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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2]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1. 플라톤 철학이 자신의 내부에 간직한 것은 시뮬라크르, 즉 착란적인 환영들의 생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그 민활한 역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는 ‘여전히’ 존재했던 자연철학에 대한 오마쥬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철학사를 통해 자연철학을 4원인 중 ‘질료인’과 관련하여 정리하면서, 그것들이 매우 소박한 실재론에 속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철학사적 정리에서 배제되는 것은 ‘질료’ 즉 플라톤이 그토록 논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자 하면서, 끊임없이 논의의 맥락에 출몰하도록 미필적으로 방기하였던 mē on과 ouk on이다. ‘생성’의 편에서만 그 파토스(pathos, 겪음)를 드러내는 이 대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학에서 더 이상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 대신 ‘본질’이 보다 명쾌하게 원리로 승격되며, ‘개념’이 논증의 유일한 보증자로 등장한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야 비로소 ‘표상의 우선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 표상의 철학은 두 가지 점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현전의 사유’로 철학을 간주함으로써 진리가 마침내 인식(logos)의 경계 내에 완전히 진입했음을 선언한다. 이때 ‘있음’(존재)은 질료적 속성을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개별적 측면에서 학적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서출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되며 오로지 ‘형상’(eidos)과 ‘목적’(telos)만이 본래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때 표상은 형상과 목적을 인식 안에 반성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존재’를 투철한 대상으로 인간 앞에 맞서 세운다(Gegenstand). 이렇게 ‘앞에 세우는’ 작업은 이후로 진행될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의 암묵적 전제로 작용한다.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적 동일성 안에 모든 현실적 차이들과 잠재적 차이들을 배열함으로써 그것이 우주 안에서 보다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55개와 47개의 원동자들은 ‘실체’라는 있음의 측면에서 생성과 운동, 관계와 양, 질이 서로 구분 없이 섞여 들지 않도록 한다. 또한 ‘하나’의 실체에 ‘하나’라는 단위가 배분되고, 그것이 수적으로 구별될 수 있도록 하면서, ‘수’는 형상의 세계에서 어떤 특권적 위치를 점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데아로서 ‘떨어져’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개념적 동일성’은 모든 차이들, 또는 차이의 생성과 그것의 존재론적 평면 위에 군림하면서 하나의 단일한 대오를 존재에 부여하는 것이다.

3.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그것이 ‘자연학 이후’(meta physica)라는 그 규정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meta’는 어쨌든 자연의 불변항을 찾는 작업이고, 이때 이 항은 신적인 ‘최고원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항 또는 항들의 계열은 크게 두 가지 사유 구도를 가지고 전개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질료형상론’에 기대어 형상의 우위를 점차 확증하기에 이른다. 형상은 변화의 주체로서의 질료와는 달리 그것의 지속성이 전제되는데, 이때 질료를 개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개별성은, 형상이 그것의 ‘정식화’의 측면에서밖에 활동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게 한다. ‘개별적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미로와 같다. 질료가 스스로를 개별화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형상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발휘하고, ‘무엇임’(본질)의 규정성을 통해 질료를 ‘이것’(this)가 되게 한다. 즉 속성을 양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것’의 ‘무엇임’ 즉 ‘이것임’(thisness)이란 ‘이것’과 얼마나 먼 것인가? 형상이 규정성을 발휘하는 그 순간에조차 ‘이것’은 자신의 반역량(counter-puissance)를 통해 형상 아래로 은폐된다. 요컨대 세계의 ‘본질’을 사유하기 위해 세계의 ‘있음’을 괄호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meta’라는 단어에 접혀 있는 심오한 비극성 중 하나다.

둘째, 이렇게 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표상의 철학으로 분명히 한 걸음을 내딛지만, 그와 더불어 표상 아래에 들끓은 ‘기체’(hypokeimenon), 즉 (비)존재와 아페이론(apeiron)의 지층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물론 그가 기체가 향유하는 실체적 모습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체는 물체적인 것(somata)의 역량을 통해 스스로 현실화하지 않고, 정식화에 따르는 ‘수동적 수용성’의 측면만이 인정될 뿐이다. 하나의 명석판명함(표상)이 등장하고, 수많은 판명-애매함(기체)이 사라진다.

