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H. J. Paton의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 Vol.I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Paton은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칸트 학자입니다. 국내에도 그의 저작이 한, 두권 번역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e>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를 주석한 두 권의 연구서로서 1,000쪽이 족히 넘는 압도적인 분량의 대작입니다. 저는 이 책의 일부를, '초월론적 연역'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번역하여 게시하려고 합니다.

 

<칸트의 경험의 형이상학>, 제1권, H. J.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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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해결 방법

 

1절.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칸트는 그의 문제를 진술하면서 비판철학적 해결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신중함을 보여주었다. 그가 가정한 바는, 단지 모든 대상에 필연적 ․ 보편적으로 적용되기를 요구하는, 따라서 경험에서 오는 일반화에 의해서 경험적으로 도출될 수 없는 약간의 선험적 범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1) 그가 이런 범주의 기원을 지성과 판단의 필연적 형식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이고,—이것이 「형이상학적 연역」의 귀결이다. 합리론자라면 이것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정신이 그 자체로 이해 능력, 또는 이성을, 정신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물의 필연적 ․ 보편적 성격을 선험적으로 파악할 있게 해주는 그런 능력을 소유한다는 합리론적 입장을 고수할 수도 있다.2) 범주를 대상에 적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란 어렵고, 이는 칸트도 매우 강조한 바 있지만, 이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그가 의도적으로 합리론적 학설이 정확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열린 물음으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다.3)

그는 문제를 진술하고 나서 그 해결 방법으로 넘어간다. 그는 합리론적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비판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을 적용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관념4)이 대상에 관계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대상이 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것, 또는 관념이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5) 첫 번째 선택지는 실재론의 학설이다. 두 번째 것은, 칸트가 옳다면 선험적 관념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학설이다.

 

2절. 경험적 관념

대상이 관념을 가능하게 할 경우, 관념은 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현상에 대해, 감각에 속하는 현상 안의 요소와 관련해서, 사실이다.6)

직관이 감각, 대상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감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직관은 경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분명한 표현일 것이다. 개념이 이와 같은 경험적 직관에서 오는 추상화에 의해 도출되는 한에서, 개념 역시 경험적이다. 게다가 대상이 개념을 도출하게 하는 [원천인] 경험적 직관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개념 역시 대상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7)

어떤 관념이라도, 직관이든 개념이든, 대상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한에서, 그것은 경험적이다. 그리고 어떤 관념이라도 경험적인 한에서, 그것은 대상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8)

 

3절. 선험적 관념

관념이 순수하거나 선험적일 경우, 관념은, 이런 견해에서 보면, 대상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관념이, 바로 이 관념이 대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대상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는 보다 어려운 경우다. 우리는 의지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대상의 관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이어서 행위에 의해 그 대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의지 말이다.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인식이다. 그리고 인식에 있어서 우리의 관념이, [대상의] 실존이 관련되는 한,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는 점은, 적어도 칸트에게는, 명백한 사안이다. 설사 우리가 대상의 관념을 산출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이 대상 자체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칸트가 내놓고 있는 제안은 이것이다. 관념이 대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대상의 성격을 인식된 것으로서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오직 관념을 통해서만 어떤 것이 대상으로서 우리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외 없이 모든 대상의 성격을 필연적으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칸트 철학의 전체가 기대고 있는 제안이다.

 

4절. 순수 직관과 순수 개념

‘대상은 ~이다’의 ‘~’에 무엇이 올 수 있든 간에, 직관 및 사고 또는 개념화 작용 양자 없이는 그 어떤 대상도 인식될 수 없다. 직관은 필수 불가결한데,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대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관을 사고로부터 추상하여 고려할 경우) 대상은 주어질 수 있으며, 이 때 대상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진다.9) 우리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상을 인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개념화 작용 역시 요구한다. 오직 개념10)에 의해서만 우리는 직관에 대응하는 대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공간과 시간은, 대상이 직관될 수 있는 단독의 형식으로서, 정신 속에 기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그것들은 대상을 선험적으로 조건지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감성론」에서 보여준 바 있다.12) 주어진 현상으로서, 대상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즉, 비록 (공간과 시간처럼) 어떤 것이 직관될 수 있는 단독의 조건은 아니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대상 일반으로서 사고될 수 있는 단독의 조건이 되는, 순수 개념 내지 범주가 있을 수 있는가?13) 직관뿐만 아니라 사고 또한 대상의 인식 내지 경험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고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 내지 형식이 존재한다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인식은 우리의 감성에 의해 부과되는 조건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고의 조건에도 순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경험의 대상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절. 대상

