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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6강 다섯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9.21 00:24 조회 수 : 35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인간이란?

 

70頁부터 시작되는 7장을 보시죠. 정치∙국가이론의 배경에 있는 ‘인간’관이 논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이론 및 정치이념은 그 인간학을 음미하고 그것들이 의식적이든 무자각적이든 ‘본성이 악한’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느냐, ‘본성이 선한’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홍철기 : 모든 국가이론과 정치사상은 그것의 인간학[적 전제]을 통해 입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것이 알든 모르든 간에 인간이 ‘본성상 악’한지, 혹은 ‘본성상 선’한지를 전제하느냐 여부로 분류할 수 있다.]

 

 

슈미트는 분명히 ‘본성이 악한 von Natur böse’ 인간을 채택하고 있네요. 󰡔정치적 낭만주의󰡕나 󰡔정치신학󰡕에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악’한 인간을 상정한 드 메스트르나 코르테스를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연장선상에서 슈미트 자신도 ‘본성이 악한’ 인간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이 대목 직후에 설명하고 있듯이, ‘악’이란 게 특수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위험 gefährlich’하냐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죠.

 

73頁에서는 이런 의미에서의 ‘악/선’의 구별을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관련시켜 논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선’하다고 전제하는 이론이나 논리구성의 일부에는 진정으로 무정부주의적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며, 국가개입에 대해 항쟁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 있다. 노골적인 무정부주의자에게서는, ‘천성적인 선’을 믿는 것과 국가의 과격한 부인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는가는, 일목요연하며, 한쪽은 다른 쪽으로부터 도출되며,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자에게 인간의 선성은 그것을 원용하여 국가를 ‘사회’에 봉사하게 하는 하나의 논거 이상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저, ‘사회’가 그 자체 속에 질서를 갖고, 국가란 그저 불신감을 갖고 규제되고, 엄밀한 범위 안에 국한되어야 할 종속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해서는, 고전적 정식화를 토마스 페인에게 볼 수 있다. 즉, 사회(society)는 우리의 합리적으로 규제된 요소들의 소산이며, 국가(government)는 우리 악덕의 소산이라고.

[*홍철기 : 인간을 그런 방식으로 ‘선하다’고 전제하는 이론과 구조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며 논쟁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실제로 무정부의적인 성격을 띠지는 않으면서도 국가의 개입에 반대한다. 명백한 무정부주의에서 "본래적인 선함"에 대한 신념과 국가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 얼마나 가까이 연관되어 있고 서로로부터 도출되며 양자가 서로에 대해 의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달리 자유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선함은 하나의 주장에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덕에 ‘사회’에 복무하는 국가가 제기[정립]되는데, 그것은 또한 단지 ‘사회’는 그 자체로 자신의 질서를 지니고 있고 국가는 단지 그 사회의 불신을 받고 통제되며 명확한 한계에 구속되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고전적인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즉 사회(society)는 이성적으로 조절된 우리의 욕구의 결과이고 국가[페인에게는 정부](government)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다.]

 

 

약간 난삽하게 말한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우선 ‘본성이 악하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국가에 의한 ‘친구/적’ 구별이나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본성이 선하다 von Natur gut’는 사람은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 이 대목의 ‘천성적인 선’은 원어로는 <natürliche Güte>로, 명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본성이 선하다’는 판에는 크게 나눠서 자유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의 두 가지 입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는 어떨지 궁금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이외의 좌파는 ‘선/악’으로 나누기 힘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천성적인 선’과 ‘국가의 급진적 부정 die radikale Verneinung des staates’을 불가분하게 결부시켜 생각합니다만, 자유주의자는 인간의 선함과 국가를 그렇게까지 대립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나키스트가 보기에는, 국가가 본래 선한 인간을 억압하고 나쁜 행동을 하게 하므로, 국가를 한시 바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부정적인 것이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사회’에 종속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의 ‘사회’란 시민들에 의한 자치의 구조로서의 ‘시민사회’입니다.