4. 이 두 가지 사유구도는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안에서 명시적이고 이론적으로 표명되거나, 선언되지 않는다. 단지 전체적인 사유의 이미지 안에서 가까스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가 『형이상학』의 첫째 권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이전의 자연철학자들과 나아가 플라톤의 그 ‘상상적인’ 이데아론에 비추어, 보다 현상학적인 명징성을 가지고 ‘앞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 학문적 야심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것을 추동하는 내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야심과는 별개로 그가 끊임없이 ‘개별적 실체’에 조회하는 것은 자신의 이론이 갖추어야 할 필연적 계기, 즉 ‘있는 한에서의 있음’이라는 진리에 대한 의식적 반향 때문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공적으로 돌리고 있는 ‘보편적 정의’라는 철학의 정도(正道)는 단지 개별적 실체를 ‘정의’해야한다는 고대적인 충실성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사실상 개별적인 것들은 ‘이것임’이 아니라 ‘이것’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더 이상 로고스의 편이 아니라 파토스의 편에서 탐구되고 진술되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는 ‘개별적 실체’에서 마중물을 길어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별적 보편자’라는 또 다른 이념에서 자신의 원천을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5. 실재로 그의 형이상학에는 이 이념이 들어설 여지가 있다. 그가 ‘가능태’(dynamis)를 논하는 『형이상학』의 초반부와 종반부는 유적 차이와 종적 차이를 통해 질료형상론을 체계의 초석으로 삼는 다른 지점보다 더 눈여겨 봐야 한다. 즉 가능태는 현실태에 종속적인 위치에 늘 놓이지만 그것이 체계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불러들인다. 때로는 ‘최하위 종’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이것’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기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본다면 하나의 개별적 실체가 ‘이것임’이 아니라 ‘이것’이 되는 것은 질료형상론의 협소한 틀 내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성’이 아니라 오래된 파르메니데스적 구도 아래에서 불변항으로서의 ‘존재’라는 틀을 계속적으로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상철학의 위계는 그것의 출생증명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도대체 질료와 형상이 무로부처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어떤 ‘희박한 존재’로부터 유래한다. 단, 이것은 ‘형상’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형상이라면 그것은 지성으로 파악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질료(hylē)인 것만도 아니다. 다만 질료라면 그것은 감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복합물들의 ‘있음’의 원인이다. 어떤 (비)존재로부터 생성되는 ‘이것’은 현실태(목적인)가 끌어당기는 형상들의 질서 내에 편입되기도 하지만, 설득당하지 않고 남아 늘 잠재적인 역능(힘)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종차’의 특이한 능력을 말할 때, 다시 말해 그것이 지닌 “어떤 이상한 능력들”, “술어로서 귀속되는 것 못지 않게 귀속시키는 능력, 유의 질을 양태적으로 변화시키는 만큼 유 자체를 달라지게 만드는 능력”(들뢰즈 94)을 내비칠 때 가능태는 더 이상 수동적 수용성의 측면에만 머물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능동적 작용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형상을 선별하고, 현실태의 방향을 정하는 하나의 우발점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가능태는 단지 ‘존재자’ 안에서 이러한 능동적 작용력과 다른 방식으로 현실화되지 않는다. 가능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았던 그것, 즉 ‘무엇임’의 형태로 ‘이것’을 갈음하고, 도대체 ‘효과’(의미)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비물체적인 상태로 물러난다. 따라서 ‘이것’은 해석될 뿐이다.

