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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2]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수유너머웹진 2016.08.29 09:34 조회 수 : 51

해석과 사건 (2)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의 경우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은 카오스로부터 나오는 생성, 즉 사건을 존재의 부동성 안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해석해 감’을 드러낸다.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접근해 가면서 이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먼저 ‘생성’과 ‘존재’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 보자.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oulon mounogenes)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ēde teleston)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1. (...)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DK28B)2.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성이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또한 전제는 생성을 ‘감각’으로 놓는다는 점이다. ‘생성=감각’의 사유불가능성을 통해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도출하는 이 과정은 그것이 ‘표상’되어 ‘해석’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고, 로고스를 덧붙일 수 없음을 말한다.3 이렇게 덧붙여질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적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과 우주는 영원히 혼돈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사회정치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인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덧붙여진 로고스를 통한 ‘존재의 구제’는 사실상 생성하는 이 사회와 문명의 구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실재로 파르메니데스가 현상(사회와 문명)을 시야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의 터 위에 세움으로써 보존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명시적으로도 파르메니데스는 현상에 대한 지식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여신이 가리켜 보이는 두 길 중, 진리의 길, 존재의 길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추론은 “그대는 모든 것들을 배워야(pythesthai) 한다. 설득력 있는(eupeitheos)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과, 가사자들의 의견들(doxai)을. 그 속에는 참된 확신(pistis)이 없다. 그렇지만 그대는 이것들도 배우게(mathēseai)될 것이다. ... 라고 여겨지는 것들(ta dokounta)이 어떻게, 내내 전부 있는 것들로서(per onta)4 받아들여질 만하게(dokimōs) 있어야 했던가를”이라는 이어지는 단편에서 확인된다(DK28B1).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인 듯한’ 지식, 즉 doxa는 혐오할만한 대중의 지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지식마저 대상으로 여긴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에게 doxa는 신적인 것과 구분되는 ‘가사자들’의 의견이며, 여기에는 ‘참된 확신’이 없다.5 이러한 의견들을 지식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절은 마지막 구절이라 생각된다. 즉 “...라고 여겨지는 것들[가상]이 어떻게 내내 전부 있는 것들[존재]로 받아들여질 만하게 있어야 했던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매우 심대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어떻게’란 가상이 존재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는 ‘경로’를 일컫는 것인가? 우선 분명한 것은 가사자들의 ‘dokein’이 아닌 지식은 ‘있는 것들’[존재]에 관한 지식이다. 반대로 다른 것은 ‘비존재’의 지식이다. 존재에 대한 지식이 가상에 의해 채워지는 과정은 가사자들이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사유의 길이 될 것이다.

 

이 추론을 따라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것, 즉 가상을 ‘전적으로’ ‘비존재’로 몰아넣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비존재’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입론에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논변을 따라 나는 세 가지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① 사유되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존재-초재적) ② 감각되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존재-내재적) ③ 사유되지도 감각되지도 않으며 이름 붙여질 수도 없는 것(비존재). 여기서 감각되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은 내재적이지만 매우 부정적인 함축을 띄게 된다. 왜냐하면 아에티오스의 단편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감각불신론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감각들은 거짓되다”(DK28A49) 어쨌든 나의 이러한 구분에 일정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심플리키오스와 플루타르코스의 다음 두 단편이다. “그리고 실로 이 책들에서 그들은 자연을 넘어선 것들(ta hyper physin)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들(ta physika)에 관해서도 논의하였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그들은 ‘자연에 관하여’라는 표제를 붙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DK28A14).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두 부류(physis) 가운데 어느 쪽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에게 응분의 것을 부여하면서 하나이자 있는 것의 종류(idea)에는 사유되는 것(to noēton)을 놓고 (영원하고 불멸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있는 것’이라 불렀고, 자신과 동일하며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불렀는데), 질서 없이 움직이는 종류에는 감각되는 것(to aisthēton)을 놓는다”(DK28A34). 두 단편 모두 플라톤주의의 틀이 완연하지만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단편은 더 그러하다. to noēton과 to aisthēton의 구분은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단편에서 존재와 생성은 모두 다루어지는 대신 전자에 사유가능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에 사유불가능성의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학문적 대상으로서 ‘존재’를 승격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성’의 ‘사실’이나 ‘효과’가 존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감각가능한 것, 이름이 있는 것으로 여전히 남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이와는 다른 결론도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DK28B2에 더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는 사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6 여기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다’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길과 “‘있지 않다’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을 나누면서 전자가 배움과 사유를 위한 길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는 진리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가 아닌 길로서 분명히 갈라지는 것이다(Kenny 2004, 41 참조)7. 이렇게 분명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존재하는 것은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알 수도 없다.8 이와 같은 관점은 단편 3에서 재확인된다. 즉,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DK28B3).9 

 

