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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발제] 아침놀2권 #97~119

강한상 2019.06.24 17:33 조회 수 : 78

제 2권 발제 강한상

 

97.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변하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도덕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노예적인 것일 수도 있고 허영심이나 이기심 혹은 체념이나 음울한 열광이나 사려없음, 혹은 절망의 행위일 수도 있다. 그것이 그 자체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진짜 도덕과 가짜 도덕. 타자화된 욕망이 내재화되어서 나를 통제할 때 그것이 가짜 도덕이다. 우리는 자기 입법자가 되어서 자기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내 안의 충동 즉 애벌레의 충동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충동에 먹이를 주자.

 

98. 도덕의 변화 – 도덕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그러한 변화는 행복한 결말을 낳는 범죄들에 의해 초래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범죄들에는 도덕적 사상의 모든 혁신이 속한다.

*도덕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생성되는 것이다. 기존의 도덕을 변혁하기위한 인류의 노력은 그당시에는 범죄로 취급받았으나, 나중에 행복한 결말을 낳는다. 인류는 끊임없이 도덕적 혁신을 해왔다. 지금 너를 억압하고 구속하며 둘러싸고 있는 도덕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마라. 네가 도덕의 혁신자가 될 수 있다. 예수는 그 당시에 범죄자였으나, 그는 인류를 구원했다.

 

99. 우리 모두는 어떤 점에서 비이성적인가 – 우리는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판단들과 더 이상 믿지 않는 교설들에서 여전히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감정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자주 비이성적이다.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교설 체계 즉 기존의 프레임과 확실하게 틀렸다고 판단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 대응한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에 근거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00. 꿈에서 깨어나 – 한때 고귀하고 현명한 인간들은 천체의 음악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고귀하고 현명한 인간들은 여전히 존재의 윤리적 의의를 믿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천체의 음악도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깨어난 뒤 그들의 귀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러분은 천체의 음악을 듣고 있는가?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를 보면 세상을 음악으로 인식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인식하는 세상은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서 니체가 주목하는 천체의 음악은 실체가 없는 것 즉 환상에 불과하다. 존재에는 도덕적으로 규정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음악을 듣는 자는 정신병자이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청을 듣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오라클 : 존재의 윤리적 의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세계의 효용성에 근거한 추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류에 근거하여 사고하기에 무의한 행위이다.

 

101. 우려된다 – 어떤 신앙을, 그 신앙이 관습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정직하고 비겁하며 부패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부정직, 비겁, 부패가 윤리의 전제라는 것인가?

*어떠한 관습을 신앙처럼 받드는 것은 미신이다. 미신과 윤리는 다르다.

 

102 가장 오래된 도덕적 판단 –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떤 인간의 행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런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주목한다. 우리는 이 행위를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본다. 우리는 이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를 그의 의도로 간주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갖는 것을 그의 지속적 성질로 간주하며 이때부터 그를 유해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론은 삼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계속되어온 삼중의 그릇된 판단이다. 그것은 아마 동물들과 동물들의 판단력으로부터 계승되었을 것이다. 모든 도덕의 기원이 다음과 같은 혐오스럽고 비소한 추론에 의한 것은 아닐까?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한 것(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선한 것(그 자체로 기분을 좋게 하고 유익한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자체로 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이익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우호적인 것이다. 아 수치스러운 기원이여 이것은 타인이 우리와 맺게되는 사소하고 경우에 따라 달라지며 자주 우연적인 관계를 타인의 본질이자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상상하면서, 그에 대해 우리가 한 번 혹은 몇 번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러한 관계만을 타인이 세계 전체와 자기 자신과 맺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진정한 어리석음의 배후에는 선과 악이 우리를 기준으로 측정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선의 원리여야 한다는 가장 불손한 생각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도덕이라고 구축한 풍습의 기원은 수치스럽다.

