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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6강 두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8.24 11:49 조회 수 : 11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결정적 단위’

 

교회든 노동조합이든, 심지어 양자의 동맹이든,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 제국이 전쟁을 벌이려 한 경우, 그것을 금지 또는 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교황을 향해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그저, 교황 자신이, 이제 ‘교전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사회주의 노동조합도 ‘교전상대’로서 등장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당시 독일 정부가 중대 사태에 관해 판정을 내리고, 스스로 정치적인 적이 되고, 이 개념의 온갖 귀결을 받아들이는 것 없이, 그 판정에 반항할 수 있는, 혹은 반항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기관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교회도 노동조합도 내란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주권 및 단위에 관한 이성적 개념을 기초짓는 데 충분하다. 정치적 단위란 그것은 어떤 힘으로부터 최종적인 심리적 동기를 획득하느냐에 관계없이, 바로 그 본질상, 결정적인 단위이다. 그것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이다. 혹은 존재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단위, 즉 결정적 사태에 있어서 결정하는 단위이다.

[*홍철기 : 교회도 노조도, 혹은 양자의 연합도 독일 라이히가 비스마르크의 지휘 하에 수행하려 했던 전쟁을 막거나 방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비스마르크는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단지 교황 스스로가 더 이상 전쟁의 권리(ius belli)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주의 노동조합들도 "교전당사국(partie belligérante)"으로서 행동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하튼 당시의 독일 정부의 위급사태에 관련되는 결정을 저지할 수 있거나 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는 정치적인 적이 되지 않고 또한 이 개념의 모든 귀결들에 의해 적중되지 않는 심급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하지만] 반대로 교회나 노조 모두 내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주권과 통일체의 합리적인 개념의 근거를 제시하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치통일체는 바로 그것의 본성상[바로 그 본성에 따라], 어떤 세력들로부터 그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정신적 동기들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결정적인 통일체이다. 그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최상위의 통일체, 즉 결정적인 경우에 규정을 하는 통일체다.]


 

지난번에 봤듯이, ‘친구/적’ 관계의 최종적인 출현은 ‘전쟁’입니다만, 교전권을 갖고 있는 것은 국가이며, 교회나 노동조합은 이를 저지할 권한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노동조합이나 교회에 대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은 상대가 강하고 전쟁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전권’을 갖고 있지 않은 상대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미국에 대테러 전쟁의 개시를 선언했을 때, 국가가 아니라 국제적인 테러 네트워크와 전쟁을 할 수 있느냐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정치적 적 politischer Feind’이 아니면, ‘교전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대지의 노모스󰡕에서의 ‘올바른 적’으로서의 상호 승인의 문제로 이어지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교전권’은 원문에서는 라틴어의 <jus belli>이고 ‘교전상대’는 프랑스어의 <partie belligérante>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슈미트에게 ‘결정적 단위’는 ‘친구/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단위’입니다. ‘결정적 단위’의 원어는 <die maßgebende Einheit>입니다. <maßgebend>는 지난번에도 나왔습니다만, <Maß> 부분은 ‘척도’라는 의미로, 영어의 <measure>에 해당합니다. 직역하면 ‘척도를 부여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die maßgebende Einheit>란 세세한 의미를 들면, ‘친구/적’이란 무엇인가, 그 ‘척도’를 부여하는 단위라는 게 됩니다. 다만 <maßgebend>는 보통 이런 의미심장한 말이 아니라 ‘표준적인’이나 ‘기준이 되는’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 뒤에 있는 ‘결정적 사태에 있어서 결정하는 단위’의 원어는 <die höchste, d.h. im entscheidenden Fall bestimmende Einheit>입니다. ‘결정적’에서 ‘결정하다’라는 뜻의 <entscheiden>의 현재분사형, 또는 형용사인 <entscheidend>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bestimmend>은 ‘규정하다’든가 ‘결정하다’라는 뜻의, 영어라면 <determine>에 해당하는 동사 <bestimmen>의 현재분사형입니다. <maßgebend>도 <entscheidend>도 보통은 영어 <decisive>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가벼운 의미로 사용됩니다만, 슈미트는 이들을 일부러 말장난하듯이 무거운 의미로, ‘주권적 결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이도록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전권’

 

‘친구/적’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정치적 단위=결정적 단위’이며, 그렇지 않은 교회와 조합은 국가주권에 ‘정치적’으로 대항하는 단위가 아닌 것입니다.

 

 

국가가 단위이며, 더욱이 결정적인 단위인 것은, 그 정치적 성격에 기초한다. 다원적 이론은 사회적 단체들의 연합에 의해 단위가 되는 국가의 국가이론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국가의 해소∙부정의 이론에 불과하다. 만약 그 이론이 국가의 단일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국가를 ‘정치단체’로서, 다른 예를 들어, 종교적∙경제적 단체들과 동렬에 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 정치적인 것의 특수한 내용 여하의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홍철기 : 국가가 하나의 통일체이며 곧 척도가 되는 통일체라는 사실은 국가의 정치적 성격에 근거한다. 다원주의 이론은 사회적 단체들의 연방제를 통해 통일체에 이르는 국가의 국가이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국가의 해체, 혹은 부정의 이론이다. 그 이론이 [국가의] 통일체를 반박하고, 그것을 "정치적 결사체"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다른, 예를 들어 경제적이거나 경제적인 결사체들과 곁에 [동등하게] 둔다면, 그 이론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것의 특정한 내용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약간 선문답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위 Einheit’라는 말이 특색입니다. 그 다음의 ‘단일성’도 원어는 <Einheit>입니다. 즉, 슈미트는 ‘국가’를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단일한 단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에 서서 그는 ‘다원론’은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친구/적’을 ‘결정’하는 ‘정치적 단위’는 단일하고 분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인 단일한 단위인 국가’가 «다원적»이라고 하는 다원론은 이해 불가능한 것입니다.

