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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수유너머웹진 2016.10.07 09:31 조회 수 : 103

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질 들뢰즈 지음 / 황재민 옮김

 

 

 

 

 

 

 

 

 

 

 

< 옮긴이의 말 >

 

1. 이 번역 연재물의 원전은 들뢰즈가 1959-1960년 소르본대학에서 행한 루소 강의를 요약해서 기록한 문서이다(생클루고등사범학교 도서관 소장(문서번호 CI 12167)). 27쪽짜리 타자본 문서인데, 기록 자체는 들뢰즈가 한 것 같지 않다.원본 파일은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232&groupe=Rousseau&langue=1에서 구할 수 있다.

2. 옮긴이는 아르옌 클레인헤렌브링크(Arjen Kleinherenbrink)가 영역한 문서도 참조할 수 있었다. 해당 파일을 구해다 준 김상운 선생님과 전주희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영역본은 불어 원본과 쪽수는 물론 글씨체까지 비슷하게 편집한 축자적 판본과, 영역자가 논문 형태로 좀더 체계적으로 절을 구분하고, 단락 및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주석 처리를 하는 등으로 다소 양이 늘어난 (리좀론적) 확장판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옮긴이는 불어 원본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되 내용 및 표현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다는 태도로 확장판 영역본도 자유롭게 활용했다. 절 구분도 영역본을 따랐으며, ‘실재의 정치’라는 제목도 실은 영역자의 것이다(A Politics of Things).

3. 원어 병기는 괄호 ( ) 안에 넣었다. 원문 고유의 괄호와 헷갈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개입은 어디서든 중괄호 { } 안으로 묶는다. 대개는 주석에서 국역본 출전을 가리킬 뿐이다.

4. 호치키스 한번 철할 만한 짧은 문서이지만 총 4회에 걸쳐 나눠 실기로 한다. 전체 차례는 아래와 같다.

 

 

 

 

< 차 례 >

 

영역자 서문

1. 세 가지 자연 상태 개념

2. <신엘로이즈> : 미덕, 객관성, 위계적 무대들

2.1. 무대 1 : 마음의 근원적 선함

2.2. 무대 2 :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애정

2.3. 무대 3 : 미덕 그 자체

2.4. 무대 4 : 지혜

3.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평행적이다

4. 자연 상태

5. 루소에게서 ‘자연’의 의미

6. 자연 상태는 실재인가, 허구인가?

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8.3. 기만, 사악함, 소외

8.4. 어떻게 벗어나는가?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10. 사회 계약

10.1. 주권자는 환원 불가능하다

10.2. 주권자는 어떻게 분할 불가능하게 되는가?

10.3. 계약의 실정적 특성은 무엇인가?

10.4. 의무, 총체성, 순간성

10.5. 왜 주권자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가?

10.6. 일반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10.7. 루소의 시민법 이념

 

 

 

 

 

 

영역자 서문

 

 

들뢰즈는 1959년과 1960년에 걸치는 1년치 학기를 장 자크 루소에 할애했다. 루소라면 들뢰즈의 그 유명한 ‘소수적’ 철학 영웅들 가운데 거론됐던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들뢰즈와의 깊은 연관을 드러내기에는 루소가 가진 대체적인 인상이 너무 낭만주의적이고, 너무 귀족풍이며, 지나치게 국가 사상가다운 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공간을 통해1 구해 볼 수 있는 이 27쪽짜리 타자 기록 강의 요약본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는 들뢰즈와 루소 사이의 놀라운 마주침의 기록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정확히 발생ㆍ잠재성ㆍ현행성의 사상가로 루소를 변환시킨다. 알다시피 이 세 가지 개념은 들뢰즈 자신의 사유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러한 연관 내지 변환이 1962년 출판된 들뢰즈의 유일한 루소론2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처럼 들뢰즈가 루소 안에서 간파해낸 내적 구조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이 강의 요약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루소의 이 마주침이 루소를 읽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들뢰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얼마만큼 유의미할 수 있는지에 관해 간단히 짚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들뢰즈의 손에 맡겨진 루소가 무엇이 되는가 하는 물음부터 던져 보자.

