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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_두번째

수유너머웹진 2016.10.17 05:31 조회 수 : 126

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_두번째

 

 

 

 

 

 

 

질 들뢰즈 / 황재민 옮김 

 

 

타자기로 친 들뢰즈 루소 강의록 (생클루고등사범학교 도서관 소장)

 

 

 

2. <신엘로이즈> : 미덕, 객관성, 위계적 단계들

 

 

 

루소가 골몰한 것이 정치 제도들이긴 하지만, 루소의 계획에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어떤 주제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루소가 그 책에 붙일 제목은 “감각적 도덕 또는 현자의 유물론”이었다. 책은 물론 미완으로 그쳤지만, 우리는 그러한 발상을 <신엘로이즈>에서 접해 볼 수 있다.

 

뷔르줄랭의 가설 : <신엘로이즈>의 주인공들 속에서 파이드로스 신화에 대한 예증을 볼 수 있다. {Burgelin, Pierre (1952). La philosophie de l’existence de Jean-Jacques Rousseau. PUF.}

생프뢰 : 검은 말

쥘리 : 마음/의욕 (coeur)

볼마르 : 지성 (noû̂s)

 

 

{<신엘로이즈>(서익원 옮김, 한길사, 전2권, 2008)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출신 성분을 가진 생프뢰가 귀족의 딸 쥘리의 가정교사로 들어온다. 생프뢰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쥘리는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사랑이 잘못된 것임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쥘리는 생프뢰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생프뢰와 딸의 관계가 못마땅한 쥘리의 아버지는 생프뢰를 멀리 쫓아내고 볼마르와 결혼시키고자 한다. 생프뢰가 다시 찾아와 쥘리는 그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쥘리를 때려 쥘리가 유산에 이르게 된다. 한편 쥘리와 생프뢰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쥘리의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이로 인한 충격에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생프뢰는 떠나고 쥘리는 볼마르와 결혼해 두 아들의 엄마가 된다. 몇 년 뒤 볼마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생프뢰를 가정교사로 불러들인다. 생프뢰는 쥘리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쥘리는 거부하면서 볼마르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남는다. 그러나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된 쥘리는 임종 직전 자기가 사랑한 유일한 이는 생프뢰임을 고백한다. ― 옮긴이}

 

 

루소가 보기에 쥘리와 생프뢰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왜냐하면 그 둘 모두 미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랑이 미덕을 지니는 것에 대해 장애를 이루는 객관적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쥘리는 그러한 갈등을 겪는다. 쥘리는 미덕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 그녀는 생프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저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볼마르에게 있기에 제 부모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식 날에 어떤 사실이 폭로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은 변하게 마련이고 그러한 상황들이 또한 우리를 거슬러 우리 마음의 변용을 규정한다”(제3부 편지 20).

그런데 우리가 사악해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특정한 객관적 상황들 속에서다. 어떻게 미덕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존재에 관련한 이익을 가지는 한에서 악덕을 가질 수 있고 사악해질 수 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변화를 바라는 것은 루소가 보기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영혼(âme)은 객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의지는 그 자체가 상황의 객관적 요소로서 개입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쥘리는 볼마르가 죽는다 할지라도 생프뢰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치 철학 상에서 아주 흔한 하나의 관념―곧 사람들이 사악하게 될 수 없는 상황을 창출하는 것―의 사적인 전위(transposition)이다. 흄에 따르면, 정치 철학의 문제는 정의와 이익이 화해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적인 삶에서는 상황에 속한 객체적 요소로서의 강한 의지를 개입시키는 것이 된다.

볼마르가 가진 구상은 육체적 존재자를 실재(choses)에 복종토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쥘리와 생프뢰를 위한 치유책이다.

 

제4부에서 생프뢰는 이제 쥘리가 결혼해서 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생프뢰더러 돌아오라고 청하는 것은 볼마르이다. 볼마르의 의도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것, 인간들을 실험하는 것이다. 볼마르는 애초 미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수로 그것을 잃어버린 쥘리가 치유되길 원한다.

 

편지 12 : 나무숲(Bosquet)의 치유법 (이 나무숲은 생프뢰가 쥘리를 껴안은 장소이자 그녀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었던 장소였다.)