이때 사유의 주체는 바로 다름 아닌 누스(noos)다. 누스는 존재를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사유작용의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은 다소 희한한 방식으로 진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는 것을 있는 것에 붙어 있음으로부터 떼어 내지 않을 테니까.”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해석하면, 인간은 항상 누스를 통해 사물이나 사태를 인식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존재(‘있는 것’)를 존재의 상태(‘있는 것에 붙어 있음’)로 파악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자는 “질서잡혀(kata kosmos; nach der ordnung; in order)” 있는 경우도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Ibid.)10. 존재가 존재자에 부착되어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결과적으로 doxa와 참된 지식을 연결할 만한 어떤 것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다면, 존재에서 존재자(현상, 가상)로의 필연적 연결은 한갓 우연적인 결과로 전락할 것이고, 우연적인 것에 관한 지식은 그 대상의 존재를 보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앞선 절에서의 결론과는 다르게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의 구도는 현상을 구제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하게 된다. 이 실패의 과정은 앞서 내가 구분한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의 세 가지 대상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배제의 논리에 따라 하나씩 소거되는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것은 ‘존재-초재적’ 대상이다. 우선 ‘비존재’가 소거되는데, 이는 파르메니데스가 그것이 ‘사유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다음으로 ‘존재-내재적’ 대상이 소거되는데 그것은 이제 감각가능한 것으로서 존재와의 필연적 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세 번째로, 단편 6에 이르면 파르메니데스의 논변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에 대해 앞서와는 다른 방향을 취한다. 단편 2에서의 방향이 존재에서 사유로 가는 방향이라면 여기서는 그 반대의 방향을 지시한다.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mēden)은 그렇지 않으니까.”(DK28B6)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사유는 차단되어야 한다.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DK28B7). 이 정도에 이르면 우리는 어째서 파르메니데스가 억견의 길조차 알아야 한다고 서두에 밝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존재자에 대한 잡다한(결합된) 인식이 날카롭게 구분된다. 이런 논변은 필연적으로 감각지각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사유의 방향에서 내재적 대상에 대한 기각은 확증된다. 그리고 마침내 ‘생성’ 자체를 기각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DK28B8). 마지막으로 결론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향에서 갈무리된다.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οὕτως ἢ πάμπαν πελέναι χρεών ἐστιν ἢ οὐχί)(Ibid.)11.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분명 ‘생성’과는 다른 평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추론될 때 비로소 존재는 ‘하나’이며, ‘연속성’을 띄는 것으로 정당화될 것이다12. 왜냐하면 현상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은 불연속적이며, 그것이 감각적인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존재란 ‘지금 전부 함께’(all at once, a continuous one) 있는 바로 그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생성’도, 더불어 감각적인 것도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런 존재론적인 전제 하에서만 파르메니데스의 ‘생성의 부정’이 이해되며, 나아가 하나의 절대적인 양도논법, 즉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라는 진술이 성립되는 것이다.13 그렇다면 이때 ‘전적으로 없는 것’은 진술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파르메니데스의 이 양도논법의 역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언설되고 있으니 말이다. 앞서의 논의와 더불어 이 역설을 재진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언설되지 않고, 동시에 언설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도대체 부재하는 존재(비존재)와 부재하는 언설(침묵)은 어떻게 존재와 언설을 한계짓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적극적인 응답이 없는 한 역설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설은 왜 생겨나는 것인가?14 이것은 역설에 대한 즉설을 피하고, 질문 자체의 근원을 톺아보기 위한 다른 차원의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다른 차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길’에 많은 ‘표지들’(σήματα) 즉 그러한 존재를 드러내는 신호(sign)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기서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의미에서 ‘σήματα’를 사용하는 것일까? 이 어휘에는 ‘성좌’라는 의미 뿐 아니라, 어떤 초재적 존재로부터의 전언이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15.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표지’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지점은 존재, 즉 초재적 평면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존재의 '이해' 즉 로고스는 이 표지에 대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완연한 생성의 측면은 말해질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것이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은 로고스의 장에 들어설 수 없는 환영(phantasma)이 거기에 있다는 것인 반면, 존재는 ‘부동’하는 실체로서(“[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DK28B26) 비로소 ‘대상’(gegenstand)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성’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DK28B20). 해석은 '표지'라는 '들리는 대상'을 위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거기 응답하면서 이루어진다.

 

 종합하자면 ‘생성’이란 ‘말해질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으며,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성의 편에는 어떤 ‘참된 확신’(πίστις ἀληθής)도 있을 수 없지만, 존재의 편에서 그것은 가능해진다. 이 참된 확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망각되지 않음’(ἀληθής), 즉 ‘진리’와 연관된다. 존재는 망각되지 않지만, 생성은 줄곧 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고스의 범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모든 것들은 생성소멸하며, 이름이 없다. 이름 있는 것은 말해지고, 들리는 것이어야 하며, 이것을 통해야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 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DK28B, 28-30).

