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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에서 은유로, 은유에서 인양으로


- 백무산, 『폐허를 인양하다』(2015, 창비) -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백무산의 시집은 처음 읽어보았다. 왠지 제목부터 세월호를 연상시켜 읽고 싶지 않았다. 사회문제를 노골적으로 시어로 삼고 있는 시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특히 세월호 추모제에서 송경동 시인의 낭송을 듣고부터는 세월호에 관한 시들을 피하게 되었다. 쏟아지는 아래서 들었던 시인의 절규는 공포와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세월호"라는 시어로부터 도망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동안 "세월호 침몰"이라는 사건은 경악할만한 것이었지만 "진상규명" "인양"이라는 말은 기꺼이 끌어 안아야 할,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가벼운 공기가 아니라 빗물이라는 다소 무거운 매질을 타고 전해진 시는 "진상규명" "인양"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일으켜 마주하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백무산의 시집의 몇몇 시들에는 사회문제와 정치적 사안이 시어로 사용된다. , 백무산의 시집에는 정치적 문제가 시어로 사용되지 않은 시들도 있다. 아무래도 뜨거운 문제들이 직접 나타나는 시들이 눈에 띈다. 시 전체가 눈에 띈다기보다는 문제와 관련된 단어들이 눈에 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단어들은 명확한 사실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 몸을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선명하다. 그런데 다음 시는 세월호를 사실이 아니라 은유처럼 듣는다.

 


빛을 등지고 오는 것은 그림자가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

은유가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

오후에 세월호 침몰 소식 들었다

그 침몰은 사실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에 대한 은유처럼 들렸다

- <그날> 부분

 


빛을 등지고 오면 몸의 앞면은 보이지 않아 몸의 정체를 없다. 다만 땅에 비친 그림자의 실루엣만으로 정체를 가늠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림자를 "도착"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림자는 멀리서 나중에 오는 것을 대략이나마 먼저 이끌고 온다. "세월호 침몰 소식"이라는 은유도 다가올 시대를 이끌고 먼저 도착한다. 은유의 그리스어 어원인 "메타포라(metaphorá)’는 무언가를 끌고 오는 것, 무언가를 가로질러, 곁으로(meta) 옮기는 것(pherō)을 뜻한다. 세월호라는 배는 사람들과 물건을 싣고 날라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몰했다. 그런데 세월호의 침몰은 다가올 시대를 이끌고 온다. 수직으로 가라앉는 것이 신기하게도 평평한 수면을 따라 무언가를 이끌고 온다.

 



지구는 둥글어 모든 지점이 다 중심이라는 말은

돼먹지 않은 소리다 둥근 표면은 다 주변이다

[…]

태양은 따듯한 중심이 아니라

제 몸이 뜨거워 불덩이를 사방으로 마구잡이로 흩뿌리는 거다

주변에 있어 모두 손이 둘인 거다 모두가 결핍돼 있어

손을 잡아야 일어설 수 있는 거다

 

아이들이 둥글게 앉아서 손을 잡고 논다

가운데는 죽은 술래만 앉는다

-<주변뿐인 우주> 부분

 


은유에 중심이 있을까? 두 사물이 공통점이 있어 어떤 교집합을 이룰 때, 둘은 은유적 관계에 들어간다. A B의 은유이고, B A의 은유다. 둘은 그 교집합으로 묶일 수 있지만 이목을 끄는 것은 교집합을 빼고 난 나머지다. 그 교집합 자체가 중요하다면 교집합을 곧바로 이야기 하면 되지 A B를 굳이 끌어올 이유가 없다. 교집합은 둘을 엮어주는 역할만 하고 사라진다. A B의 서로 다른 나머지가 도드라지며 어떻게 둘이 나란히 놓일 수 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결국 A B의 나머지 부분들, 그러니까 중심의 교집합이 사라지고 난 주변의 표면들만 남아 있다. 그래서 은유는 주변에서 주변으로 간다. 먼저 도착하는 그림자, 무언가를 이끌고 도착하는 은유는 이곳으로 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또 주변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주변은 중심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주변이 아니라 다른 주변들과 나란히 놓인 주변이다. 은유는 정의상 계속 무언가를 옆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니까 은유는 계속 주변들을 생산하면서 중심을 비워내야 한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은유는 수면을 따라 움직이면서 주변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죽음이 갯벌처럼 어둡게 스며들고

