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H. J. Paton의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 Vol.I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Paton은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칸트 학자입니다. 국내에도 그의 저작이 한, 두권 번역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e>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를 주석한 두 권의 연구서로서 1,000쪽이 족히 넘는 압도적인 분량의 대작입니다. 저는 이 책의 일부를, '초월론적 연역'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번역하여 게시하려고 합니다.

 

<칸트의 경험의 형이상학>, 제1권, H. J.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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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범주 연역의] 어려움의 예시

칸트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예시를 통해 더 분명해질 수 있다. 판단의 가언적 형식은 사고의 순수 형식 중 하나로서 그 아래에 모든 판단 질료가 속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형식은 원인 ․ 결과 범주—지금 단계에서 엄밀히 보면 시간과 아무 관련도 없는 것으로 간주될—로 가는 단서이다. 가언적 형식이 말하는 바는 이렇게 요약된다. 즉, 우리에게 어떤 대상이 주어지든 [그 대상에 대해] 우리는 “A이면 B이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 어떤 주어진 A라도 [A와] 다른 어떤 것, 즉 B가 필연적 ․ 보편적으로 A에 근거를 둘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칸트에 따르면, 순수 사고의 요구이긴 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현상들 속에서 그러한 요구가 충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무 검토 없이 상정할 권리를 분명히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주어진 현상들이 이 필연적 형식에 부합하는 것을 우리에게 전혀 제공하지 않는 식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 ․ 결과 범주에 부합하는 대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범주에 부합하게 될 어떤 것이 일련의 주어진 현상들 속에 현존해야만 한다.59) 이 어떤 것은 필연적 연속(連續)이라는 점이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60) 이 점을 제외하면 그 범주는 시간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사실상 “공허하고, 아무 내용도 없으며, 아무 의미도 없다.”61) 현상들이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연속(連續)하는 것을 순수 범주의 상관물로서 증명할 때 겪는 어려움이 있지만, 칸트는 이를 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증명을 어려운 것임은 물론이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들이 많은 것 같다.

 

10절. 경험에 호소하는 것은 쓸모없다

경험은 현상계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규칙적인 연속(連續)의 사례들을 주고 있다는 사실, 그 결과 우리는 원인 ․ 결과 개념을 [그 사례들에서] 추상하여 획득할 수 있고, 이와 동시에 그 개념의 객관적 타당성을, 모든 경험적 개념에 대해 그 객관적 타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해도, 그토록 어려운 탐구[범주 연역]를 해야 할 필연성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칸트가 보기에, 또 우리 모두가 보기에, 인과관계는 엄밀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과는 대개 원인을 뒤따르게 될 것이다[는 표현]은 [인과관계를 뜻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결과는 원인을 통해 정립되어야 하며 원인에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원인 A가 결과 B를 산출하지 않는다면(다른 모든 상황은 동일하다), 그런 경우가 한 번만 일어났다고 해도, A는 도대체 B의 원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필연성이 없다면 인과관계도 전혀 없는 것이다. 원인 ․ 결과 범주는 단지 경험적 일반화에만 의거한다는 입장은, —분명하게 생각한다면— 범주를 전부 폐기시켜야 하는 마음의 환상으로 여기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62)

 

11절. 조각보 이론

‘조각보(patchwork)’ 이론을 상세히 비판하는 일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그 일은 다른 곳에서 했다.63) 이 학설을 아주 훌륭하게 논박하려면, 칸트의 논증이 이해할 수 있고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해명하면 된다. 13절에서 나는 지금 그 같은 해명을 주었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비판철학 이전이라고 비난을 받은 A판의 진술들에 평행하는 것이 B판에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런 평행하는 진술들을 조각보 이론의 지지자들은 무시하고 있다. B판에서도 칸트가 비판철학 이전의 사고 단계에 속하는 주석들로 자신의 논증을 채우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나 또한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다룬 하위 절은 「초월론적 연역」 대부분과 비교할 때 매우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기에, 그 부분이 [비판철학 이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근거 몇 가지를 관찰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와 같은 비난은, [한편으로는 관련 텍스트] 전체에 적용되고 있지만,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이 갖는 특별한 어려움과 관련이 있는 단락들에 집중되고 있다.