 

“쥘리, 이제 이곳을 두려하지 마세요. 이곳은 이제 성스러운 곳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고립된(désocialisé)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편지 18 : 볼마르는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당시 생프뢰가 추방당해 머물렀던 곳에 쥘리와 생프뢰를 두고 간다.

 

볼마르의 계획. 그들은 과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 지금의 쥘리는 그때의 쥘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미덕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프뢰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리세요.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 생프뢰가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것은 시간을 혼동하는 데 따른 겁니다.” 생프뢰는 고착된 상태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적 고착이다.)

 

 

- 볼마르의 계획은 결국 생프뢰가 이러한 고착을 자각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가 사랑하는 쥘리는 현재의 쥘리가 아니다. 자각을 통한 치유법인 셈이다. 그러나 볼마르는 여전히 쥘리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각으로는 치유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현재의 쥘리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가 가진 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하는 편이 더 낫다. 이렇게 되면 생프뢰 자신이 애지중지한 관념들을 다른 관념들이 교묘히 대체하게 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기억을 잊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대체 조작인 셈이다. “저는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 쥘리에 대한 사랑을 성인이 된 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우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다.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전이가 바로 이것이다.

 

 

관건은 상황을 변화시켜 미덕을 지닌 이가 되는 것이다. 현자는 미덕을 획득하기 위해 결정론을 피하는 자이다. 우리는 의지를 통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쥘리가 취한 방법이다. 볼마르는 상황 자체 속에서의 실행을 더 선호한다. 전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유물론이다.)

 

루소는 “고결한 영혼”이 취하는 위계적 단계들이라는 구상을 내놓는다. 상이한 그 네 가지 단계들은 아래와 같다.

 

1) 영혼의 기원적 선함

2)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3) 미덕 그 자체

4) 지혜

 

 

 

2.1. 단계 1 : 영혼의 기원적 선함

 

 

이는 자연 상태에서의 영혼의 선함을 말한다. 이러한 선함의 긍정은 결정론의 긍정과 구별되지 않는다. 즉 상황들이 우리의 변용을 규정한다. 영혼은 무엇보다 느끼는 능력이다. 이성이 아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 “실재들에 대한 의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긍정은 자연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변용들이 선하다는 것이기에, 곧 객체에 적합하다는 것이기에, 기원적 선함에 대한 긍정을 끌고 온다. (달리 말해서 이는 실재성 = 완전성이라는 개념화의 자연주의적 옮겨 쓰기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선함 속에서 각자는 자기에 대하여 전체로 존재한다. 선함이란 곧 실존의 감정을 가진 일자를 이룰 뿐이다. 그렇지만 기본 능력들의 차이에서 오는 영혼의 자연적 다양성이 있다.

쥘리의 영혼 : 활력,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서의 안이함, 내면적 감수성.

생프뢰 : 내면적 감수성. 약한 영혼.

볼마르 : 감수성 부족. 냉철한 영혼, 이성에 대한 취미.

클레르 : 충동적. “광적인 사람.”

 

그럼에도 각각의 영혼은 기원적 선함을 갖는다. 이 수준에서 가능한 사악함은 없다. 왜냐하면 직관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이러한 유형에 따라 각각의 영혼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갖는 것이다.

 

 

 

2.2. 단계 2 :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이는 사악함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등장함과 함께 비로소 악덕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선함을 가로막고, 우리 안에 사악함에서 오는 이익이 펼쳐지도록 하는 새로운 관계들이 사회와 더불어 나타난다.

이 새로운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실재와 더불어 있는 각자의 자기에 대한/대자적 관계였다. 사회가 창출하는 의존 관계는 서로서로에 대한 것이다. 각자는 더 이상 전체로서가 아닌 상대방으로 취급된다. 이는 유년기부터 시작하는 관계이다. 잘못 자란 아이란 남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법을 배운 아이다. “남들이 순순히 응해주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냄으로써 아이들은 거의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 상태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신엘로이즈> 제5부 편지3. {서익원 옮김, 한길사, 제2권, 2008, 235쪽.}

 

 

<에밀>의 목표 : 의지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의존인 교육을 되찾는 것.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실재들에 대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사회와 더불어 각자는 항상 누군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노예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 관계가 바로 악덕을 발생시킨다. 이제부터는 사악함에 대해 이익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원적 선함은 존속한다. 자연적 선함이란 곧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들 하에서 존속하는 한에서의 기원적 선함이다.

