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최진석_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회원

 

 



1. 리듬과 감응, 유물론의 시학

 

유물론적 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는 예술의 오래된 기원 중 하나로 리듬에 대한 감각을 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술론을 모아놓은 주소 없는 편지(Pis’ma bez adresa, 1899)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노동이란 파편화된 각자의 힘을 단일한 집합성으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고, 그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다수의 인간을 하나로 엮어내는 몸의 감각 즉 리듬이라는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유물론적 혁명가이자 정치철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이 새롭거나 놀라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채롭게 보아야 할 점은 리듬을 정의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다. 아마도 최초의 노래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몸짓이나 목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동작하고 소리내는 와중에 혼합되어 하나의 가락 속에 합쳐진다. 서로는 각자의 구별을 잃으며 점점 단일한 집합체처럼 노동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노동요 곧 공동의 리듬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부터다. 그러한 무의식적 일치를 언제든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노래를 짓고 악기를 발명한 게 아닐까? 어쩌면 시란 그러한 일치의 감각을 다시금 뽑아내기 위한 언어적 주문이 아닐런가?



Georgii Plekhanov(1856-1918)



리듬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함께-있음이라는 관계성이 형성되는 언제, 어디서, 무엇과라도 리듬은 발생하고, 거꾸로 관계의 성격마저 규정짓는다. 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표적을 뒤쫓는 사냥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가만히 매달린 열매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을 응시할 때 만들어지는 관계의 리듬이 상이한 까닭이다. 타작을 하려고 흙을 밟는 농부들과 강철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도 같을 리 없다. 흙과 쇠의 질료적 차이가 보폭과 운동의 이질성을 자아낸다. 리듬은 어떤 대상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상이한 속도와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리듬이란 사물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 서로 마주한 대상들이 얽혀들 때 파생되는 관계의 표현이다. 리듬은 사이[]에서 만들어져 그 사이를 채우는 모든 것들의 공-동적(-動的) 관계 전체라는 것. 그렇다면 흔히 환경이라 부르는 관계들의 총체야말로 리듬의 비밀이 아닐까? 예술 역시 예외이진 않을 터. 어떤 예술작품이 뿜어내는 맹렬한 감응(affect, 情動)이란 예술가가 그의 환경과 공-동으로 조형하는 관계성에 다름 아니다.

시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통적 시학이 전제하듯, 시는 시인-주체의 고독한 내적 성찰과 외로운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홀로 독야청청 세상천하를 관조하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신화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미지와 언어가 피어나든, 그것은 그가 만난 세계 곧 환경 전체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상호작용의 각인일 뿐이다. 시의 제목이, 소재가, 주제가 어떤 식으로든 특정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견되는 낯선 감응의 흐름들, 때로 시인과 독자를 배반하기조차 하는 이질적 의미의 조형은 그 시가 온전히 시인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에서 매양 읽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넘어서 그 이면에 엄존하고 있는 리듬의 진실, 시인과 우리가 동시에 마주한 이 세계의 울림이다. 그것이 유물론의 시학이다.

등단이라는 제도적 문턱을 넘어선 시인들이 바라본 세계는 특별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는 어떤 작가의 고백처럼, 한낱 표찰에 불과할지라도 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네들의 삶을 절단시키고, 차이의 감각을 발동시켜 이전과는 상이한 리듬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시인들을 보라! 그들의 감수성과 시적 언어를 느껴보라! 하지만 또한 분명하리니, 그들의 시는 그들 자신만의 것은 아니며, 이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감응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 그 자취들을 더듬어 보자.

 

 

2. 문턱의 시선, 결별의 예감

 

()은 분리와 결합의 기묘한 이중 평면이다. 창이 있음으로 우리는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으로 인해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해방구인가 감옥인가? 영구히 풀 수 없는 이 삶의 오랜 질문은, 적어도 이제 갓 시의 관문을 통과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모종의 깨달음의 표석으로 장식될 만하다. 내내 과거형 어미로 주도되는 그림자 극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마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적 의식을 스스로에게 표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

 

나는 창을 연 채 그 방에 앉아 벽에 영화를 틀어놓았고

어제 저녁엔 여러 여성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이곳에서 우리와 있다. 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나마 행복해 했고

 

초저녁이 되면 영화를 튼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지이, 그림자 극장부분

 

