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spot   얼룩으로 남은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서

    일종의 탐방기의 성격을 가진 기획 연재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랑시에르적인 의미의) 정치성을 띤 장소들, 없는 셈 쳐지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사건' 이후의 시간들과 '장소' 를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방문자/이방인인 제가 혹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 사건이나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첫번째 연재는 <냉전의 인질로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
시베리아 조선인 일본군 포로와 유족에 관한 들:음 아카이빙>입니다.
    이 글은 『문학3 (제2호)』(창비,2017)에 기고한 글입니다.

 

 

     냉전의 인질로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
                               ⎯ 시베리아 조선인 일본군 포로와 유족에 관한 들:음[1] 아카이빙(1)

 

                                                                                                                                                                                                                                           심아정

 시베리아 ’와 조우하다

   1945년 8월 15일. 이 날이 모든 조선인들에게 한결같은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전쟁 말기에 일본군으로 징집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 가 혹독한 포로생활을 몇 년씩이나 견뎌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스무 살 동갑내기였던 그들 중 살아남아 귀환한 자들은 어느덧 90세를 훌쩍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포로 경험자들과 유족들의 인터뷰 작업은 40년 이상 침묵을 강요당해 왔던 그들의 억압된 시간들을 봉인 해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조선인 일본군 포로 문순남의 유족 문용식을 처음 만난 건 2015년 여름, MBC 8.15 특집 다큐멘터리 <아버지와 나-1945년 시베리아>의 제작과정에 통역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1960년생인 그는 대구의 한 공장에서 수출용 대형 기계를 포장하는 일을 한다. 야간업무가 많고 휴일이 불규칙하며 주로 야외에서 해야 하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오구마 에이지와 문용식의 아버지는 둘 다 시베리아에서 일본군 포로로 지낸 경험을 공유한다. 오구마 에이지는 자신의 아버지 겐지를 인터뷰한 내용에 역사적 사료에 근거한 설명을 덧붙여 전후 일본 사회를 함께 조망하는 『일본 양심의 탄생』[2]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동시대의 경제, 법제, 정책 등을 주시하면서 당시의 계층 이동, 산업 구조 등의 상황을 아버지의 경험의 궤적을 따라 담담한 논조로 묘사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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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8월15일 방영된 MBC다큐, 아버지와 나-1945년 시베리아(오구마 겐지와 오구마 에이지)>

 

   다큐멘터리의 제작 취지는 오구마 에이지가 아버지의 증언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청년 시절의 아버지가 겪어낸 시공간과 다시 마주하게 되고, 아버지가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위로금의 절반을 같은 수용소의 조선인 포로 오웅근에게 보냈다는 사실과, 그 후 오웅근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아버지가 공동 원고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서 일본군 내의 조선인 포로들의 존재를 조명하고, 일본 천황의 전쟁책임, 강제노역에 대한 소련의 책임, 그리고 전후에 시베리아 포로들의 존재를 알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국정부의 외교적 태만을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우선, 93세 오구마 겐지의 입에서 나온 “전쟁에 대해 일본 천황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멘트는 한국이기에 삭제되지 않고 방영될 수 있었다. 오구마 에이지는 NHK에서도 같은 주제로 촬영 의뢰가 들어왔지만 거절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천황의 전쟁책임을 논하는 장면은 지금의 일본의 정세 속에서 방영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외교사를 전공한 담당 PD는 자신이 ‘비국가주의자‘임을 줄곧 강조했고, 제작 과정을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놓지 않았으며, 국가가 그어놓은 분할선을 넘어서는 민중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도, MBC라는 제작 환경의 한계 속에서 국가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내내 의식하며 작업에 임해야 했다.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와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 선별될 수 밖에 없었고, 방영된 결과물에는 미처 담아내지 못한, 혹은 미끄러져 나온 이야기들이 있었다. 다른 방법이나 형식을 빌려서라도 어떻게든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아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문용식, ‘사건’으로 다가오다

