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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 (1)~(6)은 구 웹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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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주체성의 해체와 사건

III. 주체와 타자의 해석학

우리는 철학사와 현상학적 기술과정을 우회하여 ‘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들어선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체와 타자의 문제가 해석과 사건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가? 나는 해석과 사건의 문제(서론에서의 문제들)를 해결하기 위한 최초의 입지점을 주체와 타자로 설정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앞서의 논의들로부터 드러난 것은 해석과 사건의 안팎에 ‘표지’ 또는 ‘흔적’이 상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출처’를 해명해야한다는 요구를 사유에 던져 준다. 이 ‘출처’라는 것은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원리’(archē)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원리가 해명될 때, 반드시 해명의 주체, 즉 해석주체로서의 언어적 존재이자 음성의 담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우선은) 분명해 보인다. 플라톤에게 이 음성의 담지자는 ‘시인’이면서, 또한 그것을 해석하는 ‘음유시인’이었다. 그렇다면 해석과 사건이라는 큰 문제를 던지는 하나의 주체이면서, 그것을 또한 해석하는 하나의 동일한 주체가 여기서 반드시 선재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주체의 문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하지만 해석주체는 의식의 측면에서든 행위의 측면에서든 멈추어선 자가 아니다. 그의 의식은 일종의 ‘반성의식’으로서 끊임없는 ‘판별’의 과정 안에서 표지들을 만나며, 그 가운데에서 비의지적인 또는 의지적인 역능을 발휘하여 대상을 주조해 낸다. 따라서 ‘대상’이란 해석주체와 상관적이지만 그것은 이미 ‘사실’로 응고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애초에 해석‘주체’로서 제시된 하나의 항이 판별의 과정이라는 반성의식의 운동 안에서 그 실체성이 회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적인 방법론적 회의는 ‘세상이라는 큰 책’(grand livre du monde) 안에서 돌아와 난로 앞에 앉은 하나의 해석주체를 전제하지만, 그러한 ‘전제’ 자체를 의문에 빠트리는 것을 통해 그 자신을 ‘전제’한다. 이 이중의 ‘전제’는 다시 이중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래서 더 이상 주체로서의 단일성을 향유할 수 없는 어떤 ‘그’가 된다. 이때에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점점 더 어떤 낯선 ‘그’의 이야기, 또는 ‘그’의 사유 과정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이 ‘나’는 바라본다. 나를 대상화하는 이 반성의식 안에서 주체는 타자가 되고, 타자는 이제 주체와의 연결을 망각한 채 반성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무의식이 되거나, 아니면 책이 아닌 세상 자체 안에 실존하는 어떤 다른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 다른 ‘자’들은 주체와 함께 가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조건 안에서는 주체를 죽인다. 그리고 이 역도 마찬가지다.

셋째, 주체와 타자의 구도가 위와 같이 형성된다면 이제 사건의 차원이 눈에 들어온다. 사건은 먼저 형성된 해석주체를 해체하는 반성의식과 타자와의 만남 그 자체며, 또한 그 역의 과정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사건자체이기도 하다. 즉 사건은 타자와의 만남이면서 사건자체인 것이다. 이 동어반복적인 규정은 여기서 어떤 분명한 다른 구도를 드러낸다. 즉 ‘사건-반성의식(해석주체)-타자-사건자체’.

나는 이 장에서 앞서 두 가지 주체의 양상과 타자의 출현을 반성하면서, 먼저 반성주체이면서 해석주체인 ‘나’의 문제를 코기토를 통해, 그리고 코기토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것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와 리쾨르의 주요한 텍스트들을 살펴볼 것이고, 그 와중에 앞서 작업한 철학사적인 맥락들과는 또 다른 철학사적 내용들을 개입시킬 것이다.

 

1. ‘코기토’ - 주체화 양식

지금 탐구하려고 하는 주제에 대한 철학사적 맥락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주체’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그러한 긴 철학사적 맥락 안에서 겨우 몇 세기 전, 데카르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전망을 뒤로 짧게 거스른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만날 것이지만 보다 멀리 시야를 조절한다면 소크라테스, 더 나아가 소피스트들에까지 이른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주체의 특유성, 즉 그 ‘발견적 측면’의 결과를 에피스테메(epistēmē)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프쉬케(psychē)의 가장 심원한 내용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 이전에 소피스트들은 에피스테메와는 다른, 하지만 당시로서는 대중에게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독사(doxa)를 논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이후에 플라톤이 누스(nous)를 인간의 종적 표상으로 정립하면서 절대화하게 될 ‘인간 본성으로서의 로고스(logos)’를 최초로 강조한 것이다.(1) 하지만 플라톤은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소크라테스의 편에 서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은 상대적인 독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지식으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보다 고귀한 어떤 존재로 부상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경향을 단 한 번도 거스르지 않는다. 그가 세운 자연학의 체계는 언뜻 상대적인 가치를 자연계에 가져다 주는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철저한 ‘위계’를 우주에 부여함으로써, 즉 그 정점에 ‘신’을 놓고, 그 바로 아래에 ‘인간’을 둠으로써 인간의 신적인 측면인 ‘이성’을 최고의 높이로 고양시킨다.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은 ‘사유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2)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가 모든 인간에게 ‘양식’(bon-sens)으로서의 ‘이성’을 부여하게 될 때 철학사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실체화’라 할 수 있다.

