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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리뷰]금은돌의 예술산책

효영 2021.04.26 23:13 조회 수 : 147

 

나의 촉수 사용법을 공개합니다

<금은돌의 예술산책>(청색종이, 2020)

김효영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배울 때는 더없이 다정한 눈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배가 있을 때도 아니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답하는 후배를 마주할 때도 아니다. 나도 내 옳음이 있지만은, 네가 말한다면 언제든 들어보겠다는 진지한 눈길을 건네는 친구에게서 나는 배웠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는 “조급해서는 안 된다. 자라나야, 저절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29)라는 클레의 말을 곱씹고 또 그렇게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비로라도 누구를 때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겨 몽환적 인상을 풍겼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단호함 같은 것이 있었다.

<금은돌의 예술산책>에는 그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 그를 울게 한 시구들과 그의 속을 뻥 뚫어준 비판적 작업들, 파헤치고 싶은 흥미진진한 대중문화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신체를 체관부 삼아 그를 응시했던 회화들(클레, 훈데르트바서, 뒤샹, 에셔), 그의 몸을 빈집삼아 드나들었던 시구들(이상, 이제니, 김수영, 기형도, 권박), 그의 철없음을 간파하고 침입한 놀이의 초대들(바스키아, BTS, 실비 드파리스, 펭수)이 고스란히 보존돼있다. 외관상 평론의 형식을 갖는 이 글들은 그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글과 그림, 문화에 대한 오마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물에 몸을 내어주고 기다리는 나무-은돌이자 대단히 친숙한 대상 속에서 가장 낯선 세계를 발견하는 바라보는 자-은돌이고, 이름없는 이름으로 출사표를 던지며 선언하는 자-은돌이자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의 연결을 통해 표현하고 질문하는 괴물-은돌이다. 그렇게 클레와 자코메티, 권박과 BTS에 대한 그의 글들은 복수적 인칭의 은돌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그의 되기의 기록들이자, 그 인칭들을 횡단하며 금은돌이라는 개체성을 지우고 무기물이 된 돌멩이의 한 판 구르기가 된다. 이것은 구르는 돌멩이의 유랑기.

나무-되기. “세포 하나하나가 눈동자”(14)인 그는 대단한 관찰자다. 그에게 사물이 눈에 도달하는 것은 마지막의 일이다. 그것은 우선 그의 몸을 파이프삼아 유연하게 관통한다. 바라볼수록 겸손해진다는 클레처럼, 그는 중심을 비우며 사물들에 제 몸통을 내어준다. 바깥의 것들과 사건들, 사물의 외형들이 자신 안에서 한바탕 놀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선다. 그것이 “불가능의 세계를 그냥, 알고 본다”(19)는 그가 간파한 화가의 비법이었을까. 그렇게 그는 나무의 몸통을 자처해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16) 가운데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주시한다. 그가 종종 말했듯 “살아간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이기 때문에.

동작-되기. “‘무사한 세상’이 곧 병이었음을 자각”(64)하고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52) 그는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에게 움직인다는 것은 답습되어온 규정성을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리는 것이자 그로써 극대화될 추상성에 전념하는 일이다. 크로노포토그래피로 포착된 뒤샹의 하행운동중인 피사체, ‘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 이상의 시적 주체, 여성적 글쓰기에 몰입하는 뒤샹의 분신 에로즈 셀라비, 저고리에 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경성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남아있는 김해경의 분신 이상. 운동과 정지, 상행과 하행, 여성과 남성이라는 고정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이 ‘거동수상자’들의 실험과 놀이에서 그는 열린 주체의 가능성을 엿본다. 확률파동의 붕괴와 함께 드러난 양자적 운동에 환호하며 그는 묻는다.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어떻게 전복시킬까?”(52) 그리고 뒤샹처럼 (은근히) 명령한다. 참으로 이상한 운동을 하자고.