이런 맥락에서, “대상”이란 낱말에 대한 칸트의 용법과 관련하여 또 다시 많은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 예컨대, 사고에서 분리되면 어떤 대상도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이 현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직관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여, 비록 그러한 진술들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떻게 칸트의 혁명적 학설이 [그보다] 더 좋게 진술될 수 있는지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가 그의 이론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를 주어진 직관에서 대상의 인식으로 이행하게 하는 어떤 시간적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의견을 한쪽으로 제쳐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 구체적인 개별 대상—예컨대 이 나무를 인식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이 나무를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직관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 즉, 그 색과 모양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 하에서 시각에 주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는 나무가 이미 주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무가 나무로서 인식되고 있다면, 사고 역시 현존해 있다. 즉, 우리는 “나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하고, 사실은 실체와 우유성의 범주를 사용해야 한다. 오직 하나의 대상, 즉 이 녹색의 나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각과 사고의 결합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상화에 의해서 시각 작용을 사고 작용에서 분리할 경우, 시각 작용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색 정도가 될 것이고, 우리는 색을 그 본질에서, 즉 나무의 색이라는 점에서 인식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사고 작용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겨우 ‘나무성’의 개념14)에 불과할 것이며, 개별 대상은 전혀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규정된 대상을 인식하는 일은 오직 직관과 사고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15)

이것이 사실이라면, 칸트에 따를 때, 직관의 조건뿐만 아니라 사고의 조건 역시 선험적으로 대상의 본성을 인식된 것으로서 규정할 수밖에 없다.

 

6절. 대상 일반의 개념

이 지점에서 칸트는 사고의 조건이나 형식이 판단의 형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어진 직관들의 종합을 규정하는 것에 해당하는 판단의 형식이 범주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가 “어떤 것이 대상 일반으로서 사고될 수 있는 단독의 조건이 되는 선험적 개념은 있을 수 있지 않는가?”16)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사실상 이 학설은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언급은 괄호 안에 묶어서 하고 있다.17) 그러나 독자는 [칸트의] 논증이 “대상 일반의 개념”, 곧 방금 인용한 물음에서만 명시적으로 범주와 연결되어 있던 개념에 기대어 구성된다는 사실로 쉽게 당황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이 물음과 떨어져 있는 경우에도, 범주가 대상 일반의 개념임을 비쳐주는 많은 암시를 갖고 있었다.18) 특히 「형이상학적 연역」의 결론은, 범주가 대상에 선험적으로 적용된다는 것19), 그리고 범주를 통해서만 우리는 직관의 대상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20)이었다. 그럼에도 만일 칸트가 범주는 따라서 대상 일반의 개념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다면21), 설명의 명료함은 훨씬 크게 확보되었을 것이다.

 

7절. 객관적 연역의 방법

경험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주어진 직관 외에도 대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항상 또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이 개념이 우리의 경험을, 단순히 감각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직관하는 크기, 모양, 색 등은 항상 어떤 것 또는 어떤 대상의 크기, 모양, 색으로서 사고된다.22)

다시 말해서, 대상 일반의 개념은 항상 우리의 경험에 현존하며 그것에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은 “집”이나 “배”와 같은 우리의 모든 경험적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집이다’, ‘배이다’는 ‘어떤 것이다’를 말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대상 일반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들의 다양성을 함축한다고 믿고 있다. ‘대상이다’는 이를 테면 ‘양과 질을 가지고 있다’이며, ‘속성을 지닌 영속적인 실체이다, 다른 실체와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실체이다’를 말한다. 그러므로 판단의 형식이 판단의 형식들로 분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 일반의 개념은 대상 일반의 개념들로 분화된다. 이 같은 대상들 일반의 개념, 또는 대상 일반의 개념이 바로 범주이다.