 

 

1) 들뢰즈, 주체성의 전복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데카르트라기보다는 흄이다. 그의 처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은 흄의 『논고』에 대한 해석서며, 그로부터 경험론적 주체성을 도출해 내는 힘겹지만 아주 명쾌한 작업을 해낸다. 그 작업의 의의는 데카르트로부터 배제된 어떤 잔여를 구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흄의 경험론이 담지하고 있는 유물론이며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주체화 ‘양식’은 이런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자 환상 또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선 데카르트의 최초의 전제에 해당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의문에 붙인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즉 일반적으로 양식 혹은 이성으로 불리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또 우리가 각각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성적이어서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길을 따라 생각을 이끌고, 동일한 사물을 고찰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정신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는 엄청난 덕행을 할 수 있는 반면에 엄청난 악행도 할 수 있으며, 천천히 걷되 곧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뛰어가되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먼저 갈 수 있는 것이다(AT13 1-2).(3)

 

 

여기서 ‘양식’(bon sens)은 모든 것의 전제로 등장한다.(4) 좀 더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인 ‘코기토 에르고 숨’은 이 전제에 비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한다’는 어떤 규정성을 미리 전제하는 것임에 반해, 양식은 규정성이 아니라 실존의 함량을 미리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양식이라는 실존의 함량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것은 선천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코기토 명제의 존재적 근거가 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이러한 양식의 근본적 양상은 부차적이거나 부분적이다. 이런 주장은 데카르트의 첫 번째 진술문 안의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들뢰즈에게 ‘분배’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정착적(또는 정주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유목적(nomadique)이다. 양식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은 정착적인 분배에 해당된다. 정착적인 분배는 인용문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분배방식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만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학적인 엄정함에 따라 비율이 정해져야 한다. 공평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며, 그것은 이미 표상적인 상태로, 중립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등록하는 작업이다. 이 중립적인 표상의 상태를 위해서는 ‘좋은 정신’이 요구되며, 이 좋은 정신은 사람들 사이에 꼭 맞게 분배된 덕분에 ‘더 이성적인 것’도 ‘덜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 “분배는 고정되고 비례적인 규정들, 재현 안에 제한되어 있는 ‘소유지’나 영토들과 유사한 규정들에 의해 진행된다”(DDR 103). 데카르트가 양식의 분배를 이성적 능력의 분배로 취급하는 곳에서 들뢰즈가 재현성의 규칙을 읽어낸다는 것은 양식이 어떤 ‘일방향성’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현되고 표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양식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양식으로서의 이성은 중립적인 표상을 통해 스스로를 ‘잘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하나의 이론적인 전제와 또 하나의 가치론적인 전제가 작동한다. 즉 재현의 우월성과 양식(좋은 정신)의 능력은 선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양식의 부여에서 시작하여 능력을 거쳐 위대한 영혼에 이르는 잘 정해진 방향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오히려 이러한 방향의 앞과 뒤로 “신적이라기보다 악마적”(DDR 104)인 분배가 도사리고 있다. 유목적 분배라고 일컬어지는 이 방식은 어떤 규칙도 재현도 감당할 수 없는 심층의 움직임이다. 미리 재현으로, 표상으로 설정된 존재는 여기서 이차적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들뢰즈의 관점에서 ‘엄청난 악행’은 위대한 영혼이 배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재현의 길을 따라 이성을 선하게 사용하는 인간은 그러한 ‘선함’이나 ‘유용성’과는 대립되는 반표상적인 악과 무용함을 언제든지 대면할 수 있다. 이성적인 것들의 간격에 서식하는 광기, 표상들의 범주화를 거스르는 비표상적인 질료들, 또는 형상의 설득에 대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언제나 숨어 버리는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이 그러하다. 이 모든 예들은 사실 양식이 기반하고 있는 대지의 본모습이다.

그런데 만약 양식이 전혀 양식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들의 터전(lieu)이라면 논증은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흄의 방식이다. 유목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러한 흄의 방식은 들뢰즈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는데 그 한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지속적으로 흄은 정신과 상상력, 관념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정신은 본성(nature)이 아니며, 본성(nature)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관념은 소여(所與)로서 주어지며, 경험이다. [따라서] 정신은 주어진다(L’esprit est donée). 그것은 관념의 다발(collection d’idée)이지 어떤 체계가 아니다. (...) 관념들의 다발은 단어의 가장 애매한 의미에서 어떤 능력을 지시하기보다 어떤 것들의 배치(ensemble, assemblage)인 ‘상상력’을 의미한다. 즉 사물들은 앨범 없는 사진들이며, 무대 없는 연극이고, 지각의 흘러넘침이다. “연극의 비유는 우리를 결코 잘못 이끌지 않는다. ... 또한 우리는 그것을 구성되어진, 즉 그 장면들이 재현된 장소나 물질들에 대해서도 애매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장소는 그 안에서 발생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재현이 주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은, 정신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어떻게 해서 상상력은 능력이 되는가? 인 것이다(DES 20-21).

 

 

들뢰즈-흄의 입장에서 정신 즉 이성은 데카르트에게서처럼 선천적인 양식이기는커녕 ‘소여’에 불과하다. 그 소여의 내용은 바로 ‘관념들의 다발’이다. 그런데 관념들의 다발을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라기보다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흄을 통해 ‘동일성’을 완전히 일신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동일성’이란 하나의 본성이며 불변하는 실체로서 어떤 변화나 운동도 그것에게는 외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흄은 여기에서 먼저 ‘본성’의 함축을 비워낸다. 그리고 다음으로 ‘정신’의 함축도 비운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떤 ‘장소’라는 유비적 함축도 비워낸다. 즉 모든 실체적인 규정성들을 추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현이 주체 안에 있’지도 않다는 것으로 데카르트가 말한 그러한 방식의 이성적 능력이라는 것이 주체를 규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제 질문은 ‘정신이 주체가 되는 것’, ‘상상력이 능력이 되는 것’에 맞춰진다. 다시 말해 정신이나 상상력은 처음부터 어떤 주체나 능력인 것이 아니라, 관념의 다발, 인상의 다발이었을 뿐이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정신이 되고 주체가 되며, 상상력이 되고 능력이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들뢰즈-흄의 방식은 처음부터 데카르트적인 양식이 아니라 비실체적이고 유동적인 관념들, 인상들로 이루어진 완전히 착란적이고 유목적인 분배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데카르트에게서 어떤 순진한 ‘상식론’과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그는 모든 사람들 각각이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아, 사유, 존재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의 순수자아가 어떤 출발점인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단지 이 자아가 자신의 모든 전제들을 경험적인 자아 안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일 뿐이다”(DDR 96). 다시 말해 코기토 명제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건에 해당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완전히 텅 빈 문장이다. 오히려 전건에 해당하는 ‘나는 생각한다’의 규정성이 후건에 해당하는 ‘나는 존재한다’를 전제한다고도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두 문장은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먼 거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 먼 거리를 주파하는 이론적 시도가 가능한 것인가? 나중에 보겠지만 리쾨르는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시도를 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데카르트 비판 지점과 리쾨르의 지점은 상통한다. 들뢰즈가 양식과 코기토 양자의 텅 빈 형식성을 공격하면서, 거기에 수동적 종합에 해당하는 ‘자아들’을 도입한다면 리쾨르는 양식의 가능성을 신뢰하면서 코기토의 직접성을 공격하고 그것이 반성철학적인 우회로 즉 해석학적 우회로를 거쳐 충만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리쾨르에게서도 여전히 자아의 연속성은 회복되지 않는다.

