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준영(nomadia)입니다. 웹진의 이 꼭지에서는 최최근의 논문들이나 연구성과에 대한 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분야는 주로 철학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문헌 전체를 번역하는 지나친 성실함을 발휘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필자나 독자 모두 피곤한 일이니까요. 도파민이 바닥난 우울한 두뇌에서 상쾌한 글이 나올리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되도록 해당 문헌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철학이 연구자라는 신성한 집단의 오컬트한 암호 신세에서 벗어나 대지 위에서 환한 햇살을 듬뿍 빨아들이기를.


문헌들의 주요 출처들은 다음과 같은 해외 저널들입니다.(물론 필요하다면 다른 문헌들도 이용합니다.)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Edinburgh University Press)

*Radical Philosophy

*The Review of metaphysics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Esprit

*Philosophie (Minuit)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PUF)

 


해당문헌의 페이지수는 ‘[ ]’ 안에, 다른 문헌들의 서지사항과 페이지수는 ‘( )’에 표기합니다. 그리고 하이퍼링크를 걸때에는 위 저널제목과 같이해당 단어나 구절을 볼드체-밑줄처리합니다. 그리고 각주는 불가피할 경우에만 사용하고자 합니다.



[part 1]

대지의 우화, 들뢰즈와 해러웨이


박준영(nomadia)/수유너머104 회원



첫 번째로 살펴 볼 문헌은 질 들뢰즈와 도나 해러웨이-대지를 우화하기(‘Gilles Deleuze and Donna Haraway on Fabulating the Earth’)라는 논문입니다. 에딘버러 대학 출판부에서 나오는 들뢰즈-가타리 연구(Deleuze and Guattari Studies)라는 계간지 2018년 가을호(11월 출간), pp. 425-40에 실린 글이지요. 가을호는 들뢰즈와 페미니즘 특집이네요. 겨울호는 2월에 나옵니다(이 글을 업로드 하는 지금 출간되었어요. 꽤 좋은 논문이 보이네요. 특히 "Deleuze"s Theory of Dialectical Ideas: The Influence of Lautman and Heidegger ()"다음 소개 논문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제가 쓸 글이 좀 긴데요, 그래서 두 번으로 나눠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논문을 선택한 이유는 복잡하지 않아요. 핫한, 아니 아직도(?) 핫한 들뢰즈와 이제 핫해진 해러웨이를 엮은 제목이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상한 단어, ‘Fabulating’도 호기심을 돋우었지요. 이 제목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해보도록 합시다.

 

저자는 누구?

저자는 알린 위암(Aline Wiame) 이고 툴루즈-장 조레스 대학소속으로 논문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위암은 신진 철학자에요. 아직 유명한 분은 아닙니다. , 들뢰즈나 해러웨이라고 처음부터 유명하진 않았으니 선입견을 가지지 맙시다. 철학자답게 bilingual입니다. 책은 불어로, 논문은 불어와 영어로 쓰고 있네요. ‘Academia.edu’ 사이트에 보면 이 분이 쓴 책과 글들 나옵니다. 단독 저서는 아직 없습니다. 책 속에 있는 이 분의 글 제목들을 대충 볼까요?


*Aline Wiame & Augustin Dumont, 철학에서 이미지와 우회(De l’image à la philosophie et retour), 이미지와 철학-이미지의 개념적 사용(Image et Philosophie-Les usages conceptuels de l’image)(P.I.E, 2014)

: 이 글은 위암과 아우구스틴 뒤몽의 공동 저술이네요. 이 책 전체의 서론이에요. 참고로 이 저작의 총편집을 위암이 맡았습니다.

