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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시 읽는 시간

lllll 2021.03.19 20:37 조회 수 : 298

두 개의 시간

< 시 읽는 시간 > ( 감독 이수정 )

조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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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시간에 관해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이해를 따라가자. 시간은 우리를 관통한다. 관통의 흔적들은 대개의 경우 고통으로 물들어있다. 시간에 관통 당하며 우리는 예측 불가능의 지대로 떠밀려 가기 때문이다. 목표를 설립하고 달성할 때, 도파민의 분비에 따른 쾌감을 느끼는 인간에게 예측 불가능성의 통제야말로 지상과제가 된다. 그리고 종종 이를 통제하기 위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날것 그대로인 변수로서의 시간을 길들여 상수로 작용하게 하는 세계, 게임의 세계이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통제하기 어렵지만, 게임에서 시간은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거래할 수 있는 하나의 재화이다. 다른 재화인 돈을 통해 구매가능한 재화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1시간 후에 낼 수 있는 결과를 몇 배 빨리 낼 수 있고 얼마나 빨리 낼 수 있는지 예측 가능하기도 하다. 안태형 씨의 말처럼 “일 더하기 일이 이”가 되는 시간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안태형 씨는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의 말대로 현실은 “내가 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도”,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며 노력을 기울인다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 유저 안태형 씨는 자신이 당면한 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제시한다. 본진 업그레이드를 위한 게임재화를 획득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이를 구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의 계산 안에 있다. 여기에서 현실의 시간과 게임의 시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그에게 월세 인상은 큰일이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이며 발생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고, 게임의 재화를 모으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당장 다가올 확실한 미래이다.

  당연하게도 예측 가능한 길들인 시간에 대한 욕구는 현실에서의 고통이 커질수록 증가한다. 최근 몇 년 간 웹소설에서 주류를 이뤘던 장르는, 사망 후 자신이 알고 있는 인생을 다시 한 번 살면서 원하는 미래대로 바꿔나가는 소위 회귀물 이었다.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이나 <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등은 ‘전지적’ 혹은 ‘Re’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불확실한 시간에 대한 통제욕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들이 항상 현실에서의 불확실성증가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될 수는 없겠지만 불안의 지표 정도로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게임을 비롯한 여타 서브컬쳐 장르에서만큼 극적으로는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불확실성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다. 가령, 결혼중개업체나 데이트 중개 앱이 그러하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업체가 제공하는 필터링 과정을 거쳐 자신의 조건과 매칭될 확률이 높은 대상을 만남으로써 불확실성의 리스크를 회피한다.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이런 성향을 ‘안전한 만남’에 대한 추구라며 비판한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영역은 그 불확실성과 더불어 밀고 나아갈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태형 씨의 결혼은 그가 게임을 할 때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태도와 상반되는 두 번째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결혼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기존질서의 재생산과 같은 보수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아버지가 될 자신도 없던” 그였지만, 개미 마을 그들의 보금자리로 올라가는 길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화면만큼이나 불안정한 현실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밀어 넣으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 공간 한 켠에 걸려 있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는 더 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누군가의 체험이 아니라,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게 되는 경험을 하고 지쳐서 돌아왔더라도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에 관한 시가 된다. 그가 낭독하는 심보선의 시 속 오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화자가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내고 “내 몫의 비극”을 견뎌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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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등장하는 오하나 씨, 김수덕 씨, 임재춘 씨, 하마무 씨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김기림의 ‘바다’는 영화의 종반부에 시화호의 송전탑 이미지와 중첩되며 임경석의 <죄책감>의 파도와 이어진다. 이 시에서 화자는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가고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들은 바둑판 위에 놓인 돌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좌표들을 시와 함께 비워낸다. 그것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비워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맞서나가는 힘을 보여주고, 영화의 정적인 화면들을 동적으로 바꾼다. 시 읽는 시간은 오하나 씨가 직장에 다니면서 먹었던 안정제처럼 위로 받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그저 버티내는 시간이 아니라 현실에 부딪쳐 살아내는 시간이 된다. 때문에 이 시간들은 언어에 힘이 없다고 생각했던 하마무 씨로 하여금 시는 언어가 아닌 언어라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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