 

들뢰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루소의 작업은 단 한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는 자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이익을 미덕과 조화시키는 문제이다(p.3). 그것은 개체적 인간과 인간 종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p.18). 상이한 수준들에서 존재하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쏟은 단일한 노고로서 루소의 전 저작을 읽어야 한다. <신엘로이즈>와 관련해서 보면 그 문제는 네 가지 상이한 무대들과 얽혀 있다. 첫 번째는 마음의 근원적 선함이라는 무대이다. 그것은 실재들(things)에 대해, 즉 온전한 그 자체의 존재를 갖는 각각의 존재자 및 실존의 감정을 지닌 존재자에 대해 의존 관계를 갖는 상태이다. 이는 어떠한 사악함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좀 이따가 알게 될 것인바, 이러한 상태는 현행 상태들의 발생을 낳는 잠재적 출발점으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두 번째 무대는 마음의 자연적 선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들 속에 사악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근원적 선함이 존속하는 가운데 미덕에 대한 사랑, 곧 여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함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출현한다. 이 결과, 세 번째 무대로서, 미덕을 악해진 존재자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야기된다. 이때 들뢰즈가 언급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자의 유물론”이다. 현자의 유물론은 인간 존재자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실재들 및 상황들을 사용함에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지혜의 무대, 곧 실존의 수월함을 발견하는 회복의 무대이다. 이는 실재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떤 공백으로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몽상’이 무겁게 내포하는 바는 이 무대가 비록 최종 무대라고는 해도 불충분하게 남는다는 사실이다. 즉 보다 나중에 올 계기에서 확정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3

 

들뢰즈가 다음으로 주장하는 바는 위와 같은 네 무대가 <에밀>과 <사회계약론>에서 공히 발견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두 작품을 2연 제단화(二連祭壇畫)처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계약론>과 <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의 관계가 있다. 계약이란 교육을 받은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우리는 분산 및 사회의 완전한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종 전체와 동일한 것이 된다.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하여 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별해내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사악함이란 오직 사회적 수준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 상태는 선악을 넘어서라기보다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들뢰즈-루소는 이러한 상태가 결코 현행화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전한다. “자연 상태는 역량과 잠재성으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라기보다는 현행하는 사회의 초월론적 조건에 더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무대는 “자연인” 또는 “사적 인간”의 무대다. 이러한 인간의 발전은 “자연법”(이는 분명 잠재성들이 현행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는 게 들뢰즈의 설명이다)에 지배된다. 이 두 번째 무대는 <에밀>에 나오는 자연과 실재에 관한 가정 교육, 곧 의식, 이성, 사회, 사회성을 싹트게 하는 그것과 관련 있다. <신엘로이즈>에서는 악덕의 발생도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세 번째 무대로 이끈다. 사회 상태의 타락이자 도덕적 인간의 타락이 동시에 도래하는 셈이다. 소유와 불평등은 부자에게 빈자가 예속되도록 만드는 기만적 합의를 양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도덕성 및 정의감 역시 출현하는데, 이는 다시 더 앞선 무대에서 잠재적인 측면으로 있었던 것의 결과이다. 즉 “자연법은 타락한 사회에서 형성될 수 있다”(p.12).

 

마지막 네 번째 무대는 사회 계약의 무대이다. 이 계약은 <에밀>에 나오는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 번째 무대에서 네 번째 무대로 향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무대로의 복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 의지의 행위가 개인적 종과 도덕적 종 사이의 주관적 통일을 복원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정치적 행위가 객관적 통일을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계약은 자유를 현행화한다. 이 자유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지만 이미 자연 상태에서 현존한다. 전체로서의 인민이 주권자로의 전면적 양도를 발생시켜 신민/주체(subject)가 될 때, 모든 것은 단 순간에 인민들에게 회복된다. 즉 인민들은 개인 주체임과 동시에 주권자의 일원이다. 그들 모두는 일반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린다.