바이힝거는 해당 구절을 초기의 것으로 여기는 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부정적인 이유 때문이다.64) 그러나 상상력은 해결에 속한다, 그것의 주관적 측면에서 본 해결에 속한다. [이에 반하여] 칸트가 출발하는 곳은 문제이다.

또 다른 이유는 칸트가 범주를 직관의 대상에 불필요하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65) 바이힝거는 특히66) 범주는 대상이 직관에 주어지는 조건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칸트의] 진술67)에 반대한다. 그는 이 진술에서 강조점이 “주어지는”이란 낱말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을 텐데, 참 놀라운 일이다.

그는 더 나아가 범주가 물자체에 적용된다는 가정에도 반대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논의하였으며 전혀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매우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이 있다. 즉,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이 어떻게 감각적 직관이 우리에게 (규정된) 대상의 인식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분리되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68) 그러나 비판 철학에서 이 물음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주장은 사실이지만, 설명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칸트가 진술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범주가 감각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 타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칸트는] 만일 주어진 직관이 범주 아래서 사고되지 않는다면 직관은 결코 규정된 대상에 관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범주는 주어진 대상에 대해 반드시 타당해야 한다고 논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처럼] 칸트는 분명히 문제와 해결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혼동에 빠져 있다고 논하는 것은 칸트에게 대단히 공정하지 않은 일이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매 쪽마다 그의 철학 전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는, 많은 경우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

조각보 이론 전체가 왜곡되어 있음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 같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이 비교적 단순한 구절을 갖고도 그렇게 엉망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었다면, 우리가 정말로 어려운 구절을 읽게 될 때는 그들의 안내가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덧붙여 말한다고 해서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2절. 직관과 지성

켐프 스미스 교수는69) 바이힝거의 결론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소 모호한 자신의 학설, 바이힝거조차 수용했을지 의심스러운 학설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려고 한다.70) 그는 “표상은 지성 능력에 대해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도 의식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71)는 칸트의 주장을 비판철학 이전으로 간주한다. 그는 분명 비판 철학이 “선험적 개념 속에서가 아니면, 또 그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표상도 의식에 대해 존재할 수 없다”72)는 것을 주장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는 [󰡔순수이성비판󰡕의] § 14와 제2절의 처음 네 단락에 나타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확증은 이후의 구절들에서73) 발견되는데, 거기서는 그러나 표현 방식이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켐프 스미스 교수가 기대고 있는 구절은, 칸트에 있어 범주와 분리되면 대상인식이나 경험—엄밀한 의미에서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범주와 분리되면 그 어떤 표상의식에 대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일이다.

칸트에 있어 대상의 인식이나 경험은 (형식을 지닌) 직관과 (범주를 지닌) 사고를 모두 요구한다. 이 같은 생각에는, 직관은 사고와 분리되면, 따라서 범주와 분리되면 의식 속에서 존재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해줄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켐프 스미스 교수가 뜻하는 바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적 의식에서 그러한 분리는, 칸트가 보기에,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기대고 있는 구절이 그러한 분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나는 비판철학 이전이라고 언급된 구절들에서 그러한 분리의 가능성을 주장한다고 칸트를 해석해야 할 필연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74)