사랑이 불같이 스며들고

모든 질서를 뒤엎고 재앙의 붉은 피가 스며들 때

나는 패닉에 열광한다

[…]

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

- <패닉> 부분

 


A B가 그냥 나열되어 있는 것과 둘이 은유적 관계에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은유가 교집합을 지우고 주변들만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결국 주변들의 나열이 아닐까? 젖은 하얀 천에 빨간색 물감과 노란색 물감을 가까이 떨어뜨려보자. 둘은 스멀스멀 물기를 타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이상한 제3의 색이 만들어진다. 3의 색은 뚜렷하게 중심으로 드러난다. 결국 세 가지 색이 생겨난다. 한편, 백무산의 시에서 풍경과 나의 스며듦은 은유적 작용을 거친다. 은유는 나열에서 비롯되는 스며듦보다 그 과정이 복잡하다. 언젠가 둘이 맞부딪쳐 겹쳐진 적이 있어야 한다. 주변들은 그저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서로 스며든 적이 있다. 그런데 백무산식의 은유에서는 서로 스며든 계기에 해당하는 교집합을 알 수 없다. 교집합은 비어 있고 두 주변들만 남아 있다. 교집합이 사라지자 두 영역은 본래의 성격을 잃는다. 각자 교집합만큼의 공백을 갖는다. 3의 무언가가 없다. 풍경이 나에게 스며들면 풍경과 나 사이에 제3항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스며듦 이후에 오히려 나는 폐허로 존재한다. 스며듦은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나는 온전하지 못하고 주변으로 남는다. 나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주변 역시 폐허로 존재하지만 그것과 나는 언젠가 서로 스며든 적이 있다. 그것과 나는 서로 스며들면서 폐허가 되었다. 

 

모든 질서를 뒤흔든 재앙은 사물들의 경계를 해체하면서 그것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게 만든다. 그런데 스며듦을 적요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패닉은 고대 그리스의 신 (Pan)’에서 왔다고 한다. 판은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그의 낮잠이 방해 받을 때면 갑자기 엄청난 고함을 질러 가축의 모든 무리들이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간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사물들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재앙 앞에서 패닉을 경험한다. 단지 패닉을 느끼는 것을 넘어 그 패닉에 열광한다. 왜냐하면 그 패닉이야말로 다른 것으로는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패닉을 불러일으키는 스며듦의 과정은 내가 폐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패닉이 보여주는 낙원에서 나는 폐허로 존재한다. 은유가 발생할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은유를 통해 주변이 된 A B는 고즈넉하게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주변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재앙이 불러일으키는 패닉을 경험해야 했다. , 이제 패닉을 만끽해보자. , 이제 주변이 되어 빌빌거려 보자. 그럼 문제는 다 해결되었는가? 세월호가 아직 물 아래 가라 앉아 있는데……. 세월호 침몰이라는 은유는 이것저것을 옮길 뿐만 아니라 가려져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인양해야 한다.





 


무엇을 인양하려는가 누구는 그걸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을 건져올리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 세상을 건져올린 적은 한번도 없다 그것은 희망으로 은폐된 폐허다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다 인간의 폐허다

- <인양> 부분

 