 

들뢰즈의 이러한 루소 논의에는 놀라운 결말이 있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주권자란 순수 형식적 의미에서 법 그 자체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달리 말해서 네 번째 무대가 완료된 후에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입법을 행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지, 무엇을 입법의 대상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명 한 가지 점을 덧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실재들과의 관계 또는 인민이 처한 구체적 상황들과의 관계이다. “일반 의지는 법을 규정함에 있어 충분치 않다. 의지의 형식적 규정은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 정황들이라는 내용과 결합되어야 한다”(p.26). 들뢰즈가 보는 입법가의 모습은 그러한 물질적 정황들의 “주입”에 의거한다. “입법가가 없다면 일반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형식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또한 입법가는 물질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좋은 법은 특수한 인물들―곧 형식적 측면―을 고려함에 있다기보다는, 구체적 상황들―곧 물질적 측면―에 적응함에 있다”(p.27).

 

이 타자 원고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측면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첫째는 루소가 무대에 오르는 방식일 것이다. 루소 사상이 지닌 본성에 관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즉, 루소의 사상 체계는 단일한 체계인가? 그 체계는 역설들로 똘똘 뭉쳐 있지 않은가? 아니면 그저 그 자체 안에 놓인 여러 긴장들만을 인정할 뿐인가?4 그것은 적극적인 강령인가, 아니면 어떤 이상과 그 실패에 관한 명상인가? 등등. 들뢰즈는 시종일관 단호하다. 루소는 발생의 사상가, 잠재적 역량의 현행화의 사상가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루소의 모든 작업은 단 하나의 발생론적 노선을 따라 깔끔하게 정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 종교에 관한 루소의 고찰은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 격이었고, 잘 알려진 입법가 및 교육가와 관련한 문제들(그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가? 어떻게 그는 우리가 겪는 고난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는가?)은 실종돼 버린 셈이었다. 루소가 쓴 모든 글이 네 가지 무대들 및 그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라는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 위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은 여전히 크게 의문을 가질 만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그와 같은 발상을 크게 지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펼쳐 나갈 수 있을지 확인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들뢰즈 자신과 관련해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비록 루소는 이 이후 들뢰즈 저작들에서 거의 등장하진 않더라도5, 이 원고는 들뢰즈 자체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철학은 저항ㆍ탈주ㆍ국지성ㆍ소수파적 몸짓들 등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항상 국가에 맞선 전쟁 기계, 국왕들에 맞선 유목민들, 몰적인 것들에 맞선 분자적인 것들이다. ‘들뢰즈적 정치 이론’이 있다면, 가능한 한에서 ‘체계’로부터 탈주하는 법을 일러주는 설명서일 것이라 주로 여겼다.6 

 

하지만 이 루소 강의안은 하나의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발생ㆍ잠재성ㆍ현행성은 정의롭고 좋은 사회의 구축을 위해 자리한다. 우리는 현행하는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 상황을 발생시킨 잠재적 조건들로 복귀한다.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연적 선함’이 항상 존속해왔다는 하나의 발견이 이뤄진다. 이러한 발견은 새로운 현행화(대항 현행화ㆍ재영토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때까지는 결과가 형식적이다. 어떤 위계 속에서의 권력과 위세의 현행적 분배가 아닌, 실재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공백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때부터 인민은 진정으로 그들을 통일하는 그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란 바로 (미리 규정된 추상적 관념들이 아닌) 그들 자신이 직면한 상황들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가 이와 같다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를 미래로 열어놓을 것이다. 정의가 법체계와 동의어가 될 것이다. 목적론(과거를 미래로 투사하는 것)은 전부 포기하고 실용주의와 구성주의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상황 속에 그 자체로 현존하는 실재들(기계들, 집합체들)에 맞는 그 내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모든 초월적 과잉코드화(overcoding)를 가능한 한 많이 내던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들뢰즈 사상의 자구와 정신에 크게 조화를 이룬다. 게다가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입문서를 쓴 유진 홀랜드는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 전체가 (야생적 사회ㆍ전제군주적 사회ㆍ자본주의적 사회 이후에) 창출할 수 있는 네 번째 가능한 사회를 암시하고 있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Eugene Holland, 1999). 또한 조 휴즈가 최근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에 따르면, 들뢰즈의 흄으로의 복귀는 제도들을 구축하는 종별적 방식에 초점을 둔 실정적인 정치 강령을 드러낸다(Joe Hughes, 2012). ‘도래할 인민’이라는 통념에 관한 로널드 보그(Ronald Bogue)의 저술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 개념이 비록 예술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표시한다는 점이다.7 이제 이 강의록이 지닌 가장 커다란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단지 국지적인 수준에서 사회를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장 큰 규모에서 사회의 구축을 사고하기 위해서 잘 알려진 들뢰즈의 개념들을 전부 동원할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즉, 들뢰즈가 “엄밀하게는 제안할 만한 정치적 강령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해도8, 그것은 단지 사전에 내용과 위계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해당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형식적 방법과 관련해 들뢰즈적 원리들에 토대를 두었을 때 과연 사회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이다. 이런 점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일은 들뢰즈의 루소 재해석에 나타난 그 “상쇄” 운동이라는 들뢰즈적 변주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타락한 집단(몰적인 것, 국왕적인 것, 국가)으로부터 사적ㆍ개인적 수준(탈영토화, 도주선)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것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집단이 더 나은 세계를 구축(재영토화, 대항 현행화, 도래할 인민)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자신의 본성/자연에 관한 어떤 것을 배운 이후에 다시 사회적 수준으로 복귀해야 한다. 최소한 분명한 것은 그 사회가 가능한 한 모든 관념론들, 모든 선험적인 것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짐들을 내던져 버리려고 분투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그만큼 더욱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ㆍ물질적 정황들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는 추상적 관념의 정치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의 정치이다.