VI. 해석학적 순환과 강도의 장

 1. 해석학적 순환의 존재론

  1) 해석학적 잔여의 두 가지 의미

사건과 의미의 동외연적 성격과 동시성은 두 가지 이론적 사태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것은 해석의 층위에서 끝없는 ‘잔여’를 발생시킨다. 이 점은 해석이 가지는 내외부적인 두 가지 운명과 연관된다. 첫째, 해석은 언제나 어떤 맥락을 초월하여 다른 텍스트를 지칭하는 과정을 거쳐 ‘세계성’(또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실존성)을 확보해가는 외연확장의 움직임 안에 속해 있다. 이 움직임은 그 자체로 담론의 의미-사건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이라고 여겨지는 ‘전유’의 순간에조차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 해석은 담론에 속한 구조적인 질서, 즉 계열체적인 연결을 보증할 만한 그 발생적 차원을 스스로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의미가 발생하는 그 차원이 해석 자체의 운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 측면은 해석의 운명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아니면 이것을 공식적인 개념으로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칭하기도 할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이와 같이 외연적 확장의 과정에서 보이는 예기적(anticipant) 잔여와 더불어 의미의 발생을 가리키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잔여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이 중 첫 번째 잔여성이 그 자체 해석학의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두 번째 잔여성은 해석학이 기반하고 있을 만한 존재론의 영역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리쾨르는 이 두 번째 잔여성에 대한 응답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의 마지막 ‘연구’(‘열번째 연구: 어떤 존재론의 방향인가?’)에서 직접 이 질문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연구는 그 어떤 것보다 탐사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의 목표는 자기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이라는 이름하에 놓였던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이 가져다주는 존재론적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다(RSA 345).

 

그런데 이러한 연구의 ‘존재론적 결과’는 자기성과 자체성의 순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처음에 시도된다. 즉 “궁극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자기성, 다시 말해 자체성과의 차이에서, 그리고 타자성(l’altérité)과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본 그 자기성이라는 사실을 지체없이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증명이 존재론적 개입의 길에서 더 이상 전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Ibid. 351). 그래서 리쾨르는 이 존재론적 개입이 반드시 자기성과 자체성의 변증법을 확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여기서 존재론적 증명이란 자기성의 이러한 해석학적 운동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증명’이라는 말 자체가 해석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명은 자기성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보증”(Ibid.)이 절대적인 기초처럼 여겨진다.

이런 기초적인 확증 위에서 리쾨르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돌아선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내용 중, 리쾨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행위(praxis)와 힘(dynamis)이라는 개념이다. “요컨대 행위와 힘의 언어는 행동하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해석학적 현상학에 끊임없는 토대가 되었다”(Ibid. 351).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나미스가 명시적으로 에네르게이아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반파르메니데스적 존재론이 드러난다고 본다. 이를테면 존재 속에 어떤 운동을 도입하고, 변화와 운동을 힘의 범주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정당하게도 “운동에 완전히 별도로 존재론적 위상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Ibid. 353).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완전태’(entelecheia)가 뒤나미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지점까지 바라본다. “힘의 엔텔레키(l’entéléchie de la puissance)! (...) 이것은 힘으로서의 존재의 영역”(Ibid.)이다. 그렇다면 뒤나미스의 고유한 한 의미로서의 ‘잠재성’ 또는 ‘잠재태’가 엔텔레키의 한 특성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힘으로서의 뒤나미스는 ‘운동’ 또는 ‘행위’가 결부되지 않는다면 다시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의 무간도 안에 떨어지고 말 것들이다. 따라서 힘은 반드시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힘에 대한 행위의 우선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우시아(실체)는 행위와 관련하여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실체론적 경향은 그래서 리쾨르에게 매우 미심쩍은 것이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뒤나미스의 행위적 측면, 또는 힘의 잠재성이라는 측면을 무던히 ‘실체’ 쪽으로 끌어다 놓으려고 애를 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분투는 그의 형이상학이 스스로 ‘학문’으로 자신을 정립하려고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불명확한 것들, 유동적인 것들, 다시 말해 아페이론(Apeiron)을 퇴출시켜야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그가 『형이상학』 안에서 전개한 ‘철학사’에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한 논의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물론 뒤에서 아낙시만드로스와 ‘무한자’(apeiron)을 논하기는 하지만 이는 내게 거의 요식행위처럼 보인다. 사실상 무한자는 형이상학 안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아페이론이 ‘실체화’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정식화’ 즉 로고스의 그물에 붙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키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뒤나미스 쌍에, 그리고 우시아라는 개념에 열어 놓은 일련의 의미들에 (...) 각기 결부된 의미들을 분리시키기보다는 교차시키려고 더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Ibid. 354).

 

여기서 리쾨르가 제시한 ‘에네르게이아-뒤나미스’는 결국 ‘행위’를 말하는 다른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다.

