuee > 부정은 반동적 힘들의 부정이 될 때, 능동적일 뿐 아니라 전환되는 것 같다. 그것은(*반동적 힘들의 부정은) 긍정을 표현하고, 능동적 생성을 긍정하는 힘으로 표현한다. 그때 니체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 무의 기쁨을 담고 있는 기쁨>에 관해서, <무와 파괴의 긍정, 디오니소스철학 속에서 결정적인 것>에 관해서 말한다.

 

[4] 반동적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5) 반동적 힘들의 회귀불가능성

영원회귀는 능동적 생성을 낳는다 > 그러므로 영원회귀 안에서의 두 번째 선택은 영원회귀가 능동적 생성을 낳는다는데 있다. 반동적 힘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동적 힘들이 아무리 멀리가고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 아무리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반동적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보잘것없고 하잘것없는 반동적 인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회귀에 의해서 영원회귀에 속에서 권력의지의 성질로서 부정은, 긍정으로 전환되고 부정의 긍정이 되고, 긍정하는 힘puissanceㆍ긍정의 힘이 된다. 그것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회복으로, 디오니소스의 비밀로, 영원회귀 덕분에 <자신에 의해서 정복된 허무주의>로, 제시한 것이다.

첫번째 선택과 두번째 선택의 차이 > 그런데 두번째 선택은 첫번째 선택과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의 단순한 사유에 의해서 사유 밖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욕에서 제거하는 것(*첫번째 선택. 불완전한 의욕의 제거)이 더이상 문제가 아니라, 영원회귀에 의해서 본성의 변화없이는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존재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두번째 선택. 부정의 긍정으로 전환)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선택적 사유(*첫번째 선택. 불완전한 의욕의 제거)가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 존재(*두번째 선택. 부정의 긍정으로 전환)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존재이고 존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선택=위계).

 

15. 영원회귀의 문제          

 

[1] 능동적 생성 (*능동적 생성 & 반동적 생성)

*생성의 이중성 :: 능동적 생성/반동적 생성, 반동적 힘들의 능동적 생성/능동적 힘들의 반동적 생성

영원회귀와 가치전환 > ① (영원회귀의 해명) 영원회귀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점들과 관련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권력의지의 2성질인 긍정과 부정의 관계,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 새로운 감각방식ㆍ사유방식ㆍ존재방식(위버멘쉬)으로서의 전환의 가능성과 관련해서이다. ② (가치전환 :: 반동 대신 능동, 부정 대신 긍정) 니체의 가치들의 전복은 반동적인 것 대신 능동적인 것을 의미한다. (가치들의 전복은 전복의 전복인데, 반동적인 것이 능동의 자리를 취함으로써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들의 전복이나 가치전환은 부정 대신에 긍정을 의미할 뿐 아니라, 긍정의 힘으로 변화된 부정, 디오니소스적 탁월한 변신을 의미한다.

생성의 이중성 > ① (생성의 이중성)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인데, 생성은 이중적이다. 능동적 생성/반동적 생성, 반동적 힘들의 능동적 생성과/능동적 힘들의 반동적 생성. ② (능동적 생성과 반동적 생성) 그런데 능동적 생성만이 존재를 갖는다. 그래서 생성의 존재가 반동적 생성, 허무주의적 생성에 의해서 긍정하게 된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영원회귀가 반동적 힘들의 회귀라는 것은 모순적이다.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반동적 생성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능동적 생성의 현존을 가르친다.

 

[2] 전체와 계기 (*영원회귀=생성=전체 & 능동적 생성=계기)

긍정의 이중성, 영원회귀의 이중성 > ① (긍정의 이중성) 영원회귀는 생성을 재생산(*전체)하면서 능동적 생성을 생산(*계기)한다. 그래서 긍정은 둘씩 짝지어가는데, 능동적 생성의 현존(*계기)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생성의 존재(*전체)를 충분히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 (영원회귀의 이중성) 그러므로 영원회귀는 이중적 측면을 갖는데, 생성의 보편적 존재(*전체)이지만 생성의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계기. 능동적 생성)을 말한다. 능동적 생성(*계기)만이 전全 생성의 존재인 하나의 존재(*전체)를 갖는다. Only becoming-active has a being which is the being of the whole of becoming.

영원회귀의 전체 & 능동적 생성의 계기 > ① (전체와 계기) 되돌아오는 것은 전체이지만, 그 전체는 단 한순간에 긍정된다. 생성의 보편적 존재로서 영원회귀(*전체)를 긍정하는 한, 보편적 영원회귀의 징후ㆍ산물로서 능동적 생성(*계기)을 긍정하는 한, 긍정은 뉘앙스를 변화시키고 점점 더 심오해진다. ② (영원회귀 :: 물리적 이론 & 선택적 존재론) 물리적 이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지만, 선택적 존재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를 능동적 생성에 의해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긍정한다.

짐승들의 상투어 & 차라투스트라의 긍정 > 차라투스트라와 그의 짐승들을 결합시키는 공모 가운데, 짐승들은 이해ㆍ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문제로 인해, 차라투스트라의 혐오ㆍ회복의 문제인 어떤 문제로 인해 오해가 생겨난다. <악동들이여! 되새김질하는 자들이여! 차라투스트라는 미소지으면서 대답했다. 당신들은 이미 그것의 상투어를 되풀이했다. _『차라투스트라』3부 ‘회복기의 환자’> 상투어는(*짐승들) 순환이고 전체이며 보편적 존재이지만, 긍정의 완벽한 정식은(*차라투스트라) 전체를 긍정하고 보편적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으로, 전체는 단 한순간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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