 

 

참고문헌

Bogue, R. (2006). Fabulation, Narration and the People to Come. In: Deleuze and Philosophy. Ed. Constantin V. Boundas. Edinburgh University Press

Burke, E. (1963) [1759]. Review of Rousseau’s Letter to d’Alembert. In: Edmund Burke: Selected Writings and Speeches. Ed. P.J. Stanlis. Garden City

Deleuze, G. & Guattari, F. (1983) [1972]. Anti-Oedipus. Trans. By R. Hurley, M. Seem & H.R. Lan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김재인 옮김,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Deleuze, G. & Guattari, F. (1987) [1980]. A Thousand Plateaus. Trans. By B. Massum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Deleuze, G. (2004) [2002].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Trans. by M. Taormina. Semiotext(e). {(부분번역) 박정태 편역,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Holland, E. (1999). 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 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 Routledge.

Hughes, J. (2012). Philosophy after Deleuze. Continuum.

Patton, P. (2000). Deleuze & the Political. Routledge. {백민정 옮김, <들뢰즈와 정치>, 태학사, 2005.}

 

 

1. 세 가지 자연 상태 개념

 

자연 상태에 관한 가능한 두 가지 개념화가 있다.

 

1) 고대적 개념화 = status naturae.

이는 중세에까지 이어진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 상태는 자연권과 결부되며, 항상 완전성들의 질서에 어울리도록 정의된다. 곧 자연 상태는 합목적적인 발동이다. 요컨대, 자연권 = 자연에 대한 순응이다.

자연 상태에 속한 사회성 및 사회는 자연권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완전성의 질서 속에서 자연적으로 정의된다. 자연 상태를 전(前)시민적이나 전(前)정치적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의 󰡔최고선악론󰡕을 참조할 것.

그렇다면 사회의 문제는 계약이나 기타 다른 것에 의한 사회의 창설이라는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가장 나은 통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현자들의 통치라 할 수 있다. 허나 사실적으로는 현자들이 인간들을 통치하길 바라지 않으며, 인간들도 현자들을 원하지 않는다. 현자들을 대신해 줄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로부터 가장 좋은 체제라는 문제가 나온다. (플라톤의 󰡔법률󰡕을 참조할 것. 노모스(νομος)는 지혜의 현실적 대체물로서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화는 근대 정치 철학 속에서도, 그러니까 철학자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론가들ㆍ법학자들에 의해서 계속된다.

 

2) 홉스를 통한 새로운 의미

 

- 자연 상태는 힘들로 움직이는 기계 장치로 정의된다. 이제 자연적인 것은 완전성들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 체계로서 이해된 권리이다. 곧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각자를 심판자로 허락하게 된다. 지혜의 특권이 폐기되는 셈이다.