결국 데카르트적 자아라는 주체성의 양식에 대해 들뢰즈가 취하는 태도는 매우 가혹하다. 그것은 재현의 환상으로서 “단지 그렇게 발견된 형상이나 질료를 철학의 조짐으로 축복하는 가운데 ‘재발견하기’를 추켜올리는 아첨과 애교”(DDR 176)에 불과하다. 그래서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양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것의 진부함을 폭로하고, 흄을 거쳐 이성적 능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후자는 ‘공통감’의 허구성으로도 불린다.

 

 

공통감[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정신적 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이 같음의 형식을 제공할 때, 양식은 각각의 경우에서 인식능력들이 기여하는 몫을 규정한다. (...) 여전히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은 이 재인의 모델이고,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정향’하는 것도 이 모델이다. 이와 같은 정향은 철학에게는 난감한 것이다. 왜냐하면 ①본성상 올바른 사유, ②권리상 자연적인 공통감, ③초월론적 모델로서의 재인이라는 이 3중의 가정된 수준이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교조적인 이상(理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DDR 174-75, 번호는 인용자).

 

 

공통감과 코기토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곧 ‘주체화’에 대한 비판이다. 들뢰즈는 ‘주체화’를 ‘기호계’와 연관해서 파악하고 있다. 우선 기호계란 “특정한 표현의 모든 종류의 형식화(formalisation)”며, 그것의 표현이 “언어적인(linguisitiq) 한에서 기호체제(régime de signes)”이며 이는 곧 기호계(une sémiotique)라 할 수 있다(DMP 217). 기호계는 네 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째로 기호의 기표적(signifiante) 체제가 있으며, 이는 여덟 가지 원리를 가진다.(5) 둘째로 전-기표적(pré-signifiante)인 기호계며, 이는 의미작용 이전의 기호계를 말한다. 이것은 ‘기호’ 없이 작용하는 어떤 자연적인 표현형식에 근접해 있다. 이 기호계 안에서 언표의 ‘다의성’은 보존되며, 그와 더불어 언표는 이 다의성을 종결짓는다. 셋째로 반-기표적(contre-signifiante)인 기호계며, 이것은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계다. 이 기호계의 예로는 숫자, 번호로 매겨지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네 번째 기호계며, 그것은 탈-기표적(post-signfiante) 체제다. 이 네 번째 기호체제로 인해 주체화가 가능해 진다. 들뢰즈는 이러한 기호체제들이 자의적이며 제한되어 있다는 단서를 단다. 그리고 이 기호계들은 서로 혼합되어 작동한다. 그 작동의 원칙은 어떤 논리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규칙이 아니라, ‘배치’(agencement)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언제나 어떤 ‘우연’(hasard)이 작용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기호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계를 가져오기도 하고, 또 배치의 단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상황을 창조해 낸다(Ibid.).

그런데 들뢰즈는 이 네 가지 기호체제를 다시 두 가지 대립적인 양상으로 나눈다. 하나는 “전제적, 기표적, 편집증적 기호체제”며, 다른 하나는 “권위적(authoritaire), 탈-기표적, 주체적 내지 정욕적 기호체제”다(DMP 128-29). 여기서 주체적 기호체제가 정욕적 기호체제와 분명히 상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기호 체제 안에서 주체적인 방향의 배치가 욕망의 움직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사실 이것은 낯설지 않다. 들뢰즈가 이 기호체제의 양극성을 논하면서 들여오는 것은 정신분석적 주체화의 하부구조, 즉 ‘망상증’인데, 이로부터 그는 주체화가 욕망의 움직임이라는 정당화를 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은 반드시 ‘집단적’인 양태를 띈다. 개체적인 욕망은 여기서 부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민의 욕망’이며, 이것이 어떤 역사적 조건 안에서 현실화하는가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하나의 예시는 출애굽의 유태민족이라는 주체화의 기호체제다. 그것은 일종의 소송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조화로운 원리이며, 한 개인으로서의 모세가 아니라 각각의 지파의 수장이 원리의 주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 (...)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 내가 그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성경』, 신명기 1:12~18).(6)

 

들뢰즈가 강조하다시피,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일군의 인민이 “망상의 유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좌표 위에서 그려진 망상의 지도가 자신의 좌표 위에서 그려진 인민의 지도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DMP., 129). 다시 말해 유태민족은 우선 이집트라는 제국으로부터 탈주하여, 자신들의 기호체제 안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과정에 있으며, 이러한 기호체제의 발명 과정에서 수행적으로 달성되는 것은 바로 ‘소송’이다. 그리고 이 소송의 선은 정확하게 출애굽과 정착이라는 수난(Passion) 또는 정념(passion)의 선을 따르는 것이다. 모세가 홀로 짐지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수난과 정념의 선들이며, 이것을 전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분배하고, 최종심급에서 스스로를 소환함으로써 주체화의 과정을 섭리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반드시 ‘배신’이라는 ‘표지’가 작동한다. 그리고 성서 텍스트 내에서 이 배신은 두 부류의 얼굴성을 가지고 드러난다.

