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H. J. Paton의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 Vol.I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Paton은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칸트 학자입니다. 국내에도 그의 저작이 한, 두권 번역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e>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를 주석한 두 권의 연구서로서 1,000쪽이 족히 넘는 압도적인 분량의 대작입니다. 저는 이 책의 일부를, '초월론적 연역'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번역하여 게시하려고 합니다.

 

<칸트의 경험의 형이상학>, 제1권, H. J.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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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검색해본 책의 원본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과는 많이 다른데, 아마 초판본인 것 같습니다.) 

 


제5부. 초월론적 연역 - 입문적인 설명

 

제16장. 문제

 

1절. 초월론적 연역의 나눔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는1) 점을 기억해보자. 초판에서 연역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서론, (2) 예비적인 설명, (3) 권위적인 설명. 재판에서는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 빠져 있고, 더 분명하고 새로운 서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첫 번째 부분이 재판에서 보존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 부분이 보존되는 이유는, 틀림없이 그 부분을 형이상학적 연역과 초판의 초월론적 연역의 나머지와 구별해주는 명료함 때문이다. 그 부분은 [다시] 하위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중 첫 번째2)는 문제를 서술하고 있고 두 번째3)는 칸트의 해결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본 장에서 우리는 그의 문제 서술만 다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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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초월론적 연역의 원리

칸트는 ‘연역(deduction)’이란 말이 논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법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권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에 관련되는 말이지, 사실을 규명하는 것에 관련된 말은 아니다.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은 범주를 대상에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범주의 ‘deduction’보다는 ‘justification’로 옮기는 게 더 나은 듯 하다.

‘연역’이란 말을 [아무런 한정 없이] 사용할 경우, 철학 입문자들은 오해하기 쉽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범주들이 판단 형식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되는지’를 기대할 것이고, 또한 [‘초월론적 연역’ 부분에서] 서로 다른 범주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일이 전혀 시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하게 될 것인데, 이는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초월론적 연역은 범주 일반에 관련이 있다. 범주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어지고 있기에, 우리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칸트는 13절과 14절 두 곳에서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만 아니라 초월론적 연역 일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모든 선험적 관념은, 우리가 볼 것처럼, 초월론적 연역 또는 정당화를 요구한다. 이 점은 지성의 순수 개념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러나 칸트의 관심은, 우리가 기대하게 될 것처럼, 주로 범주에 향해 있으며, 단지 이차적인 정도로만 직관의 형식에 향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칸트의 서술에는 세 가지 요점이 있다. (1) 모든 선험적 관념의 연역은 초월론적일 수밖에 없으며 경험적일 수 없다.4) (2) 그러한 연역은 필수 불가결하다.5) (3) 범주의 연역에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고려할 경우에는 발생하지 않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6) [13절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처음의 두 요점이 특히 원인과 결과의 범주와 관련하여 재차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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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경험적 연역과 초월론적 연역

인간의 사유에는 많은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들의 연역이나 정당화가 제공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 중 일부 개념은 그 어떤 연역도 불필요하다. 예컨대, 우리는 백조와 같은 경험적 개념을, 만일 우리가 이 개념에 상응하는 대상을 우리 경험 속에서 발견할 경우에는, [연역이나 정당화 없이] 사용할 권리가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또 다른 개념, ‘행운’이나 ‘운명’과 같은 개념이 있다.7) 우리는 이 사실을, 그러한 개념의 타당성이 도전받게 되는 몇몇 드문 사례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개념을 검토해보면 경험 속에서도 이성 속에서도 전혀 정당화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의 지식에는 원인과 결과 개념과 같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 즉 경험에 독립적인 사용8)을 위하여 표시된9) 개념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사용은 경험에 호소하는 방법으로는 충분히 정당화할 수 없다. 경험은 우리에게 선험적인 것의 기준이 되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결코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사용의 정당화는 반드시 주어져야만 한다. 우리가 개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어떻게 그것이 경험으로부터는 전혀 획득할 수 없는 대상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10)

범주의 순수한 선험적 사용의 정당화는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불린다.11)