 

- 정도 차가 존재한다. 잡다한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기원적 선함이 지워진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곧 선함의 기준이다.)

- 중간 매개들이 존재한다. 선한 영혼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들을 경계하고 선별한다. 그러나 선한 영혼은 상황으로부터 허를 찔릴 수 있으며, 결정론에 떠밀려 자기 자신의 선함에 반작용할 수 있다. (이것이 자신의 경우라고 루소는 말한다.)

 

미덕에 대한 사랑이란 곧 상황을 무릅쓰고 자신의 선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선함은 미덕이 아니라 미덕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신엘로이즈>의 문제이다. 쥘리는 아주 선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회적 상황들 탓에 그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프뢰를 사랑할 수 없다. 그녀를 사랑함에 있어 생프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바로 미덕에 대한 사랑뿐이다.

 

 

 

2.3. 단계 3 : 미덕 그 자체

 

 

이는 미덕에 대한 사랑이 사악함에서 오는 이익보다 우세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즉 미덕이란 미덕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참조. “우리는 잡다한 인위적 관계들에 힘 쏟으면서 선함을 잃어버린다. 그때까지 나는 선했다. (…) 이제 나는 미덕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루소는 투쟁으로서의 미덕의 효능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는 미덕에 대한 사랑과 이익 간의 투쟁에 대해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결말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미덕은 “항상 전쟁 상태이다.”

 

 

- 이때 투쟁은 플라톤적 도주(쥘리)나 스토아학파적 도주(에드워드 경)라고 할 만한 까다로운 투쟁이다. 왜냐하면 물리쳐야 할 적이 이성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쥘리는 결혼 이후 또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직접적 투쟁은 더 이상 아닌 의지를 통한 상황의 변환이 그것이다. 즉 간접적으로 악덕을 제거해야 한다. 루소는 이 경우에도 회의주의적이다. 의지가 상황 속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화가 확정적임을 보증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쥘리는 실패한 것이다.

스토아주의와 기독교의 오류는 의무와 미덕을 과장한다는 데 있다.

“지혜는 우리의 의무가 지닌 난점을 떨쳐 내는 데 있는 것입니다. (…) 무릇 탁월한 자란 선행을 하는 자가 되는 데 만족함으로써 미덕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필연성 속에 머물지 않는 법이죠.” (Lettre de janvier 1764 à Carondelet.)

 

 

 

2.4. 단계 4 : 지혜

 

 

미덕은 상황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그러한 틀 내에서의 투쟁이다. 지혜는 미덕이 무익한 상황들을 창출한다. 오직 지혜만이 루소가 꿈꾼 우리 안에서의 미덕과 이익 간의 통일의 재창출로 이끌 수 있다.

지혜는 향락/주이상스(jouissance)와 분리할 수 없다.

지혜는 무엇보다 볼마르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아닌, 상황 자체 속에서 실행되는 선별에 기대는 것이다. 곧 시간과 장소의 선별이다.

 

시간 :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기.

장소 : 성스러운 곳을 친숙한 곳으로 만들기.

“진정한 행복은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온전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가 강조하는 것은 실존의 감정이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미래를 과거를 소환해서 미래를 예상한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항상 지속하면서도 자신의 지속을 표시하지 않고 연속의 감정이 없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실존의 감정 : (“신처럼 자기에 대하여 만족한다는” 이유에서 영원성, 신적인 상태와 닮은) 스쳐가는 순수 현재.

 

 

볼마르는 현재의 요소들을 선별하려고 한다. 이행으로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계기에서 대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의 방법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까지 이어진다.

이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을 이식시키는 객체들의 선별이 아니라, 객체들의 모든 연속을 박탈당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실존하기의 수월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 우리는 실재들에 대한 의존 관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소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의존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긍정한다. 또 공백을 창출해야 함을 긍정한다.

 

현자의 유물론에서 관건은 상황의 결정론을 이용해 그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볼마르는 객체들을 통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일까? (<신엘로이즈>의 결말 부분을 참조할 것.)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는 행복을 위해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는 그것을 대신해 객체들이 우리에 대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에 시간의 순수 이행과 일치할 수 있게 하는 몽상을 내세운다.

<고백> 제9권 : 루소는 자신의 책 “감각적 도덕”에 담길 테마들을 여기서 되풀이하고 있다.

