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의 화신인 야만티카 형상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반복(왼쪽)과
티베트 그림이 기하학과 깊이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티베트 호법신(오른쪽).
티베트의 포탈라궁에 소장된 천수관음상은 정말 천 개 아닐까 싶을 만큼 빽빽하고 촘촘하게 새겨넣은 손들이 광배를 대신해 상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팔들은 크기를 달리하며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렇게 팔들이 모여 만들어진 형상은 둥그런 원상이다. 얼굴도 그렇다. 정면의 얼굴과 합장한 두 손, 그리고 하나인 상체와 다리로 인해 우리는 이 상이 한 사람이라고 보게 되지만, 부가되고 중첩되는 얼굴과 손들은 한 사람의 신체라 할 수 없는 낯선 형상을 만든다. 하나이면서 다수인 다양체의 형상이다.
사실 많은 수의 얼굴과 손을 가진 관음보살상은 티베트뿐 아니라 밀교가 전해진 많은 지역에선 흔히 나타난다. 보살이라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아주 낯선 괴물의 형상이라 할 것이다. 티베트에는 이런 괴물의 형상을 한 보살들이 아주 많은데,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야만타카 또한 많은 얼굴과 팔을 가진 형상으로 조성된다. 교합상으로 그려진 많은 인물들은 수많은 머리와 팔을 가지며, 때론 다리마저 층층이 중첩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마도 천수천안이나 십일면관음보살이라는 개념의 내용상 특징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과 팔을 부가하고 중첩시키며 늘려가는 작업이 주는 재미는 유머 내지 장난끼마저 부추겼을 것이며, 이는 다른 보살들에 대해서도 신체적 성분들을 늘려가며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내게 했을 터이다. 때론 네 개나 여섯 개, 여덟 개 등으로 늘려가기도 했을 것이고 때론 천수, 천안, 천족을 더했을 것이다. 타라보살이나 문수보살의 팔이 네 개, 여섯 개로 늘어난 그림이나 조상들을 보면, 앉거나 서 있는 자세, 교합한 자세로 제한된 신체에 다양한 신체적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부가적 반복을 사용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야만티카를 그리기 위한 도해들은 부가와 중첩이라는 반복의 방법이 단지 팔다리나 머리로 국한된 게 아니라 형상을 조성하는 좀더 일반적인 표현형식임을 잘 보여준다. 머리와 손에 이어 다리를 늘려간 것도, 사람 머리를 줄줄이 엮어 목걸이처럼 걸친 것도, 머리의 뿔 인근에 해골을 나란히 늘어놓은 것도, 광배를 대신하는 배경의 크고 둥근 화염은 작은 화염들도 모두 미시적인 형태소들을 반복하여 부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머리부분을 다시 보면, 야만티카 얼굴의 눈썹과 수염도 작은 화염들을 반복하여 그려졌고, 제일 큰 뿔 끝에도 두 개의 화염이 농을 치듯 휘감겨 있다. 그리고 머리들을 둘러싸고는 마치 머리카락인 듯한 곡선들이 촘촘히 반복되며 물결치고 있다. 그 아래로 더 파고들면, 야만티카의 눈과 코는 줄 지어선 동그라미들의 반복이다. 뒤집어 말하면, 야만티카라는 한 인물은 미소한 형태소들이 만든 부분들이 다시 모여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다양체들의 다양체다.
이러한 부가적 반복에서 일차적인 것은 각각의 미시적 형태소의 형상이 아니라 반복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시적’ 형상이다. 각각의 손이 아니라 손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둥근 형상, 팔들 각각이 아니라 팔들이 중첩되며 조성되는 부채살처럼 퍼지는 모습, 각각의 화염이 아니라 화염들이 모여 만드는 광배의 둥그스름함, 머리나 해골 각각이 아니라 그것들이 줄지어선 모습 등등. 미시적 형태소가 자신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고 이웃한 것들과 함께 만든 거시적 형상 뒤로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그렇다고 거시적 형상이 미시적 성분들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통합한다고는 하기 어렵다. 거시적 형상을 만들기 위해 기하학적 도형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미시적 형태소들의 가이드라인 이상이 아니다. 그 안에서 미시적 형태소들은 얼마든지 가감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거시적 형상도 달라진다. 예컨대 화염의 광배는 대개 둥그런 상을 그리지만, 미시적 화염들이 가감되는 양상에 따라 타원이 되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형상이 되기도 한다. 거시적 형상이란 미시적 형태소 대중들로 이루어진 흐름이어서, 이 미시적 대중은 어디로든 흘러넘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확고한 윤곽선이나 프레임 안에 미시적 형태소의 반복이 갇혀 있는 경우와 대비된다. 가령 시뇨렐리의 오르비에토 성당 프레스코화에는 동식물이 섞인 미시적 성분들이 분방하게 반복되지만 원과 사각형의 확고하고 단단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거시적 프레임에 갇힌 반복과 프레임을 조형하고 변형하는 반복은 결코 같은 반복이 아니다.
부가적 반복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으며, 형태소들이 부가되는 양상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의 거시적 형상을 조성한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거시적 형상이란 미시적 형태소들의 연대(連帶)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 해도 좋겠다. 형태소 대중들의 횡단적 연대를 통해 다른 층위의 형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 연대의 양상이 달라지면 연대의 결과인 거시적 형상 역시 달라진다. 이때 횡단은 ‘전체’로서 군림하는 기하학적 형식의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지배와 달리, 수평적으로(橫) 이어지는 연대를 뜻하며, 정해진 틀을 가로질러(橫斷) 모든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소성을 뜻한다. 횡단적 연대를 통해 최대치의 가소성을 갖는 형상을 구성하는 것이니, 이를 ‘연횡(連橫)의 미학’이라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티베트의 그림이나 조각이, 건축만큼이나 기하학과 깊이 연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미시적 성분들의 다양체를 거시적 형상 속에 적절하게 담기 위해 원과 사각형 등 기하학적 도형을 동원한 그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은 원과 사각형 안에 인물상을 여러 개의 팔다리를 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비트루비우스의 인간’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에게도 두 쌍의 팔과 다리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원과 정사각형이라는 형식 안에 포섭하기 위해 다른 위치로 이동한 상이지 4개의 팔다리가 아니다. 반면 티베트의 도안에서 수많은 팔다리는 모두 실재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비트루비우스의 인간 도안에서 팔다리는 원과 정사각형 안에 정확히 들어감을 보여주는 게 핵심적이지만, 티베트 도안에서 인물들의 신체는 그럴 이유가 없다. 실제로 원과 정사각형 모두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전자에서 원은 대우주와 대응하는 소우주의 기하학적 형식이고, 팔다리를 벌린 인간이 거기 들어가는 것을 통해 인간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식의 소우주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반면 후자에서 원은 인물이 원에 내접하는 이상적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손발들의 배열을 조절하기 위한 보조선일 뿐이다. 이 얼마나 다른 ‘기하학주의’인가.