*Aline Wiame, 들뢰즈에 있어서 사유가능한 것과 시각적인 것. 순수 이미지의 직조에서 사유이미지 비판에 관하여(‘Le pensable et le visuel selon Deleuze. De la critique de l’image de la pensée à la fabrication de l’image pure’), 이미지와 철학-이미지의 개념적 사용(Image et Philosophie-Les usages conceptuels de l’image)(P.I.E, 2014)

: 같은 책의 마지막 글입니다. 서론과 마지막 글을 위암이 썼으니, 이 학술그룹에서 위암이 지도적인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들뢰즈 철학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외의 다른 논문들을 보면 페미니즘적 성향도 엿보이구요. 들뢰즈와 해러웨이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괜한 것은 아니지요.

 

제목이 이해가 안 가네


논문의 제목을 보면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 신기한 단어가 보입니다. ‘fabulating’이라는 단어지요. 사전에는 ‘fabula’(Lat. 우화)가 있고, 영어로는 ‘fabulate’, ‘fabular’ 등이 있어요. 이 단어를 저렇게 동명사나 분사처럼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자들이 워낙 개념들을 창안해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일이다보니 저런 단어라 할지라도 놀랍지는 않군요. 그래서 나름대로 번역어를 정했습니다. ‘우화하기라고 말이지요. ‘우화 만들기가 어법에 맞지만, 해러웨이의 의미에서 ‘fabulating’은 세계를 일신하는 실천적 의미가 있고, 단지 이야기를 만든다는 문학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라, 저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의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뭐 다르게 쓴다고 제가 화가 날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대지를 우화하기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이 말뜻은 논문을 보고 나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기다려 보시죠.


(좌)오시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 출현한 Donna Haraway(1944- ), 

(우)Gilles Deleuze(1925-1995)



다음으로 혹시 들뢰즈와 해러웨이를 잘 모르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 제가 링크를 걸어 놓겠습니다. 하나는 제가 쓴 글이고 또 하나는 페미위키에서 해러웨이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도나 해러웨이]: 페미위키

*[낯선 타인과 춤추기]: 들뢰즈 소개글 포함




자 그럼 논문 안으로 가 봅시다

 

우선 이 논문의 목차를 보고 초록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목차

I. 서문: 살육자 이야기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스토리텔링

II. 베르그송, 들뢰즈, 해러웨이: 알려지지 않은 것의 발명으로서의 우화

III. 지리철학과 현재에 대한 저항

IV. 결론: 살고 잘 죽기 위한 비-순수


*초록

어슐러 르귄(Ursula LeGuin)"운반가방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에 영감을 받아,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글을 쓰는 최근의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이들은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강력하게 갱신해 왔다. 이런 작업들은 안나 칭(Anna Tsing)과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저작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째서 이야기하기가 그것의 문학적 기원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어떤 정치학이자 치유의 도구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하기 위해 들뢰즈와 해러웨이는 "우화(fabulation)"를 다루면서 세 가지 선을 따라 상호교섭한다. 즉 대지의 지식(earthly knowledge)을 구축하는 스토리텔링에 의해, 사변과 정치의 겹침에 의해, 또한 인간중심주의적 접근으로 인해 억압된 삶의 힘을 해방하는 우화의 비인간적(nonhuman) 차원을 통해 그렇게 한다.”



우화를 말하는 것, 대지의 지식을 구축하는 것., Jacob Lawrence, The Photographer


목차와 초록만 봐서는 이 논문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불분명하지만, 뭔가 섬세하고 반짝이는 현대사상의 아이디어를 다루고 싶어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군요. 다루는 두 철학자가 바로 그러한 사상의 아이디어뱅크이며, 여기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개념인 "우화", "대지의 지식", "비인간"이 바로 그러하지요.

 

논문의 1장은 "서론: 살육자 이야기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스토리텔링"입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첫 문장부터 요상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Anthropocene"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 단어는 보통 "인류세"라고 번역됩니다. 인류에 의해 환경오염과 생태계 교란이 시작되는 지질학적 시간대를 이렇게 부릅니다. 일종의 학술적 신조어인 셈이지요. 어쨌든 첫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세와 그 이론적 변화들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에 중대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단지 개념 사용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문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새로운 지질학적 세기는 전반적으로 사고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425].