 

 

‘본성 악 von Natur böse’

 

‘본성 선 von Natur gut’

‘본성 악’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국가에 의한 ‘친구/적’ 구별이나 주권 개념을 받아들인다

거부한다

자유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의 두가지 입장

아나키스트는 인간의 ‘천성적 선’과 ‘국가의 급진적 부정 die radikale Verneinung des staates’을 불가분하게 결부시켜 생각하지만, 자유주의자는 인간의 선성과 국가를 그렇게까지 대립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자는 ‘정치적인 것’을 길들일 수 있는가?

 

 

토마스 페인(1737-1809)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정치활동가∙사상가입니다. 독립선언 직전에 독립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팸플릿인 󰡔커먼 센스(상식) Common sense』(1776)를 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후 혁명 때의 프랑스로 건너가서 헌법의 초안 작성에 관여하기도 했는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국가’는 ‘악덕 Laster’의 소산이라고 하는 주장은 급진적인 느낌이 듭니다만,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혁명을 지원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슈미트가 참조하는 것은 󰡔커먼 센스󰡕의 서두 부근의 ‘사회’와 ‘정부’의 구별에 관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나미 문고의 󰡔커먼 센스󰡕라면 17頁입니다. 원어를 보충하면서 인용하겠습니다.

 

사회는 우리의 필요(wants)에서 생기며, 정부는 우리의 악덕(wickedness)에서 생긴다. 전자는 우리를 사랑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행복을 증진시키지만, 후자는 악덕(vices)을 억누름으로써 소극적으로 행복을 증진시킨다. 한쪽은 사이좋게 지내게 하지만, 다른 쪽은 차별(distinctions)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보호자이지만, 후자는 처벌자이다.

사회는 어떤 상태에서도 고마운 것(blessing)이지만, 정부는 설령 최상의 상태에서조차도 부득이한 악(necessary evil)일 뿐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태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정부’는 ‘필요악’이기에 참을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최악의 상태’가 되면 참기 힘들다고 밝힌 후에, 영국에 의한 식민지 통치는 견디기 어려운 ‘통치 government’가 됐다고 하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정부=통치’가 없어지더라도, ‘사회’에서의 시민 상호의 결속(intercourse)이 있으므로 괜찮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저항권론을 첨예화한 듯한 느낌이 드는 논의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슈미트는 페인처럼 국가 혹은 정부를 ‘필요악’이라고 보고, 가급적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적 태도라고 보고 있죠.

 

시민적 자유주의는 일찍이 단 한 번도 정치적 의미에서 과격한 때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국가의 부정∙정치적인 것의 부정∙그 중립화∙비정치화 및 자유 선언이 마찬가지로 또한 일정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일정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국가 및 그 정치권력에 대해 항쟁적 입장에 서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홍철기 : 부르주아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의미에서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와 정치적인 것의 자유주의의 부정, 자유주의의 중립화와 탈정치화, 그리고 자유의 선언은 또한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 국가와 정치권력에 맞서서 그것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나 아나키즘에 비해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거죠. 자유주의는 오히려 국가의 가치중립성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슈미트가 “그 국가의 부정∙정치적인 것의 부정∙그 중립화∙비정치화 및 자유선언 seine Negationen des Staates und des Politischen, seine Neutralisierungen, Entpolitisierungen und Freiheitserklärungen”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것 같습니다. “국가의 부정”이라고 하면 급진적으로 들립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슈미트가 말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국가’의 본질, ‘정치적인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죠.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특정한 가치와 이데올로기, 정치적 주장에 헌신(commit)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니까, 슈미트가 보기에 그것은 ‘국가’의 부정입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만, 만약 ‘국가’가 실제로 ‘친구/적’ 구별을 본질로 한다면, 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국가’에 대해, 나아가 ‘정치권력 politische Macht’에 대해 항쟁적(polemisch)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본래적으로는 국가이론도 정치이념도 아니다. 자유주의는 분명히 국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아무런 적극적인 국가이론도, 독자적인 국가형태도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에 의해 구속하고 경제적인 것에 종속시키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홍철기 : 단지 그것은 원래부터 어떤 국가이론이나 정치적 이념은 아니었다. 자유주의는 국가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적인 국가이론이나 국가개혁도 발견하지 못하며 단지 정치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에 구속시키고 경제적인 것에 복종시키려 했다.]

