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H. J. Paton의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 Vol.I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Paton은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칸트 학자입니다. 국내에도 그의 저작이 한, 두권 번역 소개된 바 있습니다. 제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Kant's Metaphysic of Experience>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를 주석한 두 권의 연구서로서 1,000쪽이 족히 넘는 압도적인 분량의 대작입니다. 저는 이 책의 일부를, '초월론적 연역'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번역하여 게시하려고 합니다.

 

<칸트의 경험의 형이상학>, 제1권, H. J.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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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초월론적 연역의 필요성

우리는 이제 칸트의 두 번째 주된 요점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순수 개념의 정당화가 존재하려면 그것은 경험적 연역이 아니라 초월론적 연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칸트는 이제 그러한 연역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22)

초월론적 연역의 필요성은 공간과 시간의 경우에는, 비록 「감성론」에서 그러한 연역이 이미 주어져 있긴 했지만, 분명하지 않다.23)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 관념들로서 정당화되거나 연역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의 기원을 추적하여 인간의 감성에서 찾아냈으며, 이를 통해 그것들은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대상에 대해 필연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24)

그러한 연역이 [이미] 주어져 있긴 하지만, 칸트는 그것의 필요성이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기하학자는 철학자에게, 그의 자손이 적자(嫡子)임을 확인할 수 있기 전에는, 출생증명서25)를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기하학은 철학과 관계없이 그 자신만의 안정되고 확실한 방법을 지니고서 우리에게 순수한 선험적 지식을, 칸트가 믿기에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타당성을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지식을 제공한다.

기하학이 확실한 [지식이 되는] 이유를 우리는 이미 보았다. 기하학은 공간의 순수 직관에 근거해 있고, 따라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자명함 또는 확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26) 게다가 기하학적 지식에서 대상은, 그 형식이 관계되는 한에서, 직관 속에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다.27) 기하학은 공간 개념을 외감(外感)의 세계를 넘어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간은 외감의 순수 형식이기 때문에, 기하학적 지식은 명백히 외감의 대상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

범주는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처럼 확실하게 대상에 관계되지 않는다. 범주에게 초월론적 연역은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하며, 또한 그것[범주] 때문에 우리는 또한 공간과 시간의 연역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범주를 대상에 적용할 때, 우리는 (경험적 개념과 같은) 경험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술어 또는 (공간성과 시간성과 모든 수학적 개념과 같은) 순수 직관에서 유래하는 술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순수 사고에서 유래하는, 그리고 (「형이상학적 연역」이 참임을 전제한다면) 실제로는 판단의 형식 자체에서 유래하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주에 적합한 대상을 순수 직관 속에서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는, 범주가 수학적 개념이었다면 가능했을 그런 방식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범주가 요구하는 바는, 감성의 조건들과 하등의 관련 없이 모든 대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28)

범주와 관련된 어려움은 이것이다. 한편으로, 순수 범주로서 그것은 (물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대상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29)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적용되어야 하는 대상을 찾고자 할 때, 우리는 처음에는 그러한 적용을 정당화해주는 것을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것이든 순수 직관에 주어지는 것이든) 대상 속에서는 전혀 찾아낼 수 없다.30) 이런 이유로 의심은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에 관련하여 불가피하게 제기된다—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이 도대체 존재하는가? 의심은 또한 범주의 사용과 관련해서도 제기된다31)—그것은 우리에게 감각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이중의 의심이 초월론적 연역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이 없다면 철학의 절차 전체는 맹목적이게 될 것이다. 곧, 철학은 수많은 일탈을 낳게 될 것이고, 그것의 출발점인 무지(無知)만이 그 종착점이 될 것이다.32)

이와 같은 의심이 제기될 경우, 그것은 불가피하게 공간도 겨냥하게 된다.33) 만일 우리가 순수 범주를 감각 경험의 한계를 넘어 적용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우리의 공간 관념과 관련하여 똑같은 일을 행할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겠는가? 만일 우리가 신이 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신이 공간적 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학설은 기하학의 발전 속에서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을 테지만, 철학자에 의해 제안될 수는 있다.34)

공간의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 때문이었지, 기하학을 정당화할 필요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한 연역의 부정적인 면은 긍정적인 면 못지않게 중요하다. 공간은 순수 직관이자 동시에 감성의 형식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을 때, 칸트는 단지 기하학적 개념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립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기하학적 개념이 통과하여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외감의 세계를) 설정한 것이다.

