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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

2010년대 한국시의 경향과 특이점: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

 

 


돌들은 땅 위에 깔려 있다,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 돌들,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보통 돌들,

보통 돌들비문 없는 돌들.[각주:1]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송승환_시인. 문학평론가

 

 



1.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지난 201610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201731120차 촛불집회까지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에서 열렸다. 헌법에 기초하지 않은 소수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촉발된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평화적이며 지속적인 참여로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특히, 19차 촛불집회까지 세대와 성별을 가르지 않고 참여한 시민들의 최종 누적 연인원은 1,500여만 명이었는데, 이는 헌법재판소 전원일치로 2017310일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진 다음날 개최된 20차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였으며 대한민국과 세계의 역사에 민주주의가 기록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은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선정한 2017년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2008225일부터 2017310일까지 유지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퇴행적인 치안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실천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인들은 지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치안 통치 속에서 발생한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을 감행한 바 있다.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은 동시대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낸 사건으로서 시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한꺼번에 제기하였다. 시인들은 동시대의 사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표명하면서도 경악과 비명, 분노와 슬픔 외의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고통과 무력감을 겪었다. 2009‘6.9 작가 선언20149월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304 낭독회는 그 고통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실천이었다. 2000년대 한국시의 전위적이며 미학적인 실험은 제도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미적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2008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시는 다시,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모색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어떻게 감각하고 표현할 것인가, 라는 논의의 자리로 재결집하는 양상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최근 촛불 시민들의 투표로 재건한 제도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올바름과 그 윤리를 시적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까지 치달았다. 직장과 학교 안팎의 위계질서에 의한 성차별과 폭력 등에 대한 고발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의 미시적 영역에 만연한 불평등과 비민주성에 대한 시민 개인들의 강렬한 저항과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예증한다. 한국시는 급박한 현실의 국면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 앞에 놓여있는 형국이다.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국시의 신인들이 나타났다. 2000년대 한국시의 전위적 실험을 주도한 1970년대생 시인들과 구별되는 1980년대생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앞선 세대의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언어의 영향과 자장 속에 있으면서도 그 영향의 극복과 정치적 올바름’, 미학적 정치성과 윤리의 언어를 동시에 발명해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출현하였다. 2000년대의 1970년대생 시인들은 현실을 억압하는 세계과 자본에 대하여 윤리를 초과하는 주체와 소수점 이하의 주체 및 분열하는 주체를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알레고리 시의 파편적 파노라마를 전개하였다. 2010년대의 1980년대생 시인들은 2000년대보다 더욱 심화된 장기적 불황과 자본의 예속에서 삶의 생존을 더욱 민감하게 고려하고 반응하는 알레고리 시의 염려하는 주체를 등장시켰다. 그들의 시에서 염려, 즉 쿠라(Cura, 라틴어)[각주:2]지금-여기의 삶에서 다른 시간의 도래를 희망하지만 다른 삶의 어떤 가능성도 품지 못하는 주체의 불안을 드러내는 심리적 특성을 함의한다. 염려는 지금-여기한국의 시간과 장소에서 시들지 않는 꽃들을 심어 세계를 뒤덮[각주:3]는 상상력과 다른 삶에 대한 동경(憧憬)’을 가로막는다. 다른 삶을 향해 도전하고 고통과 마주하고 싸우면서 절대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1980년대생 한국시에서 염려하는 주체는, “시작부터 시작만을 반복하는 세계”(백은선의 유리도시)에서 총력을 다해 할 일 없는 하루”(백은선의 가능세계)를 살고 사람들은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 가졌”(유계영의 생각의자)다고 생각한다. 우울의 반복 세계에서 나는 숨을 참는 얼굴”(안미옥의 거미)이 되고 네 숨은 서서히 마취되어”(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가고 주름만으로 중력은 악몽”(신두호의 증후군)이 된다. “이 집에서 나는 노력 없이 노력한 것보다 더 작아진다”(김복희의 잉어 양식장)[각주:4]고 진술한다. 염려하는 주체는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 일상의 무한 반복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과 그 동경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과 동경에 대한 열망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망조차 품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2010년대 지금-여기한국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동경 없는 세대의 염려하는 시적 주체가 발화하는 언어는 그 근심을 표명하는 알레고리의 고백적 진술이 특징이다. 시적 대상을 돌파하고 난관을 가로질러서 다른 삶과 다른 의미, 그 절대에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실패한 우울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와 기지의 현실 로부터 기원한 불안에 휩싸인 주체의 우울한 고백이다. 염려하는 주체의 고백체 진술은 우울한 현실과 대면하는 알레고리의 미적 거리가 가까워서 평면적 의미의 맥락과 규범적인 언어의 경향을 지닌다.