 

‘가사자들’(mortal)이 붙여 놓은 이 ‘이름들’은 위에서 우리가 발견한 ‘표지’와 비교될 때 앞서 처음에 논한 그 ‘이름’과는 사뭇 다른 함축을 가지게 된다. 표지는 존재라는 확고부동한 수준에서 ‘가사자들’에게 도달하는 전언인 반면, 이름들은 바로 ‘가사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사자들의 그 이름들이 존재의 표지에 근접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여기서 ‘존재의 이름’은 바로 ‘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감각적인 이름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유’를 통해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고, 모든 감각적인 이름들을 멀리 “쫒아냄으로써” 알려진다16. 생성하고 소멸하는 감각적인 이름들을 내치는 이 과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역설’일 것이다. 그리고 역설은 매번, 감각적 이름들이 제 주장을 할 때마다 필요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동일성17을 확보하기 위해 ‘사유’라는 ‘한계’를 설정하고, 감각을 그 한계 바깥의 ‘혼돈’(역설)의 영역으로 추방하는 작업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역설’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여기에 이르러 철학은 비로소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이전의 뮈토스적 요소를 로고스적 용어들로 대체하면서 이루어진다(이러한 ‘사유의 노동’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18 그렇지만 신화적 요소의 흔적은 여전히 남는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는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꽉 붙들고 있”다고 말한다(DK28B31)19. 아낭케는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뮈토스로서, 로고스에 대립한다. 여기서 ‘한계’는 바로 로고스의 편에 있으며, 아낭케는 ‘필연’이지만, 그것은 사유의 필연성이 아니라, 질료적인 의미에서의 ‘혼돈’(카오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이 다가가기 힘든 질료적인 토대이자, 신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한번 ‘한계’와 ‘아낭케’에 주목해 보자. 이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는 ‘필연적 한계 안의 연속성’이라는 특유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 특성은 일견 매우 모순되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20. 그것이 한계를 가진다면 연속성은 어떤 측면에서 불연속성을 내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파르메니데스는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ibid. 31)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ibid. 32). 따라서 ‘한계’는 필연적으로 ‘결핍’(미완결)을 피하기 위한 논리적 결론인 셈이다21.

 

즉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가 된다22. 사유될 수 있으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으로서의 ‘존재’는 바로 ‘사유-총체’로서의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은 ‘존재’ 안에서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름에는 표지를 부여받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모든 이름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한계’다. 하지만 ‘표지’는 또한 이름을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초재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표지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감각적인 것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어딘가를 떠돌수도 있다. 이것이 또 다른 ‘한계’다. 따라서 결핍은 두 가지 방면에서, 즉 하나는 사유(가사자)의 측면에서(이름 없는 표지), 다른 하나는 존재의(신적인) 측면에서(표지 없는 이름) 발생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뮈토스의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로고스의 측면에서 결핍이 발생한다.23 따라서 논의의 초기에 제기된 그 ‘역설’은 이 양방향, 즉 이름 없는 표지와 표지 없는 이름 간에 발생하는 긴장으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철학사 안에서 이 역설(또는 긴장)은, 생성이 존재라는 총체성 안으로 수렴되는 방향으로 간다. 앞서 말한바, 환영에 해당되는 ‘비존재’는 여기서 배제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의 논법을 생각해 보라. 그도 마찬가지로 귀류법이라는 배제의 논법을 통해 이 생성의 환영을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논증해 내지 않는가?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우주에 남겨진 존재는 영원한 실체이며, 생성은 ‘표지’를 공유하지 못하는 무능력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생성은 존재의 총체성 안에서, 즉 어느 정도의 ‘한계’ 안에서, 그 표지를 할당받고, ‘한정’됨으로써 수렴되며, 나머지(‘잔여’)는 배제된다. 바로 이것이 ‘해석해 감’의 의미가 될 것이다. 여기서 배제되는 잔여는 비존재이며, 카오스며, 뮈토스다. 반대로 여기서 해석의 과정, 나아가 인간의 삶과 폴리스적 코스모스 안으로 승격되는 것은 존재와 로고스다. 이 두 역설적 항의 ‘거리’ 안에는 늘 긴장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 자체를 존재로 파악하는 사유를 펼친다. 파르메니데스의 경우 존재는 부동의 것으로서 비존재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때 존재는 초재적 특성을 띄게 되며, 현상에 대한 어떤 구제책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변화는 명백하게 내재적 특성을 띈다. 나아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내재적인 특성들을 감각적인 것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진리의 길에서 기각함으로써 헤라클레이토스가 감각을 일차적으로 긍정한 측면에서 더 나아간다. 즉 헤라클레이토스의 내재적 우주에서는 반드시 감각이 ‘본성’을 파악하기 위한 첫 관문이었다면, 파르메니데스의 초재적 우주에서는 지성(noos)만이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것은 현상의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상정하기 시작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이라고 하겠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현상 저편’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성할 수 없었다. 그는 변화라는 우주의 질서가 너무나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고대적인 유물론의 시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로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론의 분야에서 헤라클레이토스를 앞서 원자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들 고대 유물론자들은 ‘변화’보다, 변하지 않고, 분할 불가능한 ‘존재’라는 표현에 더 이끌린 것이다24. 사변적으로 그것이 더 굳건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25 결국 초재적인 존재론과 내재적인 존재론은 상호확대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또는 상호적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며 학문사 전체에 있어서 전자의 존재론이 우위를 점한채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의 우위나 열세가 곧 그 사상의 우열을 입증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성은 오히려 다른 쪽에 있다. 그가 파르메니데스에 비해 로고스(Logos)의 용법을 자연주의적으로 연장했다는 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26 프리도 릭켄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한편으로 우리의 오관이 매개하는 경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진리 해명의 유일한 수단인 ‘로고스’를 통한 인식, 이 양자 사이의 구별을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강조한다.”27 즉 파르메니데스는 로고스를 ‘존재의 인식’에 할당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방면에서 로고스를 덜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이렇게 ‘인식’의 측면에서도 사용하지만, 존재, 즉 ‘생성’ 자체에도 적용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생성을 상징하는 것은 ‘불’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불’이 곧 ‘로고스’ 자체다. “이 세계(kosmos)는, 모두에게 동일한데, 어떤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는 불(pyr aeizōon)로서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꺼진다.”(DK22B30) 세계가 불이며 이것이 적절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로고스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릭켄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그것은 반대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그 관계 상황이며, 또 그 반대자들의 분리와 교체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모든 생성과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질서의 위대성이다. 모든 인간은 이 로고스에 참여한다”(Ricken 2000, 63)

