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리뷰입니다!


[시읽는 목요일] 김혜순, <우리들의 음화陰畫>

수유너머웹진 2019.03.01 12:17 조회 수 : 161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리들의 음화陰畫』(문학과 지성사, 1990) 




                                              이혜진/ 수유너머 104 회원





기념일




                                김혜순



그는 계단을 올라왔다

급히 자동차를 타고

마악 들국화 뿌리 밑에서 일어나

학교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풀고

숙제를 꺼냈다

한 학생이

기념일 숙제에 그의

이름을 썼다

선생님은 숙제의 답이 틀렸다고

일일이 지적했다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계단을 다

올라와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학생들은 흰 고무지우개로

틀린 답을 지웠다

틀린 답은 쉬 잊혀지게 마련

 

그의 얼굴이 교실문 뒤에서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졌다






   김혜순의 세 번째 시집, <우리들의 >를 펼치면서 그가 쓴 시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 그는 과거는 현재 인생의 전단계가 아닌 떠나면서 다시 돌아와 자신을 감싸는 둥근 시간대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십대의 김혜순은 맴돌다 넘어지고 구멍이 나고 파고들어 몸 속에 주렁주렁 매달린 말로 시를 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 년 뒤, 그는 시인을 자신의 아픔을 몸 속에 넣어놓고, 모시고 얼르고 놀아주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지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랬다. 세 번째 시집에서 시인 김혜순은 사인 불명으로 죽은 귀신들을 위해 떠들석하게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뒹글고 흔들고 낄낄대다 끓어올라 깨져서 폭발한 통제 바깥의 말로 시를 썼다. 쉴틈없이 몰아치는 그말에 이끌려 마지막 장에 도착할 즈음 탈진한 그가 보였다.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다.

 

   반면에, 소개하는 시, 기념일은 앞서 말한 시끌벅적한 축제나 굿판과는 거리가 멀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의 시 흐름과도 다른, 마치 구경꾼도 변사도 없이 혼자 돌아가는 무성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인은 그의 소란이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것 보다 못할 거란 걸 짐작하지 않았을까, 절망하지 않으려 그렇게 꽝꽝거리고 흘러넘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기념일은 그 안타까움으로 읽고, 또 읽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얼굴이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지고 있을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3 [재춘언니] 영화리뷰3. 그는 법안으로 들어가기를 멈추었나 [1] file oracle 2022.04.01 290
162 [재춘언니] 영화리뷰2. 13년-4464일, 흐르는 시간처럼 [1] file oracle 2022.03.29 269
161 [재춘언니] 영화리뷰1. 재춘언니라는 사건 [3] file oracle 2022.03.27 545
160 [비평리뷰]금은돌의 예술산책 효영 2021.04.26 271
159 [영화리뷰] 시 읽는 시간 [1] file lllll 2021.03.19 444
158 [영화리뷰] 시 읽는 시간( 2021. 3. 25. 개봉) file 효영 2021.03.08 406
157 [과학기술리뷰] 책에는 진리가 없다 수유너머웹진 2019.06.26 294
156 문학세미나_가상현실보다 환상적인 포 읽기 수유너머웹진 2019.06.24 232
155 기형도 30주기 추모 기획세미나_기형도 시집 새로 읽기 수유너머웹진 2019.06.22 248
154 [과학기술리뷰] 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리뷰 수유너머웹진 2019.04.26 498
153 [비평집] 더 이상 정상참작 될 수 없는 고백 앞에서― 금은돌, 「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를 읽고 ― 수유너머웹진 2019.04.25 206
152 [문학세미나] 나를 발견하게 하는 거울-페르난두 페소아 수유너머웹진 2019.04.25 163
151 문학세미나_동시대의 유동하는 시점과 페르난두 페소아 수유너머웹진 2019.04.25 126
150 [과학기술리뷰] C Programming Language 소개 수유너머웹진 2019.04.22 138
149 [인문학리뷰] 『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 수유너머웹진 2019.04.22 132
148 미얀마 여행 후기 수유너머웹진 2019.03.22 216
147 [인문학리뷰]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수유너머웹진 2019.03.22 218
146 문학세미나_나를 발견하는 거울 -페르난두 페소아 수유너머웹진 2019.03.21 143
145 [시읽는 목요일]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수유너머웹진 2019.03.01 253
» [시읽는 목요일] 김혜순, <우리들의 음화陰畫> 수유너머웹진 2019.03.01 16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