뒤나미스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물리학, 우주론, 신학의 근거이기도 하다. 여기서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의 체계가 어떤 ‘탈중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본질적인 것은 (...) 탈중심화 자체이며, 이 탈중심화를 통해서 에네르게이아-뒤나미스가 힘 있고 동시에 실질적인, 존재의 심층을 행해 신호를 보내고 이 바탕 위에 인간의 행동함이 스스로를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행동함이 (실체가 동반하는 의미들을 포함해) 모든 다른 의미들과 구분되는 존재의 의미를 전범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소이고, 또한 행위로서의 그리고 힘으로서의 존재가 인간의 행동함 이외의 다른 적용 영역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역시 중요한 것 같다. 한편으로 행동함의 중심성과, 다른 한편으로 행위 및 힘의 어떤 심층을 향한 탈중심화(décentrement en direction d’un fond d’acte et de puissance), 이 두 특징은 행위와 힘으로서의 자기성에 대한 하나의 존재론을 동시에 그리고 함께 구성한다. 이와 같은 외관상 역설이 증명하는 점은 자기의 존재가 있다면, 달리 말해 자기성에 대한 하나의 존재론이 가능하다면 어떤 심층과의 결합을 통해서이며, 이 심층에 입각해 자기는 행동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Ibid. 357, 강조는 인용자).

 

이 “힘의 어떤 심층을 향한 탈중심화”는 그대로 앞서 밝힌바 있는 아페이론을 향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존재의 심층’이라고 불리워질만한 이것은 리쾨르에게 우선은 하이데거적인 ‘세계성’ 즉 염려로서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자기의 존재가 바로 이런 염려, 즉 자신의 사유함, 행함, 느낌이라는 ‘세계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심층이란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실현 가능한 하나의 세계가 없다면 자기는 없”는 그것을 의미한다(Ibid. 360).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성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이상한 역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나미스는 이러한 현존재의 실존성을 뛰어 넘는 것이며, 현존재의 실존성이란 리쾨르에 따르면 “결국 하이데거의 사실성 쪽으로 잡아당겨진다”(Ibid. 364)하지만 사실성이란 에네르게이아-뒤나미스, 또는 엔텔레케이아를 해석하는 틀로는 너무 협소하다. 만약 이렇게 해석된다면 에네르게에이아-뒤나미스는 그 존재론적 차원이 약화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하이데거적인 정당화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대가를 거부하기 위해 리쾨르가 도입하는 철학은 바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자기성과 심층 사이의] 중계는 내가 볼 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이다. (...) 『에티카』가 시종일관 증명하듯이, 삶[생명]을 이야기하는 자는 곧바로 힘을 언급한다. 여기서 힘은 잠재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실질성과 완성을 의미하는 행위와 대비될 필요가 없는 생산성을 말한다. (...) 코나투스는 모든 개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통일성을 만들어 주는 존재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Ibid. 365).

 

이제 중요한 것은 코나투스 즉 ‘삶의 활력’이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윤리학과 정당하게 연결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활력은 바로 뒤나미스적인 힘과 행위의 결합이다. 이것은 또한 인식론적인 함축도 가지는데, 행위와 힘은 적절한 관념과 부적절한 관념의 선별을 통해 자신의 존재역량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윤리적인 강화의 단계 또는 인식론적인 질서와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며, 그 근저에 코나투스의 존재론이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리쾨르는 하이데거적이면서 스피노자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재전유가 자기성의 존재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준다.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실존적 근본 조건을 자기성과 결합하다면 스피노자는 그 심층에 코나투스를 놓는다는 것이다.

 

2)자기성의 심화, 강한 타자성

하이데거와 스피노자를 거치는 해석학적 우회를 통한 존재론의 탐구는 다음으로 자기성과 타자성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열어 놓는다. 여기서 타자성은 우리가 앞선 장에서 살펴 본 그 리쾨르의 ‘타자’를 경유하기는 하지만 그와 달리 보다 심층적이다. 이것은 한 번의 해석학적 우회를 거친 후의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이 자기성의 유아론적인 표류를 예방하기 위한 것처럼 밖으로부터 이 자기성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의 의미 내용과 존재론적 구성에 속한다는 이 특징은 (...) 자기성과 자체성의 변증법과 뚜렷하게 구분하게 해 준다(Ibid. 367).