 

로고스가 불이고 그것이 곧 영원한 법칙이며, 질서며, 인간이 거기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로고스는 앞서 파르메니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그 인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바로 존재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그 자체로 인간이자 자연이며, 이 둘 모두가 속해있는 존재론적인 평면(ontological plane)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과 존재를 예리하게 구분하고, 로고스를 존재의 편에 세우면서, 동시에 인간의 특유한 ‘능력’으로 조명하는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어떤 동시적인 현존, 인간과 자연의 그 구분불가능한 법칙적인 필연성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이 고대 자연주의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스토아학파에 근근이 이어지고 이후 그 명맥이 오랫동안 끊어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로고스에 대한 자신만의 용법을 통해 ‘해석’과 ‘사건’을 보는 입장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로고스가 “언제나 그러한 것으로 있지만”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한다(DK22B1).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에게는 “본성에 따라(kata physin) 구분하고 그것이 어떠한지를 보이면서 상술하는 그러한 말들과 일들”이 있는바, 이것은 바로 그 자신이 로고스를 로고스에 따라(‘본성에 따라’) 해석하고(‘구분하고 ... 보이면서 ... 상술하는’)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중들은 “마치 그들이 자면서 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미망에 빠져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대중들의 ‘경험’으로부터 유리되고 ‘은폐’된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철학자가 그것을 ‘본성에 따라’ 설명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마치 자면서 하는 것들을 잊듯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로고스가 어떤 초재적인 실존을 가지는 존재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것은 존재로서의 로고스로부터 오는 어떤 전언의 표지(ἕρμα, herma)28를 가지는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은 바로 그 해석자(hermeneus)임을 자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을 짚고 넘어가자. 즉 해석자로서의 헤라클레이토스가 바라보는 우주는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로고스, 그리고 로고스로서의 표지(herma)'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지만, 그만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이에 관해서는 섹스투스의 그 다음 직접인용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는 공통의 것(xynōi)”임에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생각(phronēsis)을 지니고 있는 듯이 살아간다”고 한다(DK22B2). 이것은 로고스가 보편적으로 경험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스스로의 아집에 빠져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앎’이란 대중적 앎이며, ‘본성에 따른’ 앎이 아닐 것이다29. 이런 앎은 로고스에 의한 로고스의 지식, 즉 해석의 지식이 아니라 그저 견해(억견, doxa)30나 ‘~인 듯한’ 지식일 뿐이다.31

 

또 하나 특유한 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당대의 현자들과 선배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는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호메로스를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원조”, “두들겨 맞을(rhapizesthai)만”한 인물로 묘사한다(DK22B40; DK22B81; DK22B42). 그 이유는 이들 현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의 로고스를 통해 자연의 로고스를 사색하지 않고, 헛된 지식에만 기대어, 즉 과거의 권위에만 기대어 그것을 자랑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 ‘어떻게’ 사유하는가가 더 관건이었던 셈이다. 이 ‘어떻게’는 분명 로고스가 가진 그 표지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2.

 