첫 번째로 선지자(prophète)들이다. 이들은 일종의 ‘기호 담지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표지 그 자체가 새겨진 신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카인은 직접적으로 신을 배신하고, 그로 인해 소송의 표지를 안고 탈영토화의 선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끔찍한 집행유예, 즉 카프카가 묘사한 방식 그대로의 ‘유예’에 해당된다. 성서에서 진정한 인간은 사실 아벨이 아니라 카인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신과의 서약, 즉 끝없이 형벌을 유예함으로써 번성하는 인간족속. 따라서 “기표의 얼굴과 선지자의 [신의 언어에 대한] 해석에, 또 주체의 치환[아벨에서 카인으로]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날조와 속임수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배신(trahision)의 체계”다(Ibid., 131). 그래서 언제나 시작은 ‘배신’이며, 그것을 지속하거나 교정하는 것이 문제다. 모세 5경의 텍스트들은 이러한 배신과 교정, 신의 분노와 복종이라는 테마를 따라 배치될 수 있다.(7) 두 번째로 예수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야말로 이러한 배신의 체계를 보편화한다. 그는 배신하고 배신당한다. 그는 유태인들을 배신하며, 그에 따라 유태인들의 신을 배신한다. 반대로 그는 유다로부터 배신당하며, 신으로부터 배신당한다.

이것들은 전반적인 정념의 체제, 또는 수동성의 체제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이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 관념이나 상상보다는 행동의 망상을 갖고 있으며, 전제적이고 기표적인 것보다는 정욕적이고 자동적인 망상을 갖고 있다”(Ibid., 132, 강조는 인용자). 다시 말해 전제주의적인 편집증에 대항하는 탈주의 선으로서의 주체화, 즉 정념적 주체화(subjectivation passionelle)가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편집증에 맞서는 이 망상의 주체화는 그 기원적인 요소를 일신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근대적 주체화가 있다. 들뢰즈는 이 근대적 주체화의 점(point de subjectivation)으로서의 코기토를 앞서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말한 방식과 동일하게 정념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사실상 『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정념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상술한 바와 같은 ‘배신의 정념’이다.

 

 

코기토는 언제나 과정으로서 다시 시작하고, 거기에는 배신의 가능성이 언제나 따라다닌다. 속이는 신과 교활한 천재. “나는 산책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추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가 말할 때, 그는 두 가지 주체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 주체에서 첫 번째 주체의 흔적을 재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적인 현재적 언어학자들이 항상 연동소(shifter)라고 부르는 것)(DMP 136).

 

 

들뢰즈가 여기서 두 가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의 언표행위주체와 ‘나는 존재한다’의 언표주체, 또는 “영혼과 육체 내지 감정의 통일로서의” 코기토를 말한다. 이 이원적 구조는 배신의 정념을 발출하지 않는가? 즉 언표행위주체는 언표주체에 의해 배신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유주체로서의 언표행위주체가 발원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들뢰즈에 따르면 정념이다. 이러한 결론은 『천의 고원』에서는 어떠한 증명의 과정도 없이 간단하게 처리되지만, 『경험론과 주체성』에서는 자세하게 논증된다. 따라서 코기토의 저변에 흐르는 심대한 와류(渦流)는 정념이며, 그것이 언표주체가 되는 순간 즉, ‘나는 존재한다’로 수렴되거나, 또는 사유주체라는 ‘나는 생각한다’의 언표 안에서 은폐되어 있는 한, 종속적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탈-기표적인 정욕적 선을 주체화 내지 예속화(assujettissement)의 선으로 만드는 것이며, 두 주체의 구성 내지 이중화고, 하나를 다른 하나로, 언표행위 주체를 언표 주체로 끌어내리는(rabattement) 것이다”(Ibid. 137).(8)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 주체로 끌어내려지며(se rabatsur, 포개지며), 거기서 언표주체가 이번에는 또 다른 과정을 위한 언표 행위의 주체를 다시 제공한다(Ibid., 137).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이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리쾨르적인 구도 내에서 살피면서 다른 차원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2) 리쾨르의 코기토 비판

들뢰즈의 주체화 양식 비판에 비해 리쾨르의 그것은 매우 순화된 측면이 강하다. 이를테면 이것은 리쾨르 자신이 구분한 바, 해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강도차 정도로 유비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적인 주체화 양식의 전제들을 파헤치고 그것에 사실상 파산을 선고하는데 반해, 리쾨르는 그것을 새로운 주체화 양식으로 가는 터닝포인트로 삼는다. 그래도 어쨌든 데카르트의 이른바 ‘토대주의’는 완전히 논박된다. 리쾨르의 논증의 태도가 이런 방식이 되는 이유는 그가 해석학적 신중함을 가지고 코기토에 접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그에게는 자아의 동일성은 두 가지(자기성과 자체성-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할 것이다)로 분기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들뢰즈처럼 ‘양식’ 자체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쾨르에게 데카르트의 ‘양식’은 해석의 지성이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요소이며, 해석에 대한 이해와 설명의 계기들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태도는 리쾨르에게 필연적이다. 비록 그가 수동성을 논하고 정동(affection)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경우 이미 양식화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작은 것이 아니다. 나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이와 같은 철학적 분위기가 그들의 존재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뒤에서 논할 것이다.

리쾨르의 데카르트로 돌아와 보자. 어쨌든 그에게는 양식이 아니라 코기토가 더 문제다. 그는 먼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파헤친다.