 

여기에서 ‘타자성’은 이전에 언급했던 바, 그 ‘강한 타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성을 구성하는 타자성은 자기성의 사소하거나 부분적인 대상으로 전락한 타자성이 아니라, 자기성의 존재론적 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성의 운동에 의해 전유된다 하더라고 타자성은 어떤 존재론적인 잔여의 힘을 보존한다. 리쾨르는 타자성을 세 가지 차원에서 탐색한다. 첫째로 신체[corps] 혹은 살[chair], 둘째로 타인, 셋째로 의식[양심].

우선 리쾨르는 신체를 세계 귀속성으로 논한다. 자기성이 하나의 인격적인 개별성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신체성이라는 규정을 피할 수 없다. 어떤 언어적, 담론적 체계로서의 인격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을 리쾨르는 “고유한 신체가 사물들의 세계와 자기(le soi)의 세계에 동시에 속하는 이중적 소속”이라고 말한다(Ibid. 369). 따라서 신체성은 세계성과 자기성의 매개지점 같은 위상을 부여 받는다. 행위에 있어서도 신체는 그 실재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신체성의 조력이 필요하다. 즉 한 행위의 자기지시성과 귀속성은 신체를 통해 최초의 지칭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성의 조건은 인간의 수동성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으로 진입하는 문턱이 된다. 특히 신체성은 앞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가지는 윤리적 함축, 즉 긍정적 역량의 증가와는 다른 측면에서, 즉 ‘고통’ 또는 ‘파토스’라는 측면에서 수동성의 의미를 더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신체는 단순한 자체성을 넘어서 내면의 수동성, 따라서 타자성의 영역 전체를 지칭”(Ibid. 371)하게 되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확장된 수동성의 단계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다른 한편 타자성의 경계가 더욱 또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신체라기보다는 ‘살’이다.(1)

 

살과 신체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 (...) 하나의 낯선(이방인적인) 주관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분명 신체와 차이가 있는 살이라는 어떤 고유성의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 육신으로서의 나는 또 다른 자아를 구성하기 이전에, 공통된 본성의 상호주관적인 구성의 전략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그 무엇이다. (...) [수동적] 인간으로서의 나, 이것이 모든 주도권에 비해 살의 우선적인 타자성이다. 여기서 타자성은 모든 의도(dessin)에 비견되는 원초성(primordalité)을 의미한다. (...) 원초성은 지배가 아니다. 살은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사이의 모든 구분을 존재론적으로 앞선다(Ibid.).

 

살이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지닌 매개적 성격과 더불어 수동성 때문이다. 살의 측면에서는 신체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능동적 역능이 드러나지 않는다. 살은 타자성을 더 부각시키는 완연한 수동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성의 강한 의미에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살은 (...) 능동적 종합들이 구축되는 모든 수동적 종합들의 장소”가 된다(Ibid.). “그것은 지각되고 포착된 모든 대상에서 물질(hylè)이라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과 공명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고유성의 모든 변질’의 기원이다.”(2)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살은 신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타자성을 구성하기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상호주관성’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와 타인과의 상호성 이전에 나의 신체와 살 사이의 상호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살이 신체들 사이에 신체로 나타나도록 그것을 세계와의 존재관계로 만들어야 한다”(Ibid. 373)는 요구는 살이 함축하는 타자성의 소극적 측면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살의 타자성이 가진 적극적 의미는 ‘신체들 가운데 하나의 신체’라고 하는 개별성을 신체라는 개체성과 낯선 경험으로 받아들일 때 나타난다. 이때 나는 나로부터 소외된 어떤 항목을 상정하는 자가 되는데, 그 소외된 그것(살)이야말로 나의 인격성을 개성으로 변모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살’이 가지는 심대한 타자성은 이 ‘개성’이 결코 ‘몰개성’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언제나 능력을 박탈한다. 이러한 몰개성의 개성이라는 살의 역설적 심급은 개체성과는 다른 개별성을 구성하는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체에서 살로의 이행과정을 ‘올랭피아’를 통해 예비적으로 살펴 보았다.