그렇다면 이러한 로고스를 사유하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가능한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정교한 인식론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가 감각을 일차적으로 신뢰하고 오류가 판단과 같은 영혼의 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는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중시하면서(DK22B55), 감각 기관의 일차적 기능과 영혼의 저급함으로 인한 무지를 비판한다. 그가, “눈은 귀보다 더 정확한 증인(martyres)이다”(DK22B101a)라고 한 것이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혼(barbaros psychē)33을 가진 한에서(DK22B107)” 감각기관은 사람들을 미망에 빠트린다고 한 것은 그가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전언을 일차적인 해석의 자료로 삼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34.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영혼에 의해 제대로 사유되는 진리의 대상은 ‘로고스’이며 이는 당대의 현자들이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적인 로고스를 불신(apistis)한다면 이것은 알려지지 않고 은폐된 채로 지나간다(DK22B86).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신과는 달라서 예지(gnōmē)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DK22B79)35. 인간적인 영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kosmos, 즉 ‘조화로운 전체’라고 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정한 지식이 어떤 ‘공통된 것’(xynōi)이며, 모든 것을 “지배하고(kratei),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다(DK22B114).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식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이를 통해 볼 때, 어떤 개별적인 사항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대상’에 가깝다고 보인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러한 지식을 호흡을 통해 빨아들인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해준다(DK22A16).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지적인 영혼의 능력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DK22B113). 즉 로고스를 알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ginōskein heōutous)과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이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되어 있다”(DK22B116). 하지만 이러한 공통된 본성을 활용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은 가장 큰 덕(aretē)”이지만 “참을 말하는 것과 본성에 귀기울여가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지혜(sophiē)는 이와 다른 사항이기 때문이다(DK22B112).36 이런 공통된 본성이 보편적인 대상(kosmos)에 적용될 때 우리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나 자신’과 ‘본성’을 든다.37 이것들이 로고스가 현상하는 어떤 것이라고 본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자신을 살피면서 또 자연을 살피면서 로고스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석의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현성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해석이 로고스를 ‘통해’, 로고스에 ‘대해’ 이루어진다면, 로고스는 여기서 구별되지만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가지는 자연주의적 용법38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우리는 이 로고스가 어떤 ‘전언’이며, ‘표식’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언의 형식으로 전해지는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로고스는 또한 ‘사건’이다. 로고스의 일반적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사건’ 의미를 추출한다면, 그것은 “thing, spoken of, things, matter”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39 이것은 어떤 ‘것’ 즉, 사건이나 사태를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이러한 사건이나 사태가 ‘존재’라는 단일한 평면 안으로 흡수된다면,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불’로서의 로고스 즉 시시각각 타오르며, 생성하는 사건의 계열로서의 그것(thing)인 바, 질료적(matter)인 세계 자체가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이 세계 자체는 ‘은폐’된 채이며, 다만 로고스를 보는 철학자들에게 전해지는 표식에 의해 해석될 수 있을 뿐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사건'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사건이란 로고스이며, 이는 인간과 자연에 공히 내재한 신성한 것이므로 제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자신이 스스로를 얽맬 수 없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은 스스로를 가두어둘 수 없다. 따라서 앞서의 정식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생성은 존재이며, 존재는 로고스이고, 로고스는 사건이자 그 사건의 표지이므로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해석은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건너뛴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앞서 최초의 장에서 제기한 ‘카오스’의 문제다. 이 두 사람의 철학자가 비록 존재와 로고스를 통해 해석과 사건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할지라도, 이러한 해석과 사건의 보다 근본적인 사태에 해당되는 카오스, 즉 신화적인 것에서 연원하는 세계의 최초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이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고, 사유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면서까지 추구한 철학적 사유의 근본적인 구도는 다시 이들 이전의 철학적 태도로부터 탐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신화적 이미지들로부터의 사유의 변형은 일종의 ‘목숨을 건 도약’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러한 도약을 위해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최초의 잠언가를 우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회차 끝]

 