여성-되기. 여성이라는 “불길한 몸”(112)을 가진 그는 게릴라 걸스처럼 가면을 쓰고 난입해, 권박처럼 이름 없는 이름으로 출사표를 던진다. 그는 오브제였던 여성의 몸을 조명하고 가해자 없는 피해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어 그 목소리의 데시벨을 높인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다움에 봉인된 여성적 신체를 해방시키려는 성급함도 아니고, “또 한 번 악담일지라도” 받은 대로 되돌려주겠다는 원한어린 항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 할 말이 많”기에 역으로 얼굴에 새겨 넣은 활자로 말하는 이란의 작가 쉬린 네샤트처럼, 말하는 대신 깊은 사유 속으로 침잠하길 택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불길한 신체에 가해진 충격적이며 비현실적인 폭력을 가시화한 작업(Rhythm 0, 1974)에 머물지 않고, “여성이 여기 있다”고 이름붙일 만한 퍼포먼스(예술가가 여기 있다, 2010)로 이행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처럼 응시와 이해로 나아간다. 아브라모비치는 장시간 고요히 앉아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오랜 수련을 거듭한 끝에 75일동안 하루 8시간씩 총 736시간, 1,545명의 사람들과 응시의 경험을 공유한다. “관객은 하루 종일 바라보고, 기다리고, 생각한다. 테이블 사이에서 벌어지는 눈빛의 교감을, 더불어 공유한다.”(138) 이제 우리의 차례다. 우리 “곤경에 처한 그로테스크한 상황과 사람과 더불어, ‘지금-여기’에서부터. 다시 응시하고, 이해할 차례이다.”(139)

아이-되기. “속뜻은 진지한데, 말하는 방식이 철이 없는”(197) 그는 “낙서를 하듯 사물을 노래”하고 “어린아이 같은 예언자”(189)가 되기를 꿈꾼다. 그는 수학시간에 ‘x=오렌지 토끼’라는 공식을 세우는 오펜하임의 엉뚱한 낙서처럼, 쓸모없지만 쓸모 있는 수다의 힘을 믿고, 자신의 초상화에 오줌을 누는 바스키아처럼, 금기를 위반하는 낙서에 왕관을 씌운다. “그동안 왜 이렇게 시가 힘들었을까. 시는 종교인가” 그는 그 “뭔지 모를 압박감과 경직”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멋지고 우아하게, 혹은 낮고 비천하게라도, 놀아야 하지 않을까.” 예술을 위한 낙서, 쓸모를 위한 쓸모없음이 아니라, 낙서를 위한 낙서를 할 때 그는 어느새 완숙한 시가 아닌 실패하는 시 앞에서 “클클, 웃음이 새어 나오는 놀이”(192)에 빠져든다. 예술은 사라져도 낙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돌연변이들아, 여기 여기 붙어랏!”(193)

괴물-되기. 대중문화를 말할라 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자세로 훈계를 두려고 하는” 근엄한 문학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스핑크스처럼 수수께끼를 내는 아이돌, BTS의 앨범을 내민다. BTS의 새로운 앨범이 나오면 유튜브에 즉각적으로 독자들의 반응 영상이 만들어진다. 표면적인 서사 뒤에 가려진 수수께끼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 수용자들은 자발적으로 오이디푸스가 된다. 책을 찾아 읽고 영상을 제작한다. “보고싶다/ 너희 사진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너무 야속한 시간/ 나는 우리가 밉다”는 ‘봄날’의 가사는 표면적으로 부재하는 연인을 향한 그리움의 호소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자발적인 오이디푸스들에 의해, ‘봄날’은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이어지고, 노래는 소설 속, 사원도 죄인도 없고 인생에 대한 승리로 가득 찬 아름다운 오멜라스라는 마을로 이동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풍요로운 공간을 위해 지하실 방에 갇혀야 하는 어린 아이의 존재를 묵인한다. 이제 ‘봄날’의 그립다는 낭만적 서사는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구하지 않기에 모두의 제물이 되어버린 아이에 대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사회를 겨냥하는 비판적 서사가 된다. 오전 9시 40분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어깨에 걸고, 둥그런 창에 갇힌 빨래감들이 무력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배경으로 뮤직 비디오가 재생될 때, 그리고 안무의 처음과 끝이 배 모양으로 조각될 때, 관객은 그 지하실에 갇힌 아이는 이미 4월 16일에 사망한 299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노래의 마지막에 걸리는 운동화는? 그리고 “벚꽃이 피나 봐요. 이 겨울도 끝이 나요”라는 가사의 반전은? 수수께끼로 질문하는 괴물에 대한 응답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창작을 촉발하는 새로운 예술형식의 출현인 동시에, 그토록 무거운 현대사의 문제를 가장 가벼운 연대의 몸짓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에서, 그는 질문하는 괴물에 매혹된다. 그는 오이디푸스를 자처하며 응답한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과 똑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지만, 괴물과 더불어 유희하는 자는 기꺼이 스스로 괴물이 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질문하는 괴물이 내어주는 침입의 모럴에 응답하고, 2020년 버전의 민중가요를 흥얼거리며 함께 괴물이 된다.