대상 일반의 개념이 경험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면, 그리고 이 개념이 선험적으로 범주들로 분화된다면,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이 확립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오직 범주를 통해서만 대상의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은, 경험의 대상이기 위하여, 단지 경험적 개념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범주에 의해서도 사고되어야 한다.

범주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단, 사고의 형식24)이 —주어진 질료나 직관의 형식이 아니라—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렇다.

범주는, 이런 견해에서 보면, 우리가 대상을 대상으로서 경험하거나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대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대상을, 그것이 인식될 수 있다면, 범주에 의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 작용은 대상에 특정한 범주적 성격을 부과한다. 그리고 대상은 우리에게 인식된 대상으로서 이러한 성격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주에 의해서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고 작용이 대상에 이러한 성격을 부과한다는 이유 때문에, 인식된 대상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인간 정신—오직 감각과 사고의 결합에 의해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에 나타나야25) 하는 대로의 사물이다.26)

 

8절. 초월론적 연역 일반의 원리

이 논의—대상의 필연적 ․ 보편적 성격은, 그것이 필연적 ․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인식하는 정신의 본성에 기인해야 한다—의 기본 주장은 비판 철학의 근본적 학설이고,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근거이다. 우리는 그 주장을 공간과 시간과 관련하여 이미 접해본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초월론적 연역」의 도입부 중 여기서 강조되고, 종결부에서 반복되는데, 이는 A판27)이나 B판28)이나 동일하다.

칸트는 그의 논증의 일반적인 성격을 완벽히 명료하게 한다. 모든 선험적 개념—공간과 시간과 같은 순수 직관이든, 범주와 같은 지성의 순수 개념이든—의 초월론적 연역은 하나의 원리에, 그리고 오직 하나의 원리에만, 즉 선험적 개념은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원리에만 의존한다. 그것[선험적 개념]이 순수 직관인 경우에, 그것은 경험 속에서 발견되어야 할 직관의 조건(이나 형식)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순수 개념인 경우에, 그것은 [위의 경우와] 유사하게 경험 속에서 발견되어야 할 사고의 조건(이나 형식)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선험적 개념은 반드시 이 두 가지 중 하나29)에 해당하며, 그 외에 다른 근거로 선험적 개념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9절. 주관적 연역의 방법

지금까지 칸트는 「초월론적 연역」의 객관적 측면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그는 그 논의가30)—지나치게 압축되어 있긴 하지만— 객관적 연역으로서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우리에게31) 알려주었다. 「초월론적 연역」은 주관적 측면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반적인 도입부에서는, 그것을 꼭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때에 맞게 진행하고 있다.32)

그는 A 77-9 = B 103-4를 회고하며, A 97과 A 115-16을 예상하는 짧은 단락33)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단락은 B판에서는 생략되어 있고, 세 개의 다른 단락이 새로운 판본의 보다 적합한 도입부로서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34)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될 수 있는 세 가지 근원적인 (또는 비파생적인) 영혼의 소질 내지 능력35)이 있다.36) 이것들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 즉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 명칭은 감각, 상상력, 통각이다. 이것은 A판에 있는 통각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도입부37)에 나오며, 우리는 앞의 절에서 하듯이 타당하게 지성을 예상할 수도 있다.38) 능력으로서의 통각은 사고 내지 지성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낱말의 사용에는, 항상 사고 내지 지성이 어느 정도는 자기-의식적이라는 암시가 비쳐지고 있다.

이 세 가지 능력은 —이 낱말이 소질과 능력 모두를 다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면— 경험적 사용과 초월론적 사용을 갖는다.39) 경험적 사용에서 그 능력들은 경험적 관념의 주어진 질료와 관계한다. [반면에] 초월론적 사용에서 그것들은 선험적 관념의 원천에 해당하며, 인식의 질료가 아니라 오직 그 형식과 관계한다. 감각의 초월론적 사용은 「감성론」에서, 우리의 감성이 공간과 시간의 원천, 직관의 형식이었음을 발견한 그 곳에서 살펴본 바 있다.40) 우리는 이제 상상력과 통각의 초월론적 사용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 능력들 속에서 도식화된 범주와 순수 범주—이것은 (주어진 직관을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사고의 형식이다—의 원천을 발견해야 한다.