낡은 필름이 풀려나가듯 문턱 이전의 시간들은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주되며 지나간다. 어제 저녁에 어딘가에 있던 이들이,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것조차 영화 속의 한 장면인 양 이미지화되면서 강 건너의 무연한 사태처럼 창밖으로 비치는 정황이다. 이것은 순수한 과거의 시제, 과거의 장면, 과거의 감정 아닐까?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관조되고 반조(反照)되기만 하는 무연관의 시공간. “그나마 행복해 했노라 말하고는 있으나 문턱 위에서, 더 이상 이전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경계선 위에서 바짝 날이 선 시적 주체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지금 이전의 지나간 시절은 제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구속된 아름다움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 탓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며/평생을 견디고 있다.” 주체로 하여금 한 걸음 앞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쳐 개화하지도 않은 시가 어째서 벌써 시드는가? 논리정연한 산문의 언어로 설명하진 못해도 시쳇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지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바짝 발붙인 경계 너머로 나아가야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과거를 보상해 주는 빛나는 무엇일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바람이 휙 불어오듯 찰나의 순간 시적 주체는 경계 위에 올라섰지만, 감히 더 나아갈 욕망도 품지 못한 채 아직 거기 머물러 있다.

 

건조한 곳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지이, 달의 계곡전문

 

물론, 더 나아가길 바라는 욕망 또한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느릿하되 편안한 산보도, 숨가쁘나 활기찬 뜀박질도 아니다. 강진영 시인에게 이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과 의지, 성찰과 욕망이 뒤얽힌 채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표상된다. 익숙한 환경, 친절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의 무참한 결별. 기차처럼 달리는 아이들은 엄마 없이 엄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서” “엄마라 부르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온했던 울타리라도 여하한의 의존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쾌한 각오를 짚어내자. 문턱을 넘으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 손을 놓아요 터널을 지나요 바다를 건너요 뒤를 돌아보는 건 나예요.” 철없던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서사의 행복한 광경으로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세계는 안전하되 속박되는 굴레였고, 떠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으며, 문턱 너머로 열린 낯선 세상은 이물감 가득한 두렵고 분열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기차에 오를 거예요 내릴 거예요 엄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노을에서 엄마의 커피향이 나 엄마의 노을을 훔쳐 마시며 /////////////////////////////////////////////////////////////////////////////mmmmmmmmmm

m                                       m                                        m ,,,,,,,,,,,,,,,,,,,,,,,,,,,,

 

여기는 벽이 모두 창문이잖아 매일의 풍경이 바뀌잖아 엄마가 한 칸 한 칸 분열하잖아

 

강진영,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부분

 

그럼, 거기에는, 문턱 너머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의 경험, 그로 인해 아이가 뒤틀리고 기이하게 변모하여 성장의 미명 하에 부서지고 말 변화들. 해변에 부딪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도야말로 그러한 파열적 체험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 아닐까? 속절없이 너울대는 파도처럼 부유하는 시상과 언어는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애틋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랑해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를 사랑했지

                                        너는 부서진 파도

 

강진영, 쇼어 브레이크부분

 

 

3. 너머의 세상, 차이 없는 반복

 

여기를 넘어 저기로 나아갈 때마다 기대를 품고 희망의 탑을 쌓아올리는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나 욕망이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도, 문턱의 저편도 이편과 다름없이 동일한 상황의 반복으로 점철되리란 의구심은 이상하게도 늘 적중하는 듯하다.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여기의 삶을 겹쳐 보는 현상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게다.

 

우리는 자주 시청에서 만났다 여당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밀착해도 시차가 발생하는 여자였다 한 침대에 누워도 상대방의 꿈속에 도래하지 않았다 일인칭의 새벽 교대로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한 쪽의 꿈속으로 급조된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극한 침묵이 함께 있는 새벽의 암구호였다 나는 줄곧 나를 사칭했고 둘이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질 때면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 군중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방백마저 무례하게 확성되고 있었다 어는점이 십도쯤 낮은 여자였다 그 속에서 흥분을 익히며 매번 촛농 같은 땀을 흘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실해도 태연하게 행진의 일속을 가장했다 살수 같은 비가 직사로 쏟아지는 밤이면 여자와 나는 시청에서 자주 해산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줄곧 나에게만 전력으로 가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입을 떼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초 단위의 시차로 매번 싱크가 맞지 않았다

 

곽문영, 시청전문

 