 

103 나는 비윤리도 부정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을 비윤리적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야하는 근거가 진리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부르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면,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야 하고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를 부정한다. 자기 입법을 위해. 예수의 결단성처럼

 

104. 우리의 가치 평가 - 모든 행위는 가치 평가에 의거하고, 모든 가치 평가는 자신의 것이거나 받아들여진 것인데 대부분 후자에 해당한다. 우리는 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것인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각에 길들고 마침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되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관해(그의 정신, 품격, 도덕성, 모범적인 점, 비난받을 점에 관해) 판단하는 방식과 그들의 가치 평가를 옳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점에서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어렸을 적에 익힌 판단들에 의해 일생 동안 놀아나는 어릿광대이다.

*우리는 유치원 때 배운 풍습의 도덕에 의해서 놀아나는 어릿광대이다.

 

105 사이비 이기주의 –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든 간에 일생 동안 자신의 자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자아의 환영을 위한 일만 한다. 이러한 자아의 환영은 그들의 주위 사람들의 머리에서 형성되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비인격적인 의견과 자의적인 말하자면 허구적인 가치 평가들의 안개 속에서 함께 산다. 어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살고 이 머리는 다시 다른 머리들 속에 산다. ~이 모든 것은 대다수 사람 중 아무도 자신이 접근함으로써 규명되는 진정한 자아를 빛바랜 일반적인 허구와 대립시킴으로써 이러한 허구를 제거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아가 아닌 자아의 허상을 위해 살고, 타인의 머릿속에 살며 이 머리는 다시 다른 머리 속에 산다. 나는 없고 오직 그가 있다.

 

106. 도덕적인 목표의 정의에 대한 반대 – 오늘날 도처에서 도덕의 목표는 대체로 인류의 유지와 촉진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의 목표에 대한 하나의 규정을 갖고자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유지라면 무엇을 유지하겠다는 것인지 사람들은 당장 묻지 않을 수 없다. 촉진이라니, 어디로 촉진하겠다는 말인가? 바로 본질적인 것 즉 무엇을 유지하고 어느 방향으로 촉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도덕의 목표에 대한 그러한 규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 규정을 따른다면 현재 암묵적으로 그리고 사려없이 이미 확정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우리의 의미인지 가르쳐주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규정에서 인류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인류가 가능한 한 빨리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판별할 수 있을까? 두 경우에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 즉 실천적 도덕은 매우 다르게 될 것이다.

*도덕의 목표가 단지 인류의 유지와 촉진이라면 웃기는 것이 된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답을 찾지 않고 그저 유지하고 어디를 향하는지를 모르고 촉진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무엇을 유지하고 어디로 촉진할지 우리 스스로 정해야 한다. 남이 정해준 것을 따르지 말고.

 

107.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리의 특권 – 도덕의 이러한 권위는 그릇되게 생각하면 위험이 초래되는 사태의 경우 사유를 마비시킨다. 이런 식으로 도덕의 권위는 그것을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릇되게 생각하면 위험이 초래되는 사태의 경우 그릇되다는 것은 여기서는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위험한가? 명철한 이성이든 몽매한 이성이든 자신의 이성에 따라 자의적으로 그리고 어리석게 행동할 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자마자 권위적인 도덕의 소유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보통 행동하는 당사자들의 위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위험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 지성이 가능한 한 분명하고 냉철하게 통찰해야 할 바로 그때 격정에 사로잡힌 채 암흑 속으로 도망치도록 우리는 교육받아 온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더욱 고차원적이고 더욱 중요한 모든 문제들과 관련해서 말이다.

*도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를 마비시킨다. 우리는 어리석게 행동할 권리 즉 기존의 도덕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108. 몇가지 주장들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한 그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어떠한 지침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개인의 행복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들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밖에서 주어지는 지침은 그의 행복을 방해하고 저지하게 될 뿐이다. 이른바 도덕적인 지침들은 사실 개인과 대립되는 것이며 개인의 행복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침들은 인류의 행복과 안녕과도 무관하다.~ 도덕적인 선입견이 바라는 것처럼 도덕이 부도덕보다 이성의 발전에 더 기여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의식을 갖는 어떤 존재 (동물, 인간, 인류 등)의 발전에서 그것들이 추구하는 무의식적인 목표가 그 존재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우리는 밖에서 주어지는 지침을 거부하고 자기의 행복을 찾기 위한 스스로의 지침을 확보해야 한다.