 

이 시는 땅 위에 깔려 있는 돌들에 관한 것이다.

보통 돌들, 그들 중 반은 태양을 보지 못할,

회색빛 보통 돌들,

보통 돌들비문(碑文) 없는 돌들.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는 돌들,

태양 아래선 하얗고, 밤이면

물고기의 불거진 눈 같아져 버리는 돌들,

우리의 걸음걸음을 가루로 만드는 돌들,

영원한 양식의 영원한 맷돌.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는 돌들,

검은 물 같은 회색빛 돌들,

자살자의 목을 장식하는 돌들,

분별력으로 연마된 보석 돌들.

 

어느날 자유라고 새겨지게 될 돌들,

어느날 거리를 포장하게 될 돌들,

감옥을 짓게 될 돌들,

아니면 아무런 연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돌처럼

그냥 그대로 제자리에 남겨질 돌들.

 

이렇게

돌들은 땅 위에 깔려 있다,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 돌들,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보통 돌들,

보통 돌들, 비문 없는 돌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땅 위의 돌들(1958) 전문

 


소련이 강제 추방한 러시아계 미국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Iosif Brodsky, 1940-1996)땅 위의 돌들은 지상에 깔려있는 돌들에 관한 시이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돌들은 흔히 깔려있는 보통의 돌들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는 보통의 돌들이 태양도 보지 못하고 죽은 자의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익명의 존재들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비문 없는 돌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그 돌들은 우리의 걸음걸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걸음걸음을 가루로 만드는돌들이며 영원한 양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내는 맷돌이다. 자살자가 목에 매단 돌들이며 연마된 보석 돌들이기도 하다. 어느 날에는 자유를 위해 치켜든 돌들이고 새로운 길을 놓는 포석이며 감옥을 짓는 돌들이기도 하다. 아니면 앞서 언급된 돌들의 유용성과 무관하게 아무런 연관성도 불러일으키지않고 그냥 제자리에 남겨질 돌들이다. 생명의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거나 자살자의 목덜미를 연상시키는보통의 비문 없는 돌들이다. 돌들은 무용함에서 유용함까지, 자유에서 억압까지, 생명에서 죽음까지, 복종에서 저항까지, 흰빛에서 검은빛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를 거느린다. 돌들을 완전히 재현하고 지시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흔적을 거느린다. 시인은 보통의 많은 돌들이 땅 위에 깔려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돌들의 입체적 의미를 알레고리의 언어와 간결한 음악으로 땅 위의 돌들에 구축한다. 더 나아가 자유를 지향하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과 배치되는 소련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한 알레고리로 형식화한 것은 염려하는 주체의 알레고리와 다른 지점이다.

시는 지금-여기의 상황을 재현하고 비판하면서도 지금-여기의 의미를 항상 재구축하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지금-여기의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는 낯선 현존, 동경의 대상을 지금-여기에 출현시킨다. 이질적인 언어의 형식과 상상력을 통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감춰져있던 세계의 이면을 드러낸다. 시는 고통의 경험에서 흘러넘치는 낯선 언어의 경이를 받아 적는 낯선’ ‘의 목소리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출현을 지금-여기타자로서의 내가 재현 불가능한 언어로 기입하는 것이다. 2010년대 한국시의 염려하는 주체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두 개의 특이점, 1986년생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각주:5]에는 재현 불가능한 세계의 흔적을 드러내는 언어의 형식이 있다.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2. 새로운 종은 이름을 얻지 않는다 김복희 언어의 시적 서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 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 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김복희의 백지의 척후병전문

 