무성영화 화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내용적 연관 없이 툭툭 끊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접붙어 있다. 내용과 형식의 불연속적 결절은 상호 소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타인들, 세계들, 감정들의 절단면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일관된 것은 매번 싱크가 맞지 않는 전체의 분위기, 그 어긋남의 감응이다. 물론 시제는 과거형이다. 어쩌면 이 시편은 문턱 이전의 순간들을 침울하게 회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음에도 끝내 도래하지 않, “줄곧 나를 사칭하는 나 자신과의 결렬은 나와 여자사이의 불협화음만큼이나 일관된 불일치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욕망도 담지할 수 없는 이 광경은 매번 맞지 않는 싱크처럼 저편에서도 반복될까? 이런 정조에 감싸인다면 문턱 이후, 그 너머의 세계를 가히 밝게 예상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나는 소리조차 녹음된 새의 소리일 뿐이며, “어제 내려 쌓인 눈 위로/새로운 눈이 내릴 때/나는 소리조차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로(早老)의 대기에 휩싸여 낡고 지루한 풍광을 연출할 따름이다. “매일 보았던 후뢰시맨은/마지막 회에서 너무 늙어보이고,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뇌까리기에 이른다.

 

이곳은 좁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만 크자

 

[...]

 

길게 이어진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새의 발자국 옆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새와 다정하게 걷는 사람의 발자국

 

새의 마지막 발자국 곁에서

한 번도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문영, Black Fire부분

 

새로움과 신선함, 낯선 반가움으로 표징되는 신인들에게, 도대체 문턱 너머의 무망(無望)이라는 정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설익어 떨어지고, 미쳐 깨닫기도 전에 벌써 체념해 버리는 이토록 급속한 노화의 감각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그들과 교감하며 구축된 이 시대의 감응이라 불러야 옳을 터.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혹은 삶의 모든 부면에 만연한 권태와 피로의 감수성을 그들은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몸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

늘상 새의 발자국 곁에 머물면서도 결국 새는 찾아내지 못하는 파랑새 전설마냥, 시적 주체는 오직 자취의 초상화만을 그리는 운 없는 화공이다. 그저 눈물로만 색을 입힌 이 그림의 진실은, 그것이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초상화라는 데 있다. 왜 자신의 기원(주소)이 슬픔인가? 너머의 삶, 저편의 일상을 욕구하기도 전에 이미 폐기해야 하는 역설의 세대인 탓이다. 마땅히 바래도 좋은 것,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기어이 원하는 것을 필연코 얻지 못하리란 역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갓 시인명부에 입적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계시의 언어가 아니라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처럼 중단된 살아있는 미라의 삶일지도 모른다. 문턱을 밟아선 시인의 두려움과 낯설음은 필시 이로부터 기인한 불안일 테다.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김유태, 검은 원부분

 

제목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작품 검은 원(1913)에서 따왔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근원적 구성요소인 색과 형태를 극도로 추상화시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흰 바탕 위의 검은 원이었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이 검은 원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원의 색깔이요 모양일지 모르나, 역설적이게도 흰 바탕 없이는 그 자신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흰 바탕이라는 것이 무()는 아니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존재 자체라는 것. 검은 원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 해야 할 흰 바탕은 온갖 규정을 넘어서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무에 다름 아니다. 기원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이토록 무참히 깨질 수 있을까? 문턱 너머를 들여다 본 자의 절망이란 그와 같지 않을까? 궁극의 원점에 다가선다 해도, 결국은 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달을 뿐이라는 카산드라적 예언 아닌가? “검은 멍이 된 이 경험은 불판 위에 구워진 냉동육 껍질에 남은 도장의 흔적처럼 아이러니컬하게 읽히며, 너머의 삶에서 기대하게 마련인 아름다움이란 결국 잔혹한 멍으로만” “몸에 고이는기억임을 자각하게 될 터(김유태, 낙관).

너머에 대한 포기와 체험은 자기 아이러니적 희화화로 귀결되는 듯하다. 시인 각자는 시인 일반으로 추상화되고, 구별 불가능한 어둠에 감싸여 모두 같은 인종이 될 것이다”(류현, 학술보고서). ‘객관과학을 뽐내는 학술보고서이지만, 결국 차이나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카프카적 냉소가 지속될 뿐이다. 너머의 불가피한 진실을 알게 된 시적 주체는 경계에 머물고자 애쓰겠지만, 그 역시 자기를 인간으로 남겨두려는 비겁한 타협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모두도 그렇겠지만.

 

경계선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타협, 선에서 시작되는 출구는 인간적이다.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출구,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없다. 나의 직업을 미리부터 정해 놓은 너희는 말했다.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는 지루하다. 바나나만을 받아먹은 나는 너와 같아졌다. 겉모습을 갖추었다.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 원숭이는 누구인가?