 

 

국가를 왠지 꺼림칙해 하는 ‘자유주의’는 적극적인 ‘국가’ 이론을 전개하지 않지만, 그 대신 국가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 das Ethische’에 의해 구속하거나 ‘경제적인 것 das Ökonomische’에 종속시키려 하는, 즉 ‘정치’를 도덕적 이상이나 경제적 이익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새삼 생각해 보면 감이 올 겁니다. 우리가 ‘정치’로 곧바로 생각하는 것은 복지라든가 산업진흥, 방어 등을 위해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협상을 벌이고 결정하는 것이죠. 국회에서 가장 큰 위원회는 예산위원회죠. 경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이념 지향적인 사람이라면, 롤즈나 샌델(1953-)이 논하는 도덕적 이념, 정의 혹은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생각하겠죠. 롤즈의 정의론은 주로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공정함의 기준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 경제적 혹은 윤리적 발상은 우리에게 당연한 게 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유주의적인 ‘정치’ 이해가 우리들 사이에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슈미트가 이 책을 쓰고 있던 20세기 전반기에 이미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해가 당연한 것은,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냐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친구/적’에 집착하는 슈미트는 자유주의의 공세에 의해 그런 견해가 확산되어 버렸다고 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게 해서 ‘정치적인 것’을 길들이려고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된 정치이론 : 인간의 본성이 ‘악’이며 ‘위험’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것은 ‘권력’의 분배와 균형의 이론, 즉 국가의 억제∙제어의 체계인데, 이는 국가 이론이나 정치적 구성 원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홍철기 : 그것은 ‘권력’의 분배와 균형의 학설, 즉 국가에 대한 억제와 통제의 체계를 창출했는데, 그것은 국가이론이나 정치적 구성원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권력’의 분배와 균형의 이론이라는 것은 주로 삼권 분립이나 지방 자치, 공사의 구분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국가 권력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슈미트더러 말하라 하면 그것은 ‘국가’ 또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서 벗어난 논의일 뿐입니다. 자유주의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슈미트에게 진정한 정치이론은 인간의 본성이 ‘악’이며 ‘위험’하다는 전제에 서 있는 이론인 것입니다. 75頁에서는 그런 유형의 정치사상가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종류∙등급∙역사적 의의라는 점에서 아무리 다르더라도, 이들 정치사상가들은 인간의 본성을 문제적인 것으로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이 뛰어난 정치적 사상가로서의 실질을 보여주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키아벨리, 홉스, 보쉬에, 피히테(그에 대해서는 인간적 이상주의를 잊는 순간부터), 드 메스트르, 도노소 코르테스, H. 텐느의 이름을 드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아가 헤겔. 물론 그는 이 점에서도 때때로 양면적 성격을 보여주지만.

[*홍철기 : 방식이나 서열, 역사적 비중에 따라 이 사상가들이 달라질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 본성이 문제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며, 그 방식에서 그들은 특유하게 정치적인 사상가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여기서는 마키아벨리, 홉스,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 1627-1704], 피히테 (그가 자신의 인도주의적 이상주의를 잊어버리는 즉시), 드 메스트르, 도노소 코르테스, H. 테느[Hyppolite Taine: 1828-1893]를 거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에 관해서도 때때로 자신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헤겔[까지].]

 

 