 

 

 

 

3.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평행하다

 

 

 

시민이라는 평면 위에 있는 <사회계약론>은 사적인 평면 위에 있는 <에밀>과 평행을 이룬다. (교육가와 입법가도 평행하다. 루소는 이들이 신화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덕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과 <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의 관계가 있다. <사회계약론>은 교육 받은 양성된 사적인 인간을 전제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세 가지 교육이 있다고 말한다.

- “우리가 가진 능력들 및 기관들의 내적 발전”으로서 자연에 관한 교육

- 자연의 “그러한 발전에 관여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관례(usage)”로서 인간에 관한 교육

- 실재들에 관한 교육

 

<에밀>의 흐름에서 보면, 이러한 교육들은 두 가지로 축소된다.

- 가정 교육 내지는 자연에 관한 교육

- 각각의 인간이 당사자로서 관계들을 맺는 것과 관련된 공교육

 

 

첫 번째 교육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따라서 이는 자연인에 대한 교육이다. 이때 자연인이 관계 맺는 것은 실재들 및 동류들인데, 이들 각각은 대자적 전체를 이룬다.

두 번째 교육은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즉 다른 당사자들과 관계하는 당사자로서의 인간.

이 두 가지 교육은 모순된다. 현행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하면서 그 어느 것에도 가닿지 못한다. 곧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본성의 차이를 의식해야 한다. 루소의 말 : 이제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적 교육의 길로 들어서야 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일단 그 끝에 이르게 되면 공교육의 재창출이 가능한 것인지를 묻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회계약론>은 <에밀>을 전제한다.

 

 

 

 

4. 자연 상태

 

 

 

이는 전(前)사회적ㆍ전(前)정치적ㆍ전(前)시민적 상태이다. 이 자체는 새로운 관념은 아니다(홉스 참조). 어째서 전(前)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나는가? 평등과 독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참조). 그러나 루소는 자신의 독창성을 여기서 구하지 않는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분산으로 정의한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석 12{김중현 옮김, 펭귄클레식 코리아, 2010, 165-171쪽}에서 자연 상태의 부부 관계 문제에 관한 로크의 입장을 비판한다. 로크에게는 아이가 혼자만의 상태를 벗어날 때까지는 자연적 인연이다. 루소가 보기에 로크는 문제인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에서 남녀의 동거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는 우연한 마주침들의 상태이다. 루소에게는 이러한 고립이야말로 자연 상태를 평등과 독립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평등과 독립은 분석의 귀결점인 것이다.)

 

 

어떤 점에서 홉스와 멀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이고 토미즘적인 관점에서 자연적 질서는 완전성의 질서 같은 것이다. 사회성은 자연적 질서의 일부를 이룬다. 홉스에 와서는 더 이상 완전성의 질서가 문제되지 않고 필요와 욕망이라는 힘들로 이뤄진 기계 장치가 문제된다. 따라서 자연권이란 곧 자신의 세력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 욕망을 실현하기이다. 권리는 의무와 달리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어떠한 의존 관계도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평등은 힘이 불평등한 가운데 존재하는 상호 간의 평형 속에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가장 강한 자도 언제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날 수 있고, 가장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는 강할 수 있다.

 

자연 상태는 사회적 삶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충분한가? 홉스에게 사회적 삶은 권위, 곧 권력에 대한 의존을 함축한다.

자연 상태는 시민적 상태로서의 사회를 배제한다. 그러나 또한 독립적 개인들이 이루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자연적 사회를 허용하는 사회성(그로티우스)도 배제한다. 사회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들 간의 자연적 동일성에서 유래할 것이다. 푸펜도르프가 말하길 “자연 상태와 사회적 삶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완전하게 형성된 이성이 즉각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홉스에게는 이성의 발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루소는 홉스에 반대해 홉스의 자연 상태가 기대고 있는 그러한 복합적 정념들에 대한 발생도 요구한다. 홉스의 인간은 루소에 따르자면 역사적으로나 생겨나야 할 몇 가지 능력들을 “남용”하고 있다.