 

류현, 학술보고서부분

 

 





4. 반복과 차이, 사건의 감응

 

세상과 섞이는 것. 낡은 선비정신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닦으라 명령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사이라는 게 인간의 본뜻이라면 어떻게 이 세계에 몸을 섞지 않고 인간일 수 있으랴?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다시 한번 섞이는 교통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느끼고 반응하며 감수하는 것. 감응(感應)의 체험을 언어 속에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문턱을 넘은 자, 시인 주체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문턱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금 세인과 어울리고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속편히 타협하는 게 시적 행위일리는 없다. 세계에 자기를 섞을수록, 범속에 몸을 담그고 혼탁에 자신을 바칠수록 시는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소리의 분산 가운데 스스로를 표시할 수 있는 홑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겹쳐진 다른 소리들을 찢어 분리하고, 여러 가지 발음들을 실험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떠들썩한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될 수 있는 대로 차갑게, 설익은 내면을 푹 고아 시의 온존한 형태로 표현해 내야 한다.

 

모음을 찢는 소리가 경사지고 있었고

당신의 발음은 더듬을수록 모서리가 됐다

 

체온이 높은 노래를 한 음절씩 물에 빠뜨렸다

철들지 않은 발음은 수면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류현, 홑소리부분

 

이는 언어의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와 교통하며 지각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건네진 감응에 시적 주체의 울림을 실어 시의 감응을 구축해 내는 것. 세상의 온갖 소음, 이미지, 목소리를 내 몸에 투과시키는 게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란 자신에게 닥쳐온 세계의 감응을 자신의 것과 조율하여 특이한 리듬을 지닌 시적 감응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거침없이 모음을 탕진한 메아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수천 번 입술을 말아도 완성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울음을 조율하며기어코 그 리듬의 형태에 다가서려는 분투, 여기에 시인-되기의 노고가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유일무이하고 고고한 단독자가 아니지만, 또한 세상만사에 참견하는 수다스런 호사가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의 흐름을, 미세한 리듬을 감지해 내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해, 세계의 형상을 읽고 대지의 분위기를 포착하며, 그 감응을 짚어내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는 지구라는 대지의 감응을 예감하고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인-번역자라 불러야 하겠다.

 

여러분, 우리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은 옅어지고 서로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가고 있습니다. 1인칭의 언어는 사라지고 쓸모를 다한 눈금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속눈썹과 손톱만 남아 보트 위에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연속적이어야 하며 술에 취해 어깨동무해서도 안됩니다. 종국에 서로를 나라고 느끼며 견디지 못할 온도에 다다를 것입니다. 책을 펴지 마십시오. 꿈을 꾸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방향성을 믿지 마십시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박길숙, 모호로비치치의 연설문부분

 

모호로비치치의 모호한 연설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1인칭이 소실되며, 눈금마저 지워져 하나로 혼융하게 될 지각의 변이를 경고하고 있다. 시적 전통에서 위기이자 파국으로 언명되었던 시적 자아, 데미우르고스적 창조자의 형상은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 모호로비치치의 슈트에 달린 금장 단추처럼 떨어져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의 상실도 아니요, 개인의 소거도 아니다. 차라리 이전, 이편의 자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문턱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자기성이 여전히 유효할지 탐문하는 시적 성찰의 과정이겠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그제야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사태를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양심의 소리는 어느 쪽에서 날까?

내가 귀머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른발 왼발 발맞추다 박자가 헷갈리면?

계단은 내 발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나뭇결대로 내 얼굴이 깎여 버리면?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답은 없어

 

박길숙, 지미니 크리켓부분

 

당연하게도, 귀머거리에게 양심의 소리라는 비유는 의미가 없다. 나란히 평행하게 자라난 두 발 사이에도 순서가 있을 리 없고, 계단과 걸음걸이가 늘 조화롭게 일치하란 법도 없다. 순리와 당착, 인식과 오인.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논점이 달아나고, 전혀 낯선 명제가 고개를 쳐 든다. 피노키오의 양심을 자처하는 지미니 크리켓은 말하는 귀뚜라미다. 의인화된 가상의 비존재지만 통상의 순리와 인식을 전도시켜 당착과 오인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럼 허구적 실존 지미니 크리켓이 있음으로써 너머의 삶은 비로소 실제의 삶이 된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이편과 저편이 어떻게 연속적이고 또 어떻게 불연속적인지, 그 절단과 흐름의 감응을 탐지해 물음을 던지는 지미니 크리켓은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의 형상에 비견할 만하다. 계단도 없이 문턱을 오르고, 이편과 저편을 넘어서기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또한 언제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장전된 미지의 그것.