규정된 대상의 인식으로서 경험은, 감각에 주어진 질료를, 그리고 감성과 지성 양자에 의해 부과된 형식을 포함한다. (나는 칸트를 이렇게 이해한다.) 질료는 항상 감성의 형식 아래에 주어져 있지, 결코 지성의 형식 아래에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가령 빨간 당구공을 보는 경험에 있어 우선은 빨간 색을 보고 다음에 그 색을 실체와 속성의 범주 아래로 가져온다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인간 경험에는 이와 같은 시간적 연속(連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빨간 색을 본다면 이는 우리의 감성에 기인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사물이나 대상의 색으로, 즉 당구공으로 반다면 이는 우리의 지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사고와 분리된 채 감각에 주어진 직관, 또는 감각은 어떤 분석 행위에 의해 경험에서 분리된 것이며, 대상에 대한 사고와 분리된 채 의식 속에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일상 경험에서 우리는 처음에 직관을 수용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떤 대상의 직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대상의 직관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 직관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이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직관이 대상에 관련됨 없이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할 수 있는지는 나에게 경험 심리학의 문제로 보인다. 그리고 선험적 근거에 기대어 직관은 가령 의식의 반영(半影)에서, 또는 잠이 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또는 더 나아가 유아의 가장 초기 단계의 의식 속에서 발견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칸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모르겠다.75) 그 문제가 비판철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 도대체 중요성을 갖는지, 그도 잘 모르겠다. 그 문제는 확실히 범주는 대상이 사고되는 조건에 해당하지, 대상이 주어지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학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13절. 동물의 의식

켐프 스미스 교수의 학설은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칸트는 범주가 의식 자체의 조건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 아닌지 나는 의심스럽다.76) 내 의심은 그가 “의식”을 “인식(awareness)”77)과 동일시한다는 점과, 그가 “모든 인식은, 아무리 기초적 수준이고 누가 봐도 단순하다 해도, [어엿한] 판단 행위이며 따라서 관계적 범주를 포함한다”78)고 주장한다는 점에 의해 입증된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동물은 의식이 없어야 한다—칸트에 따르면 그들은 범주를, 심지어 개념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는 귀결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켐프 스미스 교수는 실제로 그렇게 추론하고 있다.79)

그는 두 구절에 준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첫 번째 구절에서는80) 동물이 “의식 없는81) apprehensio bruta[묵직한 파악]”를 소유한다고 한다. 이 구절에서, 자주 그렇듯이82), 칸트는 의식(Bewusstsein)을 “자기-의식”이나 “통각”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이는 구절 자체가 시사해주는 것처럼 보인다.)83) 이 학설은 켐프 스미스 교수가 의존하는 두 번째 구절에 의해 훨씬 분명해진다.84) 칸트는 거기서, 만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경험이 오직 특정한 조건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범주)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면, 이러한 조건과 분리될 경우 감각 자료는 대상을 표상하지 않거나, 또는 자기의 인식에 필수적인 의식의 통일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주장한다.85) 칸트는 덧붙인다. “나는 내가86) 그것[감각 자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로서 나에 대해 전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87)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동물로 볼 경우) 경험적 연합 법칙에 의해 함께 묶여 있는, 그래서 감정과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관념으로서 여전히 내 안에서 규칙적으로 작용을 수행할 수는 있을 것이다.—내가 의식하는 것은 각각의 개별 관념이지,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의해 그 관념이 대상의 표상의 통일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말이다.—그러나 나는 이를 통해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나의 지금 상태도 인식할 수 없게 될 것이다.”88)

켐프 스미스 교수는 내가 고딕체로 강조한 삽입 절을 생략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칸트가 “자신의 의미를 진술하는 데 정말로 적합한 용어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대로 삽입 절은 칸트의 의미에 완전히 필수불가결하다. 그는 만일 내가 동물이라면, 또는 만일 나의 동물적 부분이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면, 나는 분리된 주어진 관념을 의식할 수 있을 테지만, 이 관념이 나 자신의 상태인지 또는 대상들을 가리키는지를 의식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범주는 나 자신과 대상에 대한 인식의 조건이긴 하지만, 의식의 조건은 아니다.