  1. “파르메니데스는 여기서 혹 시간적 또는 공간적 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어떤 차원에서도 연속된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그는 이미 존재가 시간 안에 실존한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 이러한 애매성은 이어지는 단편들에서도 나타난다”(KRS, 251). KRS는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적 또는 공간적 연속성’(spatial or temporal continuity)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 하지만 그가 시간적 연속성을 거부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는 그래서 최소한 시간적 측면에서 초재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뒤에 언급될 코플스톤의 해석에 대한 반증으로 기능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앤서니 케니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DK28B8을 해석하면서, ‘존재’를 ‘비시간성’과 연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존재는 시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존재가 어떤 시작도 끝도 가지지 않는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존재는 영원할 뿐 아니라, 변화에도 속하지 않고(‘견고하며, 움직이지 않는다’), 또는 심지어 시간의 흐름에도 속하지 않는다(그것은 언제나 현재이며, 어떤 과거나 미래도 가지지 않는다). 과연 무엇이 현재와 미래로부터 과거를 구분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존재도 없다면, 시간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그것이 존재(being)의 한 종류라면, 그것은 존재의 일부일 것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하나의 존재(Being)이다” Anthony Kenn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 I,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p. 203. [본문으로]
  3. “그들이 nous를 강조했다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육신을 저주할 것을 권유한 것은 아니다. … 단순한 동물로 머물 뿐 거기에 logos나 nous처럼 “덧보태어진 것(epiktēsis)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특유의 것이 없다. 그 덧보태어진 것들(ta epiktēta)이 바로 인간 특유의 것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들을 덧보태어 가진 그 만큼만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을 헬라스인들은 말하고자 했다” W. K. C. 거스리Guthrie 지음, 박종현 옮김,『희랍 철학 입문-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광사, 2000, p. 49. [본문으로]
  4.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말할 때 쓰는 단어는 ‘to on’이다. 이는 eimi 동사의 부정사 einai의 현재 분사형(on) 앞에 정관사 to를 붙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 전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대문자로 Being이라 한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전체’로서의 형상을 to on이라고 한 것이며, 생성은 전체를 비껴가는 어떤 것, 그것에 걸리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본 것이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5. 이 부분에서 파르메니데스도 이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doxa에 대립되는 참된 지식으로 epistēmē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pistēmē는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이르러서야 철학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본문으로]
  6.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noēsai)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αἵπερ ὁδοὶ μοῦναι διζήσιός εἰσι νοῆσαι· / ἡ μὲν ὅπως ἔστιν τε καὶ ὡς οὐκ ἔστι μὴ εἶναι, / Πειθοῦς ἐστι κέλευθος - Ἀληθείῃ γὰρ ὀπηδεῖ - , / ἡ δ' ὡς οὐκ ἔστιν τε καὶ ὡς χρεών ἐστι μὴ εἶναι, / τὴν δή τοι φράζω παναπευθέα ἔμμεν ἀταρπόν) [본문으로]
  7. 한편, 조지 톰슨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사적 의의를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뒤에 오는 그들의 계승자들의 저작 속에서 우리는 자유민과 노예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감에 의해 규정을 받아가면서 시민들간의 계급투쟁이 확대, 전개되는 자취를 볼 수 있다.” G. D. Thomson, 『고대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 고려원, 1992, p. 16. [본문으로]
  8. 이 단편의 마지막 행은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로 끝을 맺는다. 이때 ‘지적하다’(φράσαις)는 ‘지시’하다로 새길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지시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 로 이 있지 않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γνοίης)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본문으로]
  9. τὸ γὰρ αὐτὸ νοεῖν ἐστίν τε καὶ εἶναι. 버넷의 번역본에는 “For it is the same thing that can be thought and that can be.”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해석과 보다 가까운 것은 버넷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0. 중요한 구절이다. 각 텍스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Λεῦσσε δ' ὅμως ἀπεόντα νόῳ παρεόντα βεϐαίως· / οὐ γὰρ ἀποτμήξει τὸ ἐὸν τοῦ ἐόντος ἔχεσθαι / οὔτε σκιδνάμενον πάντῃ πάντως κατὰ κόσμον / οὔτε συνιστάμενον. Diels-Krantz 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denn er wird das Seiende von seinem Zusammenhang mit dem Seienden nicht abtrennen weder als solches, das sich ueberall gaenzlich zerstreue nach der Ordnung, noch als solches, das sich also zusammenballe.” KRS 판은 다음과 같다. “for you will not cut off for yourself what is from holding to what is, neither scattering everywhere in everyway in order[i.e. cosmic order] nor drawing together.”(KRS, 262). Burnet 판에는 이 부분의 번역이 없다. [본문으로]
  11. 단편 8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길에 관한 이야기(mythos)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sēmata)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oulon mounogenes)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ēde teleston)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DK28B8). [본문으로]
  12.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방식의 초재적 사유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도 하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감각되는 것들의 실체(ousia) 너머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지만, 만일 어떤 인식 또는 사고가 있으려면 그런 부류의 것들(physeis)[이 있어야 함]을 최초로 통찰하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저것들에 해당되는 말(logos)들을 이것들에다 옮겨놓았다”(DK28A25).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니데스를 ‘자연부정론자’(aphysikoi)로 불렀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그가 운동을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DK28A26). [본문으로]
  13. 하지만 이 양도논법이 실재로 존재와 생성을 가르고,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만을 승인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뒤에 이어지논 논의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이 논법은 로고스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딱 그만큼만 실재적이다. [본문으로]
  14. 나는 여기서 논리적 역설을 논하고자 하지 않는다. 논리적 역설 이전에 의미의 역설이 있으며, 그것은 의미의 ‘발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문으로]