칸트는 이 세 가지 능력이 초월론적 사용 중에 인식에 기여하는 바를 언급한다.41) 우리는 그 능력들에 기반한 세 가지 사태를 갖고 있다.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다양42)의 개관; (2) 상상력을 통한 선험적 다양의 종합; (3) 근원적 통각을 통한 이 종합의 통일.

이 학설은 10절에서 [설명된 것]과 같은 학설이다. 왜냐하면 선험적 다양과 거기서 언급된 순수 종합 외에도43), 순수 종합의 통일이 지성에 의존하는 개념에, 또는 다시 말하면 근원적 통각 안에 기원을 가지는 개념에 기인한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기 때문이다.44)

“개관”이란 낱말은 감각에 적용되는데, 경험적이든 순수하든 직관 속에는 항상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45) “종합”이란 낱말은 감각과 관련하여 부적합한 [용어가] 될 텐데, 왜냐하면 종합은 다양의 능동적 통일화 작용을 함축하는 반면에 감각은 수동적이고 다양을 통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의 용어법을 통일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46) 그리고 이는 비판자들이 그에게 학설의 비일관성을, 사실은 칸트의 언어에 대한 그들 자신의 과도한 주목 때문에 산출된 것이자 언어 배후의 의미를 통찰하지 못한 데 기인하는 비일관성을 문제 삼도록 유도한다.47) 칸트는 그 어디에서도 감각, 상상력, 지성 내지 통각과 다른 근원적인 인식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순수한 종합 또는 초월론적 종합이 순수 다양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지도 않는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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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일반화, 또는 경험에서 오는 추상화에 의해, 범주의 인식을 획득한다. 즉, 우리는 범주를 명석한 의식 속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범주는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지만, 칸트에 의하면 정신의 본성 속에 그 기원을 두고 있어야 하는, 그런 보편적 ․ 필연적인 타당성의 요구를 소유한다.

2) 실제로 이러한 입장은 칸트의 몇몇 비판자들이 주장한 것이었다. M.A.d.N. Vor. (IV 474n)을 보라.

3) B 22와 비교하라. 그 어려움은 주로, 범주와 직관이 이종적(異種的)인 것이라는 사실에 기대고 있다. A 137 = B 176을 보라.

4) 칸트는 “종합적 관념”이라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이 오식(誤植)이 아니라면, 그는 복합적 직관—색의 직관이 대조되는바 의자의 직관과 같은—과, 우리가 본 것처럼 종합의 개념에 해당한 개념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5) A 92 = B 124. 보다 자세한 진술은 B XVII에서 찾아볼 수 있다. B 166과 A 128-9와 또한 비교하라. 칸트의 “대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흔히 겪는 어려움이 여기서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 낱말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논의할 수 있다. 프리차드(Prichard)의 Kant's Theory of Knowledge, pp. 15ff와 비교하라. “대상”을 우선은 상식적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예컨대 의자는 “의자”의 직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가정되며, 이 직관에서 우리는 추상화를 통해 “의자”의 개념을 도출한다. 즉, 대상이 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만일 우리가 주어진 직관에 실체와 우유성의 범주를 부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자의 직관도, 결과적으로는 “의자”의 경험적 개념도 가질 수 없게 될 거라고 논한다. 따라서 범주가 대상을 —우리에게 인식된 것인 의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받아들일 경우, 의자는 현상적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상은 여전히 우리의 감각-여건의 현상적 이유이다. 우리의 감각-여건의 궁극적 이유 또는 조건은 물자체이고 말이다. 분명히 이러한 입장은 —칸트건 칸트 해설자건 “대상”이란 낱말이 사용되는 때마다 반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해 불가능하다거나 자기-모순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6) A 92 = B 125.

7) B XVII와 비교하라.

8) 이 학설은 모든 경험적 관념—그 질료에 한정할 경우—에 관한 칸트 자신의 학설이다. 그러나 경험적 개념의 형식, 또는 보편성은 사고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제9장의 4-6절을 보라). 그리고 경험적 직관—공간과 시간—의 형식은 우리의 감성의 본성에 기인한다.