내가 찾아낼 수 있는 한, 칸트는 이 일반적 학설의 노선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동물의 의식에 관해서는, 비록 그의 말을 부수적 의견으로 간주해야 하더라도, 동물은 자기-의식적이진 않지만 의식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단언하는 많은 구절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이 도대체 어디에서 부정되는지 전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칸트는, 그의 「논리학」 강의89)에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여러 등급으로 구별한다. 첫 번째 등급은 관념 또는 표상이다.90) 두 번째는 감각-지각91)인 의식과 결합된 관념이다. 세 번째는 (acquaintance)92),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동일성과 차이 두 측면에서 표상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인식93), 즉 칸트가 자기-의식이라는 의미—나는 이렇게 본다—에서 “의식”이라 부르는 것을 수반하는 어떤 것에 관한 앎이다. 이 단계들 위에 이해94), 통찰95), 파악96)이 있지만, 그것들을 우리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단 하나의 요점은, 동물은 세 번째 등급의 인식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동물은 비록 대상을 인식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관한 앎을 가지고 있다.97) 칸트는, 결코 이 주제에 관한 독단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동물이 단지 의식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높은 등급의 의식까지 소유한다고 믿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나는 칸트가 의식 자체를 범주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합당한 이유도, 그러한 근거에 기대 § 13을 비난하기 위한 합당한 이유도 전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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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59) A 90 = B 123.

60) A 144 = B 183. 제33장의 4절과 비교하라.

61)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우리는 그것[범주]이 관계하는 대상을 하나도 가리킬 수 없다는 것뿐이다.

62) A 91 = B 123-4.

63)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Vol. XXX, vii (1930).

64) Die Transcendentale Deduktion, p. 35 = 13.

65) Ibid, p. 36 = 14.

66) Ibid. p. 53 = 31.

67) A 89 = B 122.

68) Die Transcendentale Deduktion, p. 53 = 31.

69) Commentary, pp. 219~22.

70) 바이힝거는 “개관(synopsis)”이 동물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인식 소유와 관련된 칸트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Op. cit. p. 63 = 41.

71) Commentary, p. 222.

72) Ibid. p. 223. 맥락상 나는 “선험적 개념”을 범주로 본다.

73) A 111과 A 112. 이 구절들은 Commentary의 p. 223에서 인용되고 있다.

74) “따라서 대상은 지성의 형식에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맺지 않고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진술(A 89 = B 122에서)조차 단지 대상이 나타나는 (또는 감각에 주어져 있는) 한에서 이 [사태]는 사고의 형식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내가 믿기로는 칸트가 언제나 붙들고 있는 학설—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진술을 이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초월론적 연역」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상식적 추론을 뜻할 수도 있다.

75) 󰡔프롤레고메나󰡕, 18절, (IV 298)에서 칸트가 행한 “지각의 판단”과 “경험의 판단” 간의 구별—B 142와 비교하라—은 그가 직관이 범주를 통해 대상에 관계되지 않고도 의식 속에 현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은 매우 적절한 생각이 아니라 나중에 덧붙인 생각이라고 하여 기각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꿈에 대한 논의에 포함돼 있다—B 278; A 201-2 = B 246-7; A 376; A 492 = B 520-1; 󰡔프롤레고메나󰡕, 13절 Anmerk. III (IV 290)을 보라—반면에 A 123-4 및 다른 구절들은 켐프 스미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이든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76) Commentary, p. 222와 비교하라. “대상에 대한 관계는 범주에 의해 구성되며, 감각-현시와 관련하여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어떤 종류의 의식이든 도대체 가능하기 때문이다.”

77) E.g. p. xxxix.

78) P. xlii.

79) P. xlix: 동물에게는 “또한 우리가 의식이란 용어로 의미해야 하는 것과 유사한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p.1을 보라— 마치 동물의 의식이 연합적인—논리적인 또는 반성적인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사고 작용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구별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80) 폰 벨로젤스키(von Beloselsky)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개요 (XI 331).

81) “ohne Bewusstesein.”