 

 

이 회의[방법론적 회의]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데카르트는 우리가 알다시피, 진실한 신의 반대되는 이미지인 대단한 기만자 혹은 악령이라는 가공적인 가정(假定)을 만들어 내는데, 이 악령 자체가 단순한 견해의 지위로 격하되어 있다. 코기토가 회의의 이와 같은 극단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회의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가 남아 있어(9) 이렇게 말한다. “ … 나는 이 모든 사유들이 가짜이고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기만하는 데 내 모든 정성을 기울인다.” 악령의 가정조차도 내가 만들어 내는 픽션이다. 그러나 그처럼 뿌리뽑힌 채, 고유한 신체와 결속된 모든 시, 공간적 지표들에 대해 회의하는 이 ‘나’, 그는 누구인가? 회의를 이끌고 코기토 속에 반영되는 이 ‘나’는 (...) 회의 자체가 그것의 모든 내용들과 관련해 그렇듯이 역시 형이상학적이고 궁극적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아무도 아니다.(RSA 16)

 

리쾨르의 해석이 가지는 특유하고 놀라운 점은 이렇게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은폐하고 있었던 ‘나’라는 코기토의 쌍둥이, 일종의 이중체를 발견해 낸다는 것이다. 코기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논증하고 회의를 결행하는 하나의 ‘나’는 회의 안에서 정신과 신체가 뿌리채 뽑히고 모든 것이 기만으로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여기서 리쾨르가 이 ‘나’를 “코기토 속에 반영”된다고 한 것은 부족하다. 차라리 이것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법적 구조의 다른 계열들, 이를테면, ‘나는 먹는다’, ‘당신은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한다’ 더 나아가 ‘나는 지푸라기며 부처며 똥작대기다’와 같은 하나의 통합체와 더불어, 또는 주어와 술어, 실체화된 ‘나’와 그것의 ‘사유속성’ 사이의 거리 안에서 선택하고 이어주는 ‘그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사실상 도처에 있으며, 따라서 그는 ‘아무도 안’이다.(10) 데카르트 자신의 진술 안에서도 이것은 그저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내가 어떤 것(aliquid)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nihil)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Descartes AT 25, 강조는 인용자). 익명의 모습으로 도처에 있으므로 아무 곳에도 없는 이 코기토의 이중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이것을 질문으로 남겨 두고 리쾨르의 데카르트 비판을 더 따라가 보도록 할 것이다.

발견된 익명적 이중체는 이제 코기토를 확언(affirmation)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확실성의 내용을 캐묻는다. 데카르트에게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확실성이 아니라, 그 확실성의 ‘내용’, 달리 말해서 코기토의 사유속성(물론 후에 데카르트는 이것을 실체화한다)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 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인지를 아직 자세히 모르고 있다(AT. 25).

 

우선 드러나는 것은 질문의 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이동”(RSA 17 주2)이다. 리쾨르는 이와 같은 질문의 이동에서 드러나는 être 동사의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재구성한다. 즉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재한다’에서처럼 절대적 사용과 ‘나는 어떤 것이다’에서처럼 술어적 사용 사이에서 흔들리는 être 동사를 통해 [그러한 질문의 이동은] 준비된다. 나는 무엇인데, 그게 무엇인가?”(ibid.)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 데카르트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져 있다. 이 ‘나’는 “회의하고, 구상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원하고 원치 않으며 또한 상상하고 느끼는 어떤 것”(ibid.)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엇’에 대한 대답이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정들은 다만 일시적이며, 따라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코기토는 여전히 잔여적인 것을 내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다양한 작용들을 드러내는 ‘나’의 비역사적이고 이를테면 일시적인 동일성일 수밖에 없다. 이 동일성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영속성과 변화라는 교대를 벗어나는 어떤 같은 것(même)의 동일성이다. 왜냐하면 코기토는 순간적이기 때문이다”(RSA 18).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코기토는 앞서 양식이 바라는 바, 그런 조화로운 능력들의 일치가 아니며, 단속적으로 결합되는 ‘인상’으로 남는다.(11) 내 생각에 리쾨르의 이 해석은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이라는 코기토의 이중체가 출현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이 이중체가 도처에서 출몰하기 때문에 코기토는 그저 직관적으로 ‘생각한다, 존재한다’라는 텅 빈 울림만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그것이 ‘양식’의 기준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양식은 애초에 이중체의 출현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혹은 그러한 일방향성에 반하는 어떤 유령적인 것, 탈주적인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코기토의 본질, 그 ‘무엇임’(whatness)은 리쾨르의 입장에서는 능동적으로 해석되며 그 결과 충전(saturate)되어야 하는 해석학적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코기토의 텅 빈 직접적 형식은 해석의 우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증언’되어야 한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해석의 주체’며 이에 상응하는 것이 저 ‘아무도 안의 주체’다. 결과적으로 리쾨르가 주체론의 차원에서 맞서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 ‘아무도 안의 주체’가 된다. 해석학적 주체는 도처에 출몰하는 이것을 끊임없는 해석의 노동을 통해 잡아 묶는다. 하지만 애초에 ‘토대주의’는 붕괴되었고, 그것이 어떤 ‘실체’로서 회복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리쾨르도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코기토의 확실성은 진리에 대한 다만 주관적인 판본을 제공할 뿐이다. 확실성이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지 아는 문제와 관련해 악령의 지배는 계속된다. 나의 영혼이 순수한 지성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학문의 내적 필연성이다. (...)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나의 자아에게만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Ibid. 19). 게루(M. Gueroult)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리쾨르는 학문의 내적 필연성에서 가정된 그 확실성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인정조차 불완전하다는 것은 분명 금방 드러난다. 이른바 해석학의 주체, 그 학문의 주체는 ‘아무도 안의 주체’와 맞서면서 자신의 잔여성을 시시각각 느끼면서 애써 노동하는 인격적인 데미우르고스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편에서 이 확실성은 지켜질 수 있다. 리쾨르는 여기에 어떤 양자택일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신의 길’과 ‘선험의 길’이다.