김복희의 첫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은 우울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의 서사와 염려하는 주체를 배면에 두고 있다. 58편으로 구성된 시집은 우울한 현실의 알레고리, 그 중력의 순환 구조로부터 벗어나서 초현실의 세계로 진입하여 이름 붙일 수 없는 세계가 출현하는 순간을 제시한다. 김복희의 시는 제목과 본문 사이에 설치한 간극의 도약을 적극 전개한다. 대상에 해당하는 제목과 대상의 성격을 암시하는 본문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희박하다. 더 나아가 시행과 시행, 연과 연 사이의 간극이 커서 면밀한 독해가 요구된다. 그 관련성이 희박한 만큼 제목과 시행 사이를 매개하는 상상력의 증폭과 암시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백지의 척후병은 김복희가 발명한 언어의 특이점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 백지의 척후병의 시적 주체는 가스검침원이다. 내가 포함된 우리는 시적 주체이면서도 관찰자의 시선을 지닌 시적 객체에 가깝다. 시공간은 가스검침원이 우리 집에 가스검침을 하기 위해 온 어느 겨울이다. 시는 연속사방무늬 물”, 즉 눈이 부서져 날리는 겨울날로부터 시작한다. 눈의 기원인 구름재난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성되고 다시 많은 눈을 흩뿌리는 겨울날이다. 김복희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라고 단순히 재현하지 않는다. ‘을 암시하는 <연속사방무늬구름재난>이라는 연속적인 연상의 상상력과 재난에 대한 시적 인식을 드러낸다. 그 재난은 자연 재해이면서도 삶의 재난으로 확장되는 중의적 의미를 품는다. 김복희의 언어는 사물과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시적 인식을 담아낸 암시의 언어임을 드러내는데, 이는 김복희의 시에서 빈번하게 구축되는 언어의 형식이다.

가스검침원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가스누출 여부를 검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스 폭발과 화재의 위험 징후를 살펴보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삶의 밸브에 비누 거품을 묻히는 노동자이다. 그는 두 번 진술한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 냈을 겁니다/전쟁은 전쟁인거죠라고. 우리에게 가스검침은 사고 예방을 위한 작은 조치이지만 그에게 가스검침은 그가 맡은 모든 집을 방문해서 수행해야 할 노동이다. 그 노동의 길, 바닥구름이 토한 것같은 눈이, 사방연속무늬의 눈이 발가락을 다 잘라낸 것처럼 가득 쌓여있다면 그의 노동은 눈과 싸우면서 눈을 돌파해야 할 전쟁이다. 눈으로 인한 자연 재해가 삶의 재난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닥은 노동의 길바닥만이 아니라 삶이 처한 바닥도 함의한다.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포함한 공동체의 위기를 예방하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공동체로부터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당한 대가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단지 가스검침원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의 바닥지금-여기한국에서 살고 있는 다수의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가스검침원의 노동하는 삶의 구체성은 지금-여기에서 노동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삶과 겹쳐진다. 가스검침원이 치르고 있는 전쟁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치르고 있는 전쟁이다. 그리하여 시적 객체였던 나는, 시적 주체가 되어 나지막이 묻는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보이지 않는 전쟁의 폭발음이 들렸던가라고. 김복희 언어의 미학적인 형식이 정치적인 내용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그의 노동은 낮 동안 눈과의 전쟁 속에서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길게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 집의 추위와 다른 집의 추위를 측량하는 것이면서 자신의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는 삶의 추위를 체감하는 노동이다. 김복희는 길게 이어지는 노동을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고 표현한다. 시에서 표현은 사상이다. 침묵까지 거느린 언어의 표현을 통해 시의 사유는 전개된다. 눈 덮인 길을 뚫고 눈과 싸우면서 나아가는 노동과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는 것의 유사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검침원의 노동에서 의 아날로지(analogy)를 발견해내고 멀리 있는 두 대상의 병치와 암시를 통해 시인의 시적 인식을 드러낸 것은 주목할 만한 시적 사유이다. 그 아날로지는 빛은 우회로를 모르는 짐승처럼 한 곳만을 두드리지요”(사다코 씨에게)밤과 낮은 겹쳐진 나뭇가지처럼 서로를 문지르고처럼 직유를 통해서도 김복희의 시에서 자주 출현하는 언어의 특이점이다.