마키아벨리, 홉스는 당연하죠. 보쉬에(1627-1704)는 루이14세 시대의 프랑스 주교∙신학자로, 왕권신수설에 근거한 정치적 절대주의를 전개했습니다. 피히테는 후기가 되어서, 신비주의∙국가주의적 경향을 강화합니다. ‘인간적 이상주의’라고 번역되는 것은 원어로는, <humanitärer Idealismus>로, <Idealismus>는 보통 ‘관념론’으로 번역됩니다. 독일관념론은 이상주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낭만주의』와 『정치신학』에서 슈미트가 자주 참조하는 가톨릭 보수주의의 드 메스트르와 도노소 코르테스. 이폴리트 텐느(1828-93)는 프랑스의 보수주의적∙반혁명적인 철학자∙역사가입니다. 헤겔의 양면적 성격이란 헤겔이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를 중시하는 국가철학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적 측면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77頁부터 78頁까지, 이런 성선설/성악설의 차이는 단순히 그 학자가 심리학적으로 ‘낙관론’이거나 ‘비관론’이거나 둘 중 하나의 경향을 갖고 있다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선’하다고 파악하느냐 ‘악’하다고 파악하느냐는 그 학문 체계의 기본적인 가정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법학자(私法學者[민법학자])는 ‘선하다고 간주되는 개인’이라는 명제를 출발점으로 한다. 신학자가 만일 인간을 죄가 많은, 구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구제된 자를 구제되지 못한 자로부터, 신에게 선택된 자를 선택되지 못한 자로부터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학자이기를 그만둘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학자는 선악의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것의 영역은 결국 적의 현실적 가능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관념 내지 사고과정은, 인간학적 ‘낙관론’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으로는 형편이 나쁘다. 그런 짓을 하면, 그것들은, 적의 가능성을 버리는 동시에, 모든 특수적으로 정치적인 귀결도 버리게 될 것이다.

[*홍철기 : 사법(私法)학자는 ‘개인은 선하다고 간주된다(unus quisque praesumitur bonus)’는 문장에서 출발한다. 신학자는 더 이상 인간을 원죄를 지닌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다면 신학자이기를 멈추게 된다. 반면에 도덕주의자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를 전제한다. 최후에 정치적인 것의 영역은 이제 적의 실제 가능성에 의해 확정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표상과 사고과정은 인간학적 ‘낙관주의’를 제대로 된 출발점으로 삼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그렇게 할 때] 그것은 적의 존재가능성과 함께 모든 특유[특정]하게 정치적인 결과들을 지양할 것이다.]

 

 

‘사법학자(私法學者[민법학자])’는 민법을 중심으로 개인 간의 계약이나 협상을 다루는 법체계로,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국가가 모두 통제한다면, 모든 법은 공법이 되며, 사법(私法[민법])이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슈미트가 본다면, ‘개인을 선하다고 보는’ 것을 전제하는 학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 슈미트가 소개한 대로, 인간을 죄인이며 악하며, 규제될 자=선택될 자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죄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불합리해집니다. 도덕철학은 많은 경우, 각자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행위가 ‘올바르다’거나 ‘선하다’거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탐구하기에, 기본적으로는 ‘선’의 입장입니다. 반면 ‘정치’의 이론은, 슈미트에 따르면, ‘친구/적’을 기본으로 생각하기에, ‘본성 악’이라는 전제에 선다고 생각됩니다. 즉, ‘본성 악’이라는 전제에 선다는 점에서 정치이론과 신학은 친화성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이론과 신학적 죄업론(罪業論)의 관련은 보쉬에, 드 메스트르, 보날, 도노소 코르테스, F. J. 슈탈 등에게서 특히 현저하게 나오며, 또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서술한 논리 필연적인 사고 전제의 유사성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 현세와 인간의 죄 많음이라는 신학의 근본 교의는 ― 신학이 아직 단순한 규범적 도덕론 혹은 교육학으로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한, 또한 교의가 아직 단순한 [교회] 규율로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한 ― 친구∙적 구별과 완전히 마찬가지로, 인간의 분류로, ‘차별’로 행해지는 것이며, 일반적 인간 개념이라는 무차별적 낙관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홍철기 : 원죄에 관한 신학적 도그마와 정치이론의 연관관계는 보쉬에, 메스트르, 보날, 도노소 코르테스, 그리고 F. J. 슈탈에게서 특히 특징적이지만 또한 다른 수많은 경우들에도 상당히 유효한데, 그것은 이 사유의 필연적인 전제들의 친화성으로부터 해명된다. 세계와 인간의 원죄성에 대한 신학적 근본도그마는 ―신학이 여전히 단순한 규범적인 도덕론이나 교육학으로 기화되지 못하고 도그마가 여전히 단순한 규율로 기화되지 못하는 한에서― 친구와 적이 인간의 분할을 초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두기"로 귀결되며 전체를 관통하는 인류개념의 무차별적 낙관주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슈미트가 특히 평가하고 있는 국가∙법이론가들이네요. 우리는 왠지 ‘종교’적 학문인 신학이란 만인을 평등하게 구제하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하지 쉽습니다만, 슈미트의 이해에서는 신학은 오히려 ‘차별’을 산출하는 사상입니다. ‘차별’은 원어로는 <Abstandnahme>입니다. <Abstandnahme>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리 Abstand’를 ‘취함(둠) Nahme’입니다. ‘구제되는 인간’과 ‘구제되지 못한 인간’ 사이에 선을 긋고, 간극을 두는 것이 ‘신학’의 본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간격을 애매하게 하고, 마치 모든 사람이 구원될 것인 양 도덕을 설파하거나 교육하려고 하는 것은 본래의 신학이 아니라는 게 그의 입장입니다.