나선-되기. 부분과 전체의 역동적인 조우를 나선형에서 발견하는 그는 가장 강력한 생의 에너지인 나선에 촉수를 뻗는다. 나선은 가장 고요한 눈이자 관조적이며 가장 깊은 중심점으로부터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각각의 사물의 리듬에 따라 연속적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면서 질적으로 다른 위치로 자라난다. 그가 “너무너무, 라는 부사를 자꾸자꾸 중첩하고 싶을 정도로, 성심을 다했”(197)던 <리좀>에서의 전시. 그때 자신의 작업이 점점 나선을 닯아간다는 친구의 소감을 듣고 그는 자신의 속이 간파당했다고 느낀다. 그는 줄곧 나선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으므로. 모든 생명은 나선의 원리로 작동하고, 그는 그렇게 나선의 원리를 회화로 실어 날랐다. 그렇게 캔버스 속 나선형의 흐름에 자신을 몸을 맡기며, 힘을 풀고, 우주의 무한 속으로 ‘나’를 잃어버리게 하여(50) 그는 스스로 나선이 되고 있었다.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나선처럼 중심을 탈구해, 수많은 입자들로 분산될수록 그의 변신 전략은 보다 능란해진다. 그는 게릴라전을 벌이듯, 그 때마다 다른 가면을 착용하고, 다중적인 속성을 즐기며, 눈에 띄지 않게 신속하게 위치를 이동하며 ‘나를 뛰어넘는 캐릭터’들을 창안한다. 그런 그에게 제3의 성을 지향하고, 어떤 것으로 규정되는 것도 거부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유니크한 B급 정서를 숨기지 않는 펭수는 더 없이 매혹적이다. 탈을 썼지만 그 탈을 벗어나 과감하게 발언하고, 교육적 캐릭터의 계몽성을 벗어나는 펭수는 비인간과 인간 사이, 현실과 환상 사이, 인형과 인간 사이, 캐릭터와 인간 사이를 횡단한다. 펭수처럼 그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 캐릭터로, 그 가상의 상태에서 발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놓는다. 이것은 주체를 변화시키는 힘이자, 새로운 나들을 만들어가는 방법, 그로써 ‘나’라는 것을 수많은 점들로 탈구시키고 끝내 지각조차 불가할 정도로 분산시키는 것. 그 변신과 분산의 전략이 능란해질수록 그의 놀이는 보다 가벼워지고, 그의 존재가 입자화될 수록 대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그의 형상은 점차 모호해진다.

형상을 식별할 수 없는 입자가 되어 대기를 유랑하는 돌멩이의 구르기를 우리는 이제 어떻게 감각할까? 되기는 생성이지 재현이 아니라고 말한다. 되기는 촉발 받고 촉발하는 것이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되기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어떤 것들에 촉수를 뻗었는지, 그들과 어떻게 접속했는지, 그로써 어떤 또 다른 나의 출현을 보았는지, 그 때 느낀 감응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기록한다. 이것은 그의 촉수 사용법에 대한 안내서. 이것은 그가 제 몸통을 비워내고 “나의 자리에 타자를 모시기 위해”(101) 감행한 되기의 기록들.

우리가 모두 그렇듯이, 그는 수많은 영혼을 지녔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그 복수의 영혼을 저마다 동등하게 어루만지고 살뜰히 보살피며 키워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비인간과 인간, 여성과 남성, 아이와 어른처럼 대립적인 항들 모두에게 저마다의 몫을 주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불길한 몸에 씌워진 굴레와 시인의 혀를 바싹 죄는 돌덩이 같은 수갑, 바라보는 자에게 전해지는 날 것의 통증을 씹고 게워 내워 되새김질한다. 그로써 그 규정성들은 잘게 조각나고 분해되어 미규정적인 채로 신체에 흡수된다. 그것은 이제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의 펄펄 뛰는 심장이 되고, 분주하게 오르내리는 종아리의 근세포가 되며, 부화하기 전의 노른자처럼 충혈된 눈으로 응시하는 자의 안구가 된다. 되기는 자신이라 믿는 것의 파괴를 견뎌냄이자 그로써 텅 비어지는 무규정적 상태를 감당함이기에 대단한 근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체력전이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한 가지 비법. 체력전을 감당할 만한 신체를 만들자. 그를 위해서 오늘도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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