가스검침원의 노동은 그의 육체가 죽음을 무릅쓰고 통과하는 전쟁처럼 눈에 흔적을 남기면서 길을 내고 -무덤을 쌓는 삶의 수고이자 연장이듯이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성장한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몸이 굳어서 죽듯이 가스검침원도 저 노동의 눈길을 헤쳐 나가지 못하면 죽는다. 그가 헤쳐나간 길 뒤에 눈이 쌓여있듯이 새로운 육체를 얻고 사라진 뱀 뒤에 허물이 쌓여있다. 시인은 노동과 뱀의 아날로지를 통한 시적 사유를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고 표현한다. 죽음의 눈길을 돌파하는 노동 속에 지속하는 삶이 있고 허물 벗는 육체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눈더미를 돌파한 삶과 허물 벗은 육체, 미지의 뱀은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고 태어난다. 지금 눈길을 가로질러서 나아가는 가스검침원은 시인에게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로 명명된다. ‘정수리는 죽음의 빙하를 밀고 뚫고 돌파하면서 생성되는 미지의 삶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미지의 생명은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며 현실의 고통과 죽음의 위협에 짓눌렸던 인질들이다. 가스검침원과 짓눌렸던 존재들은 다르지 않다. 시인은 가스검침원이 나아가는 노동의 길을 통해 눈 밑에서 포복하던생물들과 인질들을 발견해낸다. ‘지금-여기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분명 새로운 존재들이 죽음의 문을 찧일어서서 탄생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선언은 시행의 간극과 도약 속에 도사린 시인의 시적 인식으로서 가스검침원이 새로운 존재들, 미지의 생명들의 출현을 최초로 목격한 척후병임을 드러낸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옥수수 밭 바깥을 정돈한다

없는 사람으로 약속한다 공을 날려 달라는 말이다

아침마다 쓸고 닦았지만 털어 낼 수 없는 빛을 본다

―「플레이 볼부분

 

친구가 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친구가 무서우니까 이야기 좀 계속 해 보라고 말한다.

―「부분

 

털어낼 수 없는 빛을 바라보고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이야기[각주:6]하는 시인은, 염려하는 주체, 즉 우리가 삶의 불안과 재난의 고통 속에 휩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돌파할 때 다른 삶과 다른 존재로의 거듭남이 가능할 것임을 암시한다.

척후병이 다름 아닌 가스검침원으로 드러나는 순간 표제로 제시된 백지의 척후병은 다시 한번 의미의 확장을 일으킨다. 제목과 본문 사이의 간극에서 의미의 도약이 전개된다. ‘백지가 불러일으키는 흰빛의 아날로지는 과 결합된다. 가스검침원은 가스 누출 여부를 검사하고 우리의 겨울을 측량하며 눈의 흰빛과 함께, 흰빛 안에서, 눈더미를 쌓으면서 죽음의 흰빛을 뚫고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인질들의 출현을 목격하며 흰빛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시인은 백지 위에서 삶의 재난을 예감하고 고통의 크기를 측량하며 그 기록을 백지 위에 남긴다. 낯선 현존과 다른 삶의 출현을 감지하는 한 편의 시를 파국의 징후와 함께 백지 위에 남기며 사라진다. 가스검침원이 백지의 척후병이며 시인이다.

 

냉혈을 타고 오라, 서늘하고 축축한 전갈이

너를 놀래키는 것이다

―「내일과 모래 사이

 

시인은 내일도 모래도 아니라 내일과 모래 사이의 미지의 시간에 지금-여기로 출현하는 인질들과 새로운 생명들을 백지의 척후병으로서 목격한다. 그 타자의 존재들은, “냉혈을 타고” “너를 놀래키기위해 지금-여기의 바깥과 외부에서 온다. 그들은 서늘하고 축축한 전갈이며 새의 육체와 인간의 육체가 결합된 새로운 종으로서의 새로운 인간’, “새 인간”(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다. 그들은, “새로운 종은 이름을 얻지 않”(내일과 모래 사이)는다. 새로운 종은 현실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는 백지에서 솟아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쟁 같은 현실을 돌파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백지 위에 출현하는 새로운 종을 목격한다. 시인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로 끝없이 이야기하고 받아 적는 척후병이다. 김복희의 시는 흰빛으로 수렴되는 파국의 백지 위에서 삶의 재난과 보이지 않는 전쟁 뒤에 출현하는 낯선 존재들을 예감하고 목격하며 이야기하는 백지의 척후병이다.