 

109 자제와 절제 그리고 그것들의 궁극적 동기

나는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 방법 이외에 어떤 방법도 발견할 수 없다. 이 방법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성질이 다르다. 첫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 할 수 있다.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충동 자체에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시간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통해 첫 번째 방법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법에서는 그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넷째, 지적인 책략이 있다. 즉 매우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족 전체와 확고하게 결부한다. 이런 방법을 약간 연습한 후에는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다섯째 무언가 특히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을 자신에게 부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아울러 일시적으로 다른 충동을 우대하고 이 충동이 만족할 수 있는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 격렬함으로 인해 성가시게 되었을 충동이 사용할 힘을 소모할 경우에도 역시 결과는 동일하다. 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이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모든 다른 충동들에 일시적인 고무와 축제의 시간을 주고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려 했던 충동이 혼자 먹어치우려 했던 먹이를 그 충동들에 나누어 줌으로써 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육체와 정신의 조직 전체가 약화되고 억제되는 것을 견디고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물론 이런 방법을 통해 개별적인 격렬한 충동을 약화한다는 목표를 도달한다. 예를 들어 고행자처럼 자신의 감각을 철저히 굶기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종종 자신의 지성도 함께 굶김으로써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회피하는 것, 규칙을 충동에 심는 것, 충동에 대한 포만감과 역겨움을 만들어 내는 것,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을 연상하는 것, 그 다음에는 힘들의 방향 전환 마지막으로 육체와 정신 전체의 약화와 탈진 이것이 여섯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오히려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쟁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인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이 안식에 대한 충동이든지 치욕이나 다른 나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이든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충동의 격렬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실은 다른 충동에 대해 어떤 충동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충동의 격렬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충동과 똑같이 격렬하거나 훨씬 더 격렬한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지성이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만 하는 투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우리 안에 있는 충동들을 직시하고 어떤 충동에 먹이를 줄지 우리가 선택한다.

 

110 저항하는 것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다음과 같은 과정 자체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자주 관찰되고 확인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우리가 아직 몰랐던 일종의 쾌감의 낌새를 느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욕망에 무엇이 저항하는지가 관건이다. 저항하는 것이 보다 저속한 종류의 사물과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들이고 또한 우리가 별로 존경할만한 가치 없는 인간들이라면 이 새로운 욕망의 목표는 고귀하고 선하며 칭찬할 만하고 희생할 만하다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유전된 도덕적 소질 전체는 이윽고 이 목표를 자신 안에 수용하고 도덕적이라고 느껴온 여러 가지 목표들에 이 목표를 덧붙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쾌감이 아니라 도덕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추구가 갖는 정당에 대한 확신을 크게 증대시킨다.

*우리 내부의 충동을 바라보고 그것이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 바라보자. 우리가 먹이를 줄 충동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11. 객관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친척들과 지인들한테서 다양하고 강한 감정들을 보았지만 세련된 판단과 지적이 올바름에 대한 기쁨은 거의 보지 못한 결과 감정을 흉내내는 데 최상의 힘과 시간을 소모한 사람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어떤 새로운 사물이나 어떤 새로운 인간에 대해서도 곧 호감이나 증오, 시기나 경멸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짓눌리고 무력감을 느끼면서 그는 감정의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일종의 기적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천재한테나 가능한 것으로 보거나 가장 희귀한 도덕적 덕으로 찬미한다. 그리고 이 것 역시 단지 훈육과 습관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훈육과 습관에 의해 형성된 것과 진짜 나의 내부에 있는 충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112. 의무와 권리의 자연사에 대해

우리의 의무는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이다. 그들은 무엇을 통해 이러한 권리를 획득했는가? 그들이 우리가 계약할 수 있는 능력과 보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며서 자신들과 동일하고 유사하다고 상정한 뒤, 이에 따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기고 우리를 교육하고 질책하고 뒷받침하는 것을 통해서다. 우리가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에 대한 저 생각 즉 우리에게 앞의 모든 것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던 저 생각을 정당화하고 타인이 우리에게 준 만큼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의무를 다하도록 명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한 것에 대한 대가로 우리가 그들을 위해 어떤 것을 할 경우, 우리는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어떤 것을 하면서 우리 힘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우리가 의무를 이해함으로써 보복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그들 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 힘의 영역에 개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다 강력하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인정했던, 우리에 대한 타인의 권리가 종식을 고한다. 공정한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저울 즉 무상한 인간사에서 언제나 잠깐 동안 균형 상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힘과 권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저울과 같은 섬세한 감각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정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공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과 많은 선한 의지, 그리고 매우 많고도 매운 좋은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권리와 의무에서 자유로워져서 공정하게 살아가야 한다.