 

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옴므

너는 죽지 않는 불멸의 양심

 

계단도 없이 오르내리는 나는

죽지 않는 아이, 살아 있지도 않은 아이

그래서 태어난 적도 없지

 

마침내 그렇게 너머의 지평에 도달한 시인은, 이미 너무나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듯 이전의 생활과 이편의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리라.

 

가로등이 반복된다

에스컬레이터의 단면에서는 세계의

상승과 하강이 매순간 교차하고 있다

 

달이 반복되었다

식사가 반복되었다

바다 너머에 바다가 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정은, 자연발화부분

 

나는/그저 가끔씩 뜨거워질 뿐”, 여기에 비약적인,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턱이 없다. 문턱 너머는 선택된 땅도 아니고,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지평도 아니다. 여기엔 여기대로의 지루한 일상이 시인을 기다리고, 생활에 삼켜진 또 다른 시인들이 졸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언자의 목청을 드높이거나 순교자의 비탄을 쏟아내는 것 따위가 아닐 게다. 수선스런 시인의 자의식을 내려둔 채, “칼국수를 먹바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머에서는 너머의 삶을 삶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럴 때, 슬그머니 덮쳐오는 세상의 감응과 낯선 감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바다가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평선과 시선이 직각을 그렸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시선과 직각을 그은 수평선을 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온갖 감각적 파장들이 시적 주체에게 지각되는 방식은, 물론 그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감응이란 사태가 직관되고, 그 과정에서 체감되는 사물의 체험이자 수용의 효과인 까닭이다. 통념으로부터의 불일치, 그 어긋남의 발견이야말로 너머의 삶을 살아가며 찾아낼 수 있는 시의 감응일 터. 이전의 생활, 이쪽의 일상과 하나 다를 바 없던 이후와 저쪽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인공정원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정원에는 높고 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인공정원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다섯 개의 숲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박정은, 정원부분

 

인공정원이야말로 너머의 세계를 또 다른 삶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인공낙원일 수도 있고, 인공지옥일 수도 있는 양가적 경계의 중간지대로서 이 정원은, 물론 삶의 최종적 종착지는 아니다. 이 주소지는 언제든, 어떻게든 파기되고 새로이 옮겨질 수 있다. 여기 또한 이편 우리의 생활을 모방하여 큰 나무를 심고, 거기 올라 세상을 욕망하는 나날에 잠식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니 자칫 정원에서도 시인은 앙상한 꼬리표만 나풀거리며 이 세계를 자신의 감응 속에 융화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안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각의 촉수를 예리하게 갈아두기 위해 시적 주체는 주변부를 향해 뛰어야 하고, 사람들이 큰 나무에 오르려 줄을 설 때 오히려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변경으로, 구석으로, 끄트머리로 힘껏 내달릴 때, 아마도 인공정원의 너머는 또 다른 정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혹은 새로운 감응의 응결과 전염. 거기서 시인은 말하리라. “정원은 나로 인해 넓어졌다. 그렇게 주소지는 또 다시 이전될 것이다.

주소 없는 편지. 이는 너머의 세계가 쏟아내는 감응을 부지런히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여 주체의 감응을 발신됨으로써 새로운 감응, 곧 세계의 리듬을 창안하는 시적 투쟁의 과정이다. 제아무리 낙토의 장관을 연출하더라도, 그것이 건설되면서 또한 붕괴되는 속도를 추월해 새로운 정원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그 시적 여정에 주목하라. 그것은 반복 속에 차이를 발견하고, 사건의 감응을 촉지하며,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시작(詩作)의 노동에 값하는 일이다. 시의 편지가 부쳐지는 주소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주소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귀속되어 있다.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주소는 벌써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원과 속도를 겨뤘다

 

* * *

 

올해 등단한 시인들의 최근작을 살펴보며, 시인으로서 그들이 감촉하는 이 세계와 그에 조응하여 그들이 조형해낸 시적 감응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 싶었다. 감응이 감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의 조성을 가리킬진대, 시인 하나하나를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단계, 태도에 결박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에서 각자의 이름과 작품을 호명하며 단평한 것은 또한 그들의 시와 마주친 나의 비평적 감응이라 간주해주면 좋겠다. 비록 시인 개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작품들 하나하나일지라도,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이 시대와 교응하고 결합하여 안출해 낸 공-동의 시적 리듬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비평도 시인과 시 작품 그리고 나 사이의 공-동적 감응의 결과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여기에는 서로를 읽고 호응하는 일관된 리듬의 감응이 필연코 존재한다.




* 이 글은 월간 현대시201811월호에 게재된 동명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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