 

 

3. 사라짐으로써 유명해진다 안태운 언어의 시적 이미지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안태운의 얼굴의 물전문

 




이미지는 실재와 실재를 지시하는 언어 사이에 위치한다. 이미지는 실재를 드러내면서 실재를 가린다.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면서도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매번 실재를 온전히 지시하지 못하는 실패를 겪는다면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비존재와 다른 세계의 현존을 눈앞에 드러낸다. 죽은 예수의 시체에 드리워져서 예수의 얼굴을 드러낸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orino)’처럼 이미지는 말해지지 않은 것과 고대적인 것, 있지 않은 것과 죽어있던 것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잔존의 영상(映像)이다. 잔존하는 영상으로서 이미지는 비가시적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얼굴이 찍힌 리넨처럼 이미지가 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드러낼 때 비가시적인 것은 죽은 존재이거나 눈앞에 부재하다. 이미지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미지가 불러일으킨 기억에는 죽거나 망각되거나 있지 않은 비존재에 대한 파토스의 잔존이 있다. 이미지는 기억과 파토스의 잔존을 통해 부재하는 현존, 그 실재와 실재에 가장 근접한 언어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매개한다.

1986년생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는 빛조차 파괴된 허상의 현실 세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어두운 숲속에서 이 발하기를 준비하는 알레고리의 이미지를 구축한 바 있다. 송승언의 시에서 이미지는 저 숲의 어둠 속에 소멸하지 않고 잔존하고 있는 실재의 빛이 있음을 암시한다면 안태운의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에서 이미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체가 지워지는 의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안태운의 시에서 염려하는 익명의 주체는 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났다가 의 이미지를 통해 사라진다. 안태운은 접속부사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이미지, 문장과 접속부사의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통해 안태운 언어의 특이한 형식, 알레고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시집의 첫 시 얼굴의 물은 안태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특이점을 명시한다. 안태운은 시에서 흔히 활용하지 않는 접속부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그러나의 역접관계, “그러니의 인과관계, “그러면서의 동시성, “그러자의 인과관계를 전복하면서 그러나그러니’, ‘그러면서그러자가 지닌 기존의 의미와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안태운의 시에서 접속부사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 체언과 용언을 수식하면서 생략해도 무방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 준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체언과 용언으로서 문장의 의미를 확정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삶을 분명히 재현하는 품사라면 부사는 체언과 용언을 수식하는 품사로서 시적 주체의 양태와 강도를 드러낼 수 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고 생략해도 된다. 접속부사는 부사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태운 시의 염려하는 주체를 암시하며 알레고리한다. 염려하는 주체는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처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처럼 지워져도 무방한 존재인 것이다.

접속부사는 두 문장의 기존 관계를 뒤틀면서 염려하는 주체의 운동성과 그 방향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름 없는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다라는 문장과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라는 문장은 명확한 역접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로 인해 안에 있고 안이 좋다는 그의 위치와 가치판단이 부정되는 암시의 이미지가 생성된다. “그러나가 암시하는 부정적 이미지는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과 결부된다. 그가 있고 그가 좋아하는 이란, 빛이 없고 안개가 가득한 공간이다. 그의 은 어둠과 안개로 가득한 방과 음울한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의 부정적 상황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그가 좋았던 그러나를 통해 부정되었기에 그는 에서 으로 나간다. “그러니는 사건의 인과관계에서 공간의 인과관계까지 확장된 의미를 품는다. 좋아하는 을 부정하고 으로 나갔는데 밖에서는 가 내린다. ‘가 만들어내는 물의 하강 이미지는 알 수 없는 슬픔의 감정 수위를 솟아오르게 한다. 수직으로 내리는 의 물 이미지는 감옥의 철창처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맥락을 끊어버리고 그를 고립시키면서 비의 철창 안에 가둬버린다. “비는 믿음이 간다는 진술은 안이 좋다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밖의 세계를 믿을 수 없다는 진술의 반어적 표현이다. “안이 좋고 밖에 내리는 비가 믿음이 간다는 그의 안팎은, 모두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그러면서의 동시성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상태와 안팎 모두 부정적 상태의 지속을 함의한다. 안팎의 부정적인 상황과 지속 속에서 그러자는 순차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순서 없는 인과관계를 암시한다. 비 오는 밖에서 젖은 얼굴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이 어둡고 안개가 가득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이다. 안팎을 계속 드나드는 것과 같다. 이상의 접속부사는 시적 주체의 운동성과 그 방향, 시공간의 양태와 심리적 강도를 드러내지만 여전히 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모든 물은 넘쳐흐르고 옷자락은 몸을 휘감고 형태는 마모되어 갔다.”