 

 

<세 번째 성찰>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이 증명[세계의 토대에 ‘신’을 끌어들이는 증명]은 발견의 질서, 혹은 오르도 코그노센디(ordo cognoscendi)를 뒤집고 있다. (...) [즉] 이 증명은 발견의 질서를 다른 질서, 즉 ‘사물의 질서’ 혹은 오르도 에센디(ordo escendi)를 위해 뒤집는다. 후자는 종합적 질서이며, 이것에 따라 전자에서 단순한 고리인 신은 첫 번째 고리가 된다. (...) 코기토는 두 번째 존재론적 서열로 슬며시 이동한다. (...) 따라서 신이 나 자신의 존재이유(ratio essendi)라고 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불완전한 존재이고 결여의 존재인 한, 나 자신의 인식근거(ratio cognoscendi)가 된다. (...) 따라서 양자택일이 열려진다. (...) 그것은 [이제] 칸트의 “나는 생각한다”가 되어야 한다. <초월론적 연역>은 후자의 명제가 “나의 모든 표상들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문제제기는 어떤 의미에서 고양되어 다시 나오고 있지만,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이야기되는 인격, 대화에서 나-너, 역사적인 어떤 인격의 동일성, 책임을 지는 자기 등과 맺는 관계의 상실이다(RSA 19-22).

 

 

첫 번째 출구는 데카르트에게 이미 마련된 것이지만 두 번째 출구는 칸트에 이르러 완성된다. 전자는 일종의 대타자(신)의 권위에 기댄 논증을 통해, 후자는 초월적인 ‘나’를 정립하는 선험적 논증을 통해 출구를 개척한다. 하지만 리쾨르에게 이러한 출구는 코기토의 잔여성을 일시적으로 유보해 놓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적 위치에서 끌어내려진 코기토의 모멸감이 해소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멸감’이라고 표현한 것은 (니체와) 프로이트에 의해 완벽하게 타격 받은 주체성의 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즉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의 과정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리쾨르의 데카르트적 주체의 해석학적 해체 과정을 좀 더 알기 위해 프로이트의 에움길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부분이 들뢰즈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식에 대한] 탈취의 세 번째 단계는 정신분석 이론 안에 나르시시즘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자아 충동(Ichtrieb)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라는, 그리고 충동의 다양한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그 자체로 다루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자아는 더 이상 코기토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 그것은 쾌락자아이다. 이것이 바로 반성철학의 제일 큰 시련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직접적 통각의 주체 그 자체이다. (...) 이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필증적인 진리가 말해지자마자 이것이 유사명증성을 통해 길이 막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산된 코기토(Cogito avorté)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반성의 제일 진리의 자리를 이제껏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에고 코기토라는 발원지에서 모든 파생적 형식의 충동이 프로이트가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른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선결적 사실들에게로 그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RDI 602-603).(12)

 

 

따라서 코기토 명제는 처음부터 ‘쾌락자아가 형성한 유사명증성’ 안에서 움직인 것이며, 코기토는 애초에 유산되어 있었다. 이것은 리쾨르가 종동 정신분석을 지칭하는 바, 그 ‘주체의 고고학’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양자택일의 선택지로 내세웠던 그 두 가지 사실이 단지 유산된 코기토의 쾌락추구 경향 안에서 발생한 궁여지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첫 번째 선택지에서 우리는 코기토가 신을 존재근거로 삼고 마침내 인식근거로 고양시킬 때, 어떤 신적인 것이 인간의 양식에 투여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관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논문의 맨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유산된 코기토가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투여를 통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두 번째 선택지에서 칸트적인 유아론은 대상으로의 리비도 투여를 자아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자아를 충동의 한 대상으로 다루고자 하는 유산된 코기토의 간계일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유산된 상태의 이 코기토가 이만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리쾨르는 이에 대해 ‘자아는 자기 집의 지배자가 아니다’라는 정신분석의 상투적인 격언으로 대답한다(RDI 604). 사실 리쾨르에게 이에 대해 대답할 기회는 앞으로 많다. 우선 이 상투적인 대답에 맞서 ‘누가?’라고 한 번 더 묻는 작업이 리쾨르에게는 남았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수준에서 어떤 재조직화가 산출되는데, 이 재조직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수동적 자아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순간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능동성은 오로지 변용으로서만, 심지어 양태변화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양태변화이고, 이런 체험 과정에서 자아의 배후에는 다시 자신에게 ‘타자’로 다가오는 어떤 나Je가 있다. 능동적이지만 또한 균열된 이 나는 초자아의 기저일 뿐 아니라 나르키소스적 자아의 상관항이기도 하다. 수동적이고 상처받은 이 자아는 폴 리쾨르가 “유산된 코기토”라고 그럴듯하게 명명한 어떤 복잡한 총체 안에 있다. 이런 유산된 코기토 외에 다른 코기토는 없다. 그런 애벌레-주체 외에 또 다른 주체는 없다(DDR 146).

 

 

재조직되는 것은 능동성이다. 이에 앞서 말했듯이 이 능동성은 자아를 구성하고자 하는, 주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유산된 코기토의 능동성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유산된 코기토를 능동성으로 만드는 수동적 역량이 선행한다고 본다. 우선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어떤 양태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능동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동성을 촉발하는 ‘어떤 나Je’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이것이 어떤 ‘타자’라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신’이라든지, ‘초월적 종합을 수행하는 선험적 자아’라고 볼 수는 없다. 오직 유산된 코기토 안에서 우리는 이 타자를 알아볼 뿐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애벌레-주체’라고 명명한다.

 

[주석]--------------------------------------------------------------------------------------------------------------------------------------------------------------------------------------------------------------

1) 소피스트들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에 관한 선구적이며 탁월한 연구성과로는 ‘Kerferd 2003’ 1-2장 참조.