 

 

무엇보다 선한 세계의, 선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평화∙안전∙만인의 만인과의 조화만이 지배한다. 성직자나 신학자는 여기서는 정치학자∙정치가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존재이다. 원죄의 부정이 사회심리학적∙개인심리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퇴뢸치(그의 󰡔기독교 교회의 사회이론󰡕에서)나 세이에르(낭만주의∙낭만파에 관한 많은 간행물에서)가 수많은 분파∙이단자∙낭만파∙무정부주의자들의 예를 들어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홍철기 : 선한 인간들이 사는 선한 세계는 당연히 평화와 안전, 그리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조화가 통치한다. 이런 세계에서 사제와 신학자는 정치가나 국가운영자(Staatsmänner)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 트뢸치(Treoltsch)의 󰡔기독교 교회의 사회이론󰡕과 세이에르(Seilliere)가 쓴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자에 대한 여러 저서에서 종파와 이단, 낭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수많은 예를 통해 보여준 것은 바로 원죄에 대한 부정의 사회심리학적이고 개인심리학적인 의미이다.]

 

 

 

이 세계가 ‘선한 인간’들로 구성된 ‘선한 세계’라고 한다면, ‘악’의 본질을 논하는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나올 차례는 없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해, 신학 전문가가 필요하게 되는 셈입니다. 트뢸치(1865-1923)는 막스 베버와 거의 동시대의 개신교 신학자로, 종교사가∙사회학자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신학이란 도덕적, 규범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슈미트의 시각에서는 ‘존재론적 대립’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에르네스트 세이에르(1866-1955)는 프랑스의 작가∙저널리스트로, 낭만주의에 관한 저작이 몇 권 있습니다.

지금 대목보다 조금 뒤에, ‘존재론적 대립 existentielle Gegensätzlichkeit’이 나오네요. 서로의 ‘존재’ 자체를 허용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본래 이 가장 근원적인 대립을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마키아벨리, 홉스 — 그리고 부분적으로 피히테 — 등의 정치 이론가가 제시하는 ‘비관론’은 사실상 이 신학적인 ‘존재론적 대립’의 출현입니다. ‘존재론적 대립’에서 ‘친구/적’ 개념이 파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수 사람들은 ‘위협을 가하지 않는 평온 eine ungefährdete Ruhe’이라는 환상을 고집하기에 ‘비관론자’를 싫어합니다.

 

 

 

법과 정치

 

 

 

최악의 혼란이 생기는 것은 법이나 평화 같은 개념이 이처럼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 즉 간결하고 뚜렷한 정치적 사고를 가로막고, 자기의 정치적 노력을 합법화하고, 상대를 무자격∙부도덕의 입장에 두기 위해 이용될 때이다.