두 번째로 리쾨르는 타자성의 존재론과 관련하여 ‘타인’[타자]의 해석학을 전개한다.

 

타인을 ‘구성하려는’ 야심을 지닌 모든 논지들은 순환적이다 (...) 처음부터 타인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은 분석이 시작하는 지점인 판단 중지에 의해 첫 번째로 입증된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의 사유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나처럼 사유 주체이다. 또 타인은 나를 그 자신과 다른 하나의 타인으로 지각하며, 우리들 전체는 세계를 하나의 공통적 자연(본성)으로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고등한 단계의 인격체들로서 차례로 행동할 수 있는 인격들의 공동체들을 함께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 내용은 [자기의] 고유성으로의 환원보다 앞선다. 그리고 타자의 전제는 두 번째로 –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 고유성의 영역이라는 의미의 형성 자체 안에 포함되어 있다. 내가 혼자라는 가설에서 그런 경험은 내가 나의 동일성 안에 결집시키고, 나를 확고히 하며 나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총체화될 수 없을 것이다(Ibid. 383-84).

 

리쾨르의 이 언급은 ‘타인’을 하나의 ‘선험적 구조’로 파악하는 들뢰즈의 논의와 매우 닮아 있다. ‘나’의 고유성은 타인의 고유성에 앞서지 않는다. 들뢰즈가 ‘타인’이란 주체의 경험의 선험적 구조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분명 리쾨르의 이 관점이 바로 곁에 놓이게 된다. 타인은 주체가 총체화하는 세계의 선험적 구조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로서의 ‘살’이 가지는 그 개별성이 매우 심난한 이론적 고찰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이 ‘개별성’의 확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행위가 가지는 확고한 기준이자 터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살’로서의 자기성은 타자성으로 물러나고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살의 개별성이 신체의 개체성보다 타자성의 함축을 더 가진다는 것은 그것이 곧 어떤 이념적(idéal)인 요소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살은 이념적인 것으로서의 ‘사건’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인간은 자신의 정신보다 신체(살?)에 대해 더 무지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살의 이러한 이념성을 증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살의 이념성은 사건과 연관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건 자체를 지탱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살은 비신체적인(asomata)것이지만 또한 신체(somata)와 너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개체적인 삶과 개별적인 삶 사이에 무한한 분할을 도입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이 사이에 식별불가능한 지대를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건은 물체적인 사태의 층위에서 감속되고, 더 이상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3)

세 번째로 리쾨르는 타자성의 존재론을 ‘의식[양심]의 부름’ 또는 ‘명령’으로 본다. 일차적으로 의식[양심]은 하나의 ‘목소리의 은유’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나’를 넘어서는 것이면서 수동성의 징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목소리가 윤리적이며 매우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의식의 목소리가 가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여기서 타자성으로 재해석되도록 제시되는 것은 우리의 앞선 연구에서 확립된 삼원적 틀 전체이다. 나는 정의로운 제도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그리고 타인을 위해서 잘-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Je suis appelé à vivre-bien avec et pour autrui dans des institutions justes). 이것이 첫 번째 명령이다(Ibid. 405)

 

“이것이 첫 번째 명령이다.” 하지만 이런 명령은 상황적인 맥락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실행은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확신’(conviction)을 요구하며, 이는 “여기에 나는 머문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라는 진술의 형태로 부름을 현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hronēsis)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이야말로 저 첫 번째 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한 실행의 준칙이랄 수 있다.

 

그렇다면 명령된-존재의 수동성은 윤리적 주체가 이인칭으로 자신에게 건네지는 목소리와 연관되어 위치해 있는 청취 상황에 있다. 잘-살기가 기원되고, 죽이는 행동이 금지되며, 상황에 알맞은 선택이 추구되는 가운데서, 이인칭으로 부름을 받는 상황에 있다는 것은 정의로운 제도들 속에서 타자들과 더불어 그리고 타자들을 위해 자신이 잘-살기의 명령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이런 소망의 운반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타자성은 ‘커다란 장르들’의 변증법의 차원에서 보면, 명령된 존재의 그 특수한 수동성의 보완물이다(Ibid. 406).