  15. Liddell and Scott's Greek-English Lexicon(Abridged), Simon Wallenberg Press, 2007, p. 683. [본문으로]
  16.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7.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본문으로]
  18. “최초의 이성적 사유와 이에 앞서는 종교적 표상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 이 연속성은 민속 신앙에서의 신들과 원소들을 단지 비유적인 등치로 취급하는 피상적인 유추가 아니다. 철학은 종교로부터 어떤 위대한 개념들을 상속받았는데, 이를테면, ‘신’(GOd), ‘영혼’(Soul), ‘운명’(Destiny), ‘법칙’(Law) 등이 그것들이다. 이 개념들은 이성적 사고의 운동을 둘러싸면서, 그것의 주요한 방향을 결정했다. 종교는 시적 상징으로 그리고 신화적 인물들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한다. 반면 철학은 건조한 추상의 언어를 선호하며 실체(substance), 원인(cause), 질료(matter)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적인 차이는 동일한 의식이 연속해서 산출한 두 산물들 사이의 내적이며 실제적인 친근성(affinity)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명료한 정의와 명확한 진술을 획득한 사고는 이미 비이성적인 신화적 직관 속에 내재된 것이었다.” F. M. Conford, From Religion to Philosophy, Harper & Row, New York, 1957, v. [본문으로]
  19. Ἀνάγκη πείρατος ἐν δεσμοῖσιν ἔχει, τό μιν ἀμφὶς ἐέργει (...) [본문으로]
  20. KRS에서도 ‘한계’의 모호함에 대해 논한다. “파르메니데스가 도입하고 있는 한계라는 관념은 모호하다. 쉽게 생각하자면 이것은 어떤 공간적 한계라고 이해할 만하다. (...) 아마도 ‘한계 안에서’라는 것은 결정성(determinacy)에 대해 말하는 다소 은유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이 구절 다음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어떤 시간 또는 어떤 측면에서도)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하는 바와 어떤 차이의 잠재성(potentiality)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KRS, 252). [본문으로]
  21.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이 ‘한계’ 자체가 결핍을 불러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계 없는(무한한) 연속성’이라는 것이 더 사리에 맞아 보이는 것이다. 사실상 이렇게 생각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사유는 ‘무한성’(실무한, infinite)에 대한 사유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중세 이후의 사유이미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유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고대 헬라스적 의미에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또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전체성’과 ‘무한성’ 그리고 ‘유한성’이라는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개념의 단초를 여기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유한성과 전체성을 짝짓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멜리소스는 무한성을 전체성과 짝짓는다. 이런 면에서 멜리소스는 한 단계 나아간 경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리소스가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편을 든다. “개별적인 전체가 그렇듯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전체도, 밖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밖에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은,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pan)가 아니다. 전체와 완전한 것은 전적으로 동일하거나 아니면 본성에 아주 가깝다. 끝을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끝은 한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멜리소스보다 더 잘 말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무한한 것이 전체라고 말한 반면, 전자는 전체가 한계지워져 있다고, 즉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다’고 말했으니까.”(DK28A27) [본문으로]
  22. 이에 대해서는 콘포드의 단편으로 그가 『테아이테토스』에서 추출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런 부동의 것은, 전체로서의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김인곤 외 2005, 293) [본문으로]
  23. 이것은 혹시 가사자가 신적인 표지를 욕망하기 때문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이 욕망은 바로 흔적으로 남게 될 뮈토스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본문으로]
  24. 파르메니데스를 ‘유물론자’로 파악하는 관점이 코플스톤의 철학사에 나온다. 내가 보기에 코플스톤의 이 주장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를 ‘일원적 유물론’의 창시자로 간주한다. 운동을 부정한다고 해서 관념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장의 전제는 파르메니데스가 일자를 ‘물질’로 보았다는 것이다(F. Copleston, 김보현 옮김,『그리스-로마 철학사』, 철학과 현실사, 1998, pp. 80-81 참조). 하지만 코플스톤의 논의를 뒤집어 반박하면, 운동을 인정하는 것이 유물론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사태나 사물의 본질과 속성 또는 일종의 관계성 등등이 ‘이념적인 물질성’(ideal materiality)을 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급진적인(radical) 유물론이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25.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이 파르메니데스에 비해 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논변에 기대기보다 직관에 호소하며, 무엇보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있었던 걸출한 다음 세대 제자인 제논과 같은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철학사적 전변을 동일성이 다수화되고 파편화되는 반복의 역량으로 파악한다. “데모크리토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존재를 원자들로 파편화했고 다수화했던 것처럼, 반복은 동일성 자체를 파편화한다.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개념 아래에서 사물들이 다수화될 때, 이런 다수화의 결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동일한 사물들로 나뉘어진다는 데 있다. 이 무한한 반복 요소의 위상은 자신의 외부에 놓인 개념이다. 이것은 물질을 통해 실현된다”(DDR, 348). [본문으로]
  26. 로고스의 의미는 매우 다기하다. 본래 λέγω의 어근은 λέγ-로서 대체로 1. 모으다, 수집하다(최초의 예는 호메로스의 시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Τρωά󰐠 μέν λέξασθαί έϕέστιοι ὅσσοικἔασιν”: 도시에 사는 모든 트로이 사람들을 모아서 …, Homer, Iliad, 2, 125), 2. 세다, 셈하다, 3. 열거, 매거하다, 4. 이야기하다, 말하다 등의 네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logos 개념은 동사 lego의 의미에 상응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명사로서의 로고스는 collection, counting, reckoning, calculation, account, consideration, reflection, ground, condition, enunciation, catalogue, word, narrative 등의 의미를 지니며 발전하였다. 더 자세한 사항은 E. Schwyzer, Griechische Grammatik Handbuch. AW. II. 1, 1934, p. 34; 김내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교보문고, 1996, p. 135 참조. [본문으로]
  27. 프리도 릭켄(Friedo Ricken)지음, 김성진 옮김, 『고대 그리스 철학』, 서광사, 2000, p. 64. [본문으로]
  28. 이 단어의 본래 어원은 물론 hermēs(ἑρμῆς)다. 이것은 ‘경계석’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해석학과 관련해서 이 말은 직접적으로 ‘말하다’(hermē)의 함축을 가지게 된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이 후자의 의미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herma는 말하기의 그 ‘음성’을 원초적인 의미로 가진다. 해석(hermeneuein)이 가지는 이런저런 의미의 역사적 추이에 관한 기초적인 설명은 Richard E. Palmer, Hermeneutics: interpretation theory in Schleiermacher, Dilthey, Heidegger, and Gadamer,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9, chap. 3 참조. [본문으로]