사실의 차원에서 인양해야 할 것은 세월호다. , 사실의 차원에서 세월호 인양의 목적은 진상규명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희망이 바로 세월호 인양의 목적이다. 목적은 과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백무산은 세월호 침몰을 사실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은유로 보려고 한다. 은유의 차원에서 볼 때, 인양해야 할 것과 그 인양의 목적은 무엇일까? 시집의 제목에서처럼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 앞선 시에서 보았듯, 폐허는 풍경과 내가 서로 스며들고 난 뒤의 결과, 즉 어떤 측면에서든지 은유적 교집합을 이루고 그 교집합이 사라진 뒤에 남는 나머지다. , 폐허는 풍경과 나의 결코 동일화될 수 없는 차이다. 그 차이들은 더 이상 풍경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은 폐허라고만 불릴 수 있을 뿐이다. 세월호 침몰이 은유의 움직임으로 수면을 가르며 이동할 때 생겨나는 것은 세월호를 중심으로, 세월호를 바라보며 줄지어 서 있는 주변들이 아니라 서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주변들, 그 중심을 찾을 수 없어 보이는 주변들이다. 세월호 침몰은 그것들을 이끌고 옆으로 옮겨 놓는다. 그래서 하나의 주변-폐허는 다른 주변-폐허로 겹쳐지고 하나의 주변-폐허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것으로 남지 못한다. 온전해지기를 희망하는 폐허가 아니라 오히려 폐허로 존재함으로써, 주변이 됨으로써 다른 주변들과 손을 잡을 수 있는 폐허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은유가 지녔던 수평적 움직임은 여기에서 수직적 방향을 얻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을 은유를 통해 모으고 그 결과 생겨나는 주변들은 변용을 겪는다. 그것들 각각은 무언가의 중심이 되지는 않지만 다른 주변들과 함께 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인양된다. 인양(引揚)끌어서’() ‘바람에 흩날리게 내놓아 알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주변이 되어 서성이지 않고, 폐허가 되어 드러누워 있지 않고 다른 주변들과 은유적 관계를 맺어 세상으로 인양되어야 한다. 홀로 거센 물살을 헤치고 올라갈 순 없으니 반드시 다른 주변들이 필요하다. 세월호 침몰은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주변들을 모았고 주변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물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이때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도 주변들 중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텐데 한몫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가 그 사람이라면 시의 숙명이 애도라면 그 무슨 증거가 못될지라도

애도의 봉분이 되어 지키고 있어야 하고 아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할지라도

백비가 되어 서 있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시의 운명일까

- <시총과 백비> 부분

 


시는 꼭 사실을 가리켜야 할까? 시는 꼭 진실을 가리켜야 할까? 시는 꼭 희망을 노래해야 할까? 백무산이 질문하는 시의 운명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 가리키지도 못하는 백비는 사실도, 진실도, 희망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백비는 무능하다. 백비는 ‘~못할지라도가 돌덩어리로 응축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리키거나 기릴 수 없다 할지라도일단 무덤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백비는 자신을 보고 궁금해하는 이에게 무덤을 보라고 말한다. 자신의 표면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저 무덤을 기리고 있다고. 그래서 무덤을 쳐다보면 무덤은 아무 말이 없다. 무덤은 다시 백비에게 자신의 정체를 물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백비는 무덤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며 다시 발을 뺀다. 여기서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무덤과 백비 둘 다 중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심들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중심은 하나여야 하고 주변들은 여럿일 수 있다. 차라리 무덤과 백비 둘 다 주변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 너도 주변 나도 주변이라고 해서 서로 의가 상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묻혀 있는 사태가 무덤이라고 할 때, 그 사태의 진실이 아니라 그 사태가 일으킬 수 있는 주변들을 찾아내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백비로서의 시이지 않을까? 사태에 대한 백비로서의 시는 주변과 주변 사이를 오가며 그것들을 둥글게 모은다. 마치 은유로서의 "세월호 침몰"이 세상의 모든 폐허들을 서로 주변으로서 손잡고 나란히 놓일 수 있게 하듯이.

 

백무산은 세월호 침몰도 은유로 보고, 인양도 은유로 본다. 그에게 은유는 단지 문학적 수사법이 아니다. 침몰과 인양이 단지 문학적 은유라면, 인양이라는 은유는 다른 무언가를 고정적으로 의미해야 하지만 이 독특한 은유는 모든 주변들을 가로 질러 간다. 이때, 은유는 인양의 기능도 수행한다. 주변들을 거쳐 가면서 그동안 묻혀있던 주변들이 떠올라 드러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양에서 은유로, 은유에서 인양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둘을 가지고 글자놀이를 할 수도 있다. ‘인양이라는 단어의 자음과 모음을 분해하면 은유라는 글자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o’이 하나 남는다. 이 남는 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반대로 은유라는 글자에서 인용이라는 글자를 만들 때, 결핍된 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다른 것으로 만들 때 남는 재료는 또 다른 것을 만들 때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는 것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주변들을 찾을 필요가 생긴다. 한편, 무언가를 다른 것으로 만들 때 모자라는 재료는 또 다른 것에서 조금 빌려오면 될 것이다. 그래서 모자라는 재료를 나누어줄 수 있는 새로운 주변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인양은유는 은유적 관계를 이루며 주변들을 만들어낸다. 조금 더 줄 누군가들, 조금 더 빌려올 누군가들이 둥글게 앉아서 손을 잡고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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