뒤따르는 문맥에서 저자는 이러한 전반적인 사고의 전환은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일급의 페미니스트들이 구사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해러웨이 외에도 이사벨 스텐저즈(Isabelle Stengers)나 안나 칭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들이 가장 심대하게 영향을 받은 텍스트가 바로 어슐러 르 귄의 "운반바구니론"입니다. 여기서 르 귄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통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기존의 이야기들이 최초의 인류가 수렵채집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우리의 인류 "영웅"(Hero)이 싸우고, 죽이고, 승리와 비극을 겪지요. 하지만 르 귄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살육자 이야기"(killer story)라고 하며,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삶의 이야기"(life story)라고 하지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일단 뭔가 반짝거리는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한데, 굉장이 낯섭니다. 여기 등장하는 어슐러 르귄의 소설은 아주 짧습니다. 제가 번역해 놓았으니 참고 하시길.(어슐러 K. 르귄, 허구-운반가방론번역)


살육자 이야기? 삶의 이야기!, Jean-Michel BASQUIAT, Overrun(1985),part


스토리텔링으로서의 페미니즘 글쓰기-우화하기(Fabulating)

 

논문의 취지를 좀더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 르귄의 글을 인용하면서 위암은 이 이야기가 살육 이야기에 반하는 삶의 이야기이며,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운반자(carrier) 이야기라고 봅니다. 여기서 운반자란 기존에 회자되어 온 인류의 시초에 대한 픽션들이 유포시킨 죽이고, 강간하고, 정복하는 인간이라는 지배적 이미지로 인해 은폐된 수렵채집인이라 것이지요. 르귄이 "운반가방론"이라고 명명한 이런 방식의 스토리텔링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허구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어떤 시기, 예컨대 원시시기에 적용될 때 그것의 진리값은 중립적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암은 “"이야기"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은 이야기들이 허구일수도 아닐수도 있다는 점이다라고 합니다[526 참조].


 

위암은 칭의 책, <세상 끝에 있는 버섯>(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이 책도 위암의 입장에서는 르 귄의 글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집니다. 삶의 이야기로서 이러한 허구적(또는 진실된) 스토리텔링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약동하는 접근(saltatory approach)’을 추구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 자체의 진리성은 늘 불안정 상태에 놓이지만 그만큼 더 어떤 가능성들, 특유성들을 전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의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은 무엇을 겨냥하는 것일까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보행식’(ambulatory)이라고 불렀던 방식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개념과 개념 사이를 비약하면서, 하나의 완결된 이론들 사이를 건너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삶의 순간들을 걸어가듯이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비약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렵채집자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섭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운반가방을 든 수렵채집자처럼 스토리텔러의 보행식 경험은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 안에서 그것을 떠받치고 감싸는 모든 가능성, 모든 특유성(singularity)을 탐험하고자하는 것이지요[527]. 위암은 이러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우화화기’(fabulating)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베르그송과 들뢰즈, 해러웨이에게서 나타나며, 이는 곧 인류세의 맥락에서 지리철학의 재정립과 연관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르그송도 우화를 말했지

 

우선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우화 기능’(fabulation function)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논하는 이 말은 직접적으로 들뢰즈의 용법과 이어집니다. 즉 우화란 생존을 목표로 하는 본능적이며(instinctive), 상상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우화를 정의하면서 목표로 삼은 바는 단지 최초의 인간 사회에서 도덕과 종교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지요. 베르그송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들에게는 지성보다 본능이 앞서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환영을 만들어내는 지각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란 지성의 [환영에 대한] 해소능력에 반하는 자연적 본성의 방어적인 반응이 됩니다(Bergson 1935: 138-9/172-3 참조)

 

, 그럼 들뢰즈로 가 봅시다.