  다큐멘터리는 오구마 에이지와 그의 아버지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실상 숨은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도 포로 문순남의 유족 문용식의 인상은 특히 강렬했는데, 제작진 대부분이 그 점에서 공감했다. 등장하는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는 쉽사리 기억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얼룩’ 혹은 녹아내리지 않는 ‘앙금’과 같은 느낌으로 필자에게 각인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나와 동료들에게 ‘사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를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잡아끄는 무언가에 휘말려 들었기 때문이다. 사건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며 우리 자신도 변한다. 살다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장면이나 인물을 조우할 때가 있는데, 필자에게는 문용식이 그랬다.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그에게 제작 과정과는 별도로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다양한 전공의 동료들을 모아서 일사천리로 그의 이야기에 관한 르포 연재와 투고를 계획하고 영상팀을 꾸리는 한편, 시베리아 조선인 일본군 포로에 대한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동료들은 나에게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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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식과 그의 손, 그리고 그가 일하는 대구의 공장> 

 

  문용식을 통해 마주하게된 진실의 한 측면은, 국가 간 조약이나 협정 따위로는 담아낼 수 없는 목소리, 대문자 역사로는 표상될 수 없는 삶들이 묵묵히 우리 곁에 있어왔다는 것이다. 문용식이 고인이 된 아버지의 청년기 경험을 만나기 위해, 그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나 시베리아 포로 생존자 할아버지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작업은,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던 목소리와 삶들 한가운데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 자신이 내던져지는 경험이다. 문용식을 만난 이후로 알게 된 사실들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눈에서 눈꺼풀이 없어진 사람처럼 어떤 환영과 환상에도 눈 감기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생겨난 것 같았다. 나와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기민(棄民), 버려진 자리에서 융기하는 사람들

   문용식은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와 일본, 한국이라는 세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졌다’고 주장하며, 각국의 행정관청을 상대로 오랜 기간 고독하고 지난한 싸움을 벌여왔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기민(棄民)’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국가-없음의 상태인 난민과는 다른 층위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를 고통 받는 얼굴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무력하기만 한 존재로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민은 오히려 거꾸로 솟아나는 종유석처럼 버려진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융기하여 국민국가가 지닌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기민들을 배제함으로써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동일성을 다지려는 사람들의 체제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 때문에 기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문용식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버지가 쉰이라는 나이에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20여 년이 지난 1995년의 어느 날, 고향 친척이 문용식에게 신문 조각을 건넸다. 그리고는 일제 말기에 징집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에서 몇 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 중 6천 명의 명단이 부산일보에 공개되었는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으니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존재이기도 했지만, 시베리아에서의 경험을 단 한번도 가족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신문 조각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6천 명의 명단에 아버지의 이름은 없었다.

   냉전은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 구석구석에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련과의 수교 이전까지는 시베리아에서의 포로 경험에 대해서 당사자의 가족들도 모르는 게 다반사였다. ‘적성국가에서 온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냉전은 또한 기민들에 대한 국민국가체제의 공모관계로 지탱된다. 소련은 시베리아 일본군 포로들을 전후 재건의 노동력으로 착취했고, 일본은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소련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못하게 했으며, 한국은 반공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면서 그들의 경험과 기억을 억압했다.

   문용식이 처음으로 피해접수를 하게 된 것은 2005년에 <대일항쟁기 국외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행령이 공포 되었을 때다. 그러나 시행령은 개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사망한 실향민 아버지의 피해를 입증하는 일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정부기관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일본 후생성에 아버지의 군복무 기록의 조회를 요청하기까지 했지만, 한일 양국 정부기관으로부터 찾을 수 없다는 회신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에게 국가기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담한 태도를 보였고, 이것은 그가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가 피해접수를 하고나서 답신이 왔는데, 아버지가 소련에서 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묻더라고요.
              위치, 수용소 캠프 번호, 이런 것들을 알아내서 통보해 달라는 회신이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제가, 무슨 수로 러시아에 가서 포로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정보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알아봐 달라고 민원을 제기한 건데, 오히려 나한테 이걸 찾아오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로고스의 반란, 그들만의 ‘언어’에 이의를 제기하다

   문용식의 입에서는 대한민국 헌법과 제네바 협약, 포츠담 선언과 일본국헌법의 문구들이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술술 읊어져 나온다. 하루하루 극심한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그가, 자신의 고된 몸을 다독일 시간을 쪼개가며 밤마다 헌법과 국제법 관련 사이트를 뒤적이며 씨름해 왔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아버지의 알려지지 않은 경험과 온전히 만나고 싶었고, 아버지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인 것처럼 은폐되거나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부를 상대로 ’말‘을 한다는 건 생각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법률용어와 법 조항으로 가득한 정부의 회신 문서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즉 듣게 할 만한 말인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법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정부에 민원을 제기하면 법률에 근거하여 답신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답신은 그들의 '언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쓰인 것이었습니다. 