 

- 이제부터 사회는 기원에 따라 좌우된다. 기원이란 곧 자연 속에서 확립되며, 동시에 자연적인 것의 극한을 표시한다.

개인들 간의 갈등은 기계적인 측면에서 개인 내부의 갈등(즉, 변사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야심(ambition) 간의 갈등)을 끌고 온다. 어떤 종별적인 행위 = 계약을 통해 그러한 모순을 제거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사회가 나타나는 것이다.

 

루소는 위와 같은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환시킬까? 루소는 사회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홉스에 동의한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 상태로부터 빠져 나오게끔 하는 모순들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홉스에 반대한다.

계약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계약의 법적 정의는 두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 이뤄진다.

- 계약은 규정된 시간 동안 쌍방을 이루는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각각의 당사자에 관계한다.

- 계약은 자발적인 것이다.

- 계약은 제3자에 대해 항변할 수 없다.

 

루소의 사회 계약이라는 통념은 바로 이러한 정의에 손질을 가하는 것이다. 곧 무규정적인 시간, 제3자에 대한 적용 등등.

 

그러나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저자들은 그 자발적 측면을 강조한다. 곧 의지의 철학으로서 정치 철학.

 

누가 계약의 당사자들인가? 신민과 주권자? 이는 법학자들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계약이 잘 준수되고 있는지는 누가 판단할 것인가? 즉 권력의 원천이 이중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판단을 위해 제3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제3자는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 (이는 홉스의 이의 제기인데, 우리는 이를 루소에게서 재확인하게 된다.)

홉스에 있어 계약 관계는 장차 신민이 될 자들끼리만 이뤄진다. 즉 각자들끼리 이뤄지는 일련의 계약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한 계약에 따라 각자는 계약에 가담하지 않는 제3자에 대해 신민으로서 구성된다. (타인을 위한 약정을 담은 계약인 이것의 근대적 유형으로는 예컨대 생명보험이 있다.)

 

루소는 계약과 관련한 앞선 설명에 대한 홉스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홉스의 해법 자체는 거부한다.

 

계약에서 생겨나는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계약의 목적성이라는 문제이다. 이때 목적성은 계약의 산물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18세기 정치 철학의 공통의 장소는 고대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시민이라는 이중성의 발견이다. 인간은 ‘미덕(vertu)’을 지닐 능력이 있었다. 근대적 사실은 이중성이다. 곧 인간은 사적 인간이자 시민이 되었다.

사실상 사적 인간은 시민이 될 능력이 없고 시민의 규정으로서의 ‘미덕’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사적인 미덕만 남는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류를 얻는 대신 미덕을 잃어버렸다.” (Carnets)

 

이유들 : - 이데올로기적 이유 = 종교 – 기독교 

            - 경제적 이유 = 재산 소유의 발전

 

루소가 <학문예술론>에서 말하길, “고대 정치가들은 명예와 미덕에 대해서만 말했다. 우리들의 정치가들은 거래와 돈에 대해서만 말한다.” {김중현 옮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 52쪽. 들뢰즈는 단어 하나를 잘못 옮겼다. 루소 원문은 “명예(honneur)”가 아니라 “습속(moeurs)”으로 돼 있다.}

주네브 시민들 가운데 가장 덕망 있는 자들과 로마인들 가운데 가장 변변치 못한 자들 간의 본성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한다.

 

헤겔 역시 이러한 정치 철학의 비관주의를 공유한다. 민주정이 가장 좋은 체제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펼칠 능력이 없다. 이러한 이중성을 감축시킬 매개가 필요한 것이다.

<에밀>의 도입부 참조. 교육의 유형엔 2가지가 있다. 시민 양성과 사적 인간의 양성.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한다.

시민은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국가에 놓이며, 사회에 대해 자유를 요구한다. 사적인 인간은 국가에 대해 안전, 다시 말해 자신의 소유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다.

계약은 어떻게 이에 응답할 것인가?