 

루소는 문제가 제기되는 평면을 변화시킴으로써 홉스가 맞이한 난점들을 모면하는 것이다. 분산 테제를 받아들인다면 그런 부류의 문제는 더 이상 맞이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회 형태가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홉스에게 필요는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것이지만, 루소에게 필요는 서로를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동시적으로 쓰였을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는 필요의 자연적 효과가 인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전쟁 상태가 도처에 넘쳐났지만, 지상 전체로 보면 평화 속에 있었다.” 우연한 마주침들 속에서도 전쟁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장소를 갖지 않았다. “이는 황금시대였는데, 인간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소가 가진 스토아주의적 토대 : 필요란 분리시키는 것이다. 필요는 자기 충족(auto-suffisance)으로 정의된다. 자연적 필요는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한되며, 그 필요를 느끼는 자가 가진 힘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힘에 비례하며, 우리의 힘도 우리의 필요에 비례한다. 상호적인 조절이 있다는 말이다(<에밀> 제2부 참조).

따라서 자연 상태는 힘과 욕망의 균형(équilibre)이다. 홉스에게는 만물에 대한 권리(jus in omnia)이 있다. 이에 대해 루소는 ‘아마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각자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곧 그를 끌어당기고 그가 다다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이다. 그러니까 이 권리는 자연 상태에서 사실적으로 제한되는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자연 상태를 아타락시아에 비유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체이다.”

 

자연권의 기초는 연민에 의해 절제된 자기애(amour de soi)이며, 이것이 균형을 낳는다.

 

 

 

 

5. 루소에게서 ‘자연’의 의미

 

 

 

루소에게 자연적이라 함은 무엇보다 ‘시초의’ 또는 ‘근원적’의 의미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나 “시초의 인간” 등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사회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는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에 나온다. “인간은 본성상/자연적으로(par nature) 사회성이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만들어졌다.”

 

자연 상태에서의 사랑은 사소한 일이므로 쥘리와 생프뢰 간의 사랑과 비교된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를 위하도록 만들어졌다. 자연이 바라는 바다.” (<신엘로이즈> 제3부 편지 11)

“만약 사랑이 퍼진다면, 자연이 이미 그리 선택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자연에 속한 신성한 법이다.” 이를 어겼다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가족 같은 느낌은 습성, 즉 마치 두 번째 자연/본성처럼 형성되는 하나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자연적인 것은 더 이상 시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원에서부터, 또한 기원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돼 있는 방향들을 따라 형성되는 발전이다.

이와 연관된 것이 루소에게서 “자연법”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문제되는 것은 자연 상태에 군림하는 법이 아니라 “자연인”, 곧 근원적 상태 속에 기입된 잠재성의 발전 법칙을 따른다고 가정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이다.

<에밀>에 나오는 “가정” 교육 또는 “자연” 교육은 자연에 관한 교육(우리가 가진 능력들 및 기관들의 내적 발전)과 실재에 관한 교육(우리를 변용시키는 객체들에 대한 경험으로 형성되는 습득)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인은 양성되고 교육 받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에밀>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l’homme à l’état de nature)을 자연인(l’homme naturel)에 이르게 한다고 여겨진다.

루소에게서 의식, 이성은 사회와 사회성과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자연적”이라고 말해진다.

악덕의 계보학과 이성의 발생에 관해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를 참조할 것. 이성은 그것이 아무리 자연적이라 할지라도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전을 요구한다. <주네브 수고(사회계약론 초고)>에는 자연 상태에 관한 장이 있었는데 <사회계약론>에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장이 상이한 문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계약론>은 자연인을 전제한다. <사회계약론>의 문제는 인간에서 시민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이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연인이 아닌 것이다.

완전화 가능성(perfectibilité)이라는 통념 : 자연 상태는 잠재 역량들(potentialités), 잠재성들(virtualités)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생론적인 계통은 악덕의 발생에 의해 변질된다. 이는 우발 사건인가, 필연성인가?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지닌 특성들을 찾아내기 위해 분석적이고 역진적인 방법을 채택한다. 원리를 찾아내야 할 필요성에서다. 우리는 무엇을 정의하고자 하는가? 자연 상태를 여러 능력들이 현행하는 상태로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잠재적ㆍ발생론적 상태로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애와 연민은 그 잠재성들이 발전되지 않은 정념의 상태이다. <에밀> 제4부를 참조한다면, 우리는 연민이 잠재적 사회성을, 자기애가 타자들에 대한 사랑을 가득 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분석적 방법은 역학적 원리, 곧 현행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의 역진 없이 자연 상태에 대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루소의 선학들이 가진 분석적 방법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신엘로이즈>에서 말하는 바대로 “자연이란 곧 그 속에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가 만약 해독할 줄 모르는 상태라면 분석하기로는 충분치 않다. 현행적이고 형성된 모든 것은 자연 상태 바깥에 있다. 루소 이전에는 야생인과 시민적 인간에 대해서만 말해온 것이다. 발생이란 정확히 자연 상태에 속한 잠재성들의 활동으로의 이행이다. 자생적 이행은 없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바대로,

- 능력은 그것이 필요나 이익에 부응하지 않을 경우 발전되지 않는다.