초월론적 연역은 경험적 연역과 선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개념의 기원을 정신 자체의 본성 속에서 발견하며, 따라서 그것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립한다. 후자는 개념을 획득하는 우리의 방법을 검토한다. 즉, 어떻게 우리가 점차적으로 그것을 경험에서 분리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분명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한다. 요컨대 어떻게 개념이 경험과 경험에 대한 반성을 통해 획득되는지를 설명한다.12) 나는 [경험적 연역에 대한] 바로 앞의 서술이 경험적 연역이 경험적 개념의 경우에는 실제로 연역 또는 정당화라는 점,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정당화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선험적 개념의 경우에는, 비록 우리가 적절하게 그것의 획득13)에 대한 [경험적 연역과] 유사한 심리학적 설명을 줄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심리학적 설명]을 정확하게 연역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설명은 그것의 선험적 사용을 정당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4)

우리가 칸트의 논증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개념의 기원획득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후자[개념의 획득]만이 시간적 과정이고, 그 과정의 연구는 정확히 경험적 심리학에 속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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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uyer가 번역한 <순수이성비판> 영역본의 표지입니다.) 

 

4절. 공간과 시간과 범주

이제까지 칸트는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범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순수 개념이 감성에서 유래하는지 지성에서 유래하는지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별된다고 지적한다.15) 공간과 시간은 첫 번째 종류에 속한다. 그것들은 감성의 형식이고, 순수 개념이기보다는 순수 직관이기 때문에 단지 말의 느슨한 의미16)에서만 개념이다. 범주는 지성의 순수 개념으로서 두 번째 종류에 속한다.

순수 개념의 두 유형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차이가 그것들에 공통된 성격을 모호하게 만드는 일이 허용될 수는 없다. [둘 중에] 어느 유형도 경험적 일반화의 결과가 아니며, 두 유형 모두 대상에 대해 완전히 선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어느 유형에서도 우리는 경험이 —‘백조’와 같은 개념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개념에] 상응하는 대상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서는 순수 개념을 정당화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대상이 공간적이고 시간적일 수밖에 없으며, 범주적 특징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경험에 호소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확립될 수 없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한편으로] 이런 개념이 순수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칸트의 주장은 실패로 귀착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순수 개념이라고 가정한다면, 칸트는 확실히 옳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순수 개념에 대하여 그것이 순수 개념임을 인정하면서도 경험적 정당화 (또는 연역)을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순수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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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시간 속의 심리학적 전개

이는, 순수 개념이나 다른 개념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점차적으로 획득하는 것에 관한 경험적, 또는 심리학적 연구가 아예 불가능하다거나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와 정반대로, 그러한 연구는 로크의 선구적 작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18)

이 대목에서 또 다시, 칸트는 여러 차례—비판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킬 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이 우리 경험이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현상에 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있다.19) 그는 (시간적 전개를 다루고 있는) 경험적 또는 심리학적 연구와 (그것을 다루고 있지 않는) 초월론적 연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별한다. 심리학은 순수 개념의 산출로 귀결되는 기회 원인을 경험 속에서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감각-인상은 그것과 관계된 우리의 전체 인식 능력을 드러내 보이기20) 위한, 그리하여 경험을 불러오기 위한 최초의 유인(誘因) 또는 자극을 제공한다.

우리는 ‘경험’이 기술적(技術的) 용어이며 두 가지 요소를 함축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감각에 주어진 질료, 그리고 한편으로는 순수 직관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지성에 의해 부과되는 형식. 우리가 감각-인상을 받아들이는 때, 오직 그때만, 순수 직관과 순수 사고가 작동하여 공간과 시간과 범주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 경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립하려면, 질료와 형식 모두 갖추어 있어야 한다.

초월론적 연역의 시작 부분, 바로 거기에 있는 아주 분명하고 유보 없는 진술은, 비록 개념의 분석론의 시작 부분에 있는 유사한 내용의 진술에 의해 지지되고 있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모든 해석을, 즉 어떻게 우리가 공간과 시간과 범주에 대한 인식으로 출발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을 매개로 경험을 형성하게 되는지를 칸트가 설명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모든 해석을 전혀 문제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감각-인상, 공간과 시간, 범주는 처음부터 경험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은 오직 점진적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심리학적 해석을 칸트 속으로 들여오기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나서 그의 사고가 혼란스럽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의 논증이 그렇게 [심리학적으로] 해석될 경우 불합리해지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동시에 불공정한 비난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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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1장 10~11절 참조.