[*홍철기 : 최악의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법이나 평화 같은 개념들이 명확한 정치적 사고를 방해하고 자신의 정치적 계획을 정당화하며 반대자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하기 위한 그런 정치적인 방식으로 이용될 때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베르사유 체제나 유엔을 중심으로 한 보편주의 비판의 논의를 일반화한 논의입니다. 국가 간 관계뿐만 아니라 ‘법’이나 ‘평화’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에는, 자신의 ‘적’을 ‘비인간화’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성»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사용함으로써 ‘정치’의 본질이 일그러진다고 슈미트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법은 사법∙공법의 구별 없이, 법 자체로서 — 가장 안전하게는 뭔가 중대한 정치적 결정에 의해 지켜지고, 즉 예를 들어 어떤 안정된 국가 제도의 틀 안에서 — 상대적으로 독립된 고유한 영역을 갖는다. 다만 인간의 생활∙사고의 어떤 영역에서도 그러하듯이, 다른 영역의 지원을 위해서도 반박을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법과 도덕을, 이렇게 이용하는 것의 정치적 의의에 주목하고, 그리고 특히 법‘이라는 것’의 ‘지배’라든가, 심지어 지상성 같은 것에 대해, 항상 몇 가지 제기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사유의 입장에서 보면, 자명한 것이며, 불법도 부도덕도 아니다.

[*홍철기 : 법은 사법이든 공법이든 그 자체로 ―가장 안전한 경우에는 중대한 정치적 결정의 그림자 속에, 즉 예를 들어 안정된 국가적 존재의 틀 안에서― 자신만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간 생활과 사고의 영역들처럼 다른 영역을 지지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영역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정치적 사고의 관점에서 볼 때, 법이나 도덕의 그러한 활용의 정치적 의미에 유의하는 것, 그리고 특히 법‘의’ ‘지배’, 혹은 심지어 법‘의’ 주권이라는 표현에 대해 맞서서 언제나 몇 가지의 보다 상세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불법이거나 부도덕한 일은 아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요점은 ‘법’이 다른 영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만, ‘법’의 권위를 다른 영역에서의 대립과 논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가능한데다, 실제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과 같습니다. ‘도덕’의 권위를 경제, 정치, 문화의 문제에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데, ‘법’도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있네요. 예를 들어 법학을 배운 사람이 사회문제에 관해 논쟁할 때, “네가 말하는 것은 헌법 OO조의 기본적 정신에 반한다”라든가, “그것이 위법이라는 것은 △△의 판례나 학설에 의해 이미 확정되고 있다”라거나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권위가 있는 것 같기에 그 방면의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흠칫 하고 놀랄지도 모릅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법률논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사람은 담당 판사도 검사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 위협을 느낄 얘기는 아닌데도 속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 원래 법률의 아마추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말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웃음).

그런 것은 그다지 존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국내, 국외의 정치적 대립에서 ‘법’의 권위가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의 «지배»라든가, 심지어 지상성 des «Herrschaft» oder gar die Souveränität «des» Rechts’이라는 말이 조금 궁금하네요. 보통은 ‘법의 지배 rule of law’라고 말하는 대목이며, 슈미트 자신도 조금 뒤에 괄호를 붙여 ‘법의 지배 «Herrschaft des Rechts»’라고 바꿔 말합니다. 이런 말투를 하는 것으로부터 슈미트가 ‘법의 지배’라는 말투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네요.