 

7절. 범주 연역의 어려움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은 공간과 시간의 초월론적 연역보다 더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어렵기도 하다.35) 이는 칸트가 13절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세 번째 주된 요점이다.

공간과 시간의 경우에, 그것들은 그 자체로 선험적으로 인식된다는 점과 또한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대상에 적용된다는 점은 증명하기 쉬운 일이다.36) 칸트는 덧붙이기를,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어떻게 대상의 종합적 인식이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37) 공간과 시간 속의 종합은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데, 그 이유는 공간과 시간이 직관 형식을 내용으로 하는 순수 직관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오직 이런 형식 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거나 경험적 직관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은 현상으로서의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공간과 시간의 종합은 현상으로서의 대상을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38)

범주의 경우에 손쉬운 연역은 전혀 가능하지 않으며, 칸트는 논증이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제가 지닌 어떤 모호함, 문제의 본성에 의해 아주 깊이 감추어진 그런 모호함을 예상해야 한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고 해도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39) 논증과 끝까지 싸워나가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는 우리가 비판적 탐구를 완성하든지 아니면 가능한 경험의 한계 밖에 서 있는 것과 관련하여 순수 이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모든 요구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여기서 칸트의 제안이 경험을 넘어선 범주의 적용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할 것임을 보여주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합리론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범주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 인지될 경우, 범주 사용의 성공적인 연역 또는 정당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존재하기 전까지는, 합리론자는 그러한 범주를 경험을 넘어서 사용할 —물론 그는 그렇게 사용하기를 아주 좋아하지만—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저 연역의 결과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진술40)에서, 적절하게도 열린 문제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칸트가 그렇게 그 결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해당 구절이 작성되던 시기에 그는 연역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했다고 가정할 근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진술은 그가 감각 대상에 범주가 필연적으로 적용됨을 증명할 경우, 그는 또한 범주를 [감각 대상과는] 다른 어떤 것에 적용함으로써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41) 그의 진술에 대한 다른 모든 해석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과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공간과 시간의 초월론적 연역과 관련하여 바로 이 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도, 심지어 이 단락 자체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도 양립할 수 없다.42)

칸트가 여기서 초월론적 연역이 물자체의 인식을 정당화한다43)는 내용의 한 구절을 삽입했다는 가정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다(고 나는 과감하게 말하고 싶다).

 

8절. 이 어려움의 이유

「범주의 초월론적 연역」에 속하는 특별한 어려움의 원천은 무엇인가?

어려움은 [그 자체로] 충분히 명백하며, 칸트의 관점에서 범주는 지성 속에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는 칸트 철학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사실이고 순수 범주가 도식화를 피할 수 없는 이유이다.44) 범주는 공간과 시간처럼 대상이 직관 속에 주어지는 조건이나 형식이 아니다.45) 그러므로 대상은 지성의 형식에 필연적으로 관계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또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46) 결과적으로 지성은 대상의 선험적 조건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지47) 않을 것이다.

이 어려움은 공간 및 시간과 관련하여 생기지는 않는다. 대상은 감각에 주어지지 않을 경우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 왜 대상이 사고의 종합적 통일을 위하여 지성이 필요로 하는 조건에 순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48) 감각 형식 하에 주어진 현상49)은 사고 형식에 일치하지 않도록 구성될 수도 있다. 현상은 이 형식과 독립적으로 직관 속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50) 직관으로서의 직관은 사고의 형식과는 완전히 독립적이며51), 그래서 현상은 대상52)을, 설령 현상의 계기(繼起) 속에 원인과 결과의 범주에 상응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직관에 제시해줄 것이다.