슈미트의 견지에서 봐서, ‘다원론’에 의미가 있다면 ① ‘단일체로서의 국가’가 어떻게 성립되는가에 관한 이론이며, ②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이다, ③ 국가의 ‘결정 단위로서 단일성’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①이라면 슈미트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②는 슈미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슈미트와 대립합니다만, 완전 부정이기에 나름대로 알기 쉽습니다. ③이 다원론의 이해로서, 가장 보통입니다. 하지만 ③이라고 하면, ‘정치 단체 politische Assoziation’인 ‘국가’가 종교단체나 경제단체와 나란히 놓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이 경우 <politisch>의 의미가 슈미트가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친구/적’을 결정하는 힘을 독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슈미트는 다원론이 우선 ‘정치적’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의미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5頁에서 말하듯이, 러스키는 ‘국가’의 ‘주권’이나 ‘인격성’을 비판하지만, ‘정치적 단위’란 무엇인가에 관해 전혀 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선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 인간이 종교적∙문화적∙경제적, 그 밖의 단체들이 여전히 정치적 단체, 즉 ‘통치단체’를 구성하는가, 또한 이 정치적 단체가 지닌 특수한 정치적 의미란 무엇인가이다.

[*홍철기 :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근거로 사람들이 종교적이거나 문화적, 경제적, 혹은 다른 결사체들 곁에 도대체 하나의 정치적 결사체, 혹은 하나의 "통치의 결사체"를 형성하는지, 그리고 어디에 이 마지막 종류의 결사체의 특정한 정치적 의미가 존재하는지[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종교적 단체, 문화적 단체, 경제적 단체 등은 각각 고유한 목적을 지닌 단체입니다만, 이런 단체는 별도로 ‘통치 단체 governmental association’로서의 ‘정치적 단체’가 형성되는 이유를 해명할 수 없으면, 다원론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네요. 슈미트의 이론이라면 ‘친구/적’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정의가 있긴 하지만, 다원론이라면, 목적이 뚜렷한 여러 단체와 나란히, ‘정치적 단체=통치단체’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종교단체나 경제단체도 내부에서 «통치»를 행하기는 하지만, 그것과 정치단체에 의한 ‘통치’는 어떻게 다른가?

 

 

이 다원적 국가이론은 첫째, 그 자체가 다원론적이다. 즉 거기에는 통일적 중심이 없으며, 그 사고상의 계기를 실로 다양한 관념 영역(종교∙경제∙자유주의∙사회주의 등등)에서 하고 있다. 다원적 국가이론은 모든 국가론이 중심개념, 즉 정치적인 것을 무시하고, 단체들이라는 다원론으로부터 연합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단위로 끌고 갈 몇 가지 가능성조차 논하고 있지 않다.

[*홍철기 : 이 다원주의 국가이론은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스스로 다원주의적인데, 다시 말해서 이 국가이론은 통일적인 중심이 부재하면서 자신의 이론적인 동기를 굉장히 다양한 범위의 사상(종교, 경제,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러면서 다원주의 국가이론은 모든 국가이론의 중심개념인 정치적인 것을 간과하고 단체들의 다원주의가 하나의 연방주의적으로 구축된 정치통일체로 인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결코 논의하지 않는다.]

 

 

‘다원적 국가이론’이 ‘다원론 Pluralisms’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적 국가이론은 국가가 복수의(plural) 단체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만, 슈미트가 말하는 것은 그 ‘이론’ 자체가 ‘다원적 plural’이다, 즉 이론의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론’이라고 말할 만한 핵이 되는 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다원적 단체로 구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각각 별개의 목적을 가질 단체가 연합하여, ‘정치적 단위’를 구성할 때, 어떤 논리를 따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에 고유한 논리를 찾아내지 않는 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입니다.

47頁부터 시작되는 5장의 첫머리를 보세요.

 

 

본질적으로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에는 교전권이 있다. 즉, 현실의 사태 속에서,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적을 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현실성 가능성이다.

[*홍철기 : 전쟁의 권리[교전권]는 정치적 본성을 지닌 통일체로서의 국가에 속하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주어진 경우에 자신의 결정에 따라 적을 확정하고 그 적과 투쟁할 실제의 가능성[에 대한 권리]이다.]

 

 

‘교전권’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을 시작할 권리’라고 하는 점에서 납득할 것 같지만, 슈미트에 따르면 ‘교전권’의 본질은 그 전에 우선, ‘적’이란 누구인가를 현실적으로 정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즉, ‘친구/적’을 정하는 ‘정치적인 것’의 단적인 등장[현상]이 ‘교전권’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로 ‘적’이라고 규정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현실의 싸움으로 하는 것이 ‘교전권’인 셈입니다.

 

 

다원론

① ‘단일체로서의 국가’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논한다

②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③ 국가의 ‘결정 단위로서의 단일성’을 부정한다

슈미트

○ ①은 모순되지 않는다

 

× ② → ‘정치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 ③ ‘국가’의 ‘주권’이나 ‘인격성’을 비판하지만, ‘정치적 단위’란 무엇인가에 관해 전혀 

논하지 않는다

비판⇖

 

 

‘정치단체 politische Assoziation’인 ‘국가’가 종교단체나 경제단체와 나란히 하게 된다

‘친구/적’을 결정하는 힘이 독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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