 

들뢰즈가 1980년대 이래로 우화 개념을 재발견할 때 이러한 베르그송적인 특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신에 들뢰즈는 우화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요, 거기에는 어떤 예술적 함축도 함께 가져가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영화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우화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서 어떤 비인격적인(impersonal) 또는 비인칭적인 담화행위(speech-act)가 되지요. 하지만 도처에서 사람들은 이 우화적인 담화행위를 망실하게 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국가 안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화를 통해 개체화를 멈추었기 때문이고, 식민지화된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들의 신화(myth)를 또한 망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국면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아무리 은폐되고 왜곡된다 하더라도 우화는 자본주의화되고 식민화된 세계 곳곳에서 그러한 시도들을 방해하고, 자신의 스토리텔링들을 생존시키게 되지요[529-30 참조].

 

그러나 들뢰즈에게 이러한 우화는 우리가 흔히 성급하게 오해하는 것처럼 어떤 정신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독특한 작가의 목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중간적인 목소리’(median voice)라고 위암은 말합니다[530 참조]. 위암이 인용한 들뢰즈의 언급을 살펴 보도록 하지요.

 

우화는 비인격적인[비인칭적인] 신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인격적인[인칭적인] 소설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로부터 사적인 일을 분리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가로지르는 특성을 유지하는 행위 중인 말, 담화-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집합적 언표행위(collective enunciation)이다(Deleuze, 1989: 222/289). 



세상의 다른 종말은 가능하다,” 그리고?,

우화는 다른 세상의 도래하는 민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지점에서 작가는 정말 스스로를 우화 만드는 자로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화를 지어낸다는 것이 특정한 그 민중’(the people)을 발견하거나, 위치지우는 어떤 공식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소수자(minor)와 다중(multiple)인 그러한 민중만을 다룬다는 것이지요.

 

우화하기-민중의 작동


이제 우화는 베르그송에 있어서처럼 종교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전진의 순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베르그송에서처럼] 기억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래하는 것들로 정향되는 것이지요.[531]. 들뢰즈는 이에 대해 벵센 대학 강의에서 우화 만들기란 거짓부렁이 아니라, 어떤 전설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화는 그 자신의 진리를 생산하는 것인데, 그것이 우화 자신의 과정이고 이야기를 형성하는 경로가 됩니다. 이때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의 민중들에 대한 특성과 연관됩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우화적 기억’(fabulous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억은 민중을 결집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이 아니라, 허구화되고 우화로 된 기억입니다. 위암이 인용한 들뢰즈의 다음 언급을 보시지요.

 

이 민중은 실존한다. 하지만 역사 바깥에, 삶의 체험 바깥에 존재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것이 발명되는 한에서 존재한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우화적 기억으로. ... 거기에는 어떤 예비적인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그럴듯한 방법으로, 우리는 매일매일 억압 당하는 인물로부터 우화의 기능으로 나아가야 한다. ... 이렇게 해서 민중이 작동한다(Deleuze 1985).


이 기억은 역사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랭보가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숨겨진 것의 발명’(invention d’inconnu) 같은 것이지요. 즉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우화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의 기원을 발견한다는 의미와도 같지 않아요. 또한 운명론이나 현실도피의 망상도 아닙니다. 우화는 그것이 다루는 현실에 부가되는 것이면서, 잠재적인 것들을 나타나게 만들고 그것들이 발전해 나가도록 힘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우화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지요. 다만 그것이 진리효과(true effects)를 생산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해러웨이 사이에 이론적인 교전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러웨이의 세계()화와 사변적 우화


위암은 이러한 교전이 처음부터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해러웨이가 자신의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를 언급할 때 들뢰즈를 참조하진 않기 때문이지요. 일단 해러웨이의 사변적 우화개념에 접근하기 전에 그녀가 사이보그 선언’(A Manifesto for Cyborg)에서 스토리텔링이 강력한 정치적인 페미니즘의 도구가 된다는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사이보그 글쓰기는 생존을 위한 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순수성의 기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타자로 표시하는 세계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를 확보하기 위한 기반이다. 그러한 도구는 종종 이야기, 되풀이되어 이야기되는, 자연화된 정체성의 위계적 이분법을 탈구하고 역전시키는 그런 판본의 이야기이다. 원래 이야기들을 다시 이야기함으로써, 사이보그 저자는 서구문화의 중심적인 기원 신화를 전복한다. 우리는 모두 묵시록적인 전망이 충족되기를 바라면서, 그러한 기원 신화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버렸다. ... 페미니스트 사이보그 이야기는 명령과 통제를 전복하기 위해 소통과 지능을 재코드화할 임무를 지닌다(Haraway 2004: 33).