우선 독일어권에서는 ‘법의 지배’라는 말이 그다지 쓰지 않으며, ‘법치국가 Rechtsstas’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확인해 둡시다. 현대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낍니다만, ‘법의 지배’는 영국의 ‘커먼 로(관습법) Common Law’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고, ‘법치국가’는 󰡔정치신학󰡕 때 얘기했듯이, 19세기 독일에서 ‘경찰국가’의 대칭 개념으로 형성됐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전통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치국가’라고 말하면, 국가의 권력기구가 ‘법’에 근거하여 통치한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법의 지배’라고 하면, 마치 ‘법’ 자체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후자가 중립적이고, 당사자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지배 Herrschaft’를 괄호에 넣어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괄호가 붙어 있는 것은 중성정관사 <das>의 2격인 <des>인데, 정관사는 영어의 ‘the’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2격이란 소유격을 가리킵니다. <the Law>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즉, 어딘가의 의회에서 우연히 제정된 법률이 아니라 ‘법 자체’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뉘앙스를 담은 말임을 시사하기 위해 이상한 괄호를 붙인 것입니다.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법 그 자체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는 괴이하고,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떠오른다. 그런 ‘정치’의 관점에서, ‘법의 지배’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법에 반하는 것도, 부도덕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첫째로 여기서 말하는 ‘법’이 앞으로도 적용돼야 할 현행의 실정법∙입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닌가이며, 만약 그것을 가리킨다면 ‘법의 지배’는 곧 특정한 현상태 그대로의 정당화에 다름 아니며, 정치적 권력 또는 경제적 이익이 이 법 속에서 안정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의 유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홍철기 : 첫째로 ‘법’이 여기서 그 이상의 타당성을 지녀야만 하는 기존의 실정 법률과 입법방식을 지칭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법의 지배’는 결국 특정한 현재상태의 정당화를 의미할 뿐이며 자신의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이 이러한 법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현재상태의 견지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슈미트는 우선 말의 뉘앙스에 불평을 터뜨린 뒤,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무해한 것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가능성이 현행의 실정법 혹은 입법 절차를 준수한다는 의미의 ‘법의 지배’입니다. 이른바 현상 유지를 위한 ‘법의 지배’입니다. 강조되어 있는 ‘현상태 그대로’의 원문은 이탤릭의 <status quo>입니다. 이런 의미라고 하면, ‘법의 지배’를 입에 담는 사람은 현상유지를 하겠다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됩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좌파가 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법’ 비판이네요.

 

 

둘째, 법을 인용하는 것의 의미는 현상태 그대로의 법에 대해, 더 높거나 더 올바른 법, 이른바 자연법 내지 이성법이 대치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홍철기 : 둘째로 법의 원용은 현재상태의 법에 대해서 상위의, 혹은 더 옳은 법, 이른바 자연법, 혹은 이성법이 대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미는 첫 번째 의미와 대조적이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쉽네요. ‘더 높거나 더 정확한 법 ein höheres oder richtigeres Recht’ = ‘자연법 또는 이성법 ein Natur-oder Vernunft-Recht’의 지배라는 의미로 ‘법의 지배’를 말하면, 아무래도 고견에 서서, 현상태를, 그리고 현상태에 있어서 낮은 수준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런 말투는 방금 국제관계 얘기에서 나온, ‘인류’의 이름에으로 비인간적인 ‘불량배’를 처벌한다는 논의와 이어지기 쉽죠. 슈미트 자신도 그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이든 둘이든,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87頁에서 시작되는 8장에서는 자유주의 비판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슈미트는 자유주의에 나름의 정치성이 있다는 견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를 내거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민족주의, 가톨릭주의나 보수주의, 사회주의 등과 결부되며, ‘국민자유주의자’나 ‘가톨릭자유주의자’ 등이 됐습니다. 전체주의와도 결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der individualistische Liberalismus’의 불가능성

 

그런 것을 지적한 뒤, 슈미트는 ‘개인주의’야말로 ‘자유주의’의 기조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der individualistische Liberalismus’는 일관된 정치적 입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그 어떤 논리가 일관된 개인주의에도, 정치적인 것의 부정[이라는 요소]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정치권력∙국가형태에 대한 불신의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되더라도, 결코 독자적인 적극적 국가이론∙정치이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교회 기타의 것에 의한 개인 자유의 제약에 대한 항쟁적 대립물로서의 자유주의적 정책은 상업정책∙교회 및 학교정책∙문화정책으로서는 존재하지만, 그러나 자유주의적 정책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저 항상, 정책의 자유주의적 비판에 불과하다.

[*홍철기 : 문제는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의 순수하고 일관된 개념으로부터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 획득될 수 있는가 여부다.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관된 개인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인 것의 부정은 아마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과 국가형태에 대한 불신의 정치적 실천을 초래하겠지만 결코 적절한 적극적인 국가이론과 정치이론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 결과 자유주의 정치[정책]란 [국가, 교회 혹은 다른]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교회, 혹은 다른 방식의 제약에 맞선 논쟁적 대립으로서, 그리고 통상정책, 교회정책, 학교정책, 문화정책으로서, 그러나 결코 자유주의 정치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언제나 오직 정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으로서만 존재한다.]