82) 실제로 멜린은 (Wörterbuch, I, p. 687) 마치 “Bewusstsein”은 칸트에게 오직 자기-의식(conscientia, apperceptio)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용법이다. 바움가르텐은, Metaphysica 535절 (XV 13)에서, “conscientia strictitus dicta”을 내감(內感)과 동일시한다. G. F. Meier, Auszug §13. In M.A.d.N. (IV 542)와 비교하라. 칸트는 의식의 힘은 통각이라고 말한다. Log. V (IX 33)에서 의식은, 엄밀히 말해, 또 하나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관념이다. 그리고 B 158에서 의식은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는 사실과 동일시된다.

83) “apprehensio bruta”는 “apperceptio”와 대립하고 있다.

84) 헤르츠(XI 52)에게 보내는 편지, 켐프 스미스, Commentary, pp. xlix-1에서 인용.

85) 칸트에게 대상의 인식과 자기의 인식은 상관적인 항이며, 서로가 서로를 함축한다.

86) 나는 강조점이 “내가”란 말에 있다고 본다. 다음 절(節)에 나오는 “나에 대해”는 칸트가 강조하는 말이다.

87) 이 문장의 의미는 이미 편지 자체에서 설명된 바 있다. “만일 직관이 경험의 조건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즉, 그것은 인식대상도 아니고, 자기-인식도 아니며, 다른 사물에 대한 인식도 아닐 것이다.”

88) 내가 보기에, 이 문장은 나는 이를 통해 그 어떤 대상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며 나 자신의 상태로서의 주어진 관념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89) Log. Einl. VIII (IX 64-5). A 320 = B 376-7과 비교하라.

90) “sich etwas vorstellen.” 내가 보기에, 이것은 꼭 의식적일 필요는 없다.

91) “wahrnehmen” 또는 “percipere.”

92) “kennen” 또는 “noscere.”

93) “erkennen” 또는 “cognoscere.”

94) “verstehen” 또는 “intelligere.” 이것은 여기서는 추상적 개념화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 같다.

95) “einsehen” 또는 “perspicere.”

96) “begreifen” 또는 “comprehendere.” 마지막 두 등급은 여기서 이성과 연관된다. 또한 Metaphysik, p. 29를 보라.

97) 여기서 이 구별을 상세히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개는 예컨대 고기와 빵에 관한 앎을 갖는다. 왜냐하면 개는 고기와 빵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개는 두 가지를 구별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인식하지는 못한다. 개는 예컨대 고기 냄새를 맡고 그것을 “표시하는” 분명한 관념을 갖지만, 이것이 고기를 표시하는 관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한 마디로, 그는 개념을 소유하지 않으며, 범주는 더더욱 소유하지 않는다. Die falsche Spitzfindigkeit, §6, (II 59-60)과 비교하라. 거기서 칸트는 —그의 일반적 학설인 바— 동물은 외감(外感)을 소유하지만 내감(內感)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여기서도 개념과 판단은, 자아와 대상 간의 구별을 함축하기 때문에, 자기-의식을 함축한다. Nachlass, 411 (XV 166)과 비교하라. “동물은 포착을 갖고 있지만 통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관념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다른 준거는 󰡔판단력비판󰡕 90절 (V 464 n.); Anthr. Ergänzungen aus d. Handschrift, 141, 7 (VII 395)와 Fortschritte d. Metaphysik (Phil. Bib. 46c, p. 95)이다. 내가 발견한 가장 명료한 설명은 칸트의 「형이상학」 강의에 있다. Metaphysik, pp. 129-30을 보라, 그리고 p. 119와 비교하라. 동물은 또한 쾌락과 고통을 갖는데, 이는 그들이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관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Metaphysik, p. 100을 보라, 그리고 pp. 102, 106과 비교하라. 󰡔판단력비판󰡕, 「서론 V」 (Phil. Bib. 39b, p. 18)에서 동물은 심지어 “본능적 반성”을 가진 존재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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