 

나는 나의 자연적 자유(의 전부 내지는 일부)를 교환한다. 그리고 주권자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는다. 홉스에게서 계약의 자유는 곧 확실한 안전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몇몇 권리들은 양도 불가능하게 남아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저항할 권리 등.

 

스피노자는 시민적 상태 속에서 자연 상태에서와 같은 자유를 보존한다. 나는 단순한 필요성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근대 세계에 보존된 이러한 새로운 자유는 사고의 자유일 것이다.

 

루소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과 결합시킨다. 법을 제정할 권리가 그것이다. 헤겔은 루소를 질책한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루소 저작 전체를 놓고 본다면 틀린 말이다.

 

18세기의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자연 상태에 관한 세 번째 개념화 유형도 있다. 바로 공리주의적ㆍ실증주의적 개념화이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론 및 고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계약 통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흄과 벤담을 참조할 것.)

흄의 두 가지 논증이 있다.

 

- 자연 상태의 전면적 부정. 곧 자연 상태는 권리의 상태가 아니라 필요의 상태이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는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 사회는 언제나 자연적 권리들의 제한 행위일 수밖에 없는 계약을 기원으로 갖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실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에게 필요한 것은 (예컨대 노 젖는 이들 간의 조화와 같은) 묵계(convention)이다. 

벤담에게 이러한 묵계의 목적성은 안전에 있다.

반면 스피노자, 루소, 칸트는 계약의 옹호자들을 위해 자유를 요구한다.

 

 

  1. 특히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232&groupe=Rousseau&langue=1에서. [본문으로]
  2. Desert Islands, pp. 52-55. {박정태 편역,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149-160쪽.} [본문으로]
  3. “이러한 몽상이 구현되는 현실의 상황들은 항상 애매하다. 우리가 잘못 처신한다거나 혼자만 겉도는 사람이 된다거나 해서, 아니면 둘 다이든지 해서 상황은 나쁘게 돌아갈 수 있다.” Desert Islands, pp. 53. {박정태 편역,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153쪽. 번역은 표현만 조금 수정.} [본문으로]
  4. 잘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루소에게는] 역설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어떤 탄탄한 앎을 바라는 자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 [루소와 같은] 그러한 천재에게서 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함직한 많은 좋은 효과들을 가로막았다”(Burke, 1963: 89). [본문으로]
  5. 루소는 <천 개의 고원>에 있는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이라는 장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한번은 명령어(order-word; mot d’ordre)와 관련해서(A Thousand Plateaus, p. 81), 다른 한번은 목소리와 음악에 관련해서(A Thousand Plateaus, p. 96)이다.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159; 186쪽. 국역본의 해당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명령어의 이러한 순간성은 아주 기묘해서, 무한히 투사될 수도 있고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도 있다. 예컨대 루소가 볼 때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의 이행은 제자리 뛰기와도 같으며 0의 순간에서 일어나는 비물체적 변형과도 같다”(159쪽). “무엇보다도 랑그-파롤이라는 구분을 거부해야 하는데, 그 구분은 표현이나 언표행위를 작동시키는 모든 종류의 변수를 언어의 바깥에 두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 자크 루소는 음악-목소리라는 관계를 제안했는데, 이 관계는 음성학과 작시법은 물론이고 언어학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186쪽).} [본문으로]
  6. 주목할 만한 예외로 폴 패튼의 작업이 있다(가령 Patton, 2000 {백민정 옮김, 󰡔들뢰즈와 정치󰡕, 태학사, 2005}). 패튼이 보는 들뢰즈는 늘 사회의 하부 구조 그 자체의 구축에 관한 대규모의 실정적 정치와 관련된 사상가였지, 그러한 하부 구조 안에서 작은 틈새 찾기를 주문하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7. “목표는 […] 정설들 및 결정론적 역사들의 연속성을 끊어 내는 일이며, 또 그와 동시에 집단적 작동 주체(agency)의 새로운 양태를 구축함에 있어 관습적 서사들로 뒤얽힌 연상들에서 벗어나고 종별화되지 않은 가공에 열려 있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빚어내는 일이다”(Bogue, 2006: 221, 강조는 영역자). [본문으로]
  8. Anti-Oedipus, p. 379. {김재인 옮김,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62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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