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문학의 선언, 선언의 문학 (6강) / 오영진,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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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언, 선언의 문학 역사는 선언과 함께 시작한다. 문학의 역사도 그러하다. 문학의 선언들을 통해 문학은 기존의 질서 틀을 벗어난다. 이 강좌는 문학에서의 선언의 역사와 함께 선언의 힘이 무엇인지, 왜 선언은 강력한지를 살펴보는 강좌이다. 근대 문학에는 낭만주의의 새로운 문학에 대한 선언 이래로 초현실주의의 선언, 미래파 선언, 미래주의의 선언이 있었다. 이러한 선언들은 낡은 구시대의 유물에서 벗어나고자 주창되었고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자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선언은 '힘'을 갖는다. 문학과 문학의 선언들은 지배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 '코드화 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 질서가 배제한 것, 소외시킨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 강좌에서는 이렇게 탄생한 문학이 '새로운 것', 현실 질서가 억압한 '실제'를 말하고자 했음을 짚어보고 아울러 그 내용을 자세히 파악해(실제 문학의 선언들을 통해) 본다.
사랑은 선언을 통해 시작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고백이라는 선언을 통해서만 시작되고 비로소 사실이 된다고 말했다. “너를 사랑해”라는 발화가 있기에 사랑은 돌연 실존하고, 보여지며, 작동한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지금-여기 있게 하고, 그 힘을 표현하는 능력, 우리는 여기서 선언의 수행적 힘을 본다. 지금 우리의 말은 승인된 말과 승인하는 말 사이에 갇혀 있다. 하나가 길들여지고 복종하는 언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강요하는 권력의 언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 생각하지만 우리의 말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외엔 선택할 여지가 없는 수인(囚人)의 언어일 뿐이다. 반면, 선언은 갇혀 있던 말을 '잠금 해제'하는 마법이자 주문이며, 승인의 굴레를 맴도는 우리의 삶을 재발명하도록 독촉하는 명령으로 제기된다. 선언은 사건의 말이며, 문학은 그 사건적 힘을 불러내는 표현의 형식에 다름 아니다. 선언은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자기 승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선언하는 문학 문학의 역사는 선언의 힘이 사그라든 후 작성된 죽은 말들의 명부일 따름이다. 사건성이 거세된 문학은 이상(李箱)의 말처럼 박제가 된 새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치장할 뿐 변화시키지 못하며, 문학 제도라는 질서에 복무하며 서서히 문학을 질식시킨다. 차라리 문학의 역사를 반추하며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승인하는 힘으로서 말의 역능, 그것이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순간들인 선언의 장면들이어야 한다. 말로써, 글로써 경직된 현실을 촉발하며 균열을 일으키고 파열로 몰아가는 힘의 문학! 랑시에르가 주장했던 치안 너머의 정치로서의 문학이란 그것이 아닐까? 문학사의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 사건적 폭발의 순간들을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보자.
강사소개 :: 최진석 (이화여대 연구교수) 문학평론가, 수유너머 연구원. 러시아인문학대학교 문화학 박사.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근대비평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러시아인문학대학교에서 문화와 반(反)문화의 역동성을 주제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사회, 문화와 정치의 역설적 이면에 관심을 두면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의 온갖 잡스러운 일들에 관심을 가지며, 문학과 문화, 사회의 역설적 이면을 통찰하기 위해 오늘도 게으른 독서를 실천한다. 『감응의 정치학』 (그린비, 2019)
강사소개 : 오영진 (문화평론가) 수유너머 연구원. 문화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에서 현대시, 그 중에서도 김수영에 집중해 공부했다. 현재 문학과 문화를 오고가며 강의와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언어와 신체, 기술과 결합한 새로운 신체성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함께 썼고, 「거울신경세포와 서정의 원리」, 「김수영과 월트 휘트먼 비교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