           제가 법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때부터 이고,
          공부하다 보니 정부의 답신에 커다란 모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어느 뜨거운 여름 밤, 대구에 있는 그의 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공장의 작업장 2층에 마련된 작은 사무실은 밤이 되면 낮의 분주함을 잊고 온전히 그의 공부방이 된다. 소박하고 겸손한 그 공간에서 그는 지난 십 여년간 날마다 법률에 관련된 웹 사이트와 기사를 뒤지고, 낯선 언어로 탄원서와 요망서를 작성하고, 자신이 제기한 민원에 대한 각국 정부의 답신을 검토하기 위해 구글 번역기를 돌리면서, 이른바 프롤레티리아의 밤들을 수없이 밝혀왔을 터였다.

 

  문용식작업실3.jpg  문용식작업실7.jpg  문용식작업실8.jpg 
 <2017년 2월22일 문용식의 공장 2층 작업실에서 방문 인터뷰>

 

   문용식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논쟁의 장(場)을 만들어냈다. 독학으로 공부한 법적 지식에 근거하여 정부의 회신을 일일이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의 문제를, 그와 같은 경험을 했을 수많은 기민들 공동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 정치적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그의 이의제기는 딱히 그러한 논쟁의 장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한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외교 관료들을 그곳에 끌어들여 자신의 말을 ‘알아 듣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구체적인 조치를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뒤늦게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일에 뛰어들면서, 문용식은 동아일보 본사에 보존되어 있는 마이크로 필름 자료들을 꼼꼼히 열람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였다. 2005년 강제동원위원회 진상조사가 진행되던 무렵, 그에게는 아버지의 피해사실을 입증할 만 한 단서가 없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자료들 중 어느 하나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에도, 정부 관계 부처에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아버지는 서류상으로는 ‘없는 존재’였다.

   한국과 일본에서 아버지의 기록을 찾지 못하자, 이번엔 외교부의 러시아 담당 유라시아과를 통해서 아버지의 노동증명서 발급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서를 보냈고, 이에 외교부는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에 그의 민원 내용을 알림으로써 러시아 관련 기관과 교섭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이름이 일본어로 한자를 훈독한 ‘미나미히라 준난’이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기재되었음을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알게 되어, 10년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신문조각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일본식 이름을 찾게 된다. 문용식은 그들만의 ‘언어’가 점하고 있는 의미와 가시성의 세계 속으로 이렇게 틈입(闖入)을 감행했다.

   그는 "한일 양국이 1956년 일소공동선언과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두 개의 조약으로 인하여 일소 간, 그리고 한일 간 서로에 대한 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근거 아닌 핑계를 대면서, 시베리아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1965년 박정희정권 때 맺은 한일협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교섭과정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포로 문제 또한 의제로서 취급되지도, '문제화'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가 간의 청구권과는 별도로,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03년에는 포로 경험자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나 둘씩 보상 청구를 시작했지만, 일본의 재판소는 이러한 청구소송에 대해서 한결같은 이유로 기각했다. 한일협정으로 인하여 청구권이 말소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상청구 기각의 이유에서도 자명해졌다.

   법정 투쟁이 실제로 승소하지 못하고 기각되면서 상징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재판과정에서의 ‘증언‘은 당사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0년간의 침묵으로 생겨난 과거의 공백과 억압된 기억을 회복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증언은 존엄을 되찾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문용식의 공부는 나와 동료 연구자들을 적잖이 흔들어 놓았다. 우리가 업으로 하는 학문이나 예술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문용식이 온 몸으로 밀어붙이는 공부와 어떤 식으로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을까?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무력한 타자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고 이제껏 없었던 물음을 던지게 만드는 힘센 타자였다.

 

*^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1] 콜론(:)은 앞뒤의 두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뜻한다. 듣는다는 동사를 명사화해서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는 행위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증언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때가 오더라도 아카이빙의 문서와 사진들, 그리고 자료들을 통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콜론을 사용했다.

[2] 『生きて帰ってきた男―ある日本兵の戦争と戦後』(岩波新書、2015年)원제는 직역하면 ‘살아 돌아온 사내-어느 일본병사의 전쟁과 전후’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취재과정에서 한국어판 제목(일본양심의 탄생)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다큐가 방영된 후, 이와나미 서점의 월간지『世界』10월호에「아버지와 나-한국 시베리아 억류자들과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제작 과정에 대해 르포 형식의 글을 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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