- 필요는 상황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경우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는 다음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객관적 정황들

- 이 객관적 정황들이 규정하는 필요들

- 이 필요들의 충족에 필요한 주체적 능력들

 

 

예컨대, 파롤은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루소가 보기에 자신의 선학들은 그러한 능력들이 이미 형성되어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 다음 그로부터 상황들을 도출하면서 원인들의 순서를 오해한 것이다. (가령, 인간이 말을 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속에 산다.)

 

그와 달리 루소에게는 그 능력들이 발생을 갖는다. 만약 인간이 이미 완전하게 형성돼 있는 능력들을 가진다고 하면, 그러한 능력들을 이용할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만든 홉스를 비판한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전쟁 상태 속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행은 이렇다. 즉 공격성이라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치자. 그것은 어떤 이익을 전제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익은 어떠한 상황을 전제하는가?

 

- 법적ㆍ객관적 문제 : 폭력이라고 다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상태들 사이의 관계와 일정한 지속, 그리고 힘을 수단으로 해서 가정된 손실의 보상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목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소유를 전제한다. “전쟁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들이 아닌 실재들 간의 관계이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사회를 전제한다.

 

이익이라는 주체적 문제 : 인간적 이익/이해관계(intérê̂t)인 자존심(amour-propre)은 마찬가지로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여기서는 <반뒤링론>을 참조할 만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채택된 변증법적 방법을 칭송한다. 사실상 엥겔스는 홉스를 마주한 루소의 상황 속에서 뒤링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금요일을 노예를 만들기(asservir) 위해 로빈슨은 무엇을 이용하는가(se sert)?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사회 상태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을 면 생산에 매이게 한다(asservissent).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182-183쪽 : “그렇지만 뒤링 씨의 이 전능한 “폭력”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로빈슨은 “손에 검을 쥐고” 프라이데이를 예속시킨다. 그는 이 검을 어디서 구하는가? 로빈슨 이야기에 나오는 환상의 섬들에서도 아직 검이 나무에서 열리지는 않으며, 뒤링 씨는 이 물음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 로빈슨이 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도 어느날 아침에 장전된 권총을 손에 쥐고 나타나리라고 가정할 수 있으며, 그 경우에는 “폭력”-관계 전체가 뒤집힌다.”}

 

 

 

 

6. 자연 상태는 현실인가, 허구인가?

 

 

 

ㆍ이 문제가 중요성을 가지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몇몇 이들은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거기엔 기초와 기원을 구분하는 칸트의 역할이 있었다.

ㆍ루소의 선학들에게서 자연 상태는 기초임과 동시에 기원이다. 홉스에 입각해 보자면 자연 상태는 전(前)사회적 삶으로 간주된다. 자연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적인데, 왜냐하면 인류가 거기서 스스로를 발견했던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상황들에서는 현실적이다. 홉스에게 시민적 전쟁은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 하나이다.

 

ㆍ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는 이와 관련한 서너 군데의 대목이 있다. “사실들 일체는 제쳐놓고 시작해야 한다.” “반성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관찰이 확증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라는 가정.” “아마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십중팔구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상태.”

-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요람기도 아니고 야생의 상태도 아니다.

- 인용문들의 맥락 : 여기서 “사실들”은 경전이 증언하는 사실들이다. ‘일정한 능력들을 갖추고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자연 상태는 결코 문제 설정의 방식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가설적인 것으로 정립되는 것은 바로 자연 상태와 현행 상태 사이에 일어나는 것, 즉 모든 중간 매개들이다. 두 끝은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진다.

 

자연 상태는 인간을 형성하는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현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한 가지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이나 <풍속의 역사(Histoire des mœurs)>(에두아르트 푹스)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점은 동일하다. <에밀>은 아이의 관점에서 발생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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