  29. 이에 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직접인용한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어떠한 것과 마주치든 간에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phronēousi) 못하고, 배우고서도 알지(ginōskousin) 못하지만, 자신들이 (안다고) 여긴다(dokeousin).” 여기서 ‘여긴다’에 해당하는 앎은 이후 확실한 앎이 아닌 지식, 즉 ‘~인 듯한 것’에 해당하는 dokein으로 발전한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참조. dokein은 phronēsis와 대조되기도 하지만 다음의 단편은 이것이 dike와도 대립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자(dokimōtatos)가 알고 고수하는 것은 단지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것들(dokeonta)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디케는 거짓들을 꾸미고 증언하는 자들을 따라가 붙잡을 것이다.”(DK22B28) 여기서 디케는 아직까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dikaiosyne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dike가 처음으로 ‘올바른 길’ 즉 ‘정의’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이스퀼로스에게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Guthrie 2000, 18-21 참조),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언급에서 디케와 도케인은 ‘확실한 길’과 ‘그럴 듯한 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되는 doxa와 noein의 대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본문으로]
  30. 이암블리코스의 간접인용: “인간의 견해들(anthrōpina doxasmata)은 아이들의 장난거리이다”(DK22B70) [본문으로]
  31.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과 인간에게 합당한 ‘공통’(common)이라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실패한다. (...) 그들이 인지해야 하는 것은 로고스이며, 이것은 아마도 통합하는 형식이거나 사물들의 질서를 비례적으로 조절하는 방법, 즉 개별적이고 통일된 그것들의 구조화된 평면과 거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로고스의 테크니컬한 의미는 ‘척도’, ‘계산적 사유’(reckoning), 또는 ‘비율’(proportion)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로고스가 그런 방식으로 드러나고, 그와 일치되게 말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추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공통의 평면 또는 척도에 따르는 배치의 효과(effect of arrangement)는 겉으로 보기에 다양하고 전반적으로 구별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실재로는, 인간도 그 한 부분으로 속하는 일관된 복합체(coherent complex) 안에서 통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해는 그 자신의 생명활동에 속하는 적절한 법칙(adequate enactment)을 논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매번 세계의 현실적 원소(actual component of things)이며, 여러 방면에서 그것은 우주론적인 제일 요소인 불과 공외연적(co-extensive)이다.”(KRS, 188) KRS는 로고스를 어떤 ‘배치’로 파악하는 것을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와는 멀고 우리의 지금의 논의와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KRS는 또한 이 불이 밀레토스학파의 물이나 공기, 아페이론과 같은 잠재적으로 중립적인 존재(mediator)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극단적인 존재(the extreme)라고 한다.(KRS, 200) 여기서는 또한 대중들에 견해에 대한 헤라클레에토스의 귀족적인 경멸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종종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군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발전한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계급적 상황이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현상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성(nous)이나 생각(phrēn)을 그들이 갖고 있는가? 그들은 대중의 시인들을 믿고 군중을 선생으로 삼는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쁘고, 소수의 사람들이 좋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DK22B104).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헬라스 민주주의의 쇠퇴기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nous나 phronēsis는 몇몇 고귀한 귀족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대중들은 그러한 것을 설명해도 모르며, 배우고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로고스를 대하면서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다. 즉,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logos)에도 흥분하기 십상이다”(DK22B87). [본문으로]
  32. 그런데 이러한 로고스적인, 로고스에 기댄 사유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지혜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227, DK22B108) 이 말은 로고스 자체나 진리 자체가 일상과 멀리 떨어진 초재적인 위치에 있다고 새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여러 단편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 말은 현자라면 마땅히 지혜를 구하기 위해 대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그의 귀족주의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3. 이 단어에 대해 KRS는 특별히 주의를 요청한다. “여기서 barbarian souls는 정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거나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잘못 이끌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KRS 188) [본문으로]
  34. 그런데, 이와는 달리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생각(oiēsis)은 신성한 병(hiera noson)이고, 시각은 사람을 속인다”는 말을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 ‘oiēsis’는 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 말이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김인곤외, 주 20). [본문으로]
  35. 하지만 이러한 예지를 습득할 수는 있다. “지혜로운 것은 하나인데, 모든 것들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조종하는(ekybernēse), 예지(gnōmēn)를 숙지하는 것이다”(DK22B41) [본문으로]
  36. 이렇게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philosophoi andres)이라고 지칭한다(DK22B35). 이것이 확실하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philosophos’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이 플라톤 이후의 의미라고 봐서는 안 된다. 다만 ‘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정도로 새겨야 한다(김인곤 외, 234 주24) [본문으로]
  37. 두 개의 단편을 이와 관련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edizēsamēn emeōuton)(DK22B22). “본성(physis)은 스스로를 감추곤(krypthesthai)한다”(DK33B123). 여기서 ‘나 자신’과 ‘본성’으로 번역된 자연, 즉 physis는 당대의 사유 아래에서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 두 단편은 따라서 동일한 것에 대한, 즉 physis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을 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본문으로]
  38. 나는 여기서 ‘자연주의’(naturalism)이라는 말을 현대적인 의미의 ‘물리주의’로 보지 않는다. 물리주의는 곧 기계적 설명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객체의 특성으로 환원하지만,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자연주의는 그러한 ‘환원’을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으며, 고려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앞서 McClure의 설명과 같이 이들 고대철학자들의 ‘자연’이란 신성함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동일한 physis의 다른 양태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McClure, 113 참조. [본문으로]
  39. 앞의 주 26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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