9) 이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만— 대상은 단지 현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점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상이 현실과 구별되는 수준, 또는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에서 구별되는 수준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준을 회고해볼 수 있고, 더 높은 수준에서 기술할 수 있다. “현상”은 보통 (물자체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현상적 대상 전체에 적용된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하겠다. 여기서 그 표현은 오늘날 [철학계에서] 현상적 대상과 대비하여 감각(sensum) 또는 감각-여건(sense-datum)이라 불리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가장 일상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10) 여기서 개념은 경험적 개념일 수도 있다. —이 빨간 당구공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색을 보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당구공의 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실체와 우유성의 범주를 전제한다.

11) 칸트의 비판철학적 학설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 의미는 A 189에서 논의되고 있다. 또한 A 189 = B 234 ff.와 A 197 = B 242 ff와 비교하라.

12) 칸트는 “형식과 관련하여(der Form nach)”를 덧붙인다. 이는 A 93 = B 126에 나오는 “사고 작용의 형식과 관련하여(der Form des Denkens nach)”라는 문구와 평행하는 것 같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그 표현은 반복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단지 “직관의 형식이 관련되는 한에서”만을 의미할 것이다. 칸트가 그것들[공간과 시간]의 경험적 사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아마 상상해볼 수도 있지만—A 127-8과 제6장의 7절을 보라—, 나는 그것을 주장하기가 망설여진다.

13) 켐프 스미스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이제 다음과 같음 물음이 제기된다. 즉, 선험적 개념은 어떤 것이, 만일 직관될 수 없다면, 그러나 대상 일반으로서 사고될 수는 있는 독보적인 선행적 조건으로서 또한 기여하지 않는가?” 그는 Commentary, p. 222에서 “만일 직관될 수 없다면, 그러나”라는 말이 진정으로 비판철학적이지 않음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 나는 과연 이 주장이 정당한지 전혀 모르겠다.

14) 또는 “녹색 나무 일반”의 개념. 실제로 우리가 사고 작용을 감각에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추상하여 고려한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이라는 공허한 개념, 대상 일반의 개념이 될 것이다.

15) A 258 = B 314와 비교하라. “인간 존재의 경우에 지성감성이 대상을 규정하는 것은 오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것들을 분리한다면, 우리는 개념 없는 직관, 아니면 직관 없는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아무런 규정된 대상도 지시할 수 없는 관념일 것이다.” 또한 A 51 = B 75를 보라.

16) A 93 = B 125. “조건”은 보통 “형식”과 동일시된다.

17) A 93 = B 126: “경험은 (사고의 형식이 관련되는 한에서) 오직 범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가 A 94에서 「초월론적 연역」의 주관적 측면으로 갈 때, 「형이상학적 연역」의 추가적인 학설—범주는 순수 종합의 개념이라는—을, 매우 간접적이긴 하지만, 암시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18) A 55 = B 80에서 칸트는 대상에 대한 (또는 대상들에 대한) 순수 사고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A 57 = B 81에서는 대상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대상을 선험적으로 가리킬 수 있는 개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또한 A 62 = B 87, A 64 = B 89, A 79 = B 104, A 85 = B 117-8 등과 비교하라.

19) A 79 = B 105.

20) A 80 = B 106.

21) 우리가 요구한 주장은 B 128에서 만들어진다. 제12장의 6절과 비교하라.

22) 상식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 일반의 개념이 모든 경험에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칸트가 주장하는 바는, 이 개념을 대상 일반의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으로만 우리는 선험적 인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23) <윤리 형이상학>의 Einl. III (VI 218 n.)과 비교하라. 내가 보기에, 이것[범주의 분화]은 개개의 범주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타당하고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범주들 속에서 분절되는 궁극적 개념으로서의 “대상 일반의 개념” 또는 “어떤 것 일반(etwas überhaupt)의 개념”에 대해 종종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주 자체는 아무런 구별 없이 “대상들 일반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대상 일반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컨대, B 128을 보라. 이와 유사하게, “공간들 일반의 개념”과 “공간 일반의 개념” 간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A 25 = B 39를 보라.