―「탕으로부분

 

너는 내 얼굴을 찾고 있나 그러나 찾지 못했지 나는 사람들이 되어 울고 있었지

―「낳고부분

 

접속부사는 우울한 세계의 안팎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상황과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가리고 지워버린다. 얼굴의 물 안으로/얼굴의 물 밖으로/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낳는다. 내 얼굴의 형태는 마모되어서 너는 내 얼굴을 찾지 못한다. 접속부사는 물에 씻겨 나가서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안태운 시의 시적 주체, 염려하는 주체의 존재론적 특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비가 계속 내리는 세계에서 나는 사라짐으로써 유명”(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해진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는 사람들이 되어 울고있다.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게 얼굴이 씻겨나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가득하고 어두운 안비가 계속 내리는 밖의 세계에서 우리의 얼굴은 모두 씻겨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접속부사와 물의 이미지를 통해 우울한 세계에서 흐려지고 지워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물에 흐려지는 그의 얼굴은 사라져가는 나의 얼굴이다.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은 그가 남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남은 얼굴로)는 일이다. 나는 그의 남은 얼굴에서 씻겨나간 내 얼굴의 이미지를 본다. 이름 없이 죽어가는 존재가 이름 없이 죽어가는 존재를 바라본다. 시인은 도시에서 이름 없는 얼굴을 지워버리는 죽음의 이미지를 목도한 것이다. 죽음의 물 이미지는 모든 존재를 흐릿한 존재로 변모시키고 씻겨나가는 얼굴의 흔적을 남긴다. 안태운의 시는 있지 않은 것이 있음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기억과 파토스의 잔존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망각과 소멸의 잔존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있는 것이 있지 않음의 흐릿한 영상으로 남는 이미지를 구축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말해질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는 순간의 시적 이미지를 포착한다. 이것이 안태운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특이점이며 접속부사의 알레고리이다.

 

 

0. 이 시는 땅 위에 깔려 있는 돌들에 관한 것이다

 

 

  

 


문학들2018년 가을호

 『전체의 바깥』, 문학들, 2019.

 

  


송승환 poetika@naver.com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과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평론 부문 당선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전체의 바깥』(2019) 등이 있다.





  1.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땅 위의 돌들」, 『땅 위의 돌들』, 김진영 편역, 정우사, 1996, p.197. 이하 인용 면수는 생략한다. [본문으로]
  2. 쿠라에 관한 우화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 1998, p.269) 참고. 우화에서 염려는 인간을 빚어내는데, 이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염려의 지배로부터 전혀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본문으로]
  3. 노발리스, 「밤의 찬가」, 『밤의 찬가/철학 파편집』, 박술 옮김, 읻다, 2018, p.18. [본문으로]
  4. 이상 첫 시집을 출간한 1984년생 안미옥의 『온』(창비, 2017)과 신두호의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창비, 2017), 1985년생 유계영의 『온갖 것들의 낮』(민음사, 2015), 1986년생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과 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 1987년생 백은선의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참고. 이하 인용 면수는 생략한다. [본문으로]
  5. 1986년생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와 함께 주목해야 할 첫 시집은 안희연과 송승언의 시집이다. 1986년생 안희연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작과비평, 2015)는 “백색 공간”의 아름다움, 그 절대를 동경하는 시적 주체가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시의 윤리와 미학 사이의 고뇌로 나아가는 ‘옆’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안희연의 ‘옆’의 시쓰기와 실패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졸고, 「대홍수의 상상력, 그 무의식적 정치성을 위하여」, 『현대문학』, 2016.6. 참고. 한편으로 1986년생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는 멜랑콜리적 세계관 속에서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대상을 암시하는 감각의 잔상을 신체에 각인시키는 빛의 이미지로 구현한 바 있다. 그의 시는 인공의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비판하고 숲속의 불빛이 어둠 속에 남아있음을 암시한다. 송승언의 시에 나타난 빛의 알레고리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졸고, 「빛이 파괴된 세계의 잔존하는 빛」, 『현대시』, 2016.9. 참고. [본문으로]
  6. 김복희의 시 「길다」, 「왕과 광대」, 「테마파크」, 「사유지」 등에서 이야기와 우화는 시와 정치, 삶과 예술의 관계를 사유하는 알레고리로 표현되며, 그 시적 서사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시적 언술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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