 

113. 우월의 추구

우월의 추구는 이웃을 압도하려는 노력이다.

*우월함/탁월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웃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의 충동을 따르는 것에 치열하면 된다.

 

114. 고통을 통해 획득된 인식에 대해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 고통을 통해 최고의 냉정함을 회복하는 것은 그를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며 더 나아가 유일한 수단이다. 예수가 최고의 고통을 맛보는 순간 자신에 대해 통찰하게 되었다. 고통에 저항하려는 지성의 엄청난 긴장은 새로운 빛 속에서 빛나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건강의 마술이 다시 시작되더라도 화내지 않는다. 우리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지켜본다. 온화하게 그리고 여전히 피로를 느끼면서. 이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고통을 겪으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파악이 된다.

 

115. 소위 자아라는 것

이렇게 그릇된 길에서 우리가 발견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 소위 자아가 이후 계속해서 우리의 성격과 운명을 형성하는 데 협력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 나의 모습이 아니고 그릇되게 형성된 것이다. 이제 그것에서 벗어나서 내 안의 충동에 주목하자.

 

116. 주체라는 미지의 세계

기존의 오류적 사고가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조차도 올바른 인식에는 올바른 행위가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행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행위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행위는 우리에게 나타난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이와 반대였기에 오류를 범했다.

*우리 내부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전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미지의 세계를 섬세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117. 감옥에서

내 눈이 지금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밖에 보지 못한다. 우리는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척도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삶을 측정한다. 이 모든 것은 오류 그 자체이다. 우리는 우리의 그물 안에 갇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 이를 직시하자.

 

118. 도대체 이웃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웃의 행동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 감각을 이웃의 객관적인 속성으로 이웃에게 귀속함으로써 이웃에게 그릇된 정반대의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따라 이웃을 우리의 천체의 한 위성으로 만든다. 환상의 세계 그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전도되고 뒤집어지고 공허하고 그럼에도 충만하고 올바르게 세워져 있다고 몽상되는 세계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오류의 시선으로 본다. 마치 자신을 그렇게 보는 것처럼. 자신의 오류적 시선을 정확하게 직시하는 것이 필요한 첫 과제이다.

 

119 체험과 창작

어떤 사람이 아무리 폭넓게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더라도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충동들 전체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불완전한 것은 없다. 소위 도덕적인 충동들은 꿈속의 음식물을 통해 만족될 수 있다. 꿈속에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고 독수리의 환희를 품고 아득한 산꼬대기를 향해 날아간다. 깨어있는 삶은 꿈꾸는 삶이 갖는 이러한 해석의 자유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력과 자유로움에서 뒤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충동이 최고조에 있는지에 따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 안에 세계의 유쾌함과 밝음을 증대시켰다고 기뻐할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이 있다. 우리의 충동은 사건을 먹이처럼 붙잡는다.

*우리의 충동에 집중해서 우리가 원하는 에너지와 충동에 먹이를 주자.

 

120. 회의주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대의 행위는 그대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진다. 모든 순간에 말이다. 인류는 능동과 수동을 혼동해왔다.

*넌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121. 원인과 결과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의 상만을 본다. 본질적인 결합에 대한 통찰이 불가능하다.

*네가 본 원인이 원인이 아니다. 충동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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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니체_발제] 아침놀 3권 :: #149~207 file 두정 2019.07.16 67
522 [니체_발제] 아침놀 2장 후반부_쟈스민 file 쟈스민 2019.06.30 73
521 [니체_후기] 아침놀_조성연 [4] file ssk07040 2019.06.28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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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기형도 30주기 추모] 기형도 시 새로 읽기 세미나 후기 [2] 늘푸른진 2019.06.21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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