 

이 세 번째 타자성에 와서 비로소 리쾨르는 하나의 윤리학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윤리학은 처음부터 우리가 전제했다시피 ‘존재론적 정당성’을 부여 받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해석학적 상황, 즉 해석학적 순환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탐구의 결론이 윤리-정치적이라는 것은 이 윤리-정치적 고리가 사실은 자기성의 가장 실천적이고 중요한 ‘전유’ 지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해석학적 순환은 “고유한 신체의 경험, 타인의 경험 그리고 의식의 경험이라는 수동성의 세 경험”(Ibid.)을 통해 마지막으로 윤리-정치적 차원을 부가함으로써 타자성을 진정 실재적인 메타범주, 즉 존재론적 범주로 격상시키게 된다.

나는 리쾨르의 이러한 자기의 수동성 차원인 타자성이 어떤 사건의 존재론과 접면하고 있다는 가설을 끝까지 견지하고자 한다. 특히 리쾨르가 ‘심층’을 말하고, 뒤나미스와 코나투스를 논한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해석학의 해석학적인 존재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존재는, 더불어 생성은 더욱더 무던히 해석학의 텍스트성을 벗어난다. 리쾨르는 이 점을 몰랐다기보다, 마지막까지 해석학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윤리와 정치를 말할 때조차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론적 고집과 자기한계에 대한 고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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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상 우리는 신체로서 하나의 개체적인 경험을 통해 타자와 연대하지만, 살로서 개별적으로 원자화된다. 이러한 원자화된 살적 존재로서의 우리 인간은 어떤 절대적인 타자성이라는 경험을 하게 되는 바, 이것도 하나의 사건, 즉 타자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은 이런 의미에서 수긍할 만한 것이다.

(2) 하지만 이 ‘살’이야말로 또 다른 고유성의 영역이다. “현상학을 개시하는 전반적인 판단중지 내에서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아무것도 기인하지 않는 어떤 잔여물, 즉 고유성의 영역을 남겨 놓는 것 같다.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이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육신의 존재론이다”(RSA 383).

(3) 들뢰즈-가타리의 다음 언급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각과 정서의 집적인 감각의 존재는 느끼고 느껴짐의 일체성 혹은 그 불가역성으로, 말하자면 꽉 마주잡은 두 손과 같이 그들 간의 긴밀한 얽혀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곧 체험된 육체로부터, 지각된 세계로부터, 여전히 경험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상호간의 지향성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지게 될 살(la chair)이다-반면에 살은 우리에게 감각의 존재를 부여하며, 경험판단과는 다른 원초적 견해를 가져다 준다. 서로 교환되는 상관물로서의 세계의 살과 육체의 살, 그 관념상의 일치.” 이와 더불어 들뢰즈는 예술에 있어서의 감각의 위상과 살의 위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사유한다. “비록 살이 감각의 발현에 관여할지라도, 살은 감각이 아니다. (...) 감각을 구축하는 것은 박피된 한 마리 짐승이나 껍질이 벗겨진 과일의 표상처럼, 가장 우아하며 가장 섬세한 누드, 이를테면 거울 속의 비너스에서 담홍의 지표들 밑으로 솟아오르는 하나의 동물되기, 식물되기이다. 아니면 짐승과 인간의 구별 불가능한 지대로서의 점묘법, 가열, 주조 가운데 불쑥 떠오르는 그 무엇이다. 살을 지탱하는 제2의 요소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저 얽힘이나 카오스에 불과할 것이다. 살은 생성의 온도계일 뿐이다. (...) 두 번째 요소는 뼈나 뼈대라기 보다는 집이며 골조물이다. 육체는 집 안에서 활짝 열린다(집과 등가인 샘 혹은 숲). 그런데 집을 정의하는 것은 ‘면들’, 말하자면 앞면과 뒷면, 수평, 수직, 왼쪽과 오른쪽 면들, 수직과 경사면들, 직각면 혹은 곡면들 … 과 같이 살에다가 그의 골격을 부여하는, 여러 방향으로 향해진 면들의 조각들이다. 그것은 벽들이며, 뿐만 아니라 바닥이며, 문들, 창들, 발코니 문들, 거울들로서, 이는 정확하게 감각에다가 제 스스로 자율적인 틀들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감각 집적을 이루는 국면들이다”(RQP 169-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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