우리가 “대상”이란 낱말의 모호함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명료한 진술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범주가 순수 범주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단계의 논증에서 칸트에게는 대상에 대해 —그가 「감성론」에서 하는 것처럼53)— 상식의 수준에서 말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대상은 가령 의자와 같은 물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각 속에서 주어지고, 따라서 공간적이고 시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상이 범주—이것이 지성 안에 기원을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논증한 바 있다—에 종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는 없다.54) 우리가 좀 더 분석을 수행한다면, 비록 모든 규정적 대상이 감각에 주어져야만 (또는 감각에 주어질 수 있어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사고와 분리된 채 감각에 주어지는바 대상은 오직 현상으로서의 대상55)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규정적 대상과 대립하는 미규정적 대상이다.56) 만일 우리가 규정적 대상 또는 낱말의 완전하고 적합한 의미에서의 대상을 인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직관 못지않게 사고도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식 대상은 사고의 형식 하에 놓여 있어야 하며, 따라서 범주 하에 놓여 있어야 한다.57) 범주와 분리될 경우 우리는 사고를 결여한 직관을 갖게 되며, 결코 대상의 인식58)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의 해결책이지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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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22) A 87 = B 119.

23) A 87 = B 119-20. 제5장의 2절과 비교하라. 공간과 시간의 “초월론적 연역”은 “결론”을 포함하여 「감성론」의 논증 전체를 망라해야 한다.

24) A 87 = B 119. 내가 보기에, 마지막 절은 “bestimmt(규정된)”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25) A 86 = B 119와 비교하라.

26) A 160 = B 200 및 Log.Einl.의 제3장과 제9장(제9장의 23절과 70절)과 비교하라.

27) B 147 및 A 239-240 = B 299와 비교하라.

28) A 88 = B 120. 텍스트는 왜곡될 여지가 있지만, 그 일반적 의미는 분명하다. 마지막 문장의 학설은 B 148, B 166 이하, B 305-6, 󰡔실천이성비판󰡕(V 54), 기타 많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29) 이러한 요구는 단지 합리론적 가정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칸트가 발견한 바 순수 범주의 본성 자체에 함축되어 있다. Adickes, Kant und das Ding an sich, 4절, pp. 38~74와 비교하라.—그러나 나는 그의 모든 결론에 동의할 수 없다. 순수 범주에 의한 물자체의 사고는 공허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제2장의 4절과 비교하라.

30) A 137 = B 176과 비교하라. “지성의 순수 개념은, 경험적 직관과, 그리고 사실상 모든 감각적 직관과 비교할 때 전혀 동종(同種)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직관에서도 결코 마주칠 수 없다.” 또한 헤르츠에게 보낸 편지(XI 50 이하)에 나오는 마이몬의 물음과 칸트의 대답을 참조하라.

31) 칸트는, 만일 그가 범주는 물자체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인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면, 이 점과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결론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32) A 88 = B 121.

33) 물론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칸트는 우선적으로 기하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34) B 71을 참조하라, 그리고 Diss. § 22 Scholion(II 410)과 비교하라. 이러한 가정은, 말브랑슈, 스피노자, 헨리 모어(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의 학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상에 불과한 게 아니다.

35) A 88 = B 121과 A 89 = B 122.

36) 여기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으로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명료하게 구별하고 있다.

37) 「감성론」에서 칸트는 상상적 종합을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수학의 판단은 선험적 종합적 판단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38) 공간과 시간은 대상이 현상으로서 주어지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분석을 수행하면—A 92 = B 125와 비교하라—, 우리는 대상은 오직 현상으로서만 주어진다는 점과 엄밀한 의미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직관 못지않게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것이다.

39) 나는 이 점이 두 번째 부분의 예비적 설명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40) 그 결과는 B 22에서 그 문제의 보다 일반적인 진술 속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이성을 신뢰를 가지고 확장하거나 아니면 이성에 일정하고 안전한 경계를 긋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41) 제2장의 4절과 비교하라. 이는 물론 우리가 비록 물자체를 결코 인식할 수는 없다고 해도 순수 범주에 의해 물자체를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칸트의 견해를 수정하지 않는다.

42) 그는 공간과 시간의 초월론적 연역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진술할 수 있는데, 이 연역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43) Kemp Smith, Commentary, pp. 220~1과 비교하라.

44) A 137 = B 176 이하와 비교하라.

45) A 89 = B 122. 이것은 언제나 칸트의 견해이다. B 159-60 및 B 136-7과 비교하라.