24) A 93 = B 126. 사고의 형식을 언급하면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연역」의 논의를, 약간은 뒤늦고 썩 분명하진 않게,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사고의 형식은 또한 대상의 모든 인식의 지성적 형식이라고 불린다(A 129를 보라). 그것은 사고의 형식들 또는 조건들로 분화된다(A 94 = B 126을 보라).

25) 지금 우리의 관심은, 사고로부터 추상될 경우 감각에 현상하게 될 대상(이는 이전 장에서 우리의 관심사였다)이 아니라, 감각과 사고 모두에 나타나야 하는 대상에 있다. 제2장의 2절을 보라.

26)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지성의 범주가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 직관에 주어진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칸트의 대답의 첫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의 첫 대답은 어떤 대상이든 인식되어야 한다면, 범주는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은 「도식」의 장과 「지성의 원칙」의 장과 함께 「초월론적 연역」의 주관적 측면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27) A 128-9.

28) B 166-7.

29) A 94 = B 126. A 111과 비교하라.

30) A 92-3 = B 124-6.

31) A XVII.

32) A 94-5.

33) 이 구절이 「주관적 연역」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이유는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바이힝거와 켐프 스미스는 그것을 나중에 쓰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견해에 반대하여 우리는 칸트의 사고의 연속성을 강조해야 한다.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여) 모든 선험적 개념의 「초월론적 연역」은 그것이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초월론적 연역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정신과 그 능력들 속에서 그것의 기원을 찾아내는 방법을 통해서만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은 세 가지가 있고, 이 능력들은 제각기 탐구될 필요가 있다. 세 가지 능력은 감각, 상상력, 통각이다. 감각은 「감성론」에서 다룬 바 있다. 다른 두 능력을 고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이다. (통각 내지 지성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상상력이 지성의 개념 및 그것이 적용된다고 가정되는 직관 사이의 이종성(異種性)을 극복하는 능력이라는 점 때문이다.

34) 이 구절의 세 번째 부분(B 128-9), 바로 여기에서, 칸트는 우리에게 범주의 정의를, 그것을 분명 판단의 형식과 연결시키며 「형이상학적 연역」 그 자체에서 주어졌어야 했던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35) 엄밀히 말해, 소질(Fähigkeit)은 수동적이고, 능력(Vermögen)은 능동적이다. 감각은 소질이고, 상상력과 지성은 능력이다.

36) 이 능력들은 여기서 “원천”이라고 불리며, A 97에서는 “인식의 원천”이라고 불린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인식 자체의 원천이 아니라] 인식 안의 요소들만의 원천이다. 인식 안의 요소들의 원천으로서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인식의 요소들이 이 능력 속에 자신들의 기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37) B판에서 그것은 B 68에서 언급된다.

38) A 78 = B 103. 그러나 “현상”은 우리보다는 칸트의 독자에게 더 친숙한 낱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9) 여기서 능력의 초월론적 사용은, 그것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조건의 원천으로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제11장의 4절을 보라.

40) 감각의 경험적 사용은 주어진 감각의 수용이다.

41) 칸트는, 이 능력들의 경험적 사용에서는 주어진 다양과 종합이 경험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여기서 진술하지는 않는다. A 77 = B 103과 비교하라.

42) 바이힝거는 (Die Transcendentale Deduktion, pp. 60-1 = 38-9) 감각이 우리에게 경험적 다양의 선험적 개관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이 구절이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방법에 의해 그는 어떻게든 A 94를 10절과 비일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의 견해]를 켐프 스미스가 Commentary, p. 226에서 추종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피상적임은 물론이고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43) A 78-9 = B 104.

44) 제13장의 7절을 보라.

45) A 97. 내가 보기에, 칸트가 이 용어[다양]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가 흄의 심리학적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견해를 지지해주고 있다. 제11장의 8절과 비교하라.

46) 플라톤조차, 우아함에서도 문체의 정확성에서도 칸트보다 뛰어나긴 하지만, <국가>편에서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의 문맥에서 비일관적인 용어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관찰된다.

47) 파이힝거는 간혹 언어의 명백한 의미조차 보지 못하여 칸트의 비일관성을 강요하는 때도 있다.

48) 순수 범주가 (시간의 순수 다양과 관계없는) 다양 일반의 종합의 개념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시간의 다양과 관계하여 도식화된 것으로서만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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