2) 13절, ‘초월론적 연역 일반의 원리’

3) 14절,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으로 이행’

4) A 84~7 = B 116~19. 본 장의 3~5절과 비교.

5) A 87~8 = B 119~21. 이 장의 6절과 비교.

6) A 88~9 = B 121~3. 이 장의 7~9절과 비교. “Er muss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그러나 또한 피할 수 없는 난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또는 켐프 스미스의 번역에서는 “동시에, 만일 그가 통탄하지 않으려면 ...”—은 새로운 논의의 시작을 알려준다.

7) A 84 = B 117, “usurpierte Begriffe”; A 228 = B 280과 비교.

8) A 86 = B 119에서 그것들의 미래의 사용이 경험에 독립적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확실히 그것들의 사용은 언제나 경험에 독립적이다. 비록 우리가 실제로 그것들을 경험 속에 가지고 있은 다음에야 그것들을 우리 자신에게 ‘분명하게’ 만들 수 있지만; A 196 = B 241 참조.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들을 ‘분명하게’ 만들고 그 참된 성격을 인지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이후부터는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경험에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로크의 방법으로 그것들의 정당화를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9) ‘bestimmt.’ 칸트는 여기서 범주의 우선적으로 나타나는(prima facie)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이러한 성격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범주가 실제로도 그러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초월론적 연역의 과제이다; A 95와 비교.

10) A 85 = B 117. 나는 단지 이러한 필요성이 선험적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대상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 또한 이 개념의 질료 내지 내용은 경험으로부터 ‘빌려오지’ 않는다는 (혹은 감각에 주어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A 86 = B 118과 비교, 여기서는 이 개념이 그 대상의 재현에 필요한 어떤 것을 경험으로부터 ‘빌려오지’ 않고도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칸트가 명시적으로 물자체를 언급하고 있다고 가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칸트가 그러한 언급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나는 [이 가정이] 필요 없다고 보지만—, 그는 ‘초월적인(transcendent)’ 합리론적 형이상학의 요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선험적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에 제기되는 문제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요구를 열려 있는 물음으로 간주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결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칸트 자신은 순수 범주를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조건을 통해 제한되지 않고, 어떤 제한되지 않는 영역을 갖는다는 점을 항상 주장하고 있다. (B 166 및 B 148과 비교) : 우리는 순수 범주를 매개로 하여 물자체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11) A 85 = B 117. 이 대목에서 칸트는 마치 초월론적 연역의 본질적 관심이 선험적 개념의 객관적 타당성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 [객관적 타당성의 문제]는 또 다시 그 개념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의존한다. 제11장의 3절 참조.

12) 칸트는 여기서 그 형식과 관련하여 개념의 획득, 또는 구성을 염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 맥락에서] 문제되고 있는 연역이 경험적인 것처럼, 그것은 논리학적이기 보다는 심리학적일 수밖에 없다. 제11장의 6절과 비교, 그리고 또한 A 86 = B 118~19 참조.

13) A 86 = B 118; A 94 = B 126을 비교.

14) A 87 = B 119.

15) A 85 = B 118.

16) 이 느슨한 의미를 칸트는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낱말로 공간과 시간과 범주 모두를 기술하고 싶을 때, 그는 대체로 그것들을 [공간, 시간, 범주들에 대한] 더 정확한 기술이 될 선험적 관념(Vorstellungen)이라 부르기보다는 선험적 개념(Begriffe)이라 부른다. 심지어 그 자체로 공간과 시간이 개념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17) A 87 = B 119.

18) A 86 = B 119.

19) A 66 = B 91과 제3장의 3절을 비교.

20) A 86 = B 118, ‘eröffnen.’

21) 칸트의 학설은 공간과 시간의 기원을 감성에 귀속시키고 범주의 기원을 사고에 귀속시키는 한에서 심리학적인 것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우리가 이것을 심리학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경험적 심리학은 아니며, 그것이 경험적 심리학에 속한다는 어떠한 제안도 단지 혼란만 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바로 알고 싶다면, 감성론과 형이상학적 연역에 나오는 논증의 본성을 고려해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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