46) 이것은 상식에 의해 자연스럽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되는 추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칸트가 평행하는 구절(A 90 = B 123)에서 말하는 것처럼 “대상은 나타날 수 있다” 대신에 “대상은 나타날 수도 있었다”고 (können 대신에 könnten) 말했다면, 내가 보기에 그것은 확실한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 구절에서 그는 “현상은 지성이 자신의 통일성의 조건과 일치하는 것으로 발견하지 못하도록 구성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초월론적 연역」이 반박해야 하는 가정이다. 현 상황에서는, 이것은 나에게 가능한 설명인 듯 보인다. 비록 그 문장은 칸트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게 더 좋겠지만, 만일 우리가 “나타나다”는 낱말에 강조를 두고서 그것을, 내가 했듯이, 그리고 칸트 자신이 A 93 = B 125에서 명확히 하듯이, “주어지다”와 동일시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나는 칸트가 여기서 완전한 의미에서 대상은 우리에게 사고와 분리된 채 나타날 수 있다는 학설을 그 자신의 견해로서 주장하고 싶어 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전혀 못한다.

47) 내가 보기에, [‘enthalten’의] 접속법 과거형 “enthielte”는 칸트가 이러한 가정된 결과에 자신을 맡기고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지성은 대상이 주어지는 조건을 포함하지 않지만, 그러나 대상이 사고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48) A 90 = B 123. 사고의 통일은 여기서 종합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49) 칸트가 A 89 = B 122에서 “대상” 대신에 “현상”을 말했다면, 그의 진술의 어려움은 사라졌을 것이다.

50) A 90 = B 122. B 144와 비교하라. “직관되어야 할 잡다는 지성의 통일에 선행하여, 또한 그것과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한다.”

51) A 91 = B 123. B 132와 비교하라. “모든 사고에 선행하여 주어질 수 있는 관념은 직관이라 불린다.” 나는 칸트가 사용하는 “선행하여”를 시간적 선행성이 아니라 논리적 선행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본다.

52) A 90-1 = B 123. 그러나 현상은, 칸트가 방금 말한 것처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제시된 대상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53) 제4장의 2절과 비교하라.

54) 범주의 기원은 「형이상학적 연역」의 주된 부담 사항이다. 그 연역의 한계는 「초월론적 연역」에 대한 이 서론에 의해 분명하게 지시되고 있다. 제14장의 9절과 비교하라.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어려움은 칸트가 이미 「형이상학적 연역」에서 대상과 관련하여 그의 논증이 이루려고 하는 바에 관한 몇 가지 지시—내 해명에서 나는 이런 지시를 훨씬 더 명시적으로 만들었다—를 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와 별도로, 통상적으로 제기된 난점과 반론은 주로 이 구절을 그 맥락과 분리시켜 고려한다는 데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틀림없이 칸트는, 만일 그가 “여러분은 대상에 대한 완전한 설명—완전한 의미에서—이 단순히 그것은 감각에 주어진다는 점에 있다고 이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가정한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제 막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면, 그것을 독자에게 보다 쉽게 이해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독자에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그가 자신의 진정한 학설에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오래된 주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태이다.

55) A 92 = B 125. A 124에서 (바이힝거Vaihinger는 [A 124의 언급이] 늦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감성이 상상력의 기능에 의해 지성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현상은 제공해도 경험적 인식의 대상은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경험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56) 경험적 직관의 미규정적 대상은 “현상”이라고 불린다. A 20 = B 34를 보라. 오직 범주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 경우에, 범주는 대상을 선험적으로 규정한다. A 92 = B 125를 보라. 미규정적 대상은 감각에 주어진 질료라고 말해질 수 있고, 그것은 범주 안에서 사고된 결합의 형식에 종속됨으로써 규정된다. 규정적 대상은 감성의 형식 하에 주어진 질료뿐 아니라 사고에 의해 부과된 (지성적) 형식을 가져야만 한다. 예컨대 A 129-30과 B 164를 보라.

범주에 의해 사고된 “대상 일반”은 또한 감각에서 분리되어 미규정적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 점에 칸트는 동의할 것이다. 감각적 직관의 조건에서 분리되기에 범주는 그 어떤 규정적 대상과도 전혀 관계를 맺지 못한다(A 246). 개념에서 분리된 직관과 직관에서 분리된 개념은 똑같이 우리가 그 어떤 규정적 대상에도 관계시킬 수 없는 관념들이다(A 258 = B 314).

57)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는 「초월론적 연역」의 주관적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다.

58) “인식”과 “대상”은 여기서 엄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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