2)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πάντες ἄνθρωποι τοῦ εἰδέναι ὀρέγονται φύσει.”(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980a).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언급 이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다. 형이상학의 첫 부분을 ‘사유의 욕망’과 ‘감각능력’ 그것도 시각의 우월성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의 특권적 위치를 설파하면서, 그것이 사물들의 ‘차이’와 ‘공통점’(동일성)을 가장 잘 ‘지각’한다고 말한다. 이때 차이는 주로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공통적인 것은 주로 기하학적인 또는 수학적인 공통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측면에서 이 구절은 당시의 헬라인들이 주로 ‘보는 것’을 즐기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연중 대부분을 축제라는 ‘보는 즐거움’에 싸여 살았다.

3) 인용은,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1997을 활용하였다. 인용문 뒤의 표시는 Adam-Tannery판(Oeuveres de Descartes, Vol. 13, Paris, 1974-1986)의 쪽수이다. “Le bon sens est la chose du monde la mieux partagée; car chacun pense en être si bien pourvu, que ceux même qui sont les plus difficiles à contenter en toute autre chose n'ont point coutume d'en désirer plus qu'ils en ont. En quoi il n'est pas vraisemblable que tous se trompent: mais plutôt cela témoigne que la puissance de bien juger et distinguer le vrai d'avec le faux, qui est proprement ce qu'on nomme le bon sens ou la raison, est naturellement égale en tous les hommes; et ainsi que la diversité de nos opinions ne vient pas de ce que les uns sont plus raisonnables que les autres, mais seulement de ce que nous conduisons nos pensées par diverses voies, et ne considérons pas les mêmes choses. Car ce n'est pas assez d'avoir l'esprit bon, mais le principal est de l'appliquer bien. Les plus grandes âmes sont capables des plus grands vices aussi bien que des plus grandes vertus; et ceux qui ne marchent que fort lentement peuvent avancer beaucoup davantage, s'ils suivent toujours le droit chemin, que ne font ceux qui courent et qui s'en éloignent.”

4) 이에 대해 질송(E. Gilson)은 다음과 같은 자세한 주석을 달고 있다: 이 표현은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구별하는 본성적 능력. 2. 지혜[la Sagesse, 사려, 분별]. 1. 단축형태로 사용될 경우: ‘sens’(이것이 외적 대상들을 지각하는 능력, 즉 시각, 촉각 등등이라는 의미가 아닌 경우)는 ‘이성’(raision)의 동의어로 표현되거나, 판단력(faculté de juger)을 의미한다(아래를 보라. p.2, I.26-27: “... 왜냐하면 이성(raison) 또는 양식(sens)을 위하여 ... ”. p.1, I.18에 인용된 몽테뉴의 텍스트 참고). 완전한 형태, 즉 ‘le bon sens’로 사용될 경우, 이것은 ‘좋은 판단의 능력’(puissance de bien juger)이라는 특별한 뉘앙스를 표현한다. 또한 이것은 자연의 빛(lumière naturelle)이라는 관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때에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우리의 능력이라는 의미와 상응하며, 변조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 즉 신으로부터 전달받은 형태라는 뜻으로 파악된다. 『방법서설』3부, p.27, I.24-25 참고. 그리고 다음 구절도 참고하라. “모든 인간은 동일한 자연의 빛을 소지하고 있고, 어떤 동일한 관념을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러나 ... 그 빛을 잘 부여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메르센에게 보내는 편지」 1639년 7월 16일자, t.II,p.597, I.28-p.598, I.9). ‘bon sens’는 프랑스어 특유의 관용용법 때문에 라틴어역인 ‘bona mens’로 하기가 불가능하다. 에티엔 드 쿠셀(Étienne de Courcelles)은 그것을 포기했지만(III부 p.24, I.13과 라틴역, t. VI,p.553 참조), 데카르트는 라틴어로 말해야 하는 때에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Epist. ad Voetium t. VIII, p.51, I.19: “판단력 또는 양식을 가지는 어떤 사람Qui aliquid habeat judicii sive bonae mentis”) 이러한 [라틴] 번역은 아래의 의미와 더불어 혼란을 초래하는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기도 한다”(René Descartes, commentaire par E. Gilson, Discours de la Méthode, Vrin, 1987, pp.81-82). 2. 이와는 반대로 라틴어 ‘bona mens’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경우, ‘bon sens’는 스토아적 의미에서의 ‘지혜’라는 의미를 포기한다(세네카, 『지복의 삶에 대하여』De vita beata, XII, 1 참조). 이것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 I부에서 “좋은 정신, 또는 보편적 지혜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de bona mente, sive de hac universali sapientia(t.X, p.360, I.19-20. 『규칙』 III부; t.X, p.395, I.17-22 참조)라고 말할 때의 그런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베이예(Baillet)가 Studium bonae mentis라는 제목의 번역을(『데카르트의 삶』Vie de M. Des Cartes, 1691, t. II, p.406과 『전집』, t. X, p.191) étude du bon sens(이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즉 Étude de la Sagesse나 보다 간단하게 De la Philosophie로 번역되기도 한다)로부터 그 표현을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의 데카르트 언급 참조.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ce mot Philosophie signifie l’étude de la Sagesse.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음도. “그리고 나는 양식(bon sens (scil. la Sagesse))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없다는 것과, 우리가 잘 명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초래할 것인데, 그것이 양식(bon sens)입니다”(1645년 6월, t.IV, p.237, I. 21-24). 이 두 의미는 다른 곳에서는 서로 상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식(le bon sens)은 만약 우리가 그것을 잘 사용한다면 bona mens, 즉 지혜(Sagesse)라고 할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지혜(la Sagesse)는 양식이 도달할 만한 가능한 최고의 완전성의 지점은 아니고, 그 자체로 규칙적인 용법은 아닌 은혜(grâce, 재능)에 이르는 방법이다. Discours de la Méthode; commentaire par Étienne Gison, Paris; Vrin, 1925. pp. 85-86.