해러웨이사이보그 선언표지


여기서는 아마도 스토리텔링, 이른바 사이보그 스토리텔링이 전복이 도구로 묘사되는군요. 하지만 아직 사변적 우화개념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해러웨이의 후기 저작에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그녀의 소책자인 SF: 사변적 우화와 실뜨기의 제목부터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화는 소위 테라폴리스’(Terrapolis)라 불리는 세계의 사변적 민중(speculative people)을 향해 세계()(worlding)하는 새로운 방법을 형태짓는 것을 목표로 어떤 사변적인 장치로서 도입되는 것이지요. 사변적 우화란 그래서 인류세에 의해 부과된 급진적인 이행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worlding), 우리가 대지에 관해, 그리고 대지와 더불어 무엇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사변적 우화, 다시 말해 다종적 스토리텔링’(multispecies storytelling), ‘다종적 세계()’(multispecies worlding)가 있어야 합니다(532; Haraway 2011: 5).

 

(, worlding세계()라고 한 것은 제 번역어입니다. 왜 그랬어? 라고 물으면 대답이 복잡해지므로 일단 여기서는 보류하겠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worlding이 해러웨이의 문맥에서 보면 세계화인데, 이 말이 정치경제학적인 부르주아 세계화와 구분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러웨이의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어떤 현실적 효과 문제도 담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세계화을 괄호 안에 넣은 겁니다. 괄호 없이 세계상화라고 하면 하이데거의 세계상과 또 헛갈립니다. ...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해러웨이에게 사변적 우화는 인류세에 직면하여 스토리텔링을 갱신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녀의 최근 책인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Staying with the Trouble)는 분명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해러웨이는 한 장 전체를 어슐러 르귄과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에게 할애합니다. 그리고 해러웨이 자신이 쓴 단편 소설, 카밀 이야기: 퇴비더미의 아이들로 책을 마무리하지요(Haraway 2016: 134-68). 그러나 사변적 우화는 단지 세계와 거기 속한 존재자들에 대해이야기하는 이론적 도구인 것만은 아닙니다[532 참조].




일단 이번에는 여기까지 설명드리려고 합니다오늘 읽으신 글의 마지막 몇 단락은 꽤나 요상한 개념들이 많이 나옵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 개념들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궁금하시면 다음 웹진 권호에 실릴 제 글을 또 봐 주시길.

[다음 호에 계속] 



*논문 참고도서 약호사항

Bergson, Henri (1935): The Two Sources of Morality and Religion, trans. R. Ashley Audra and Cloudesley Brereton assisted by W. Horsfall Carter, London: Macmillan, 1935[Bergson, Henri (1932)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Deleuze, Gilles (1989) Cinema 2: The Time-Image, trans. Hugh Tomlinson and Robert Galeta, London: Continuum [Deleuze, Gilles (1985) Cinéma 2: L’Imagetemps,

Paris: Minuit].

Deleuze, Gilles (1985) ‘Pensée et cinéma cours du 05/02/1985 3’, La Voix de Gilles Deleuze en ligne, uploaded by University Paris 8, available at <http://www2.univ-paris8.fr/deleuze/article.php3?id_article=304>(accessed 31 July 2018).

Haraway, Donna (2004) The Haraway Reader, New York: Routledge.

Haraway, Donna (2011) SF: Speculative Fabulation and String Figures, Kassel: Hatje Cantz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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