 

 

듣고보니 당연하네요. ‘개인주의’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에, 사람들을 ‘적’에 대해 집결시키고 주권적인 명령에 종속시키는 ‘정치적인 것’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정치권력’과 ‘국가’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이론은 구축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국가’나 ‘교회’ 등의 활동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이론이 되지만, 적극적인 ‘자유주의적 정책(정치) liberale politik’이라는 것을 내놓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유재산이나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국가를 ‘중립물=타협의 산물 Kompromiß’로 하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자세가 위기 ― 특히 1848년 ―를 맞이해 모순에 찬 태도로 나타나며, 예를 들어 로렌츠 폰 슈타인, 칼 맑스, Fr. 율리우스 슈탈, 도노소 코르테스 같은 모든 뛰어난 관찰자를 하고, 여기에 얼마간의 정치원리 혹은 사상적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을 단념하게 한 것이다.

[*홍철기 : 또한 그밖에 민주주의에 대립하는 군주제와, 군주제에 대립하는 민주주의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도 제공하는데, 위기의 시대에―특히 1848년에― 너무나 모순적인 태도를 초래함으로써 로렌츠 폰 슈타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 도노소 코르테스와 같은 모든 훌륭한 관찰자들은 여기서 하나의 정치적 원리나 사유의 논리적 귀결을 찾는 일을 단념했다.]

 

 

 

슈타인, 슈탈, 코르테스와 나란히 맑스도 ‘자유주의’의 한계를 찾아낸 ‘뛰어난 관찰자 gute Beobachter’로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 흥미롭네요. 이 강의에서도 몇 번 언급했는데, 1848년은 2월 혁명, 3월 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혁명이 두 번 일어난 게 아니라 2월 혁명을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나왔다]. 맑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런던에서 간행된 것도 이 해의 2월입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선언󰡕이 나오는 형국이 됐습니다.

2월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1773-1850)이 부르주아 중심의 정치를 행하고, 노동자나 농민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반발한 노동자와 농민, 학생에 의해 야기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자유와 통일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전개됐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하에 있었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타민족의 지배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적 반란과 오스트리아 본체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적 운동이 연동되고,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됐습니다. 이런 일련의 혁명으로 유럽의 정치지도는 크게 변화했습니다.

 

 

 

자유주의적 사고는,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국가 및 정치를 회피 혹은 무시한다. 그리고 그 대신, 두 개의 이질적인 영역, 곧 윤리와 경제, 정신과 장사, 교양과 재산이라는 전형적인, 그리고 항상 거듭해서 나타나는 양극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홍철기 : 자유주의 사상은 지나치게 체계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정치를 우회하거나 무시하며 스스로는 그 대신에 윤리와 경제, 정신과 사업[이윤], 교양과 재산[소유]이라는 두 가지의 이질적인 영역들의 전형적이고 계속 반복되는 양극을 향해 움직인다.]

 

 

 

앞에서도 있었습니다만, 슈미트가 본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 자체를 직시하지 않고, ‘윤리’ 혹은 ‘경제’로 환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적 이상 혹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저 ‘윤리’와 ‘경제’는 어떤 의미에서, 대립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정치» 이해는 양극 사이를 오가게 되는 셈입니다. ‘교양’이라는 것은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듭니다만, ‘교양’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Bildung>의 원래 의미는 ‘형성’입니다. 이 경우는 ‘인격’의 ‘형성’입니다.

 

 

‘정치적인 것’ 자체를 직시하지 않고, ‘윤리’ 혹은 ‘경제’로 환원하려는 경향

«정치» 이해는 양극 사이를 오가게 된다

윤리 ⇄ 경제

정신 ⇄ 장사

교양 ⇄ 재산

 

 

슈미트

‘정치적인 것’

사람들을 ‘적’에 대해 결집시키고 주권적인 명령에 종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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