5) “1)기호는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화의 무제한성). 2)기호는 기호로 환원되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기호는 하나의 원환에서 다른 원환으로 비약하며, 끊임없이 중심을 바꾸는 동시에 그 중심에 일치시킨다(기호의 메타포 내지 히스테리). 4)원환의 확장은, 기의를 제공하고 기표를 남아돌게 하는 해석에 의해 항상 보장되어 있다(사제의 해석). 5)기호의 무한한 전체는 결핍만큼이나 과잉으로 나타나는 지고의 기표로 소급된다(전제군주적 기표, 체계의 탈영토화의 극한). 6)기표의 형식이 실체를 갖거나, 기표가 얼굴(Visage)이라는 신체를 갖는다(재영토화를 구성하는 안면성이라는 특질의 원리). 7)체계의 탈주선은 부정적 가치를 할당받으며, 기표적 체제의 탈영토화 능력을 넘어선 것으로 단죄된다(속죄양의 원리). 8)비약과 규제된 원환, 예언자적 해석의 규칙, 안면화된 중심의 공공성(publicité), 탈주선의 취급 모두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속임수(tricherie)의 체제다”(DMP 226). MP의 이 장은 해석학과 많은 관련성을 가진다. 우리는 뒤에 이에 대해 다시 살펴볼 것이다.

6) 유사 구절이 민수기 14:14에도 나온다.

7) “죽음을 앞두고 모세는 배신의 위대한 찬가 소리를 받아들인다. 신의 사제와 반대로 선지자는 근본적으로 배신적이며, 신에게 충실한 채 머물러 있는 이들보다 신의 명령[질서]을 훨씬 더 잘 실현한다. 신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거듭 신을 배신하는 그들을 개종시키라고 한다. 그러나 요나의 첫 행동은 반대 방향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즉 그 또한 신을 배신하며, 아도나이의 얼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친다. (...) 그런데 신의 얼굴로부터 도망친 요나는 바로 신이 원했던 것을 정확하게 수행했다. 그는 니느웨의 악을 자신 위에 짐졌던 것이며, 이는 신이 원했던 것보다, 그리고 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그의 뜻을 수행한 것이다. (...) 이는 바로 요나가 탈주선에 자리잡음으로써 서약을 새로이 했기 때문이다”(DMP. 131)

8) 나는 이러한 주체화의 이중적 양상이 만나는 지점을 ‘공명’(résona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공명은 언표주체와 언표행위주체의 극간이 최소화되면 될수록 더 커진다. 코기토의 경우 공명은 최대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명이 역설적인 것은 공명이 가능하려면, 어쨌든 두 주체 간에 극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치’로 다가갈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무한소의 ‘잔여’가 남아야 한다. 이진경은 이를 ‘잉여’라고 부른다. “주체화 체제에서 잉여성은 주관적 공명[이다.] (...) 따라서 코기토의 의식적 이중체에서 언표행위의 주체인 나와 언표주체인 나가 일치하는 경우는 공명의 최대치라고 할 수 있[다.]”(이진경,『노마디즘 I』, 휴머니스트, 2002, pp. 396-98 참조.) 결국 이 잔여는 ‘정념’이 될 것이다.

9) 그래서 데카르트적 회의의 가장 궁극적인 작동주체는 은폐된 채로 텍스트 여기저기에 출몰한다. 그것은 흡사 ‘유령’의 모습을 닮았다. 그것은 주체의 ‘흔적’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긍정되는 코기토는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의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10) “오 누구, 오 아무. 오 아무도안, 오 당신이여. / 그것이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디로 간 것인가?”(파울 첼란Paul Celan 지음, 김영옥 옮김, 「그들 안에 흙 있었다」, 『죽음의 푸가』, 청하, 1986. 중) ‘나’와 ‘타자’를 중립화시키는 이 ‘아무도 안’의 주체, 이것은 익명적이지만 어쩌면 ‘죽음’이나 ‘파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이 측면에 대해 첼란과 똑같은 언급을 한다.

11) 리쾨르의 코기토 비판은 마리온(Marion, J-L)의 언급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 “생활 시간의 원천적인 인상은 애초에, 더 이상 종합적 단일성의 통각이 아니다. 따라서, 원천은 자기 재현으로서의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앞서의] 그러한 이해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되는 직관 안에서 “나는 촉발된다”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정지하거나 찰나적이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 의식의 상에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그래서 그것은 의식을 일깨우고, 의식 안에서 사라지며,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인상에로 그것을 열어 놓는다.”(Marion, J-L. (trans.) Jeffrey L. Kosky, Being Given-Phenomenology of Giveness ,California: Stanford Univ., 2002, p. 255).

12) 이와 관련하여 리쾨르 초기 저작에서의 다음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신체와 그것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은 비의지적인 것과 더불어 하나의 국면에 접어든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을 기술하고자 하는 과제는 실재로, 코기토의 완전한 경험의 수용체가 되어간다는 것의 하나다. 이때 이것은 심지어 그것의 가장 혼란한 정서적 잔여를 남기기도 한다. 필요(욕구)는 “나는 ~을 욕구한다”는 것으로 취급되는데, 이는 “나는 ~하곤 한다”는 하나의 습관으로서, 즉 나 자신의 성격이 된 하나의 특성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지향성이 한 편에 있고, 자기(soi)와 대응하는 하나의 대상이 또 한편에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주체의 흔적들인 바, 이를 이해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나 주체에 대한 어떤 사유란 이론적 표상의 수준에서 보다 수월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심지어 심리적 표지들 (다시 말해, 어떤 특정 대상에 속한 지향과 그 지향을 통한 일종의 주체-영역)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의 무의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RVI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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